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336
336. 오늘이 지나기 전에(8)
완벽하네. 딱 데온 하르트가 좋아할 만한 엔딩이야.
어쩜 이렇게 그 인간의 뜻대로 딱딱 맞춰 돌아가는지. 삐딱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휑한 어깨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히 울리고 있는 상황인데, 그런 건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는 듯 우뚝 서서 한 손에 검을 들고 있는 그림자가 시야 한쪽에 비친다.
트로버는 들으라는 듯 피식 웃음을 토해 냈다.
“이 부분은 좀 유감이군. 그 인간의 바람대로 돌아가는 건 싫은데.”
“…….”
“뭐… 어차피 패자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내가 뭐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겠지만.”
“…….”
“그럼 이제 죽여.”
더 할 말은 없다. 기본적으로 생에 대한 열망이 있는 만큼 미련은 어쩔 수 없이 남지만, 상황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기에 굳이 입을 나불대지는 않았다.
상대는 이미 마음을 먹었고, 제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입 아프게 떠들어 봤자 달라질 것도 없는 상황.
그는 그저 말했다.
“시간은 끌만큼 끌었잖아.”
“……그래.”
제이카르는 검을 휘둘렀다.
…….
끝났다.
숨이 끊어진 시신을 앞에 두고, 제이카르는 잠시 비틀거리다가 검을 땅에 꽂은 뒤 이를 지팡이 삼아 기대듯 주저앉았다. 긴장 풀린 몸이 균형을 잡는 것에 어려움을 표하고 있었다.
정적이 내려앉은 것도 잠시.
“……그럼 이번엔….”
천천히 입술을 달싹여 침묵을 몰아냈다.
제이카르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동요 한 점 없는 눈빛이 입보다 더 빨리 끝을 고했다.
“내가 죽을 차례로군.”
트로버에게도 말했듯이 살아갈 생각은 없다.
제이카르는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뭘 하려 하든 부상의 정도가 심해 방해만 될 터. 그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던 미련을 깔끔하게 털어 냈다.
“살아서 마계의 밑바닥을 길 바에는 죽는 게 낫지.”
마계는 힘의 논리로 돌아간다. 그런 곳에서 장애는 치명적일 테고, 드높던 1군단장의 추락은 모든 마족들에게 있어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겠지. 같은 상황인 다른 마족이 있다 해도 특히 더 짓밟히리라.
죽을지언정 그런 꼴을 겪을 생각은 없으므로.
“그러니 리리넬, 걱정 말고 긴장 풀도록.”
목과 머리가 따로 놀고 있는 11군단장의 시신을 향해 말했다.
“난 확실히 죽을 생각이니까.”
데르니반과 마찬가지로 제이카르 역시 데온 하르트가 저를 포함한 ‘모든’ 군단장들의 죽음을 바란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후회도 없었다.
협조의 이유를 묻는 데온 하르트를 향해 저와 한배에서 태어나 종족의 우두머리가 된 제 쌍둥이를 들먹였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겸사겸사일 뿐, 싸우다 죽기만 하면 만족한다는 생각으로 마왕성에 들어온 그로서는 무슨 이유를 대었든 결국 제 욕심껏 살다 가는 것이기에. 힘겹게 한쪽 무릎을 세워 중심을 잡고, 검을 뽑았다.
“그럼 난 먼저 가도록 하지.”
제이카르는 미련 없이 검 끝을 돌려 스스로에게 겨눴고.
고요한 공간에 또 하나의 섬뜩한 소리가 덧칠되었다.
“…….”
다시금 찾아온 지독한 정적 속에서, 리리넬의 시신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공간이 미미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난전 속이었다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아주 작은 일렁임. 그러나 그 범위는 전장을 전부 덮고도 남을 정도로 넓다. 같은 마족이 보았더라면 말도 안 되는 마법이라며 입을 쩍 벌렸을 정도였다.
한순간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짧은 일렁임이 끝나고, 몸과 머리가 분리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멀쩡한 모습을 한 리리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망이 된 옷을 태연히 툭툭 털며 중얼거리듯 말한다.
“……역시 1군단장이라고 해야 할까.”
환각 마법을 눈치채다니, 대단하네요.
다른 이들의 생각과 달리 리리넬은 살았다. 이를 눈치챈 이들이라면 2군단장 드벨라니아와 1군단장 제이카르 정도일까.
