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312
312. 2차전 시작이다, XX들아(1)
르웨체의 국왕은 조용히 흩날리는 눈을 보며 머릿속으로 잃은 병력과 남은 식량을 계산했다.
그리하여 나온 답은 간단했다.
‘아직 더 버틸 수 있다.’
사실 정해진 답이기도 했다. 버티지 못할 상황이어도 데온 하르트를 죽일 때까진 어떻게든 버텨야 하니까.
마왕의 대적자인 만큼 용사의 수명 또한 상당히 길다. 이쪽에서 자연사를 기대하며 기다리다가는 몇 세대가 훌쩍 지날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금의 용사가 자연사하기 전에 인간계가 먼저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짓밟힐 것이 분명했다.
오직 데온 하르트의 죽음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모든 군주들이 그것 하나만을 노리고 집중하는 상황에서, 각 군주들의 통신기에 불이 들어왔다.
평소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토의하는 데 사용하던 통신기가 아니다. 이번에 새로 마련한, 데온 하르트를 상대하기 위해 보낸 영웅들 측의 통신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즉…….
그래, 영웅들과 데온 하르트가 조우했다.
***
[데온 님, 여기서부터는 길이 달라서….] [그래, 수고했어. ……아, 가기 전에 병사 일부는 이쪽에 남겨 두도록 하고.] [병사요?] [어. 정예 같은 고급 전력까진 필요 없고 그냥 일반 병사 정도면 충분해.]리리넬을 비롯한 다른 군단과 헤어진 데온은 늘어난 휘하의 병력과 함께 다시 출발…하려다 뺨 위로 툭 떨어진 액체에 고개를 들었다. 지독한 가뭄이라던 말은 거짓이었는지, 비가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삽시간에 굵어지는 빗줄기를 물끄러미 올려다본 것도 잠시, 근처에 있던 마족들이 비를 막아 주려는 것을 거절하고 0군단원들을 돌아보았다. 제 지휘하에 따라온 직속 병력들이 명령만 내려 달라는 듯 흔들림 없이 시선을 마주해 왔다.
“잘 봐.”
데온은 지도를 펼쳤다.
“난 아마 여기서 싸울 거야.”
“…….”
“그러니 여기를 중심으로 이 정도의 거리를 두고….”
한 곳을 쿡 짚은 손가락이 제법 긴 선을 주욱 그린다. 그가 짚었던 곳이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곳까지 손가락이 나아갔다.
그 상태로 큰 원이 그려지고,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명령을 마무리 지었다.
“주위에 둘러서서 누구도 오지 못하게 해.”
“누구도… 라는 말씀은…….”
“아군도 안 돼. 방해만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낯선 목소리.
데온은 대표하여 대답한 이를 잠시 쳐다보았다. 얼굴은 낯익지만 이름조차 모르는 이가 의아한 듯 시선을 마주해 온다.
“뭔가 더 하실 말씀이라도…?”
“…….”
……원래는 이런 익숙하지 않은 녀석이 아닌 에드가 이 자리에 있어야 했겠지.
하지만 에드는 따라오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데온 하르트가 그를 부르지 않았고, 에드도 따라가겠노라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에드가 따라오지 않아 0군단원 중 한 명이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리라.
“데온 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데온은 고개를 돌렸다.
***
“어때, 조용하고 좋지? 이번에 죄다 전쟁에 나가 버려서 성 전체가 조용하더라고. 술 마시기에 딱이라 생각했지.”
“조용하긴……. 음산하기만 한데.”
“잔말 말고 여기 앉아. 한잔하자고.”
“…….”
“……데온 님을 따라가지 않은 거, 후회 안 하나?”
“내가 따라가지 않는 편이 오히려 도움이 될 테니까. 지금으로서는 따라가 봤자 방해만 될 테지.”
“그런가…….”
“그보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예전에 말이야. 마왕님과 데온 님이 대립하시게 된다면 누구의 편을 들 건지… 내게 물었을 때.”
[만약, 만약에 말이야.] [마왕님과 데온 님이 대립하시게 된다면 네놈은 누구의 편을 들 거지?]“넌 그때 이미 다 알고 있었나?”
“…….”
“대답해.”
“……그래.”
“…….”
“…….”
빌어먹을.
***
전투 장소로 향하는 길목까지 고려하여 0군단원들을 주위에 배치한 채, 데온은 일반 마족 병사들을 데리고 영웅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어디에 있는지 다 안다는 듯 거침없이 나아가는 모습에 뒤따르던 마족 병사들이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시선을 한쪽에 고정했다.
저 멀리, ‘용사’여서 보일 정도의 거리에 영웅들이 모여 있는 것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조금 더 나아가자 마족들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한 듯 나직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린다. 등에 닿는 경외의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움직이던 데온이 영웅들과 시선을 마주치고 멈칫했다.
