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332
332. 오늘이 지나기 전에(4)
이 세상에 남은 내 우호적인 연은 전부 떠나려는 모양이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사람을 찌르는 감각이 아직까지도 손끝에 남아 정신을 괴롭힌다. 데온은 저를 중심으로 세상을 뒤덮은 피의 바다가 얼마나 위험하게 출렁이든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조용히 눈물만 뚝뚝 떨궜다. 스티그마의 호흡을 확인하듯 숙인 고개가 그의 가슴팍에 물 자국을 남겼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에게 내가 우선이었다면….”
“…….”
“그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요.”
……그럴 리가. 레멤베르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결론은 금방 나왔다.
내가 걸어온 길 위에 나를 최우선으로 여겼기에 죽은 이들의 시신이 흔적처럼 늘어져 있거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가정이란 말인가.
나를 최우선으로 여겼기에 죽었고,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죽었다. 어느 쪽이든 결국 죽었으니.
‘그들은 그저 나와 엮였기 때문에 죽은 거야.’
스티그마 프리미로가 명예보다 저를 우선시했더라도 그는 결국 죽었으리라. 아마 저를 도우려다 죽었겠지.
데온 하르트. 이 저주받은 인간 같으니라고.
절망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전쟁터에 처음 끌려 나갔을 때 그냥 죽었어야 했는데.’
뭘 그렇게 살겠다고 아등바등해서는 기어이 살아 돌아와 여러 사람을 괴롭히는 건지. 주변 사람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끝이 다가온 탓에 느슨해진 정신이 예상치 못한 타격을 받고 혼탁해졌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표정은 놀라우리만치 차분했다.
“…….”
레멤베르는 부서질 듯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덩달아 이와 대조될 정도로 지독하게 차분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본인의 눈물을 확인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자신이 아직까지도 울고 있다는 것조차 잊은 듯 생각에 잠겨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눈물만 떨어뜨리는 애처로운 모습에 씁쓸한 감정이 치솟았다.
씁쓸함은 스티그마 프리미로의 시신을 보자 더욱 커졌다.
‘알고 있었고, 각오도 했다만…….’
막상 이렇게 마주하게 되니 생각보다 더 마음이 편치 않다.
하지만 눈앞의 위태로운 상대를 두고 자신마저 좋지 않은 감정에 휘말릴 수는 없는 노릇. 레멤베르는 어른으로서 스스로를 나락의 구덩이에 밀어 넣고 있을 게 뻔한 아이의 생각을 돌리기 위해 조용히 입을 뗐다.
“아직 할 일이 남지 않으셨습니까. 여기서 지체할 시간은 없을 텐데요.”
“……그건, 그렇죠.”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그제야 제 상태를 자각한 데온 하르트가 조용히 목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흘긋 레멤베르를 향한 시선이 뭐 더 할 말이 있느냐는 물음과 재촉을 담았다. 스티그마를 상대할 때에 비해 약간의 여유가 깃든 눈빛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멤베르의 목적은 데온 하르트와 싸우거나 그의 손에 죽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종류가 아니다. 오히려 살아야 하기에 쓸데없는 충돌은 일어나지 않을 터.
“……역사서는 조만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역시나, 레멤베르는 싸움과는 전혀 관계없는 말을 꺼냈다.
다소 누그러진 분위기를 배경으로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말씀하신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생각보다 금방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부디, ‘직접’ 받으셨으면 좋겠군요.”
무엇을 바라고 그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지만…… 확신할 수 없는 일에 함부로 확답을 줘서는 안 된다. 데온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답을 재촉하는 말은 없었다. 대신 익숙한 산을 향하는 그의 등 뒤로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한 음성이 따라붙었다.
“가실 길은 깨끗하게 정리해 놓았으니 목적지까지 가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멈칫.
어조는 별거 아니지만,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다. 데온이 그를 돌아보았다. 의문과 의심을 품은 붉은 눈동자가 은청색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미심쩍은 감정이 선명히 묻어나는 질문이 이어졌다.
“……마왕성까지?”
“마왕성까지.”
“……역시 예전에 마계에 갈 때 챙겨 줬던 물건들, 다 알고 챙겨 줬던 거군요.”
각종 쿠키와 회중시계, 흰 장갑, 그리고 인간계의 씨앗까지.
