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34
34. 황제의 가장 강력한 검(1)
그러나 이미 들은 건 다 들어 버린 상태.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 그러고 보니 영웅이 되었다 했지…….”
“…….”
“하, 하하하! 아하하하하하!!”
이 무슨 운이란 말인가. 웃음이 나왔다.
새로운 영웅이 등장했단 소식을 알리며 경계선으로 가라 했을 때, 데온은 마왕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
[알다시피 영웅과 마족은 상성이 안 좋잖아?]“…….”
웃음이 뚝 멎었다.
“친애하는 나의 형님께선.”
“…….”
“기어이 용사의 파편마저 손에 넣으신 모양이야.”
그가 문 안으로 성큼 발을 들였다.
그의 지위와 폐하의 명, 더해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문지기는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문지기의 눈이 이제 뭘 해야 하는지 저들끼리 속닥이던 살인귀 기사단원들의 눈과 마주쳤다.
“…….”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저벅.
걸음이 내디뎌질 때마다 깨끗하던 황궁 복도에 붉은 발자국이 찍힌다. 발자국을 꾸미기라도 하듯 그 주위에 핏방울이 어지러이 흩뿌려졌다.
연회장의 문을 지키던 병사가 도저히 정상이라 볼 수 없는 인물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창을 겨누려다가 그의 정체를 깨닫고는 황급히 물러섰다.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
어째서 이런 꼴로, 하필 연회가 열리는 날 온 것인지.
어느덧 문 앞에 멈춰선 그가 자꾸만 시야를 가리는 붉은 액체를 닦아내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 열어.”
“…….”
열어 줘도 되는 걸까.
고민은 길지 않았으나, 하르트 백작은 그 짧은 시간마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성큼 문에 다가선 그가 두 손으로 커다란 문을 밀어 버린다.
문이 열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안에 들어서는 데온 하르트를 보던 병사들은 이내 문에 찍힌 붉은 손자국을 확인하고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현실 도피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는데, 이거 현실이야 이 친구야…….”
“……소문대로 정말 살벌하네. 그런데 왜 저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
“이 연회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한 번 생각해 봐.”
“아.”
크루엘 하르트.
안에 들어선 데온은 잠시 멈춰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그가 들어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평화로운 연회장. 아니, 근처에서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린 것을 보니 한두 명 정도는 눈치챈 모양이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평생이 가도 말 한마디 섞을까 말까 한 인물들일 뿐. 신경 써야 할 인물은 단 하나이니까.
‘황제는…….’
저기에.
단상 위, 화려한 의자에 앉아 무료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금발과 금안. 피의 황제라는 것이 의심될 정도로 젊고 아름다운 외모.
그의 나이가 이제 겨우 스물여덟 이랬던가.
따위의 잡생각을 하며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연회장 가운데를 가로질러, 황제가 있는 곳까지 일직선으로.
붉은 발자국이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똑바로 찍힌다.
그를 발견한 한 영애가 작은 비명을 내지르는 것을 시작으로, 연회장 내의 시선들이 점차 그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어머.”
“세상에. 저게 무슨…….”
“어찌 저리도 무례할 수가.”
무례함에 대한 분노와 숨길 수 없는 공포.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담긴 시선들이 찌를 듯이 데온을 향하는 가운데, 흥미를 담은 시선이 둘 있었다.
‘결국 살아서 왔군요.’
전투의 흔적을 여실히 보이는 데온 하르트를 작은 미소를 띤 채 훑어보는 공작 스타베 일루스터와,
‘기사단을 마중 보내길 잘했군.’
황제, 에도아르도 데세르트. 그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데온 하르트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황제와 공작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스치듯 그를 지나쳐 시선을 제자리로 돌린 황제가 다시 데온 하르트를 눈에 담았다.
공작의 시선 역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라진 뒤였다.
금세 이곳까지 도달한 데온 하르트가 붉게 물든 복면을 내리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덩달아 머리카락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피가 똑 떨어졌다.
