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304
304. 누구보다 큰 죄를 지을지어다(2)
굳이 영웅 한 명당 군단장 하나가 붙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빈 전력은 군단장들이 알아서 잘 메우게 시키려 했다만, 꼭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인력이 부족하면 기후를 이쪽의 편으로 만들면 되는 거잖아.’
데온은 언젠가 직접 사용해 본 적 있는 막대기를 떠올렸다.
막대기의 끄트머리를 자르면 내용물이 폭죽처럼 튀어 나가 눈을 내리게 만드는 물건이었지. 전쟁 때 사용하기 위해 개발했댔나. 과연 그 의도에 걸맞게 어린애 장난감 같은 이름과 달리 위력은 제법이었더랬다.
……그때도 막대 끝을 자르다가 손가락을 반쯤 잘라먹었었고.
‘이걸 왜 잊고 있었을까.’
여러모로 유용한 물건이다.
넓은 반경에 눈을 뿌리기 위한 폭발력과 눈이 녹아 비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극도의 냉기는 적에게 직접 쏴도 효과적일 텐데.
시선을 내렸다. 상처가 있던 부분을 꾹 누르며 문질러 보는 마왕이 시야에 들어왔다.
“용사가 좋긴 하네. 흔적도 없이 아물었….”
“마왕님.”
“응?”
그제야 손가락에서 시선을 뗀 마왕이 고개를 든다. 데온은 그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내며 저를 보는 역안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눈꽃스틱의 재고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눈꽃… 아아, 그 이름 오랜만이네.”
……처음엔 생소한 단어를 듣는 듯 의문을 띠다가, 이내 알겠다는 듯 탄성을 뱉는다.
물건을 활발히 만들고 적극적으로 쟁여두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반응.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듯한 상대의 태도에 데온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설마 생산을 중지한 겁니까?”
“중지했다기보다는… 애초에 시험작이었지? 그거 그냥 ‘이러면 어떨까?’ 싶어서 개발해본 거라 대량으로 만들지 않았거든. 애초에 정식 물품이었으면 이름을 그따위로 짓지 않았겠지.”
하긴, 척 보기에도 이름이 너무 대충이긴 했다.
하지만 시험작이라 해도 효율성을 보면 조만간 정식으로 생산에 들어갈 거라 생각했는데…….
“마력석을 섬세하게 가공해서 만들어야 하는 거라 손이 제법 많이 갔거든. 대량으로 만들기엔 적합하지 않달까. 그래서 폐기되었고.”
“아…….”
“그래도 남은 재고가 있긴 할 거야. 여기 어딘가에 관련 장부가 있을 텐데…….”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한쪽 책장에 다가간다. 주르륵 꽂혀 있는 여러 장부를 손가락으로 쓱 훑으며 걸어가더니, 어느 한 곳에서 멈추고는 그것을 뽑았다.
촤르륵 페이지를 넘기며 내용을 살피던 마왕이 원하는 걸 찾은 듯 고개를 들고 말했다.
“일반 눈꽃스틱 두 개에 피 눈꽃스틱 하나가 남았네.”
“……아쉽네요.”
생각보다 너무 적다. 적에게 직접 쏠 수는 없겠네. 데온이 낮게 혀를 찼다.
‘그래도 최소한의 수는 맞췄으니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각 성에 하나씩 쏘고 시작하면 되리라.
데온의 생각을 눈치챈 듯 장부를 제자리에 돌려 둔 마왕이 슬쩍 입꼬리를 올린다. 자리로 돌아오는 발소리 위로 은근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틀어박힌 놈들을 끌어내는 데 쓰려고?”
“네. 정확하게 성 위의 상공을 노리고 그걸 사용하면 놈들이 수확해둔 작물이 얼거나 상하겠죠. 그럼 식량 부족으로 버티는 것이 불가능해질 테고….”
“최후의 수단으로 정면 돌파를 시도하겠지. 저쪽 입장에서는 배곯은 상태에서 전투를 벌이는 셈인 데다 일단 한 수 지고 나오는 것이니 정신적으로도 몰려 온전한 전력을 내지 못할 테고, 그러한 상황은 이쪽의 부족한 군단장의 수를 어느 정도 보완해줄 테니…… 괜찮네. 하나는 피 눈꽃스틱이지만 목적으로 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상관없을 거고.”
