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303
303. 누구보다 큰 죄를 지을지어다(1)
달그락.
“♬~.”
데온은 나직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차에 각설탕을 집어넣었다.
드물게 가벼운 태도. 무거운 짐을 짊어진 듯한 평소의 모습과 달리 세상 그 무엇도 걱정될 것 없다는 듯 홀가분한 태도에 서류를 살피던 마왕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의문을 담은 시선은 얼마 못 가 하나씩 더해지는 각설탕의 수가 6개를 넘어 7개째 되었을 때쯤 조금 질린 눈빛으로 바뀌었지만.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봐?”
마왕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듯, 잠시 멈칫한 데온이 고개를 들었다. 어떠한 감정도 없이 맑기만 한 눈동자가 마왕을 담았다.
대답 대신 침묵만이 돌아왔으나 마왕은 개의치 않고 말을 붙였다.
“그 서류에 좋은 소식이라도 담겨 있나 보지? 갑자기 왜 내 집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나 했더니, 자랑하고 싶은 내용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야.”
“……아뇨. 좋은 소식이랄 건 없었습니다. 자랑할 것도 없고요.”
“그러면?”
“굳이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데온은 말갛게 답하며 설탕이 잔뜩 녹아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를 마시는 와중에도 다른 손에 서류를 든 채 눈으로 내용을 읽어 내렸다.
지나치게 달달한 차향이 집무실을 가득 채우자 마왕이 창문을 열었다. 한 줄기의 바람이 들어오고, 데온의 표정이 한결 편해진다. 고요한 공간에 마왕의 목소리가 배경음처럼 잔잔히 깔렸다.
“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괜찮아 보여서 말이야.”
“…….”
“여러 일을 겪어서 상태가 좋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네.”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일까, 혹은 그냥 최근에 터졌던 각종 일을 말하는 것일까. 습관처럼 마왕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가 돌아간 것도 잠시.
‘어느 쪽이든 쓸모없는 정보야.’
데온은 의식적으로 생각의 흐름을 끊어내고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이전에 내렸던 명령에 따라 드벨라니아가 각국을 주시하며 얻은 내용이 담긴 서류였지. 적어도 개중 가장 첫 장은 쓸모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르웨체 영웅들의 규모.’
한 장씩 넘기고 또 넘긴 끝에 다시 첫 장으로 돌아온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리리넬이 알아 온 것이다. 심지어 진의 주축까지 알아 왔었고.
너무 늦었어. 정보 수집이 주 업무인 2군단장이 11군단장보다 늦으면 어떡하자는 건지. 잉크를 머금은 쓰레기를 가만히 보다가 마왕에게 손을 뻗었다.
“혹시 가위 있습니까?”
“가위? 여기. 왜?”
……순서가 바뀐 것 같은데. 보통은 주기 전에 이유를 묻지 않나?
어쨌든 가위를 받아 서류를 썩둑 자르기 시작했다. 특별히 무언가를 오려내려는 것도 아닌 그저 잘게 자르기 위한 가위질이 과감하게 이어졌다. 어쩐지 섬뜩하기도 한 작은 소음은 자꾸만 건방지게 저를 찔러보는 드벨라니아에 대한 분풀이의 의도도 담겨 있었다.
이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마왕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좋은 소식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다면 말이야. 여긴 왜 온 거야?”
서류 처리는 원래 네 방이나 개인 집무실에서 해결했잖아.
특별한 의도는 담겨 있지 않은 듯 잔잔한 물음이었다. 데온은 가위를 내려놓고 그를 향해 씩 웃었다.
“슬슬 때가 되어서요.”
“……아.”
그 말의 의미를 모를 턱이 있나.
알겠다는 듯 내뱉어진 가벼운 탄성에 데온은 찻잔을 옆으로 밀고 테이블 가운데에 지도를 펼쳤다.
“어차피 회의에서 말할 거긴 하지만… 지금 미리 알려드리겠습니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세 위치를 짚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각국의 군주들은 각각 이곳, 이곳, 그리고 이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어설프게 병력을 분배하는 대신 모든 병력을 이 한곳에 집중하여 마왕군을 상대할 생각을 하고 있죠.”
“…….”
“다시 말해, 마왕군은 이렇다 할 방해 없이 군주들이 머무는 성까지 도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흐음, 그래서?”
붉은 눈동자가 샐쭉 휘어진 눈매 사이로 숨어든다. 그대로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며 데온이 말했다.
“우리는 삼국을 동시에 공격할 겁니다.”
예상 밖의 말을 들은 듯 마왕의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이내 광기에 가까운 즐거움을 품은 채 활짝 미소 짓는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나직한 듯하면서도 격양된 음성이 나왔다.
“먼저 여러 나라를 동시에 공격한다고… 이건 마계 역사에서도 없던 일인데.”
