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329
329. 오늘이 지나기 전에(1)
이것으로 앞으로의 일은 대충 정리가 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밖에서 무기를 들고 황궁을 향해 진격해 오는 인간들이야, 혼란과 흥분에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마족들은 내분으로 떠난 지 오래다. 그러니 다른 것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반란만 잠재우면 될 터.
방법은 엘피디우스 데세르트가 독배를 마시기 전에 남긴 발언에 담겨 있긴 하다만…….
“한데….”
린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하실 겁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대화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자신들의 대화는 그 방법을 행하는 것을 기본으로 두고 이루어졌다. 이제 와서 정말 할 거냐니. 아르달이 지금까지 뭘 들은 것이냐는 듯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 질문이 잘못되었군요. 다시 여쭙겠습니다. 하실 수… 있겠습니까?”
“…….”
멈칫.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겠다.
아르달은 엘피디우스 데세르트를 황태자 시절부터 봐 왔다. 그가 황제가 되고 제멋대로 굴면서 이를 제지하려던 저와 다소 사이가 틀어졌다지만 그간의 정이 어디 갈 리 없었다.
죽음을 직접 지켜본 것만으로도 씁쓸한 상황인데, 아무리 본인이 허락했다 한들 그의 머리를 잘라 이용하는 것이 말처럼 쉬울 리가 있나.
“……해야죠.”
하지만 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할 겁니다.”
“…….”
“이 방법이 아니면 상당히 멀리 돌아가야 하잖습니까. 본인이 허락한 일이기도 하고요.”
죄인이어도 어지간한 중죄가 아닌 이상 고인의 시신을 이리 모독하지 않겠지만……. 아르달은 본인이 허락했다는 핑계를 방패로 내세워 눈을 질끈 감고 추악한 저를 외면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린델이 혹시 몰라 주워 온 검을 들었다.
“……그럼 하겠습니다.”
“아니요.”
“?”
“제가 하겠습니다.”
“예…?”
검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배운 적 있다. 마지막 확언까지 제가 다 해 놓고 깨끗한 척 뒤로 빠져 있을 수는 없지.
반문이 있었으나 아르달은 대답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손에서 검을 낚아챘다.
엘피디우스의 시신 앞에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
반란은 목표물인 황제가 죽었다는 것이 알려지자 금방 사그라들었다. 목표물을 빼앗겨 멍해진 것도 잠시, 감정을 가라앉힌 사람들은 황제의 목을 벤 이에게 주목하기 시작했으니.
“재상…?”
후제국 아르달의 시작이었다.
***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단의 이름에 감정이 흔들렸으나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데온 하르트의 동요를 눈치챈 적대 군단장들이 기회라는 듯 눈을 빛냈다. 특히 작정하고 마력을 소모해 강력한 마법을 쏘아 보냈던 12군단장 마이어스는 실패에 아쉬워하던 마음을 접고 가라앉은 눈을 굴렸다.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낮게 달싹였다.
“……창을.”
눈치 빠른 부하가 투창용 창을 건넨다. 그는 그것을 들고 한껏 팔을 젖혔다…가 급히 마력을 두른 채 휘둘러 날아온 마법을 쳐 냈다.
“내가 순순히 두고 볼 줄 알았어요?”
한 번은 놓쳤다지만 두 번째 공격까지 그럴 순 없다. 11군단장, 리리넬이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데온 님을 공격하려면 저부터 죽여야 할 거예요.”
“…….”
마이어스가 창을 꾹 쥐고, 방금의 공격이 신호라도 된 듯 각 군단이 다시 뒤엉킨다. 현실로 돌아온 데온은 힐긋 리리넬을 눈에 담았다.
……닿은 공격은 없지만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적이 득실거리는 이곳에서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제 편의 군단장들을 둘러보며 못 박듯 말했다.
“그럼 부탁하지.”
가야 할 곳이 있으니 이곳의 정리를 맡긴다는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하필 가야 할 방향에 난투극이 펼쳐져 있어 전장 한복판에 발을 들인 셈이 되었으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달려나가 활약하기 시작한 제 편의 군단장들 덕분에 크게 귀찮은 일은 없었다.
“죽어!”
“어딜.”
종말의 축소판이 펼쳐졌다.
데온 하르트가 나아갈 때마다 군단장들이 공격하고, 군단장들이 막는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데온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태연히 전장을 가로질렀다.
