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321
321. 너는 누구의 편인가(2)
기어이 마족들이 성벽을 넘었을 때, 산국의 병사들과 영웅들은 국왕부터 대피시키려 했다. 하지만…….
“대피라니.”
충심 어린 이들의 행동에 연화는 동조하는 대신 그저 낮게 웃었다. 흐린 목소리가 아스라이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어디로 대피해야 한단 말이냐.”
“…….”
마땅히 갈 곳도 없거늘. 이 성에서 무사히 빠져나간다 하여 남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언제 죽을지 몰라 불안한 도망자의 삶? 과연 그것을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저 하나 살기 위해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왕이라는 불명예에 비하면 도망쳐서 얻는 이득이라고는 죽음을 잠시 미루는 것뿐이라, 연화로서는 도망쳐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주변인들의 재촉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걱정은 고맙지만, 과인은 어차피 이곳에서 성과 운명을 함께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그대들만 자리를 피하면 될 것 같군.”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과인이 기어이 명령을 입에 담아야 따를 셈인가.”
“…….”
병사들이 주춤거린다. 그들의 시선이 한 영웅에게 쏠렸다.
마지막까지 왕의 곁에 남아 그녀를 지키기로 예정된 영웅이 어두워진 얼굴로 불만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전하를 지키는 것은 저희의 소임입니다.”
“……정 그렇다면.”
왕명을 들먹여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 듯한 단호한 기세에 한숨을 내쉰 연화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대 한 명만 남는 것은 어떤가?”
“……그것이 전하께서 허용하실 수 있는 최대한의 선이라면.”
이것이 그녀가 한 최대한의 양보다. 이를 눈치챈 영웅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어두운 표정을 하면서도 긍정을 뱉었다.
그렇게 일반인들을 물린 공간에 오직 셋만이 남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잠시 창밖을 보며 침묵하던 연화는 이내 이곳에 남은 유일한 일반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 유능한 책사가 시선을 마주해 왔다.
“사에린.”
짧은 부름에 담긴 의미를 읽은 사에린이 살며시 눈웃음 지었다.
“저는 남겠습니다.”
“과인이 허락할 것 같나.”
“죽음이 목전인데 제 고집보다 왕의 허가가 더 중요할까요.”
그건 그렇지만. 연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공작이라는 작자가 죽었을 때는 복수하려 하더니, 내가 죽을 때가 되니 함께 죽으려 드는군.’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묘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한순간, 재빠르게 표정을 감추고 짐짓 가볍게 물었다.
“과인의 복수는 안 해주는 건가?”
“복수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진 곳이 없으니까요. 전부 무너지고 있는데, 어디에 가서 복수를 도모해야 하나요? 저 또한 여기서 운명을 함께하겠습니다. 책사의 무능함으로 이런 결과가 나왔는데, 자리에 남아 책임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죠.”
“이거 참… 낭만적이군.”
여건이 되었다면 복수해 주었을 거라는 뜻인가. 영광이야.
알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웃던 연화가 어느 순간 얼굴 위에서 표정을 지웠다.
물끄러미 사에린을 보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진다. 죄책감에 짓눌려 올라가지 못하는 시선처럼, 무거운 목소리가 읊조리듯 흘러나왔다.
“과인 때문에 그대 또한 죽게 되는구나.”
“아직 안 죽었습니다.”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 벌써 죽이지 마세요.
사에린이 단호히 답했다.
…….
그렇게 지금.
기어이 영웅을 죽인 마족 군단장이 호흡을 가다듬듯 길게 숨을 내쉰다. 영웅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이는 모습.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카로운 손톱 끝을 보던 사에린은 우습게도 문득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허탈한 웃음이 소리 없이 나왔다.
‘……죽음이 가까워져서도 공작님이나 떠올리다니, 나도 참 중증이네.’
수습한 그의 시신을 태우며 몇 번이고 감히 그 이름을 입에 담았었지. 살아서 부르지 못한 이름, 죽었으니 더 부를 일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낸 평민의 작은 욕심이었다.
그리고 그만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내가 죽으면… 내 이름을 불러 줄 이가 있긴 할까.’
이름을 부르짖으며 슬퍼하고 그리워하고.
‘아니, 애초에 내가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해 줄 사람이 있으려나.’
없겠지. 유일하게 가능성이 있는 사람조차 곧 이 자리에서 함께 죽을 테니까.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지금은 기대조차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녀는 제 주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복수의 희망을 잃은 지금, 목전까지 다가온 죽음에도 사에린은 태연할 수 있었다.
‘…….’
툭. 투둑. 피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하다.
태연한 얼굴 아래, 사형 집행을 기다리듯 체념 어린 눈으로 가만히 상대를 응시하는 저의 왕을 힐긋 본 그녀는 슬쩍 한 걸음 나섰다.