한 나라를 먼저 공격하고, 그에 다른 왕국들이 연합하여 자연스레 다국을 상대하게 된 경우라면 모를까, 이쪽에서 처음부터 여러 나라를 동시에 공격한 적은 없었다.
보통은 하나를 무너뜨리고, 그다음 왕국을 공격하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 아닌가.
“이편이 시간을 더 단축할 수 있잖습니까. 어차피 많은 병력을 잃은 채 궁지에 몰린 놈들이라 모든 군단을 동원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하, 그렇겠지!”
넌 마지막이 가까워져도 날 즐겁게 해 주는구나.
이러니 내가 널 놓을 수 없는 거다. 매번 재밌는 짓을 벌여주는 질리지 않는 장난감을 어떻게 버리겠어.
어느새 하던 서류 작업은 집어치운 채 걸어와 데온의 맞은편 소파에 앉은 마왕이 다리를 꼬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인간계가 모든 걸 걸었는데 이쪽도 그에 대한 예우는 해 주어야겠지.”
“…….”
“마침 사냥 대회를 연 덕분에 마물 문제도 걱정 없고, 마왕성을 공격할 만한 위험 요소도 없으니 방어도 필요 없는 상태야.”
물론 심연의 다른 종족들, 그러니까 요정족이나 뱀파이어, 드워프 등의 하이에나 같은 놈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데온 하르트가 살아있는 한 마왕성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데온 하르트를 통해 무언가 이루려 하는 놈들이니까.
데온 하르트의 쓸모가 다한 이후에는 내가 없을 테니 신경 쓸 필요 없고.
그런고로.
“모든 군단과 군단장을 동원하기에 아주 적절한 시기라는 뜻이지.”
“…….”
“어디 한번 모조리 동원하는 쪽으로 계획을 짜 봐. 재밌겠네.”
“……드벨라니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들은 각자 병력을 균등하게 나누어 각 성에 배치했더군요. 개중에 포함된 영웅의 수는 각각 넷 정도.”
허락할 것을 예상했다는 듯, 혹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레 마왕의 말을 받아넘긴 데온이 다음 말을 읊기 시작했다.
“즉 그들의 가장 큰 전력인 영웅들이 성에 배치되지 않았다는 뜻이죠.”
“그럼 그놈들은 성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전투를 벌이려는 것이겠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여기, 영웅들이 전투를 벌일만한 장소를 고르려는 듯 각국의 순찰병들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닌 기록이 있는데…….”
서류를 몇 번 넘긴 끝에 목적으로 한 내용을 찾아 가장 위에 올려놓았다.
A 지역엔 제국 측에서 한 번, B 지역엔 산국에서 두 번 르웨체에서 한 번… 보기 좋게 가장 자주 방문한 순으로 정리된 표의 맨 윗줄을 톡톡 두드린다. 마왕의 시선이 손끝을 좇았다.
“유독 자주 방문하고 경로가 많이 겹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아마 여기서 전투를 벌일 생각이겠죠.”
각국의 성을 이어서 생긴 삼각형 구역 내의 한 곳이다. 어느 성하고도 빠르게 오고 갈 수 있는 위치.
마왕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널 상대하기 위함이겠지. 유인하려는 건가.”
“네. 아마도.”
“널 위한 병력과 전투 장소도 따로 마련할 정도라니. 인기 많네, 데온.”
“……헛소리.”
풀썩- 쓰러지다시피 널찍한 소파에 누운 데온이 자르던 서류를 들고 잠시 내려놓았던 가위를 다시 찾았다.
건방진 대답에 더해 건방진 행동까지. 눈앞의 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행동에 마왕이 헛웃음을 흘렸다.
“마왕 앞에서 언행이 아주 자유분방하네.”
“화내실 겁니까?”
“아니. 하던 대화나 계속하자. 저들이 무슨 방법으로 널 유인할지는 알고?”
썩둑. 가위가 서류 끄트머리를 잘랐다.
“자세한 건 아직. 어차피 당해줄 생각이라 상관없기도 하고요.”
“역시 혼자 움직일 생각인가 보네. 확실히 네겐 다른 이들이 있는 쪽이 방해되고 불편하겠지.”
“네. 이를 통해 대부분의 영웅은 제가 상대하게 될 테니 공성전을 벌이는 다른 쪽에서도 나쁠 건 없죠.”
“여기 지형에 대해 아는 건 있고?”
“전투를 벌일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 자체는 평야인데, 주변에 적당한 높이의 절벽과 산이 많더군요.”
“인간들 입장에서는 잘 골랐네.”
원거리 영웅을 배치하기에도 용이하고 근거리 영웅이 날뛰기에도 아주 좋다.
이를 알면서도 유인에 당해주겠다는 건가. 턱을 매만지며 책상 위에 널브러진 서류를 내려다보던 마왕이 불쑥 물었다.