“데온 님? 왜 그러십니까?”
“……별거 아니야.”
확실히 저쪽에 뭔가 있는 모양이군. 눈이 마주쳤음에도 이쪽으로 마중 나오는 대신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걸 보면.
뭘까. 그러고 보니 보고와 달리 프리미로 기사단이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지. 그 녀석들과 관련이 있으려나.
고민하며 막 걸음을 내디딘 데온이 일순간 무릎이 꺾인 듯 비틀- 크게 휘청였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기습이 들어왔다.
“데온 님!?”
“……!”
자신들의 통솔자이자 이 전쟁의 핵심이 위험한 상황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그를 지키기 위해 달려간 마족들이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몸을 짓누르는 압력에 적응하지 못하고 풀썩 넘어지거나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지켜 줄 이 하나 없이 고스란히 검 앞에 노출된 데온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적들의 면면을 훑고 씩 웃었다.
‘이거였구나.’
프리미로 기사단이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네.
억지로 균형을 잡으려던 것을 포기하고 몸에 힘을 풀었다. 빠르게 숙어지는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검이 지나간다. 데온은 그대로 몸을 비틀며 바닥을 짚고 발로 상대의 명치를 걷어찼다.
‘……계산대로라면 자세를 제대로 잡는 것까지 했어야 정상인데.’
압력의 무게를 미처 계산하지 못한 팔이 몸을 밀어내지 못하고 힘없이 꺾인다. 데온은 재빨리 바닥을 한번 굴러 혹시 모를 공격의 범위에서 벗어나며 몸을 일으켰다.
조금 민망하지만 어쨌든 적을 밀어내는 것에는 성공했고, 살았으니 된 거다. 곧바로 단검을 꺼내 이어지는 공격을 쳐내며 가볍게 물었다.
“이거, 진(陳)인가?”
“…….”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진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걸 알고 있긴 했는데… 이런 것도 있었을 줄이야. 보아하니 범위형 진인 것 같은데, 같은 범위 안에 있는 저들이 영향을 안 받는 걸 보면 무언가 수를 쓴 모양이지.
‘기왕이면 부적 같은 거면 좋겠는데.’
빼앗을 수 있는 종류니까.
날 선 경계가 피부를 따끔하게 찔러 온다. 데온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익숙한 얼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
“선배님은 어디 가셨니?”
오, 표정이 볼만한데.
당연하지만 이는 알면서도 던지는 질문이다. 확인할 게 있어서 말이지. 조금 전의 전투는 너무 삽시간에 지나가서 조금 더 시간이 좀 필요하다.
여전히 대답 없는 상대의 기색을 살피며 데온은 손을 들어 뺨을 긁적였다.
“선배님의 기사단은 되도록 건들고 싶지 않았는데…….”
“…….”
“그래도 선배님이 없어서 다행이랄까.”
……좋아, 이 정도의 압력이군. 적응됐다.
주어진 시간은 짧았지만 얻은 것은 적지 않았다. 그사이 몸을 짓누르는 압력에 적응하고, 손을 들어 올릴 때 느껴지던 압력의 무게를 대충 계산하여 생각과 실제 움직임의 차이를 파악한 데온이 씩 웃으며 바쁘게 굴러가는 놈들의 시선을 좇았다.
“눈 굴리는 꼴을 보아하니 뭔가 열심히 찾는 모양인데.”
“…….”
“우리 미친개… 로프티 기사단을 찾나 봐?”
아, 너희에겐 살인귀 기사단이 익숙한 명칭이려나.
순간이지만 적응이 되지 않아 무거운 몸으로나마 힘겹게 전투를 벌이는 마족들을 본 놈들의 표정이 안 좋아진 것을 데온은 똑똑히 보았다.
전투 자체는 녀석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전황이 문제인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의도한 손님 대신 엉뚱한 녀석이 온 것이 문제라는 거겠지.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어쩌나, 같이 안 왔는데.”
“…….”
기분 나쁠 정도로 정확한 추측이다. 프리미로 기사단의 단장이 흐트러진 표정을 바로잡았다.
본래 자신들의 역할은 살인귀 기사단의 발목을 붙잡아 두는 것이었다. 영웅들의 전투에 쓸 만한 인질로 활용할 수 있도록. 데온 하르트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든 그의 목줄을 잡는 수단이 되든, 끝내는 데온 하르트를 죽일 수 있도록.
“그런데 너넨 쪽팔리지도 않냐? 나 하나 죽이겠다고 온갖 더러운 수를 다 쓰고 말이야.”
