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337
337. 오늘이 지나기 전에(9)
정곡을 찔린 요정족의 수장이 입을 다문 채 차를 들고, 인어족 수장은 시선을 피해 눈을 돌린다. 어색한 분위기가 영 껄끄러운 듯 드워프 수장이 헛기침을 뱉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때 그건 잘 쓰고 있나? 갑작스럽게 찾아와 의뢰를 넣고는 날 갈아 넣다시피 만들어서 가져간 그거 말이야.”
“……아.”
마력을 감추는 목걸이.
목걸이가 있을 가슴팍을 옷 위로 가볍게 쓸어내린 마왕이 싱긋 웃었다.
“물론.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지.”
“그거 다행이군!”
“조만간 쓸모없어지겠지만.”
“……?”
필요 없어지는 게 아니라 쓸모가 없어진다고? 드워프 수장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망가진다는 건 아닐 테고….’
무려 ‘드워프 수장’이 만든 물건이 쉽게 기능을 상실할 리 없다. 보아하니 목걸이를 다른 누군가에게 넘긴 것이 아니라 마왕이 직접 사용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는 건…….
─탁.
“!”
찻잔 내려놓는 소리가 상념을 깨뜨렸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음이 들린 곳을 보자 마왕이 이쪽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건 분명, 경고의 의미를 담은 미소였다.
아니나 다를까.
“때로는 너무 많은 것을 아는 것도 수명을 단축하는 지름길이 되곤 하지.”
“……거, 살벌하긴.”
명백한 경고의 의미에 드워프 수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머릿속에 떠오른 가정을 지워 냈다.
그래, 내가 이걸 알아서 뭐에 쓰겠어. 다 쓸데없는 호기심이지.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가정이다.
‘아무리 그래도 마왕의 마력이 바닥날 리가.’
상대는 무려 ‘마왕’인데.
……어쨌든 덕분에 불편한 대화 주제에서 벗어났다. 왠지 모두 조금씩 불편해하던 상황에서 말을 돌림으로써 나 혼자만 왕창 불편해진 기분이지만, 아무튼.
다행히도 조금 전의 화제는 그저 가볍게 던져 본 것이었던 듯, 가볍게 차를 기울인 마왕이 슬쩍 눈동자를 올려 요정왕을 보았다. 무언가 떠오른 게 있기라도 한 건지, 상대를 보는 눈에 흥미와 장난기가 섞여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알고 있을지 모르겠네.”
“?”
“아, 모르는 게 당연하려나. 어쨌건 마족의 일이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엄습해 오는 불길함에 요정족 수장이 슬쩍 눈살을 찌푸린다. 그와 대조적으로 역안을 담은 눈매가 환하게 휘어졌다. 불길할 정도였다.
“1군단장은 죽을 거야.”
“…….”
“어쩌면 이미 죽었을 수도 있지.”
쨍그랑.
파열음이 울렸다. 덩달아 자리에 있던 모든 수장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결코 아군일 수 없는 이들의 시선 한복판에서, 산산조각 난 파편을 보던 요정족의 수장이 뒤늦게 시선을 자각한 듯 ‘아’하고 짧은 탄성을 뱉는다. 그러고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마왕을 마주했다.
“실수했군.”
어울리지 않는 실수를 한 것과 달리 얼굴은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이 무표정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을 텐데 결코 입 밖에 내지는 않는다. 한 종족을 책임지는 수장으로서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선명히 보여 마왕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너그러운 척 말했다.
“별말씀을. 더러운 종족의 근원에게는 죽어도 사과하지 않을 네 성정을 아주 잘 알고 있으니 굳이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돼.”
“…….”
“그보다는 1군단장에 관한 질문을 해 보는 게 어때? 궁금한 게 많지 않아?”
“……웃기는 소리.”
동요를 수습하는 건 빨랐다.
언제 흔들렸냐는 듯 세계의 흐름을 읽는 고귀한 종족 수장 특유의 오만함을 되찾은 그가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1군단장이라는 자리까지 꿰찼던 제 쌍둥이 형제가 죽었다는 것은 조금 의외였지만 그뿐이다.
“굳이 물을 것도 없다. 그놈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 좋을 대로 굴던 녀석이었어.”