은근슬쩍, 아니 노골적으로 국왕을 가린 움직임에 그렇지 않아도 소리 내어 웃었을 때부터 그녀를 향해 있던 데르니반의 시선이 가늘어진다. 살기가 가시지 않은 눈동자에 떨림을 제어하기 위해 애쓰는 애처로운 인간이 비쳤다.
‘……그렇게 떠는 주제에 왜 막아선 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렇게 죽고 싶다는데 못 해 줄 것은 없다.
귀찮은 방해물을 치우기 위해 마족이 날 선 손톱을 휘두른다. 그에 따라 사에린은 눈을 감았다. 의식이 끊기기 전, 마지막으로 어렴풋이 줄곧 그리워하던 이의 모습이 보인 것 같기도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리던, 보라색 머리카락이.
그리고.
촤악!
“…….”
국왕은 조금 전까지 살아 있던 이가 시신이 되는 것을 코앞에서 목격했다.
얼굴에 뜨끈한 액체가 흩뿌려지더니 이내 천천히 흘러내린다. 섬뜩한 감각에 연화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손끝이 잘게 떨렸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죽음은 이미 각오했다. 다만… 어깨에 얹힌 무언가가 너무 무거워서.
‘다음은 내 차례인데, 죽음으로도 책임지지 못할 것이 하나 더 늘었군.’
이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것을 알기에 왕은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떨었다.
잠시 그녀를 보던 데르니반이 손을 휘둘렀다. 섬뜩한 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한발 늦게 끔찍한 고통이 느껴진다. 힘 빠진 육신이 쓰러지는 듯 흘긋 뜬 눈에 낮아지는 시야가 비쳤다.
얼핏 사에린의 시신이 보이자 그녀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역시…….
‘과인 때문에 그대 또한 죽게 되는구나.’
이번엔 반박이 돌아오지 않았다.
…….
“산국 정리 끝났습니다.”
***
진의 주축을 부순 것이 제 목을 조르게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전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리하게 돌아가는 전황에 드벨라니아가 이를 악물었다. 살기 어린 시선 끝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는 리리넬의 모습이 보였다.
마력이라도 많이 소모했다면 모를까, 마법에 재능 넘치는 녀석답게 최소한의 마력으로 최대의 효율을 뽑아내고 있으니 더 곤란한 상황이다. 상대가 그녀 하나였다면 상황이 더 나았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적은 11군단만이 아니기에.
“……젠장!”
드벨라니아는 실을 펼치는 것을 자꾸만 견제하는 4군단장을 노려보며 기어이 욕설을 뱉었다.
이 모든 걸 혼자서 상대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다른 이들과 힘을 합쳐 상대하는 편이 나을 터.
“……2군단! 미리 이야기해 두었던 장소로 이동한다!”
판단이 서기 무섭게 그녀는 곧장 귀중한 마력을 소모해 마법을 시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마력에 이 많은 군단원들을 전부 데리고 단번에 약속 장소까지 이동하는 것은 낭비다. 알아서 마법으로 이동하라 하기에는 군단원들이 그 정도 거리를 이동할 만큼의 마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그저 잠시 몸을 뺄 틈을 만들기 위해 모든 군단원들을 이곳으로부터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이동시킨 뒤, 곧장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출정하기 전, 미리 들은 말이 있는 군단원들의 행동도 빨랐다.
“무슨…?”
“허, 지금 쟤네 도망치는 거야…?”
재빨리 자리를 뜨는 드벨라니아와 그녀의 뒤를 따르는 2군단을 어이없다는 듯 본 4군단장 이델리아가 힐긋 리리넬을 보았다. 마침 리리넬도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던 듯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적임에도 이때만큼은 서로의 생각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일단은 도망치는 녀석들을 쫓는 것이 우선이다.’
놓쳤다간 필시 뒤가 좋지 않을 터.
“……3군단, 4군단. 도망치는 2군단을 쫓는다! 후방 공격에 주의하도록!”
물론 그렇다고 같은 편이 된 것은 아니니 쫓는 와중에도 11군단의 공격 또한 주의하는 것이 좋겠지.
이델리아의 명령이 떨어지고, 리리넬도 이를 염두에 둔 듯 3, 4군단의 공격을 주의하며 2군단을 쫓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델리아는 조용히 그녀의 시선을 피해 손을 뒤로 감췄다.
영웅과의 전투로 힘을 많이 소진한 상태에서 또 한바탕 전투를 치른 탓에 힘 빠진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부채를 놓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일 정도인데…….’
……체력은 전투를 쉬는 동안 회복할 수 있다.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반동분자를 그냥 둘 수는 없지. 2군단을 쫓는 속도에 박차를 가하며 이델리아는 다소 정신없어 보이는 리리넬을 힐긋 돌아보았다.
적어도 2군단을 쫓는 중에는 이쪽에서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전투가 벌어지진 않을 것 같네. 그나마 다행이다.
‘아닌 척해도 불안해 보이는 게… 역시 2군단이 어디로 가는지 눈치채서 그런 거겠지.’
