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3
3. 0군단장 데온 하르트(1)
“서류 작업은 싫습니다!”
처음 마왕에게 영입 제안을 들었을 당시 내뱉은 말이었다. 덕분에 비공식적인 지위인 제0군단장을 맡음으로써 나는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으면 되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딱히 불만은 없다. 다른 군단장들이 서류 더미에 파묻혀 끙끙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오히려 그런 말을 했던 나 자신이 기특할 지경이니까.
다만 치명적인 단점을 하나 꼽자면….
“심심해!”
너무 심심하다는 것이다! 할 일도 없고, 나가 봤자 마계는 언제나 밤인 데다 정원에는 끔찍한 식물들만 살고 있으니.
그렇다고 마왕을 찾아가는 것은 미친 짓이고, 다른 군단장들을 찾아가는 것 역시 내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셈이며, 내 밑에 있는 놈들은 인간을 상대하고 싶지 않은지 언제나 날 피하는 데다 나 역시 놈들을 통 믿을 수 없으니… 결국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큐브라던가, 퍼즐 같은 아주 건전한….
“때려쳐어어어어!!”
촤르르르.
수천 개의 퍼즐 조각들이 하늘을 날았다. 나는 씩씩거리며 방 안을 둘러봤다. 깔끔하게 맞춰진 대형 퍼즐들이 액자에 끼워져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심심풀이로 50개, 60개짜리를 맞추기 시작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6000개짜리를 맞추고 있었다.
빌어먹을, 팔아도 되겠네. 나란 새끼, 쓸데없이 집중력만 높아서는.
문득 밀려오는 허탈함에 헛웃음만 흘리다 방문을 벌컥 열었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이 눈에 띄게 움찔하며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움직임을 모른 척하며 나는 말했다.
“술 가져오세요.”
“예?!”
“술이요. 어떤 종류든 상관없습니다. 술이기만 하면 됩니다.”
“하, 하지만….”
뭐든 시키면 할 것 같던 필사적인 태도와 달리 그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머뭇거리며 연신 망설였다.
왜 이런 반응인지는 대충 알 것 같다. 보나 마나 벤이 막았겠지.
나는 타고나길 몸이 약하게 태어났다. 이 비정상적인 흰 머리와 붉은 눈,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가 그 증거. 틈만 나면 피를 토하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이곳에선 그 원인을 ‘용사와의 전투 후유증’으로 둘러댈 수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만, 술을 못 마신다는 것은 좀 슬프다. 정확히 말하자면 벤의 투철한 직업정신이 정말 유감이다.
어릴 때인가, 날 진찰했던 의원이 한 말이 있다.
[몸 전체에 고루 퍼져 있어야 할 모든 건강이 간에만 몰리신 것 같습니다!]실제로도 어지간해서는 쉽게 취하지 않았으니 거짓은 아닐 것이다. 덕분에 몸에 좋지 않은 약을 먹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거고… 아무튼.
그러니 난 술을 마셔도 괜찮다는 뜻이다. 안 죽는다고.
그러니까 술을 내놔. 지금이 딱 술이 필요할 때란 말이야.
0군단장씩이나 되어 가지고 할 일 없이 방 안에서 퍼즐이나 맞추고 있는 내 꼴을 자각하니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못 버티겠다.
빨리 가져오라는 뜻을 담아 빤히 쳐다보니 시종이 흠칫 어깨를 떨고는 어디론가 후다닥 달려나갔다.
……잠깐, 대답은?!
“설마 안 가져오는 건 아니겠지.”
그래, 도망갔다던가 어디 다른 곳으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러 간 건 아닐 거야.
그리 중얼거리면서도, 어째서인지 밀려오는 불길함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불길한 느낌은 적중했다. 대답도 없이 도망치듯 사라진 시종이 돌아온 것이다.
─무려 마왕을 데리고.
이 배신자 새끼.
“술이 먹고 싶다고?”
원망을 가득 담아 시종을 노려보다가 들려오는 마왕의 목소리에 재빨리 눈을 깔았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이제 잔소리가 날아오겠지.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반쯤 체념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돌아온 말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있었다.
“그렇게 몸이 근질거렸어?”
“…네?”
“요즘 전투가 없어서 네가 심심할 거라는 건 짐작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내가 널 너무 무르게 보고 있었던 모양이야. 사과하지.”
아, 아아아아니, 아니 아니 잠깐만.
난 그냥 술이 마시고 싶었을 뿐인데, 의식의 흐름이 왜 그런 방향으로…?