정확하다. 데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해도 기왕 사용하는 거, 최대한의 효율을 뽑을 수 있는 곳에 사용하는 편이 좋겠지. 어느 나라에 피 눈꽃스틱을 사용하는 것이 이득일까.
답은 금방 나왔다.
“피 눈꽃스틱은 산국에 사용하려 합니다.”
“굳이 그렇게 짚어 말했다는 건…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보지?”
“산국은 주술사가 많은 남부에 위치해 있죠. 그만큼 미신에 민감할 테니 성 내 민심의 불안을 조장할 수 있을 겁니다.”
미신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데온은 과거의 기록이 담긴 책을 통해 보았다.
어떠한 근거가 없음에도 멋대로 하늘이 노했다고 해석하고 원인을 왕의 부덕으로 몰아 죽인다. 자연을 달래기 위한 명목으로 같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기도 하며, 건강해진다는 근거 없는 낭설을 믿어 아이를 잡아먹기도 했다.
그러니 하늘에서 피의 눈이 내리면 민심이 흉흉해지겠지. 추악한 대중들은 본인의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없는 원인도 만들어 한시라도 빨리 불길한 현상을 해결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것이 미신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일 터.
“좋은 판단이야.”
마왕이 웃었다.
“개인은 똑똑할지 몰라도 대중은 멍청하거든. 전쟁을 벌이는 것에 있어 상대 나라의 ‘민심’을 건드는 건 기본이지.”
한두 마리의 미꾸라지가 물을 흐리기 마련이다. 정신을 차려보면 똑똑한 이들도 멍청한 이들에게 휘말려 의미 없는 말싸움만 하고 있을 테니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니겠지. 혹은 정신 차리고 제대로 하려 해도 이미 휘말려버린 다수에게 발목만 잡힐 테고.
아마 내분이 일어날 것이다. 무기를 쥐고 일어난 내분이 아닌 그저 여론 상의 내분이기에 더욱 상대하기 까다롭겠지.
“민심이 흔들린다는 건 왕의 권력이 흔들린다는 뜻이라서.”
이는 유독 광적으로 왕을 맹신하는 산국에 타격이 클 것이다.
“……네, 아마 그렇겠죠.”
이번에도 정확하게 짚었네.
데온은 유독 즐거워 보이는 마왕을 가만히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백작 가문의 적통이자 명예 백작으로서 귀족이었던 그는 윗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흔들린 왕의 권력은 귀족들의 견제로 이어지겠지. 무언가 행하려 해도 사사건건 방해가 들어오리라.
“욕심 많은 귀족들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뭔가 더 얻고자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 지휘 체계에도 문제가 생길 겁니다.”
어떻게든 더 권력을 뜯어내기 위한 대립과 견제.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데온은 머리를 굴리느라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몸에 힘을 풀고 다시 소파에서 뒹굴거렸다. 물끄러미 그를 보던 마왕이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스틱은 언제 사용할 거야?”
“전에 보니까 눈은 그리 오래 내리지 못해도 기온을 낮추는 냉기 자체는 상당히 오래 가더군요. 냉기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자연적인 비가 내린다 해도 눈이 되겠죠. 그러니 미리 사용해서 나쁠 건 없어 보이는데…….”
“몰래 인력을 보내 사용해두려고?”
“아뇨, 그러면 또 식량을 구해올 가능성이 있잖습니까. 그러지 못하게 견제할 병력이 필요합니다.”
차라리 선발대 개념으로 보내두는 편이 좋겠지. 그러니까.
몸을 일으킨 데온이 마왕을 똑바로 쳐다본다. 이게 본론이라는 듯 단단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한 채, 말한다.
“지금 당장 군단장 회의를 열어도 되겠습니까?”
“…….”
눈빛만큼이나 다부진 목소리.
마왕은 곧장 답하는 대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테이블을 빙 돌아 데온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의 이마에 손등을 댄다.
짧은 침묵이 둘 사이를 스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직한 물음이 떨어졌다.
“지금 바로?”
“……네.”
“여전히 열이 있는데.”