“제국에 광명을. 신 데온 하르트가 현재의 제국을 뵙습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간간이 떨어지는 물방울, 아니 핏방울 소리뿐.
데온 하르트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던 황제가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데온 하르트.”
“예, 폐하.”
“이 무슨 무례지?”
다른 누구도 아닌 무려 황제의 말이다. 연회장의 모두가 숨을 죽였다.
공기마저 얼어붙을 듯한 분위기 속에서, 데온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오는 길에 습격이 있었습니다.”
“습격이라…….”
이건 하나의 연극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황제는 그 소식을 처음 듣는다는 듯 눈매를 찌푸렸다.
그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느릿하게 중얼거린다. 천천히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압축된 살기가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백작저에 세작이 있는 모양이군.”
“송구합니다.”
“원한다면 짐이 처리할 수도 있는데, 어찌하겠나?”
“폐하께서 굳이 손을 더럽히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흐음, 그렇다면야.”
황제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데온 하르트를 보며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
“…….”
“짐 역시 그대에게 들을 말이 많아. 긴 대화가 될 것 같으니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
금방 마련된 응접실에 앉은 황제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데온을 눈에 담았다.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물이다. 당장 붙은 이명부터가 극과 극을 오가는 것들뿐이니.
‘뱀파이어 백작이랬나.’
아주 잘 어울리는 별명이다.
창백한 피부와 붉은 눈동자. 심지어 싸웠다 하면 피에 미치는 태도까지 보이니, 이게 뱀파이어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피에 미친 선봉장’과 ‘살인귀 부대의 주인’, 그와 반대되는 ‘제국의 영웅’과 ‘마지막 용사의 동료’라는 칭호까지.
더해서…….
‘마왕을 막아서고 용사의 시신을 수습한 자.’
사실상 이것 때문에 그에게 영웅이란 칭호를 내렸더랬다.
영웅은 용사의 파편을 가진 이들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사의 파편을 가졌다는 것은 가산점의 역할만 할 뿐,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의 실력과 성과를 보였느냐’다.
그런 의미에서 데온 하르트는 최고였다.
8년 전쟁에서 그는 선봉장으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성과를 일궈 냈다.
용사의 동료로서 길을 떠났을 때는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용사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해내기도 했다.
마왕에게 패배한 용사는 그 육신마저 편히 쉬지 못한다.
사지가 잘리고, 몸뚱이는 마물에게 먹이로 던져지며, 머리는 바늘과 실로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든 뒤 제국과 마계의 경계선에 던져진다.
이번 대의 용사도 데온 하르트가 구해 내지 못했더라면 필시 그렇게 됐으리라.
‘실로 대단한 업적이지만…… 그 대가로 마왕의 저주를 받아 몸이 약해졌지.’
시신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무려 마왕을 상대해야 하는 일인데, 아무리 몸을 빼는 일이라 해도 쉬울 리가 없었다.
결국 데온 하르트는 용사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스스로의 몸을 지키는 것은 실패했다.
몸을 좀먹어 들어가는 마왕의 저주 탓에 시도 때도 없이 피를 토하고, 별것 아닌 충격에도 몸에 큰 부담이 간다.
인재를 아끼는 황제로서는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저주를 풀 방법은 찾았는가?”
그렇기에 그는 저주를 풀 방법을 찾고자 마왕성에 들어가겠다는 데온 하르트를 막을 수 없었다.
오히려 이를 기회로 만들어 그를 첩자로 써먹고자 했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마왕의 상태는?”
“평소와 다를 것 없습니다.”
황제가 앞에 마련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느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내게 할 말을 해 보도록 하지. 오래 기다리지 않았나.”
“기사단을 마중 보내 주신 것에 감사를…….”
“그런 것 말고.”
“……마왕성에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원하던 답이 아닌 듯 황제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영웅 후보를 말하는 건가. 별거 아니었다. 용사의 파편을 지녔다는 것 하나만 믿고 날뛴 어리석은 자였지.”
“역시 죄를 지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죽으라 보내신 겁니까.”
