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323
323. 너는 누구의 편인가(4)
흠칫한 벨리탄이 곧장 거리를 벌린다.
그래, 적이니까 당연하겠지. 이렇게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공언한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애초에 ‘확실하게’ 데온 님의 편이 되어 드리겠노라 약속했으니 돌이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하고.
트로버는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
‘단 이 빌어먹을 새끼.’
설마 처음부터 이걸 염두에 두었던 건가.
살아 있었다면 목을 움켜쥐고 흔들었을 텐데. 이미 죽은 놈, 한 번 더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아니, 애초에 리리넬 말고 데온 하르트의 편이 있기는 해?’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트로버는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살벌하면서도 묘하게 침체된 그의 분위기를 살피던 드벨라니아가 상황을 파악한 듯 피식 웃었다.
‘그러게 약속 같은 건 함부로 하면 안 된다니까.’
처음에 마왕님의 편이라고 말하려다 말을 바꾼 것도 그렇고, 내키지 않는 표정을 보아하니 무언가가 강제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게 무엇일지는 굳이 물어 확인하지 않아도 뻔하다.
‘이델리아도 눈치챈 것 같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
그녀는 소원권을 건 단과의 내기에서 패배했던 트로버를 기억하고 있었다. 은근하게 공개된 자리에서의 소원권 사용을 기피하던 단 역시도.
데온 하르트의 죄를 가져가며 죽을 정도로 충성심 높은 녀석이 트로버에게 빌 소원 정도야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아무튼 이로써 마왕 측 진영은 3, 4, 6, 7군단이 되는 건가.’
본래는 1군단장도 여기에 포함했겠지만 최근 들어 데온 하르트와 대련을 자주 진행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역시도 경계 대상이기에, 이델리아는 섣불리 판단하는 대신 경계 어린 눈으로 제이카르를 살폈다.
한결같이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조용히 상황을 살피는 마족이 시선 끝에 있었다.
“이게 무슨.”
그리고 다소 충격받은 듯한 목소리 역시도.
새로운 목소리의 등장에 서로를 바짝 경계하고 있던 모든 마족들이 일제히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뒤늦게 도착한 듯 한쪽에서 5군단장 데르니반이 혼란으로 눈을 떨고 있었다.
그는 또 어느 측 진영일까. 오엘을 죽인 트로버가 데온 하르트의 진영에 있는 걸 보면 그쪽은 아닌 것 같은데. 경계 가득한 시선들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방금…….”
데르니반은 신경 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주변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자마자 들은 발언이 너무 충격적이었기에.
“9군단장이… 데온 님의 편이라고 하셨습니까?”
***
아슬아슬하게 피하긴 했지만 화살에 이마가 찢어졌다. 독특한 화살촉 탓에 좀 크게 찢어졌더랬지. 아니, 이 경우에는 피부가 뜯겨 나갔다고 해야 하나.
고통은 한순간이었고 상처 또한 순식간에 아물었으나 그새 흘러내린 피가 시야를 가린 탓에 데온은 피와 빗물로 볼썽사납게 젖은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렸다. 다시 존재감을 발하는 외모에 지켜보던 영웅들이 흠칫했다.
이유 모를 소강상태에 흘긋 주변을 살핀 데온이 잠시 시선을 내렸다. 매섭게 일렁이는 핏물을 배경으로 붉게 물든 손이 눈에 들어왔다.
‘…….’
정신적 피로가 극에 달한 듯, 손이 미미하게 떨린다. 분명 몸은 멀쩡한 것 같은데 묘하게 힘이 빠진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하고 보니.”
조금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너무 온건하게 싸우고 있긴 했어.”
제아무리 신경 쓰려고 노력한다지만 결국 용사로서의 몸에 밴 여유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생명의 위협을 잘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당장 지금만 해도 이 많은 영웅들을 상대로 혼자 싸우고 있는데 위기감을 전혀 못 느끼고 있지 않나. 어지간한 부상은 그 자리에서 바로 회복되니 그런 것이리라.
“이전이었다면 기가 죽었을 것들이 이렇게 빈틈을 찾아 눈이나 굴리고 말이야.”
그래서 손속에도 여유가 생겼다.
살기 위해 아등바등할 때의 적들은 살벌한 기세에 짓눌려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곤 했다. 지금 이렇게 눈을 마주치고, 기색을 읽으려 애쓰는 게 아니라 시선을 피해 몸을 웅크리며 다음 상대가 본인이 되지 않기만을 빌었단 말이다.