인간계의 주술사들이 뱉는 단어 중 제 형제에게 붙이면 적당할 말이 하나 있다.
살성(殺星). 쌍생이기에 뭐가 잘못되기라도 한 건지, 그 녀석은 마족이 되기 전부터 살육에 이끌리던 놈이었다. 세계의 흐름에 민감한 자가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놈이 마족이 된 건 운명이었을지도 모르지.
마족이 되었다 해도 떠나지 않고 옆에서 보좌해 준다면 모든 반발을 뒤엎어서라도 막아 줄 의향이 있었건만,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마계로 향했다. 홀로 남을 형제의 말을 완벽히 무시한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보나 마나 제 좋을 대로 살다가 간 것이겠지.”
필시 그럴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형제까지 버리고 간 의미가 없지 않은가.
못난 놈. 더러운 놈. 종족의 수치 같으니라고. 요정왕은 속으로 불편한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애쓰며 냉정히 말했다.
“그런 놈이 뭐가 좋다고 내가 질문까지 해야 하지?”
“그런 말을 한 것치고는 지금 주먹을 쥐고 있는데.”
“…….”
“뭐, 네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지만.”
이미 들쑤신 거, 좀 더 들쑤셔 볼까.
그렇지 않아도 심심해서 운을 뗀 거였다. 거만하고 재수 없는 녀석을 좀 흔들어 보고 싶기도 했고.
이 말을 들은 요정왕이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 마왕은 턱을 괴며 눈을 휘었다.
“정말 제멋대로 굴긴 했지. 녀석은 날 배신했거든.”
“……뭐라고?”
“어느 날부턴가 데온 하르트를 자주 찾아가더라고. 마왕이 아닌 용사의 편에 선 거지.”
“……고작 그 이유로 그런 확신을 내렸다고? 비약이 심한 것 같은데.”
맞다. 비약이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이 대화의 목적이 심심풀이와 상대를 흔들어 보는 것에 있는 이상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모름지기 군주라면 상대의 눈을 보고 내 편이 맞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
“농담이고, 난 ‘마왕’이야. 만마(萬魔)의 주인이지. 마계의 모든 마족들을 감시하진 못해도 군단장 같은 주요 마족들의 행보는 언제나 지켜보고 있어. 특히 그게 마왕성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더더욱.”
물론 거짓말이지만.
내가 왜 개미들의 움직임까지 감시해야 한단 말인가. 누가 누구의 편에 붙든 결국 개미일진대.
그저 눈에 보였고, 그걸 연륜이 읽어 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충실한 1군단장은 확실히 용사의 편이 되었지. 더 웃긴 건, 그 이유더라고. 뭔지 한 번 추측해 볼래?”
“……내가 조금 전에 한 말을 못 들은 건 아닐 텐데. 분명 물을 것도 없다고….”
“그래도 알아 두는 게 좋을걸? 너와 연관이 있거든.”
“…….”
“답을 알려 줄까?”
여기서부터는 완벽한 날조이자 추측이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건만, 뻔뻔한 마왕은 자존심상 묻지 못하는 사내를 향해 아무렇지 않게 싱긋 웃었다.
“‘그때’ 네가 용사를 살리고자 했기 때문에.”
“…….”
“언제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뱀파이어 수장이 데온 하르트를 죽이고자 마왕성에 난입했을 때.
모든 군단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요정왕은 분명 그녀를 막아섰었다. 다시 말해, 제가 원인이라는 말일지니.
칼에 찔린 듯 얼어붙은 그의 위로 마왕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네 성정상 아무 이유 없이 동족이 아닌 이를 살릴 리 없다고 판단했겠지. 분명 목적이 있을 거라 생각했을 테고, 결과적으로 용사가 살아서 본인의 역할을 다해야 네 목적이 이루어진다는 것까지 생각이 이어졌을 거야.”
“…….”
“용사가 제 역할을 할 때까지 목숨을 붙여 놓기 위해서, 그리고 너의 ‘목적’이 달성되기까지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그의 편에 선 거겠지.”
“……그게 왜 제이카르의 죽음과 연결되는 거지?”