“그래. 가던 길에 죽을 줄 알았고, 용케 살아서 들어간다 하더라도 잡힐 것이라 생각했다. 더해서 그대가 위험을 감수해 가며 녀석을 구할 것 같지도 않았으니. 짐의 말이 틀렸는가?”
“……아닙니다.”
침입자는 감옥에 갇혔고, 처분 권한은 마왕에게 넘어갔다.
데온은 딱 한 번 그를 본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그것 외에는 할 말이 없나?”
“…….”
“0군단장이 최전방에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송구합니다. 거절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 본 것이 있을 텐데.”
“…….”
데온 하르트의 고개가 올라갔다. 온전한 얼굴이 드러나고, 붉은 눈이 황제의 금안을 똑바로 마주한다.
황제는 그 시선을 여유롭게 받아치며 나올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기다리던 주제가 튀어나왔다.
“크루엘.”
“…….”
“그자를 어째서 영웅 자리에 올리신 겁니까?”
붉은 눈동자에는 드물게도 분노가 어려 있었다.
데온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주먹을 꾹 움켜쥐며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도 아시잖습니까.”
크루엘 하르트.
살아 있는 한, 절대 잊지 못할 이름.
“제게 있어서 그를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라는 것을.”
그는 데온을 제외한 하르트가의 유일한 생존자다.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를 하지 못할 테니 다시 말하겠다.
──크루엘 하르트는 데온 하르트의 손에서 살아남은 하르트가의 유일한 생존자다.
***
몬스터 같이 생긴 혁명군에게 목이 졸리고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더니…… 눈앞에 황제가 있었다!
어찌나 놀랐던지, 순간 패닉에 빠져 벌떡 일어설 뻔했다.
그것도 무려 황제 앞에서!
‘시부럴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빠져나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열심히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곳은 연회장.
나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황제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고, 어째서인지 자꾸만 눈앞에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몸 전체가 끈적끈적하고 비릿한 철 냄새가 나는 것이…….
‘잠깐, 내 몸 상태 왜 이래?!’
어쩐지 온몸이 욱신거린다 했더니만, 뭔 일이 터졌던 모양이다. 깔끔하던 흰 제복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누가 머리 위에서 피를 들이붓기라도 한 건지, 어디서 피가 튄 수준이 아니라 아예 푹 젖어서 짜면 피가 주르륵 나올 정도.
눈앞에 떨어지는 피가 바로 머리카락 끝에 매달려 있던 것이었다는 것까지 파악한 나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도 한 시녀를 떠올렸다.
‘병약한 귀공자’ 이미지를 내세워 세간에 알려진 내 이미지의 전환을 꾀한 한 시녀를.
‘……병약?’
적당히 피가 묻어 있었다면 ‘병약해서 피를 토했나 보구나, 하하하.’ 하며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이건 아예 피범벅이다. 마치 괴담 속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
이건 병약이 아니라 병마(病魔)다 병마.
지금 내 꼴은 악마라 해도 믿어질 정도로 끔찍했다.
이런 모습으로 황제를 보러 왔다 이거지. 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도대체 안 막고 뭐 한 거냐.
‘썩을 놈들. 좀 말려 줄 것이지.’
아니, 그것보다 그 시녀에게 좀 미안해진다.
아무래도 나름 고심해서 골랐던 옷 같은데. 심지어 공들여서 정리해준 머리마저 엉망이 되고 말았으니.
이름 모를 시녀에게 속으로 사과를 건네며 나는 무릎을 꿇은 자세를 그대로 유지했다.
상황 파악이 확실하게 안 됐을 때는, 괜히 쓸데없는 행동을 하는 것보다 가만히 있는 것이 최고다.
그런데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데온 하르트.”
“예, 폐하.”
“이 무슨 무례지?”
황제가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었다.
나는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기억이 안 난다. 황제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건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렇다고 기억을 떠올릴 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진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망했다.
단지 말뿐이건만 목 앞에 칼이 드리워진 기분이다.
목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나는 장렬하게……
……정신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