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90
290. 말도 많고 탈도 많은(9)
마이어스는 부족한 제 몫만큼의 처세술을 다하르가 익혔다는 것을 안다. 그런 다하르가 마왕님께 보고하지 않은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아, 다하르의 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그는 죄인이고….”
“알아.”
데온은 급히 손을 내젓는 마이어스를 가만히 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오해하지 않으니 안심해도 돼.”
“……예.”
흔들리는 눈이 데온의 미소를 덧그리다가 이내 아래로 툭 떨어진다. 고개를 숙이기 직전, 그의 시선에서 제법 견고한 의심을 발견한 데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부관과 신뢰가 두터웠던 모양이네.”
“…….”
그의 부관이 그랬던 것처럼.
놈의 의심은 마왕과 데온 둘 모두를 향하고 있었다.
***
마이어스와 헤어진 뒤, 자리에 돌아온 데온은 기다렸다는 듯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물론 다들 아닌 척 즉시 눈을 돌렸지만, 용사의 눈이 이를 놓칠 리 있나.
‘……시선에 물리적인 영향력이 있다면 난 이미 깔려 죽었겠네.’
움직임 하나하나에 따라붙는 시선이 참으로 집요하고 무겁다.
그래도 신경 쓰지 않는 척 지나가던 사용인으로부터 술잔을 하나 받아 들고….
“데온 님! 지금 뭘 들고 계시는 겁니까!”
……받아 들고 테라스로 자리를 옮기려 했는데.
데온은 제 앞을 막아선 벤을 떫은 시선으로 보다가 힐긋 손에 든 잔을 내려다보았다.
“……다 나았는데.”
“다 나았고 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하루가 지난 것도 아니고, 바로 조금 전에 독이 든 술 때문에 일이 터졌는데 술이 또 마시고 싶으십니까?”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괜히 입씨름하고 싶지 않아 잔을 내려놓았다.
대신이랍시고 벤이 독 확인이 끝난 알코올 없는 음료를 손에 쥐여준다. 데온은 그것을 한 번 흔들어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테라스로 나갔다.
탁 트인 밤하늘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
마계라는 것이 실감 나지 않을 정도로 제법 아름다운 풍경에 드물게 평온한 기분으로 난간에 상체를 기대고 잔을 홀짝였다.
그것도 잠시.
“애초에 마이어스를 죽일 생각은 없었어.”
짙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데온은 시선을 내렸다. 세상을 뒤덮은 핏물이 바람의 방향에 맞춰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적어도 ‘마지막 전투’까지 마이어스는 살아있을 예정이었다.
“나와 얽힌 이들이 자꾸 죽어 나가면 의심을 살 테니까.”
마왕이야 이미 알고 있으니 상관없지만, 다른 마족들이 눈치채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니 의심을 살 바엔 적절한 날을 잡아 한 번에 쓸어버리는 편이 낫지. 뭐하러 야금야금 하나씩 죽이고 있겠나.
“하지만 이미 늦었네.”
“…….”
“다하르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의심이 터졌어.”
탁. 잔을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부턴가 이곳에 들어와 잠자코 듣고 있던 상대를 마주하며 데온은 싱긋 웃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찾아온 거겠지. 안 그래, 데르니반?”
***
“넌 데온 님께 안 가봐도 되냐?”
순수한 의문을 담은 질문에 카드를 섞고 있던 단이 고개를 들었다. 9군단장 트로버와 눈이 마주쳤다.
그 외에도 자리에 돌아온 다른 군단장들이 궁금한 듯 쳐다보는 것이 느껴진다. 단은 다시 시선을 내려 카드를 섞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모시는 사람인데?”
태연히 카드를 분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그 질문도 그렇고, 이 질문 또한 이미 한 번 받은 질문이다. 바로 옆에 앉아있는 2군단장이 조금 전에 했었지.
당연히 대답은 같았다.
“필요했다면 부르셨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는 날 꺼리고 있으니까.
독단적으로 혁명군 수장을 제거하고 데온 하르트가 이를 알았을 때, 그는 저를 가리켜 공작과 겹쳐 보인다고 했었다. 그게 사실인 듯 아직까지도 거리를 두는 상태고. 평소처럼 대하려고 하지만 반사적으로 외면하는 시선과 공기 중에 흐르는 뻣뻣한 분위기가 그 증거였다.