“용사는 ‘모든’ 군단장의 죽음을 바라니까. 그런 녀석에게 협조했으니 당연히 쓰임을 다하면 그 또한 죽지 않겠어?”
“……웃기는군.”
정말 우스워서 말도 안 나온다.
말과 달리 날 선 감정 하나 없이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아래로 스르륵 내려간다. 그대로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요정왕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를 핑계로 내세우다니.”
위선자 자식.
“결국 마지막까지 제 좋을 대로 살다 가는 게 맞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궁금한데.”
“나를 위한다느니 일족을 위한다느니 해도, 결국은 싸우다 죽는 게 목적이었겠지.”
이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요정왕은 제 쌍둥이 형제를 잘 알고 있었다. 놈은 그런 녀석이었다.
“그러니 이쪽에서 신경 쓸 것은 아무것도 없어.”
“…….”
“……이참에 말하지. 괜한 말로 날 뒤흔들려 하지 마라, 마왕. 어차피 시간 낭비일 뿐이다. 일족도 아닌 자를 신경 쓸 정도로 나는 한가하지 않아.”
마왕은 대답 대신 보란 듯이 미소 지었다.
그러다 문득, 표정을 풀고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보기라도 하듯 아무것도 없는 곳을 응시한 것도 잠시, 그는 더없이 가벼운 어투로 수장들이 기다리고 있었을 말을 툭 내뱉었다.
“손님이 왔네.”
“……!”
그 말의 의미를 모를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흘긋 인어족 수장과 시선을 교환한 요정족 수장이 드르륵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그럼 난 이만 가 봐야겠군.”
“저도 준비할 것이 있어서.”
“분위기를 보아하니 티타임은 여기서 끝이구만. 나도 돌아가도록 하지.”
“…….”
줄곧 흥미 없는 얼굴로 앉아 있던 뱀파이어 수장이 묘한 눈초리로 마왕을 한 차례 훑은 뒤 말없이 돌아가는 것을 시작으로, 드워프 수장도 자리를 뜨고,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멈칫거리던 요정족 수장도 본인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어느새 한쪽에 위치한 작은 연못에 몸을 담근 인어족 수장이 잠시 마왕을 돌아보았다.
말할 듯 말 듯 달싹이던 입술이 이내 문장을 만들어 냈다.
“……당신이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길 빌어 드리겠습니다.”
“아하.”
요정왕이 하지 못한 말이 뭔지 알겠다. 마왕은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야 너희 종족이 이득을 얻을 테니까?”
“…….”
“네가 빌어 준 행운에 감사는 표하지 않도록 하지. 이만 가 봐.”
***
마왕성 성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들을 태연히 지나친 데온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아직 소식이 닿지 못한 듯 혼자 온 것에 대한 의문을 보이면서도 제게 충실한 태도를 취하는 마족들의 꼴이 우스웠으나 명백한 이득이었기에 굳이 진실을 밝히지는 않았다.
‘일단은 옷부터 갈아입을까.’
축축하게 젖어 들러붙는 옷이 영 거슬린다. 필시 움직임에 방해가 될 터.
다른 누구도 아닌 마왕을 상대로 시작부터 손해를 안고 갈 수는 없기에 옷부터 갈아입기 위해 내성의 제 방을 향해 분주히 발을 옮기는데, 시야 가장자리에 익숙한 면면이 보였다.
굳이 정체를 떠올리려 애쓸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벤, 에드.’
데온은 그들과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
주치의였던 마족과 부관이었던 마족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평범하게 마중 나온 건 아닌 것 같고,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이다. 혹은 직감했다거나.
그럼에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한 듯 흔들리는 눈동자가 제법 위태롭다. 당장 다가올지 말지조차 고민하는 듯한 시선을 맞받아친 것도 잠시, 데온은 이내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태연히 저를 지나치려는 전 상관을 향해 에드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으나….
“데….”
“데온 님.”
마왕성에 남아 있던 절반가량의 3군단을 대동한 채 앞을 막아서는 3군단장에 의해 다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런 에드에겐 시선 한 줌 던지지 않은 채 데온은 아실드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평소와 달리 아실드는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를 시선을 가늠하려 들지 않고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