하긴,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씨앗은 너무 대놓고 수상하긴 했다. 내 마계 인맥 중에 정원사가 있다는 걸 알지 않고서야, 짐가방에 들어갈 일 없는 종류니까.
당시에 물어봤을 땐 발뺌해 놓고선. 뚱한 시선에 레멤베르가 빙긋 웃었다.
“에스페라네스에서 고위 귀족가의 핏줄이라는 건 상당히 유능한 자들과 연을 틀 수 있는 열쇠가 되곤 하지요.”
마왕성과 교류하는 마계의 큰 도시는 물론이고, 마왕성에 잠입시키는 것도 어렵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당시에는 여러모로 요주의 인물인 데온 하르트에게 이런 식으로 정체와 관련된 티를 냈다는 것이 들키면 곤란해지는 탓에 모른 척 발뺌해야 했다만…. 레멤베르는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포기한 쪽은 데온이었다.
“……일단 배려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별말씀을요.”
다시 볼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노인은 다시 돌아서는 청년을 향해 쓸쓸히 가망 없는 인사말을 뱉었다.
***
“이… 왜 하필 인간계에서 싸우는 거야?!”
도끼에 허리가 깊게 베이고 목에 생채기가 난 9군단장 트로버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좀 마계에서 시원하게 싸우면 안 되냐?!”
인간계의 제약에 억눌려서 시원스러운 전투를 펼치지도 못하고, 이게 뭐 하자는 짓인지 모르겠다.
그런 그를 향해 6군단장 벨리탄이 재차 도끼를 휘두르며 태연히 답했다.
“휴전하고 마계까지 가는 내내 전투가 벌어지지 않으리란 장담도 없잖냐. 게다가 마계에서 싸운다면 마계가 쑥대밭이 될걸.”
마계에는 제약이 없으니까.
피해의 규모도 줄일 겸, 망치더라도 타지인 인간계를 망치는 편이 낫지 않겠나. 인간계도 곧 우리 영역이 된다지만 지금처럼 제약 때문에 크게 망치지도 못할 테고.
“무엇보다.”
벨리탄은 도끼 끝으로 2군단장과 한창 싸우고 있는 11군단장 리리넬을 가리켰다.
“저 마력 괴물이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환경이라 차라리 인간계가 더 낫단 말이지.”
“그래서 더 문제라고!”
벨리탄이야 적이니 이득이겠지만, 제게 있어 11군단장은 아군이다. 그녀가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손해인 것이 당연할 터.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지혈하듯 꾹 누른 채 도끼를 피해 움직이며 트로버는 답답함에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빌어먹을 인간계!!”
빌어먹을 인간계… 인간계… 인간…….
시끄러운 전장을 뚫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린다.
목청 한번 좋기도 하지. 흘긋 목소리가 들려온 곳의 상황을 살핀 4군단장 이델리아는 거의 다 정리된 10군단을 마무리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리리넬… 마력이 상당히 부족해진 것 같던데.’
전투를 치르며 마법도 많이 사용하고, 로프티 기사단까지 먼 곳으로 이동시킨 걸 생각하면 부족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총 여섯 개의 눈이 데굴데굴 굴러가며 도망치는 10군단원들을 찾아낸다. 부채가 휘둘러질 때마다 암기가 튀어 나가 그들의 급소를 꿰뚫었다.
개중 한 개의 눈이 리리넬을 살폈다.
‘……맞네. 내가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어.’
이델리아가 가진 여섯 개의 눈은 동시에 여러 정보를 다루는 것에 유용하다. 그렇기에 그녀는 본인의 전투를 치르면서도 전체적인 전황을 훑을 수 있었다.
가장 귀찮은 적이 힘을 잃었다는 것을 파악하자,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이는 5군단장과 한창 전투를 치르고 있는 12군단장이었다.
‘마이어스는 마력이 거의 바닥난 것 같고.’
저 정도면 간신히 9군단장 수준을 면한 정도인데.
원래도 넉넉하지 않던 마력이건만, 로프티 기사단을 공격할 때 죄다 쏟아부은 듯 미미한 마력량이 느껴진다. 이 정도면 변변찮은 마법 하나 쓰지 못…… 오.
‘끝났네.’