그러니 괜히 다가가서 심적 스트레스를 악화시킬 필요는 없지.
“그보다 제가 이긴 내기의 대가 말입니다.”
단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도 이쪽에 더 흥미가 있었던 듯 군단장들이 집중하는 것이 보인다. 조금 전의 주제는 벌써 잊은 듯한 모양새였다.
조금 뜸을 들이다가 한창 호기심이 극대화되었을 때쯤, 씩 웃으며 검지를 입 앞에 댔다.
“나중에 단둘이 있을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귀찮게.”
김샌 듯 트로버가 미미하게 긴장되어 있던 어깨에서 힘을 풀고 등을 기댄다. 안심과 불안이라는 모순적인 감정을 바탕으로 투덜거리는 말이 튀어나왔다.
호쾌한 척, 신경 쓰지 않는 척해도 내심 무슨 소원을 빌지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더 그랬다. 단과 소원권을 걸고 한 내기에서 시작 전에 미리 결과에 승복하며 패배할 경우 약속을 성실히 지킬 것을 마력을 걸고 확언했으니까.
물론 죽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적당한 선에서 소원을 제시하겠지만. 그래도.
[저야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 하면 군단장님들께서 몸소 죽여버리거나 지키게 만들면 되겠지만, 군단장님들은 아니잖습니까. 저로서는 군단장님들께서 말을 바꾸시면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마력을 건 약속 정도는 해주셔야 안심을 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의심도 많긴.] [그저 겁이 좀 많을 뿐입니다. 군단장님들과 카드를 나누는 지금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로 긴장이 되는지라.] [뭐… 좋아! 특별히 그렇게 해주지!]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솔직히 이길 줄 알았지. 놈의 패배가 ‘군단장’들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서였다는 걸 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래놓고 빙글빙글 웃으며 하는 말이 ‘운이 좋았습니다’라니.
‘소원은 단둘이 있을 때 말하겠다고…….’
대체 무슨 소원을 빌려고.
흔쾌히 마력을 걸고 약속했던 과거의 저를 패주고 싶은 심정이다.
불안한 트로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드를 훑은 7군단장 실루아가 책상 위에 늘어졌다. 그 위에 놓여있던 다른 물건들이 흐트러지든 말든 몸을 뒤척이며 제 카드를 보이지 않게 만지작거렸다.
“궁금했는데 아쉽네.”
“이렇게 많은 군단장님들께서 지켜보시는데 너무 긴장돼서 뭔가 말할 수가 있어야죠. 당장은 딱히 바라는 것이 없기도 하고요.”
과연…?
가만히 듣던 드벨라니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단을 보았으나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단은 흐트러진 책상을 정리하며 한쪽에서 서로 으르렁거리는 3군단장과 4군단장을 눈에 담았다.
“……저 두 분은 원래 사이가 안 좋으신 모양입니다. 볼 때마다 싸우시는 것 같은데….”
“응? 뭐, 그렇지.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이를 드러낼 정도니까.”
“뭔가 특별한 이유라도…?”
“그건….”
실루아가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다른 이들도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이 궁금한 듯, 단뿐만 아니라 트로버와 드벨라니아도 시선을 집중하고.
이어서 지극히 가벼운 말이 툭 튀어나왔다.
“나도 몰라.”
“…….”
“그래도 저 둘의 사이가 안 좋은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오래되었다는 것 정도는 확신할 수 있겠네.”
“……그렇습니까.”
단은 말없이 3군단장과 4군단장을 돌아보았다. 턱을 괸 채 그를 지켜보던 드벨라니아가 눈빛에서 무언가 발견하고 흐응- 콧소리를 낸다.
덥석, 단의 손목이 잡혔다.
멈칫한 단이 시선을 올려 드벨라니아를 본다. 순간적인 침묵이 스치고 허공에서 시선이 맞부딪힌 것도 잠시, 그녀가 눈을 휘며 경쾌한 음성을 내었다.
“그러고 보니 데온 님께 드릴 것이 있는데.”
“……?”
“네가 대신 전해주겠어?”
“……아, 네.”