나의 여유가 적들에게도 여유를 주었다. 데온은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배가 불렀지.”
지금은 진 때문에 용사로서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여유나 부리고 있고.
솔직히 지금의 영웅들은 질이 좀 떨어져 방심한 것도 있다. 전 황제가 통치하던 제국 때의 ‘공식 영웅’들, 특히 8년 전쟁을 거치며 지정되었던 이들은 기백부터가 차원이 달랐으니까.
‘게다가 선배님, 스티그마 프리미로를 보다 보니 눈이 좀 높아져서…….’
아무튼 지금은 그저 용사의 파편을 지녔다 하는 이들을 모조리 쓸어 모은 탓에 다소 질이 떨어지는 상황이다. 이전의 영웅들에 비해 우습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여유를 버려야 한다. 용사의 몸뚱이 하나만 믿고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기술을 남발한 탓에 몸이 망가지고 수복되길 반복하며 정신력을 많이 소모했다. 제아무리 빨리 회복된다 해도 고통은 필연적으로 느끼기에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쌓일 수밖에 없었다.
집중력이 딸려 이마가 뜯겨 나갈 만도 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러다 문득, 머리를 스치는 의문에 데온이 고개를 들었다.
이곳에서 데온 하르트가 존대를 사용하는 대상은 한 명이다. 알레테아가 곧장 시선을 마주했다.
“전하께서는 ‘그 기술’을 어떻게 눈치채고 피하시는 겁니까?”
분명 용사의 몸뚱이 하나만 믿고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기술을 남발했다고 했다.
용사가 되기 전의 저를 상대로 전 황제, 에도아르도 데세르트조차 피하거나 막아 내지 못한 기술일진대, 알레테아 데세르트는 아직까지도 살아 있다. 교묘한 타이밍에 다른 영웅들의 뒤로 슬쩍 빠진 탓이었다.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챈 알레테아가 생긋 웃었다.
“그야, 감이죠.”
알레테아 데세르트는 감이 좋다. 그녀 본인도 스스로가 감이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렇기에 때때로 신호를 보내는 감을 절대 무시하지 않는데, 전투 도중 그 감이 온 힘을 다해 경고할 때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불길함. 그럴 때마다 데온 하르트는 순간적이지만 진의 압력 따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듯 육안으로도 쫓을 수 없을 속도로 움직여 공격을 가하곤 했다.
“……그렇군요. 그럼 장난은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하고.”
황녀의 감에 대해서는 들은 것이 있는 터라 데온은 금방 흥미를 떼고 본 주제로 돌아갔다.
새빨간 눈동자가 남은 영웅들의 수를 가늠하듯 주위를 한 차례 훑고 다시 알레테아에게 고정되었다.
“제가 물렀다는 것도 알았으니 이제 제대로 싸워 볼까 합니다.”
집중력을 유지할 정신이 부족하다면 그냥 아예 놓아 버리면 된다. 그는 이미 소수가 다수를 압도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초심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데온 하르트는 8년 전쟁 때의 어린 데온을 끄집어냈다.
줄곧 두르고 있던 초연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섬뜩한 기세가 주위를 짓누른다. 텅 빈 붉은 눈동자에 광기가 들어차 핏물처럼 일렁이고, 끝내 범람한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영웅들이 주춤 물러섰다.
“이건…….”
“……근접전은 되도록 피하고 원거리 위주로 공격하는 것이 좋겠어요. 근거리 영웅들은 무리해서 공격하는 대신 원거리 영웅들이 공격하기 용이하도록 발을 묶어두는 것에 주력하세요. 그리고.”
감이 좋지 않다. 알레테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검을 고쳐 쥐었다.
“당연하지만 생존이 우선입니다. 시간을 얼마나 끌든, 일단 살아야 뭐라도 시도해 볼 수 있으니까요.”
긴장감 가득한 시선 가운데에서 데온 하르트는 말없이 단검을 빙글 돌렸다. 눈이 살기로 번들거리고, 입꼬리가 씩 말려 올라갔다.
‘이성은 적아를 구분할 정도만 있으면 된다.’
앳된 목소리가 속삭였다.
‘적들에게 공포를.’
적에게 집착하고 피에 미쳐라.
그게 내가 살 유일한 길이 될 터이니.