6군단의 도끼가 8군단의 방패를 뚫지 못한 채 도리어 짓눌려 죽어 나간다. 저를 향해 달려드는 12군단장 마이어스를 상대하려던 리리넬은 2군단장 드벨라니아의 기습에 급히 방어막을 둘렀다.
카가각!
투명한 실이 보이지 않는 벽을 할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치사하게 2 대 1인가요?”
“미안하지만 네 마법은 상당히 귀찮아서 말이야. 너부터 최대한 빨리 죽여야 뒤가 편할 것 같단 말이지.”
“그렇게 두지 않겠습니다.”
적이 유리하게 싸우는 건 두고 보지 않는다. 11군단장 리리넬은 일단 아군이므로.
5군단장 데르니반이 그들의 대치에 난입해 마이어스를 공격했다. 날붙이 못지않은 손톱으로 창대를 후려치고 곧장 몸을 뒤로 날린 그가 언제 꺼내 든 건지 모를 활과 화살을 들고 시위를 당긴다. 화살비가 쏟아졌다.
“……쯧, 어쩔 수 없나.”
역시 금방 이렇게 되어 버리네.
머리를 팍팍 헤집은 드벨라니아가 손가락 사이에 실을 걸어 늘어뜨리며 힐긋 마이어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마이어스, 그쪽은 맡길게.”
“……얼마든지.”
한편.
데온 하르트에게 싸우자며 달려들다가 1군단장 제이카르에 의해 저 멀리 나뒹군 7군단장 실루아는 벌떡 일어나 화를 내며 달려들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도 그렇고, 당신 진짜 짜증 납니다!”
“…….”
먼저 공격해 놓고 무시하며 이곳까지 온 것도, 데온 님의 ‘그’ 전투술을 다시 보고자 하는 저를 막는 것도 짜증 난다.
언젠가 우연히 보았던, 하얀 달빛 아래 피를 흩뿌리며 적을 난도질하던 오싹한 모습을 떠올린 실루아가 입맛을 다시다가 담담한 제이카르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좋은 말로 할 때 비키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에 한눈에 반해 버렸건만, 경계선을 지키기 위해 나가 있던 탓에 다시 볼 기회가 몇 번 없어 늘 아쉬워하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기회가 온 지금, 마침 주변에 널브러진 영웅들의 시신 중 일부에서 익숙한 전투 스타일의 흔적이 발견되어 한껏 기대된 상황인데 초를 쳐 버리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가 있나.
결국 삐죽한 세로 동공에 살기가 서렸다.
“……어쩔 수 없나.”
최대한 빨리 죽이는 수밖에.
“제이카르와 싸우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 평소라면 즐겼겠지만… 지금은 더 먹음직스러운 게 눈에 보여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죽어.
눈동자가 열렸다. 날카롭게 치켜뜬 눈을 정면으로 마주한 제이카르의 몸이 순간 굳었다.
이건 감정의 영역이 아니었다.
‘……고유 능력인가.’
실루아가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으나 그새 굳은 몸을 푼 그는 조금 늦게나마 몸을 움직여 맞대응했다.
검으로 막기에는 너무 늦어 급한 대로 근처의 시신을 밀어내듯 박차며 뒤로 물러섰다. 앞으로 밀려난 시신이 상대의 발을 걸어 단검의 경로가 흐트러지고.
촤악!
물러섰음에도 늦은 듯, 얼굴 위로 단검이 지나갔다. 뺨부터 시작해 정확하게 눈을 가로질러 이마까지. 붉은 실선이 흔적처럼 남는가 싶더니 이어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름의 한 수였는데, 이것도 안 통하네…. 역시 괜히 1군단장이 아닌 모양입니다.”
“…….”
상대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차든 말든 제이카르는 다친 쪽 눈을 감은 채 검을 쥐지 않은 손을 들어 피를 훔쳤다. 손이 붉은 액체로 흥건했다.
……7군단장과 제대로 검을 맞대본 적이 없어서 방심했다. 특히 그녀의 고유 능력은 오늘 처음 마주한 것이어서.
‘이젠 알겠군.’
눈 하나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눈이 다친 건지, 피 때문인지, 슬며시 뜬 눈에 뿌연 붉은색만 잔뜩 비친다. 흐트러진 거리 감각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제이카르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미안하지만 빨리 끝내고 싶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여서.”