“정 원한다면 작은 전투나마 참여시켜줄 수도 있는데. 요즘 전방에 나가 있는 9군단장이 지루하다고 난리더군. 네가 간다면 전황이 바뀔 것 같은데, 어때? 거기라도 가는 것은?”
9군단장이 나가 있는 곳이라면….
‘최전방이잖아.’
제국과 맞닿아 있는 만큼 크고 작은 전투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 그런 곳에 날 보내겠다고?
아, 알겠다. 어차피 술을 마셔도 죽을 만큼 약한 몸뚱이, 조금이라도 쓸모 있게 전쟁터에서 고기 방패로나마 쓰이다 죽으라는 건가.
나 참. 더럽고 치사해서. 아, 안 먹으면 되잖아.
“괜찮습니다.”
절대 무서워서 이러는 게 아니다. 더러워서 이러는 거다.
“뭐, 좋은 판단이야. 가봤자 네가 만족할 만큼의 피는 보지 못할 테니.”
이젠 말도 안 나온다. 아, 정정한다. 무서워서 얼어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술 좀 마시려 했다고 이렇게까지 협박하는 것은 너무하잖아.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이런 내 감정이 들통나기라도 할까 슬그머니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마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무튼 술은 안 돼. 마왕성을 뒤엎을 일 있어? 정 심심하다면 네 군단을 돌아보든가, 정원이라도 돌아보도록 해. 히엔이 이번에 새로운 꽃을 들였다고 좋아하던데 말이지.”
흠칫 고개를 들었다. 그 미친놈이?
마족인 것은 당연하니 생략하고, 히엔은 정원사다. 내가 감히 말하건대, 그놈은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다. 뭐에 미쳤냐고?
징그럽고 위험한 식인 식물에!
처음에는 마왕성에 정원사가 있다는 것이 영 어울리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었는데, 놈과 함께 정원을 돌아보고 나서 아주 처절하게 납득했다.
[이런 놈이니까 마왕성에서 일하지!! 평화로운 직업이라 나름 믿었는데! 내가! 다시는! 마족 따위 믿나 봐라!!]몸으로 겪고 뼈에 새긴 값진 경험이다. 함부로 무시할 수 없기에 난 진지한 표정으로 마왕을 쳐다봤다.
“군단을 돌아보겠습니다.”
군단원들도 위험하긴 하다만, 그 미친 정원사보다는 확실히 나을 테니까.
……라고 생각해 제0군단의 연무장으로 향하고 있던 게 불과 5분 전이었건만.
“어, 데몬 님!”
“……히엔.”
파리해진 안색을 감추기 위해 급히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유려한 인상의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까, 깜짝이야!
“피곤하세요?”
“뭐, 조금….”
“그럴 땐 꽃향기를 맡는 게 제격이죠. 제가 이번에 새 꽃을 들였는데, 한번 보시겠어요? 특별히 데몬 님께 가장 먼저 보여드리는 거랍니다.”
악마다. 악마가 눈가를 사르르 접은 채 웃고 있었다.
보통은 넋을 놓고 볼 외모이건만, 나는 그저 도망칠 방도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데 열중했다. 그의 외모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왜 저 외모에 넘어가지 않냐고? 그야 남자잖아.
서큐버스라면 몰라도, 인큐버스인데 넘어갈 리가 있나. 내가 요즘 이곳에서 미쳐가고 있다지만 성 정체성마저 흔들릴 정도로 미치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자식, 은근 고단수인데? 인큐버스라 그런가, 선택지를 한 가지로 줄여버리는 데 재능이 있다.
피곤하세요?
A 루트: 피곤하다 > 그럴 땐 꽃향기가 최고!
B 루트: 피곤하지 않다 > 그렇다면 이번에 제가 들인 꽃을 한번 보고 가시는 게….
평소였다면 그의 말에 얼렁뚱땅 넘어가 그 끔찍한 정원을 돌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겐 훌륭한 핑계가 있다.
“지금 막 제 군단원들을 살펴보러 가던 중이라 곤란합니다.”
“아… 혹시 미룰 수는…없겠죠?”
“…….”
끈질겨라.
미루는 거야 얼마든지 가능하다. 0군단원들도 딱히 날 찾지도 않고, 찾아가 봤자 가까이 오거나 말을 붙이는 대신 두 눈에 불을 켜고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만 있으니.
사실상 그곳에서 내가 할 일이라고는 구석에 처박혀서 적당히 검이나 만지다가 자리를 피해 주는 것밖에 없다.