휴식은 끝났다. 데온이 먼저 가겠다는 듯 땅을 박차고.
채앵! 다시 날붙이 부딪히는 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
데르니반에게 있어 9군단장 트로버는 죽여야 할 적이다. 데온 하르트 역시 이를 허락했고.
분명 그랬는데…….
‘그가 데온 하르트의 편이라고?’
이건 아군이라는 뜻 아닌가.
“대답해 주십시오. 9군단장이 데온 님의 편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고 하던데? 데르니반 넌 누구의 편이지?”
“저는…….”
상황은 그가 혼란에 빠져 있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경계 가득한 물음에 일단 답하려던 찰나,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덩달아 울리는 땅에 데르니반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곳을 향한다. 그곳에는 웬 놈들이 미친 듯이 말을 몰아 달려오고 있었다.
마계의 말인 걸 보면 일단은 이쪽 녀석들일 텐데, 이곳에 올 놈들이 더 있었던가?
짧은 의문은 곧 풀렸다.
“지도를 보면 이 근처인 게 분명한데… 대체 어디지?”
“대장! 어디 계십니까!”
“대자아아앙!!”
“아.”
모를 수 없는 외침에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탄성을 뱉었다.
미친… 아니, 로프티 기사단. 데온 하르트가 꽁꽁 싸매고 있는 놈들이 이 위험한 곳까진 어떻게 온 건지. 설마 탈주라도 한 것일까.
‘……저놈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내심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놈들도 이쪽을 발견한 듯 재차 시끄러운 음성이 이어졌다.
“군단장들이다!”
“전부 모여 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대장이 여기에 있어서 그런 거 아냐? 우리가 제대로 찾아온 모양인데.”
그렇지 않아도 시끌시끌한 목소리가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더욱더 커지고 또렷해진다. 이윽고 서로의 얼굴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가 되자 가장 선두에서 달리고 있던 밀란이 눈을 희번득 뜨고 외쳤다.
“대장은! 대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으, 응? 아마 저쪽 방향에…….”
“감사합니다!”
“아니, 잠깐…!”
두두두두! 삽시간에 마족들 사이를 지나친 무리가 망설임 없이 한 방향으로 달려간다.
기세 좋은 질문에 반사적으로 답한 트로버가 아차 싶은 듯 뒤늦게 그들을 불렀지만… 이제 와서 멈출 리가 있나. 전혀 줄지 않은 속도에 허망한 표정을 짓는 그를 제치고, 한발 늦게 정신 차린 이델리아와 드벨라니아가 동시에 외쳤다.
“넋 놓고 뭐해? 저 녀석들 죽여!”
“멍청하게 뭐해? 저놈들부터 죽이지 않고.”
“……5군단!”
그다음으로 정신을 차린 이는 5군단장 데르니반이었다.
9군단장이 누구의 편이건 데온 하르트는 그를 죽이는 것을 허락했다. 즉, 이 뒤는 제 역량이므로.
지금은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우선이다. 재빨리 혼란을 수습한 그가 5군단을 향해 외쳤다.
“로프티 기사단을 엄호해라!”
이 발언은 즉 5군단이 데온 하르트의 편이라는 의미.
데르니반이 나와 같은 편이라고? 망했군. 트로버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북북 헤집었다.
“젠장, 9군단! 저 앞뒤 구분 없이 달려 나가는 미친 망아지들을 지켜!”
“11군단, 알지? 로프티 기사단을 지켜! 0군단도 죽지 않게 하고!”
“1군단, 로프티 기사단을 지키도록.”
단번에 누가 누구의 편인지 드러났다.
데온 하르트가 가장 아끼는 이들의 등장으로 기묘한 대치 상태는 깨졌다. 마왕 측 진영과 제3세력이 그들을 죽이기 위해 움직이고, 데온 측 진영이 이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
덕분에 적군과 아군의 구분이 쉬워졌다.
‘1, 5, 9, 11군단이 데온 하르트의 편이다.’
마왕의 편은 3, 4, 6, 7군단이었으니 제3세력은 이델리아가 말했던 대로 2, 8, 10, 12군단이 되겠지.
앞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완벽하게 적과 아군을 파악한 이들이 망설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지든 신경 쓰지 않고 앞만 보고 나아가던 로프티 기사단원들은…….
“더 이상은 못 간다.”
“비켜!”
0군단원들과 대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