등 뒤에 다수와 다수가 맞붙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대다수의 군단장들이 제 군단원들에게 이쪽부터 처리하라고 명령한 탓일 터.
0군단을 뚫고 지나가며 데온 하르트에게 적대적인 군단원들의 수가 상당히 줄어든 데다 1군단이 정예라지만 저렇게 몰려서 공격해 오는 이상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
“상황을 보아하니 너희는 내가 맡아야 할 것 같은데?”
……9군단장 트로버가 그들의 전투에 난입했다. 고작 한 명이라지만 괜히 군단장이 아니라는 듯 수세에 몰려 있던 전황을 뒤엎는 것이 시야 가장자리에 얼핏 비쳤다.
덕분에 신경 쓸 것이 줄었다. 가볍게 호흡을 정돈한 제이카르가 다시 본 전투에 집중하려던 찰나.
쿠웅!
“무슨 소리. 내가 있을 텐데.”
“넌 저기 가서 8군단 애들에게 처맞고 있는 네 군단원들이나 구하지 그래? 거의 다 죽게 생겼더만.”
“나약해서 죽는 놈들을 내가 구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건 맞는 말이지만!”
6군단장 벨리탄이 그의 상대로 나서 맞붙기 시작했다.
……역시 최대한 빨리 끝내고 다른 녀석들도 정리하는 편이 좋겠군.
“어서 끝내도록 하지.”
제이카르는 턱 끝에 맺혀 뚝뚝 떨어지는 피를 무시한 채 검을 들었다.
반면에 3, 4군단원들에게 1군단부터 처리하고 여유가 되면 1군단장까지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4군단장 이델리아는 부채를 살랑이며 10군단의 앞을 막아섰다.
“너흰 나와 싸우자.”
아니, ‘싸운다’라기 보다는 ‘정리한다’라고 해야 할까?
굳은 표정을 한 그들 너머로 1군단에게 보내 둔 3, 4군단원들과 다른 군단이 9군단장의 등장에 거의 다 차지한 고지에서 밀려나는 것이 보인다. 다행히 그건 얼마 지나지 않아 난입한 6군단장 덕분에 제지되었지만…….
팽팽하게 맞붙는 두 군단장과, 빨리 끝내고 지원할 생각인지 눈에 띄게 달라진 기세로 검을 휘두르는 1군단장을 본 그녀는 짧은 침묵 후 떨떠름하게 덧붙였다.
“……가능하면 빨리 끝내는 게 좋겠네.”
***
데온 하르트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차가운 겨울비를 맞은 탓에 젖은 몸이 얼어도, 중간에 0군단원들의 시신을 보았을 때도 그의 걸음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죽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핏물이 조금씩 차오른다. 익숙한 이가 부상을 입어도, 한때 저를 따랐던 익숙한 이들끼리 갈라져 대치할 때도 그러했다.
배꼽 위, 가슴 아래 갈비뼈에서부터 때로는 좁쌀, 때로는 손가락 한두 마디씩 차올라 끝내는 가슴까지. 부러 앞만 보고 걸었음에도 들려오는 수많은 이들이 죽어 가는 소리는 어찌할 수 없어서, 데온은 점점 차오르는 핏물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멀어지는 그를 쫓으려던 움직임은 금세 다른 이에게 봉쇄되었기에 서두르지 않았음에도 전장을 벗어나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러다 하늘에서 내린 눈송이가 눈가에 닿았을 때, 데온은 비로소 멈춰 서서 고개를 들었다.
“아…….”
익숙한 장소를 배경으로 끔찍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곳은 형이 죽고 내가 기억을 합친 계기가 된 그 경계선이다. 어느 성과도 거리가 먼, 전장에서조차 한참 벗어난 위치이므로 눈꽃스틱의 영향이 닿지 않았다는 뜻이니 이 눈은 필시 자연적인 종류겠지.
이 전쟁을 시작하고 얼마나 지났더라. 본격적인 2차전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전에 미리 군단을 하나씩 보내 눈꽃스틱을 사용하게 한 것까지 계산하면 생각보다는 오래되었으리라.
영웅들과는 또 며칠이나 전투를 벌인 건지. 전투를 치르며 해가 몇 번을 뜨고 졌는지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하던 데온이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오늘이….”
새하얗게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동요를 품고 위태롭게 흔들렸다.
“……형의 기일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