5군단장의 손에 12군단장의 심장이 꿰뚫렸다. 이델리아는 완전히 정리된 10군단을 뒤로하고 1군단을 공격하는 군단원들의 지원을 위해 걸어가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돌아가겠어.”
거의 모든 군단이 1군단을 최우선적으로 집중 공격한 덕분에 그 수가 많이 줄었다. 손만 조금 보태면 정리하는 건 순식간일 터.
내딛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한편, 5군단장 데르니반은 적의 심장에 찔러 넣었던 손을 뺀 뒤 제 어깨를 꿰뚫은 창대를 잡았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창이 뽑혀 나갔다.
고통이 상당했으나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것에만 신경 쓰기엔 다른 부상도 많았으니까. 당장 가슴팍만 해도 길게 베여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데 이깟 어깨에 난 구멍이 뭐가 그리 대수란 말인가.
군단장들답게 그들의 전투는 제법 치열했다.
데르니반은 근거리에 유리한 육체를 가진 동시에 원거리 무기를 주력으로 사용하는 군단장이다. 즉, 근거리든 원거리든 어느 전투에도 수준급 이상으로 싸울 수 있다는 뜻이니, 적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까다로울 수가 없었다.
날렵하게 뒤로 빠져 활시위를 당기다가도 어느 순간 파고들어 날카롭게 세운 손톱을 휘둘렀다. 그럴 때면 마이어스도 지지 않고 창대로 바닥에 널브러진 돌멩이나 무기를 튕겨 날리며 맞상대하다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창을 고쳐 잡고 상대를 공격했다.
서로를 죽이는 것이 목적인 만큼, 창대로 바닥을 긁어 올려 눈에 흙을 뿌리거나 주변 적대 군단원을 방패로 사용하는 등, 온갖 술수가 오갔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일 없이 팽팽하게 이어지는 시간이 길었던 것에 비해, 전투가 결판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묘하게 손에 상처가 많이 생긴다 했더니, 의도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대응할 리가 없지. 일은 마이어스가 상대의 어깨에 창을 찔러 넣었을 때 벌어졌다.
푹.
[……아.]기껏 큰 상처를 내었건만, 창이 빠지지 않는다. 손에서 나오는 피 탓에 자꾸만 미끄러지는 창대를 파악한 마이어스는 재빠른 판단하에 창을 버리고 물러서길 택했다.
분명 이 모든 판단을 내리고 움직이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건만,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덥석.
창대를 타고 올라간 손이 팔목을 잡았다. 날카롭게 선 손톱이 살에 파고들어 쉬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고, 곧바로 다른 손이 심장을 꿰뚫었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콜록.]피가 역류했다.
저를 꿰뚫은 팔을 보고 있으려니 영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어쩌면 고통보다 허탈한 감정이 앞섰기 때문에 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이러니까 다하르가 화를 낼 만도 하지…….]부관의 복수 하나 제대로 해 주지 못하는 못난 상관이니 화를 내는 것이 당연했으리라.
뜻 모를 중얼거림에 데르니반이 시선을 들었다. 죽어 가고 있음에도 담담한 눈빛과 죽이고 있음에도 흔들림 없는 시선이 마주쳤다.
데르니반이 입을 열었다.
[원래는 존대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까?] [……부관이 한 말이 있어서.]아주 오랫동안 잔소리처럼 해 온 말이 있었다.
마이어스 님은 다른 군단장들에 비해 꿀릴 것 없으니 자신감 부족으로 인한 존댓말은 사용하지 말라고 했었지. 존대를 사용하는 군단장들도 있지 않냐며 짚었다가 그분들은 쫄려서 존대를 쓰는 게 아니지 않냐며 타박을 들었었다.
[네가 어째서 데온 하르트를 따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후회하게 되겠지.] […….] [아니지.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저주입니까?] [아니. 이건 확신이다.]데온 하르트도, 마왕도 믿을 게 못 되는 자니까.
[그렇다면 틀리셨습니다.] [……?]의문을 담고 가늘어진 눈이 이내 데르니반의 눈빛에서 무언가 읽은 듯 크게 확장된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음성이 나왔다.
[너, 설마…….]알면서도….
데르니반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빼냈다. 뽑혀 나간 자리를 따라 피가 솟구치고, 힘을 잃은 육신이 스르륵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