드벨라니아의 목적은 데온 하르트와 마왕 둘 모두 죽이는 것이다.
리리넬도 바보가 아니니 저와 드벨라니아의 대화나, 데온 하르트를 따르는 11군단과 마왕을 따르는 3, 4군단 모두 공격하는 그녀의 행동에서 목적을 충분히 눈치챘겠지.
드벨라니아가 데온 하르트와 마왕, 둘 중 누구부터 죽이려 들지는 안 봐도 뻔하다.
‘……데온 하르트 쪽은 전투가 끝났으려나.’
마침 인간계에 나와 영웅과 전투를 치러 힘이 많이 빠졌을 데온 하르트부터 먼저 죽이고, 마계에 귀환해 마왕을 죽인다.
데온 하르트를 해치고자 하는 이가 그가 있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니, 리리넬이 불안해할 만도 했다.
***
“……아까부터 다들 제 말을 씹고 계시는데.”
1군단과 10, 12군단이 공격을 주고받는다. 1군단장인 제이카르는 12군단장 마이어스와 한창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몇 번이고 이게 무슨 상황이냐 물었음에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7군단장 실루아가 기분이 상한 듯 낮게 으르렁거렸다.
“맛있습니까?”
“…….”
“세상에 먹을 게 그렇게 많은데 왜 하필 제 말을 씹는 겁니까?”
투덜투덜.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짜증 섞인 말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가 귀찮은 듯 제이카르가 제게 휘둘러지는 마이어스의 창을 옆으로 슬쩍 밀어 공격 방향을 틀었다. 날카로운 창끝이 실루아를 향했다.
채앵!
단검으로 이를 막은 실루아가 삐죽한 세로 동공을 치켜떴다.
“이거… 싸우자는 겁니까?”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침묵하는 제이카르에 더해, 슬쩍 몸을 뒤로 빼면서도 부정하지는 않는 마이어스의 태도에서 긍정을 읽은 그녀는 씩 웃었다. 어리둥절함이 사라진 눈에 섬뜩한 살기가 들어찼다.
“보아하니 단순히 싸우는 것을 넘어 서로 죽이려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도 한 번쯤 군단장을 죽여 보고 싶던 참이라, 잘됐…?!
한순간 실루아의 표정이 멍해졌다. ……지금 내가 제대로 본 것이 맞나? 눈을 깜빡이고도 바뀐 것 없는 광경에 절로 얼빠진 음성이 튀어나왔다.
“뭐야, 왜 도망가.”
12군단장이 도망쳤다! 제 군단원들과 10군단을 데리고!
순식간에 적이 사라져 버렸다. 그들을 상대하던 1군단도 상황 파악이 안 됐는지 서로를 돌아보더니 답을 구하듯 제이카르를 본다. 그러나 제이카르는 새로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짓쳐들어온 공격을 피해 고개를 꺾어야 했다.
황당함에 멍하니 있던 것도 잠시, 아무렴 어떠냐는 듯 히죽 웃은 실루아가 공격을 이어 갔다.
“아쉽지만 1군단장만이라도 제 상대가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먼저 건드려 놓고 이렇게 물러서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
어차피 죽여야 하는 상대이니 싸우는 것은 상관없지만, 12군단장을 놓치는 것은 곤란하다. 아직 제국 쪽도 완전하게 정리가 끝난 것도 아니고.
쉬지 않고 들어오는 공격을 막고 쳐 내며 제이카르는 힐긋 그들이 사라진 방향과 저 멀리 보이는 황궁을 돌아보았다.
‘일단… 제국부터 정리해야겠지.’
군단장들을 죽이는 것은 그다음이다.
판단을 내린 뒤, 막 실루아를 밀어내고 돌아선 제이카르가 걸음을 내딛…다 말고 멈칫했다. 황궁 쪽이 묘하게 소란스러웠다.
마족들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 위화감 가득한 소란은….
“……반란?”
“아? 그러게 말입니다. 적들이 성 내에 들어왔는데 힘을 합치지는 못할망정 내분이라니. 인간들도 참 멍청합니다.”
평소 황제의 인망이 어땠으면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반란이 일어날까. 아니, 어쩌면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이기에 오히려 반란이 일어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냥 두어도 황제는 죽겠군.’
확실한 것이 좋다지만 12군단장을 놓쳐서는 곤란하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판단을 바꾼 제이카르는 돌아서서 군단원들에게 명령했다.
“1군단, 지금부터 우리는 도망친 10군단과 12군단을 쫓는다.”
“……지금 저와 싸우다 말고 어딜 도망치려는 겁니까?”
“7군단은 무시하도록.”
“……하.”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렇다면 무시할 수 없도록 만들어 주지.
눈을 번뜩 빛낸 실루아가 도망친 군단을 쫓아 달려 나가는 1군단을 노려보며 말했다.
“7군단. 알지?”
“…….”
“당장 쫓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