드벨라니아의 마지막 공격이 위협적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지. 평소처럼 생각하고 움직였다면 필시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데온 님의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전까진 죽을 수 없었기에 리리넬은 그 짧은 순간 과감한 판단을 내리고 움직였다.
드벨라니아가 실을 당겨 머리를 자를 때 상기된 임무가 너는 가장 마지막에 서 있는 군단장이 되어야 한다며 생을 강요했으니까. 그렇기에 당시에 생각했더랬다.
‘드벨라니아와 싸우다가 죽을 수는 없어.’
하지만 내가 살아 있다면 그녀는 어느 한쪽의 숨이 끊길 때까지 계속 공격을 가해 오겠지.
그래서 대규모 환각 마법을 걸었다.
일일이 이 많은 이들에게 환각 마법을 걸 수는 없고, 범위형으로. 전장이라는 공간 전체를 하나의 환각을 위한 무대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고는 제가 있는 자리에 환각 리리넬을 만들고 저는 잠시 마법으로 자리를 벗어난 뒤, 공격이 끝나자마자 돌아와 그 환각을 덧입었다. 그 과정에서 모든 마력을 털어 넣은 탓에 육체를 이루는 기본적인 마력만이 남은 것도 환각의 현실성을 높여 주었다.
……드벨라니아는 속지 않았지만.
[……마법을 못 쓰는 11군단장은 인간계의 어린애나 다름없는 존재지.] [그러니까 11군단장은 죽었어.]눈 감아 준 것은 의외였다.
그녀의 말대로 마법을 쓰지 못하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겠지. 11군단장 리리넬은 신체를 이용한 전투가 아닌 마법을 사용하여 싸워 왔으니까.
“……그래도 부상을 입어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의 군단장을 상대로 한다면 기습 정도는 성공할 수 있을 텐데.”
작은 무기를 쥐고 찌르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굳이 무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촉수로 공격할 수도 있고.
입을 비죽인 것도 잠시, 드벨라니아가 이를 몰랐을 리 없기에 그저 한때 친분이 있었던 작은 군단장을 향한 마지막 배려라는 것을 깨달은 리리넬은 흐린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확실히 다 끝났네.’
남은 마족이라고는 자신뿐.
드디어 데온 님의 뜻대로 되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곧 그리되겠지.
이 사실을 데온 님께 전하는 게 좋겠다. 이걸로 그분이 확신을 얻고 마음 편히 움직일 수 있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터.
“통신석이…….”
품을 뒤지던 리리넬이 멈칫했다.
난리 통에 다 잃어버렸구나. 전장 한복판에 떨어져 이리 짓밟히고 저리 짓밟혔을 테니 진즉에 가루가 다 되었겠지. 도르륵 눈을 굴렸다.
‘다른 군단장들은….’
……품을 뒤질 필요도 없어 보인다. 당장 몸 여기저기를 찔리고 베여 옷부터가 누더기인데 대체 어디에 통신석을 보관한단 말인가. 심지어 군단장들끼리 주먹도 주고받았으니 품에 남아 있었더라도 다 박살 났을 것이다.
‘마력이 남아 있었다면 마법으로라도 연락을 취했겠지만… 내게 남은 마력은 없어.’
……아니, 아니지. 딱 적당한 것이 있다.
어차피 저 역시 죽어야 하기에 쓸 수 있는 마력.
리리넬은 망설임 없이 제 육신을 이루는 마력을 이용해 데온 하르트의 머릿속으로 일방적인 연락을 취했다.
“데온 님, 저를 제외한 모든 군단장이 죽었어요.”
보통 마족들은 제 죽음이 확실해져도 쉽게 육신을 이루는 마력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건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 이상의 원초적인 공포를 주니까.
마치 저의 모든 것을, 영혼을, 존재 자체를 거는 듯한 공포.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데온 하르트를 불안한 상태로 둘 수 없다는 생각이 우선이기에, 리리넬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저 역시 곧 죽을 거예요. 지금 이 연락은 제 육신을 이루는 마력을 사용한 마법이거든요.”
모두 데온 님의 뜻대로 되었어요.
“그러니까.”
서서히 몸이 부서져 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리리넬은 개의치 않고 보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결코 닿지 못할 환한 웃음을 지었다.