아, 여기서 검을 만진다는 것은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만지기만 하는 거다. 괜히 똥폼 잡고 검 한 번 휘둘렀다가 내 실력이 뽀록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아무튼 그래서 미루는 건 가능하지만, 그래도 싫다. 애초에 0군단 전용 연무장으로 향하려던 이유가 바로 이놈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
“…….”
문득 나는 적막이 생각보다 길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이 너무 길어진 나머지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모양이다.
길어진 침묵에 심기가 상한 건 아닐지 슬쩍 눈동자를 굴려 히엔을 쳐다봤다. 때마침 그도 이쪽을 살피고 있었는지 하필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기도 전에, 히엔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러고는 평소의 은은한 미소도 지워버린 채 허리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이쯤 되면 마족이라는 종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이참에 한번 제대로 논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자, 오늘의 논제.
갑자기 사과하는 것은 마족들 특성인가?
‘얜 또 왜 이래?’
***
히엔은 인큐버스다. 천박하다고 무시당하는 바로 그 인큐버스.
마왕성의 정원사로 들어간 것도 순전히 운이었다. 온갖 위험하다는 식물을 수집하고 키우는 것이 취미인데, 마침 희귀한 식인 식물을 구해 들고 길거리를 가로질러 오다가 마실 나온 마왕님의 눈에 띄어 정원사로 영입되었으니까.
그런 자신을 군단장씩이나 되는 높으신 분들께서 제대로 대우해 줄 리가 없었다.
당장 시종들부터가 눈이 마주치면 침을 뱉고 욕을 읊조리는 정도인데, 감히 군단장의 눈에 찰 리가. 괴롭히지나 않으면 다행일 테지. 실제로 발로 걷어차는 둥, 괴롭히는 분들도 있었다.
그런 그분들을 상대로 일개 인큐버스가 뭘 어떻게 하겠는가. 그저 참는 수밖에.
그날도 폭언과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던 날이었다.
“인큐버스 따위가….”
공들여 가꾸어놓았던 정원을 온몸으로 깔아뭉개며 나뒹군 히엔이 곧바로 일어나는 대신 시선을 바닥에 고정했다.
소중한 식물들이 망가진 것은 뼈아프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상황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불쾌한 기색의 10군단장.
자신이 가는 길 앞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히엔을 날려버린 그가 잔뜩 인상을 쓴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심란해 미치겠는데, 별게 다….”
히엔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10군단장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자다. 1군단장이나 3군단장을 상대할 때처럼 벌떡 일어나면 도리어 그것을 도발로 받아들일 것이다.
때문에 아파서 못 일어나는 척, 바들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였다.
“아….”
“음?”
낯설디낯선, 마왕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주 작은 목소리가 앓듯이 들려왔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종이 우연히 이 장면을 발견한 것일 수도 있을 테니까.
문제는 10군단장의 반응이었다.
“헉…!”
반사적으로 히엔의 고개가 올라갔다.
잘못 들었나? 잘못 들었다고 하기엔 그의 표정이 너무도 노골적이다.
경악에 가까운 표정. 얼핏 두려움과 경외심마저 내비치는 듯한 표정에 히엔은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한 ‘인간’을 볼 수 있었다.
평범하다 못해 오히려 약해 보이는 마른 체형. 이질적인 흰 머리와 붉은 눈동자. 더해서 창백한 피부까지. 아마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마력이 아니었다면 인간인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폭풍과도 같은 소문이 마왕성을 휘돌기 시작했다. 정확히 언제였더라, 아마 용사와의 전쟁이 막 끝났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마왕님이 아닌 다른 분이 용사를 죽였다더라.] [그 자리에서 마왕님이 바로 영입을 시도하셨다더라.] [심지어 인간이라더라.]‘그 사람이다.’
헛소문일 거라 믿고 있던 그 소문의 주인공. 그게 바로 저 사람이라고,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그에 쐐기를 박는 것은 10군단장의 말과 행동이었다.
“여기엔… 어쩐 일로….”
“정원사가 있다길래 좀 만나보러 왔습니다만… 제가 타이밍을 잘못 맞춘 모양이군요.”
“아, 아닙니다.”
무려 군단장씩이나 되는 이가 조심스럽게 대한다. 그렇다는 것은 저 인간이 그보다 더 강하거나, 더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그가 0군단장의 자리를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손사래를 치던 10군단장이 편히 대화 나누시라며 급히 물러가고, 그가 멈췄던 걸음을 옮겨 내게 다가왔다.
나를 만나러 왔다고 했지. 무슨 목적인지 궁금하긴 하다만 별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야, 난 인큐버스니까.’
심지어 상대는 무려 0군단장이다. 그가 내게 잘 대해 줄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분명 그리 생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