……기사로서 솔직히 잠깐이지만 비겁하다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인간계를 지키는데 수단과 방법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인류를 멸망시키려 드는 극악무도한 자를 상대하는데 정정당당함을 따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는 줄곧 닫고 있던 입을 열어 역으로 물었다.
“그러는 너는, 용사가 되어서 쪽팔리지도 않나? 인간계를 지키기는커녕 공격이나 하고 있고.”
“……응.”
대답 대신 질문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듯, 잠시 눈을 키운 데온이 이내 싱긋 웃었다.
“전혀 안 쪽팔리는데?”
멈춰 있던 걸음을 뗐다.
어느덧 일상처럼 익숙해진 압력 속에서 경계 어린 시선을 무시한 채 산책하듯 주변을 거닐다가 고개를 돌려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마족에게 물었다.
“마력 사용은?”
“불가능합니다. 이 영역의 범위 밖으로 나가면 사용은 가능합니다만….”
“그건 쓸모없지.”
범위 밖에서 범위 내를 노리고 마법을 써 봤자 영역에 들어오는 즉시 취소된다.
밖에서 불덩이를 만들어 날려도 마법 억제 진의 범위에 들어오면 곧바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데온은 태연히 턱을 쓸었다.
“뭐… 예상은 했어.”
정 안된다 싶으면 마법을 사용할 녀석들이 맥없이 죽는 것만 봐도 충분히 답이 나온다. 무엇보다 적들이 이런 상황을 예상 못 했을 리도 없고.
나였어도 당연히 마족을 데려올 경우도 상정에 넣어 마력 억제 진을 설치했을 것이다. 현 각국의 군주들이 멍청이도 아니고, 심지어 동맹을 맺어 머리를 맞댈 이들이 늘기까지 했을 텐데 이조차 상정에 넣지 않았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어떡할까…….”
데온은 조용히 숨통을 집어삼킬 듯 일렁이는 핏물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살펴본 결과, 몇몇 마족들이 압력을 가하는 이 빌어먹을 진의 범위 밖으로 나가 보았을 때 놈들은 쫓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상대하기 위해 나왔던 마족들이 어쩔 수 없이 진의 범위에 발을 들이며 재적응의 시간을 거치다 보니 역효과가 났고.
‘과연 지금 있는 마족들만으로 상대가 가능할까?’
결국 여기서는 내 손으로 피를 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짧은 고민에 잠긴 것도 잠시, 의식을 끌어 올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희가 상대하겠습니다.”
데온이 고개를 들었다.
“……할 수 있겠어?”
“데온 님께서는 영웅들을 상대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상대할 수 있습니다. 이 기묘한 압박도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지면 금세 익숙해질 겁니다. 그 잠깐의 시간조차 버티지 못할 정도로 저희는 약하지 않습니다.”
약해 보여도 결국은 마족이요, 일반 병사라 할지라도 결국은 마왕성의 전력 중 하나다.
자신감 넘치는 눈빛이 믿고 맡겨 달라는 듯 데온 하르트를 향한다. 부담스러운 눈빛을 마주한 것도 잠시, 이내 데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희에게 맡기지.”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인사로 답을 대신한 녀석이 돌아서서 전투 중인 마족들을 향해 외친다. 여느 장수 못지않게 힘 있는 목소리가 울렸다.
“우리가 맡은 임무는 데온 님의 발목을 잡는 귀찮은 것들을 떼어 내고 처리하는 것이다! 무려 데온 님께서 믿고 맡겨 주신 임무이니, 철저하게! 데온 님께서 나아가시는 걸음을 그 누구도 감히 막아서지 못하도록 하자!”
“와아아아아!”
“죽여라!”
기세가 올라간 녀석들이 매섭게 달려든다.
지지 않겠다는 듯 거친 음성이 대지를 울렸다.
“프리미로 기사단, 우리는 정예다! 우리가 왜 남부에서 공포의 상징이었는지 저들에게 똑똑히 보여 줘라!”
“적에게 죽음을!”
두 집단이 엉켰다. 거칠게 내딛는 걸음에 흙탕물이 튀어 오르고, 허공에 피가 튄다.
잠시 멈춰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데온은 천천히 그들 사이를 지나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영웅들에게 마주 걸어갔다. 간혹 저를 공격하려 드는 놈들이 있긴 했으나, 제게 닿기도 전에 다른 마족 병사의 손에 막히곤 했다.
“……음?”
그러다 멈칫, 마주 오는 영웅들 틈바구니에서 무언가 발견한 데온이 슬쩍 눈을 키웠다. 어느새 멈춰 선 걸음을 다시 옮기는 대신 의외의 상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느리게 운을 뗐다.
“이거 의외군요.”
“…….”
“고귀하신 황녀 전하께서 여기까진 어쩐 일이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