더없이 순수한 음성이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잔인할 말을 자아냈다.
“행복해지세요.”
***
그리고.
“…….”
데온 하르트는 그 지독한 저주를 들었다.
더 차오를 것도 없어 보이던 핏물이 일렁이며 수위를 높인다. 쇄골까지 집어삼킨 액체가 가슴을 답답하게 압박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겨 언젠가 도망치듯 들어갔던 산길을 천천히 밟았다. 눈이 흩날리는 배경이 실로 끔찍했다.
핏물을 헤치며 경계선을 넘어 마계로 들어가고, 깨끗하게 정리되어 걸릴 것 없는 길을 걷는다. 마지막 남은 목표를 향해 쉼 없이 걸으며 그는 생각했다.
‘인간계는 무너졌고, 군단장은 죽었지.’
이로써 인간계가 약해진 틈을 타 마계가 이를 집어삼킬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졌다. 중심이 될 군단장이 사라졌으니까.
‘꼭 다 죽여야 했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어디 인간계의 역사에 타의로 반정의 주연이 된 이가 없던가. 본인이 원치 않았음에도 타의에 의해 왕좌에 앉은 이들이 존재하거늘.
중심이라는 것은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되곤 한다. 군단장이라면 마왕이 죽더라도 새 중심의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되겠지. 군단장을 중심으로 마족들이 몰릴 테고, 필시 먹기 좋은 상태가 된 인간계를 향해 손을 뻗으리라.
‘마족들 좋은 꼴은 절대 못 보지.’
언젠가 생각했듯이, 데온 하르트는 원수로부터 탄생한 녀석들이 이득을 얻는 꼴은 절대 못 본다.
인간계를 무너뜨린 것은 세계를 엿 먹이기 위한 것이지, 마족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떨어진 인간계의 전력만큼 마족들의 전력 역시 떨어뜨릴 필요가 있었다.
‘물론 다른 마족 놈이 중심이 되어 뭉칠 수도 있지만 그래 봤자일 테고.’
호랑이도 없고 늑대도 없다. 그런 곳에서 여우가 왕 노릇을 한다 한들 그래 봤자 여우일 터.
어중이떠중이를 중심으로 뭉친 것 정도는 굳이 이쪽이 손써 주지 않아도 인간계에서 알아서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이 정도로 조치를 해 줬으면 그 정도는 알아서 버텨야 할 것 아닌가. 인간계를 공격한 같은 인간으로서 마지막 양심은 다 했다고 생각하기에 데온은 거기서 생각을 끊고 걸음만 재촉했다.
마물 하나 없이 깔끔한 길을 걷고 걸은 끝에, 마왕성이 보였다.
***
언젠가, 마왕은 생각했다.
용사는 마왕을 죽이기 위해 탄생하고.
마왕은 용사를 죽이기 위해 탄생한다.
그렇다면, 용사와 마왕이 한 편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
‘……그럴 리가 없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세계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 있나. 마왕은 피식 웃었다.
세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데온 하르트가 마왕에게 검을 겨눌 것을.
그리고 세계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용사와 마왕의 굴레를 끊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마왕은 데온 하르트가 용사가 된 순간 확신했다.
‘언젠간 그가 날 죽이려 들겠구나.’
그리하여 지금, 마왕은 기다렸다.
마족 병사들에게 얼마 남지도 않은 마력을 추가로 불어넣어 이쪽에 붙어 살아남은 인간계의 왕국을 정리하라고 보내면서, 날카롭게 칼을 간 용사가 제 목을 치러 오기만을.
“……표정이 좋아 보이는군.”
“그런가?”
태연한 태도가 찝찝한 듯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요정왕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왕은 찻잔을 느긋하게 쓸어내리며 테이블에 둘러앉은 각 종족의 수장들을 가볍게 훑었다. 무엇이 목적인지, 마지막 전투를 위한 병력을 보낸 이후 매일같이 우르르 방문해 티타임을 갖는 뻔뻔한 녀석들의 면면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 없던 상황이 당혹스러울 법도 했으나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목적을 알 것 같았으니까.
“매일같이 와서 별 소득 없이 돌아가는 꼴이 재밌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네.”
“……!”
용사가 이곳에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정확하게는 ‘마왕을 죽이기 위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발칙한 것들.’
마왕은 싱긋 눈매를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