“좋아, 그럼 따라와.”
이곳에 안 갖고 왔거든.
망설임 없이 일어난 그녀가 넓은 보폭으로 연회장을 빠져나간다. 다소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멍하니 있던 단은 서둘러 정신 차리고 다른 군단장들에게 실례하겠다는 말을 남긴 뒤 그 뒤를 쫓았다.
주최자가 자리를 비우는 것이라 불쾌할 법도 하건만, 다행히 개의치 않는 듯 등 뒤에서 군단장들이 도박… 아니, 소소한 친목 다지기를 이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실루아! 너 사기 쳤지?!”
“제가 말입니까? 생사람 잡는 것도 정도껏 하십시오.”
“분명 조금 전에 네 카드에 하트가 있는 거 봤단 말이야! 어디서 손장난을 쳐?!”
“남의 카드를 함부로 들여다보면 쓰겠습니까.”
……아까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했더니, 그거였나.
단은 모른 척 걸음을 재촉했다.
드벨라니아는 그리 멀리 가지 않았다.
사용인들이 이동하는 통로와 시간을 아는 듯 인적이 없는 복도에서 멈춰선 그녀가 단을 돌아본다. 속 모를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간이 크다 싶긴 했지만… 군단장들 앞에서 손장난이라니.”
“……!”
“정말 대범하네.”
단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 자리에 굳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몇 판 더 진행하고 나서야 알았지. 다른 녀석들은 모를 거야. 트로버가 단순무식한 편이어서 대놓고 노린 거지?”
“…….”
“뭘 노리고 그런 건지 내게만 슬쩍 알려줄 수 있을까?”
당황은 잠시였다.
단의 입가에 유들유들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저 지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었을 뿐입니다.”
“……뭐, 그래. 이거나 데온 님께 잘 전해줘. 선물이라는 말도 같이.”
그녀가 내민 것은 머리끈이었다. 데온 하르트의 눈처럼, 피처럼 붉은 머리끈.
손장난을 들킨 것을 빌미로 협박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순순히 넘어간 것에 한 번, 뭔가 중요한 물건인 줄 알았는데 별거 아닌 것에 두 번 놀란 단이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본다. 드벨라니아는 보란 듯이 코웃음 쳤다.
“네가 뭐라고 귀찮게 압박까지 해야 할까.”
“…….”
“그리고….”
내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조만간 죽을 것 같으니까.
아실드와 이델리아를 보는 눈초리가 뭔가 일을 칠 것 같던데. 저 둘을 사이가 틀어진 오엘과 트로버 정도의 관계로 보면 큰코다친다.
하지만 굳이 말해줄 의리는 없지. 그녀는 그저 입을 꾹 닫고 손을 내저었다.
“……선물이나 제대로 전해.”
상심하고 있을 마이어스에게나 가봐야겠다.
***
긴장감 가득한 침묵이 흘렀다.
날 선 붉은 눈동자가 데르니반을 파헤칠 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데르니반은 그 시선을 묵묵히 받아넘긴다.
그러다 데온이 막 입을 뗀 순간, 데르니반이 한발 앞서 말문을 열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예상과 전혀 다른 첫 마디에 데온의 미간이 움찔했다.
“진즉에 다 나았지.”
“다행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멋대로 찾아뵌 점 사죄드립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 그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한때 오엘을 뒷받침했던 마족이라 그런지 평소 말수가 없는 주제에 필요할 땐 또 말을 잘한다.
데온은 가만히 그를 보다가 내려놓았던 잔을 다시 집어 들었다. 조금 전보다 한결 풀린 분위기 속에서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울렸다.
“사과는 됐고, 말해봐.”
“데온 님을 따르겠습니다.”
……직설적이라 좋네. 적아를 가늠하느라 신경 낭비할 필요도 없고.
사실 거의 적이라 단정 짓고 있었는데. 당황으로 흐트러진 표정을 감추기 위해 잔에 담긴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게 들어가니 흔들린 감정이 잡히며 버벅거리던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말은 좋지만…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 해도 필시 이유가 있을 테고. 그 이유를 알기 전까지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앞뒤를 쳐내고 냅다 던져진 말에 화답하듯 똑같이 짧은 말을 던졌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