“혼자서도 괜찮겠어?”
“혼자여서 괜찮은 겁니다.”
“그렇긴 하겠지.”
말했듯이 용사로서는 발목을 잡는 다른 이들이 없는 쪽이 편할 것이다. 하지만 잘하면 좀 더 편하게 싸울 수 있거늘, 굳이 불리한 지형까지 유인당해주어야 할까.
뒤늦게 말에 담긴 의미를 읽은 듯 데온이 답을 덧댔다.
“제가 유인당해주지 않았다가 그 많은 영웅들이 계획을 바꿔 각 성으로 지원 가기라도 하면 곤란해지잖습니까. 괜히 욕심부려 모든 걸 망치고 싶진 않습니다.”
“……그래. 그럼 반대의 경우를 물어볼까.”
“……?”
“용사가 없는 전력이 공성전에 성공할 거라고 확신해?”
종이를 자르던 손이 멈췄다.
데온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마왕을 보았다. 갑자기 왜 쓸데없는 질문을 하느냐는 시선에 마왕이 싱긋 눈매를 휘며 언제 집어 든 건지 모를 서류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한 곳에 영웅을 넷이나 배치한 것을 보면 저들도 수성전을 포기하진 않은 것 같은데, 실패할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할 순 없잖아? 이 병력으로 성에 틀어박혀서 버티면 뚫거나 끌어내기 어려워.”
“…….”
“마족들이 완전히 마계에 돌아와 쉬고 있는 현 시기를 놓치지 않고 식량도 열심히 날랐을 테고.”
어디 보자-.
영웅 배치에 관련한 서류를 내려놓고, 테이블 위의 서류 뭉치를 뒤적인 마왕이 이내 한 부분을 찾아 짚었다.
“맞네. 여기 르웨체에서 각 성으로 식량을 운반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잖아.”
“……남이 처리하는 서류를 함부로 뒤지시면 곤란합니다.”
“보라고 여기 올려둔 거 아니었어? 적어도 봐도 상관없으니 여기까지 들고 온 거겠지.”
“…….”
정답.
데온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차를 마시며 마왕이 말한 부분을 머릿속에서 되짚었다.
수성전에 작정한 듯한 인간계의 모습과 르웨체의 식량 나눔.
그리하여 나온 것은….
‘르웨체 국왕이 대단하네.’
……따위의 태연하기 그지없는 감상이었다.
르웨체가 비축한 병력을 오롯이 자국에만 사용했다면 성 하나만 붙잡고 버티는 것이 아닌 그곳까지 도달하기 위해 적이 지나쳐야 할 성에도 병력을 배치해 보다 오래 버티는 것이 가능할 텐데. 국왕이 아주 큰 결심을 했어.
르웨체는 그간 비축해두었던 병력을 전력이 부족한 동맹국에 균등히 분배했다. 힘겹게 긁어모은 영웅들을 용사를 잡기 위한 패로 내놓았으며, 오랜 가뭄에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식량을 동맹국과 나누었다.
인간계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었겠지만 실로 과감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산국과 제국만 숨통이 트였지.’
긴 가뭄에 더해 적당한 상단도 없어 허덕이더니만, 지금쯤 신났겠군.
어쨌든 질문을 받았으니 대답해야겠지. 다시 생각해봐도 쓸데없는 질문이다. 멈췄던 손을 움직여 마저 종이를 자르며 답했다.
“마왕군은 용사 없이도 인간계를 침공해왔죠.”
당연하다는 듯 나온 대답에 마왕이 입꼬리를 매끄럽게 올렸다.
“하지만 성공한 적은 없지.”
“그래서 이례적으로 모든 군단을 동원하는 겁니다. ‘영웅’의 상대는 본디 군단장의 몫.”
용사는 마왕을 상대하고, 영웅은 군단장을 상대한다.
“성 하나당 군단 넷을 배치하면 충분하겠죠.”
“성에 머무는 영웅은 넷이고, 군단 중에는 군단장이 없는 곳도 있는데?”
“그 부분은….”
썩둑.
순간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멈칫한 마왕이 가만히 데온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데온도 손끝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시선을 내린다.
……손가락이 반쯤 잘려있었다.
“……아.”
“‘아’는 무슨…….”
곧바로 달려온 듯 밖에서 벤이 문을 두드…리다가 신호가 멈춘 것을 느낀 듯 돌아간다.
마왕이 데온의 손에서 가위를 빼든 채 그새 다 아문 손가락을 살핀다. 상대가 제 손가락을 만지든 말든 데온은 가만히 앉아 생각했다. 덕분에 마침 떠오른 것이 있었다.
예전에, 에드가 제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선보였던 마계의 물건.
‘그래, 눈꽃스틱이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