거의 고질병이 되어버린 미열.
손등에 뜨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마왕은 그대로 데온의 눈을 마주하더니, 가만히 입꼬리를 올리며 속삭이듯 조곤조곤 말했다.
“뭐가 그렇게 급해.”
“…….”
“오늘 안에만 해도 차고 넘치잖아. 조금 쉬었다 하는 건 어때?”
“…….”
“아, 그래. 한숨 자고 나서 하는 것도 괜찮겠네. 요즘 약도 안 해서 버티기 힘들 텐데 말이야.”
언제부턴가 데온은 약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뿐일까, 단의 죽음을 기점으로 쓸데없는 습관도 사라져 지금은 어릴 적부터 갖고 있던 기본적인 습관만이 남았으니, 이걸 과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도 될는지.
‘……아니지,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기긴 했나.’
틈날 때마다 가만히 두 손을 내려다보는 행동. 이것도 습관이라면 습관이겠지만…….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롭게 굴 땐 언제고, 지금은 잠만 자지 않을 뿐이지 지나치게 정상적이다. 선명하게 와닿는 위화감에 마왕은 관찰하듯 데온을 내려다보았다.
“……신경 쓰지 마시죠.”
마왕의 말과 행동이 불쾌한 듯 와락 얼굴을 구긴 데온이 아직까지도 제 이마에 닿아있던 손을 거칠게 쳐냈다.
“이건 열이 아니라 기본 체온입니다.”
“……그래, 거기서 더 내려가지 않으니 ‘기본’ 체온이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물론 ‘정상’ 체온은 절대 아니고.
따라붙는 뒷말에 데온은 우습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애초에 그 원인 중 하나가 제 앞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열의 원인은 스트레스다. 그 스트레스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게 바로 눈앞의 마왕이고.
날 선 목소리가 이어졌다.
“최근의 일만 해도 그렇잖습니까.”
“단의 일이라면 그 녀석이 멋대로 군 거지, 내가 손댄 건 없는데?”
“그때 단이 죄를 끌어안고 갈 것을 먼저 자처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희생하라 제안했겠지.”
조금 울컥한 듯 아예 짧아진 발언에 마왕은 침묵으로 긍정하며 데온을 보았다.
부정할 생각은 없어 일단 입을 다물었다만… 그래서 그게 왜 여기서 나오는 건지. 의문은 곧장 이어진 발언에서 풀렸다.
“그러니까, 저는 ‘단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닌 저를 감싸는 당신의 행동을 말하는 겁니다.”
“……아하.”
마왕은 언제나 데온 하르트를 감쌌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 데온 본인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유야 뻔하지.’
본인의 목적을 위해서일 터. 제 목적을 위해 나를 감싸고, 이를 위해 ‘데온 하르트’ 이외의 것들은 가차 없이 버리는데 어찌 속없이 좋아할 수 있겠는가.
여건에 따라 내 의사와 무관하게 주위 사람들을 그리 버릴 수 있다는 것이 실로 끔찍하건만, 그럼에도 절대적인 보호는 실로 안락해서.
“아마 당신도 그 행동이 내게 주는 영향을 알고 있었겠지.”
데온은 마왕을 노려보았다.
눈치 좋은 마왕은 그게 데온 하르트에게 있어 상당한 스트레스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그럼에도 감싸고, 치료하고, 챙겨주고.”
원수 새끼가, 내 몸을 걱정한다. 단순히 숨만 붙여놓는 것이 아닌 정신적인 측면도 적당히 챙겼다. 사고 쳐도 감싸고, 다치면 치료하고, 숙면을 거부하자 잠을 재우려 들고, 취미를 가르친다.
단순한 스트레스의 영역이 아니라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뭐, 지금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
갑작스럽게 들끓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확 식는 모습.
……이제야 위화감의 정체를 알겠다. 애증에 가까운 비틀린 감정을 받아주며, 마왕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데온 하르트는 정상적으로 회복된 것이 아니라…….
“어설프게 조각난 유리 파편보다, 모래처럼 부스러진 유리 가루가 덜 아픈 법이지.”
“…….”
“당장 군단장 회의를 하고 싶다고 했지? 네가 원한다면야.”
마음대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