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340
340. 마지막 용사와 마지막 마왕(2)
“내가?”
“그쪽이 바람을 불어넣은 게 아니고서야 그놈들이 내 명령을 어기고 찾아왔을 리 없잖아.”
아무리 제멋대로 구는 놈들이라 해도 명령을 따라야 할 때와 어겨도 될 때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 그때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아무 이유 없이 명령을 어겼을 리는 없을 터.
실제로 내가 저주에 걸렸다는 것과 그 내용을 알고 있었으니 이를 알려 줄 만한 범인이야 뻔했다.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긴 하지만…….”
확신을 담고 중얼거리는 말에 화답하듯 마왕이 싱긋 웃었다.
“뭐… 생각하고 보니 그렇잖아? 난 군단장들을 잃었는데, 너도 그에 준하는 녀석들을 잃어야 공평하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구나. 데온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미친개들의 도착 시간을 미루어 보았을 때 마왕의 수작질은 군단장들이 출발하자마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로 지금 이렇게 ‘군단장들을 잃었다는 것’을 들먹였으니. 즉, 그는 처음부터 그들의 죽음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복수’가 아니라 ‘공평’을 들먹여?
“……이건 게임이 아닌데.”
“그래?”
마왕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대수롭지 않게 되묻는 말에 담긴 옅은 부정을 읽은 데온이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적어도 저에게는 아주 흥미롭고 재밌는 게임이었다고 말하는 듯해 제법 불쾌했다.
절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애초에 계산부터가 잘못되었어. 군단장들은 그쪽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잖아.”
“중요한 존재인데.”
“……단어 선택을 잘못했군. 정정하지. ‘소중한’ 존재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이미 전에 마왕은 한번 말한 적이 있었다.
‘마족’은 동족이 아니라고. ‘마왕’은 단일 종족이라는 말과 함께 ‘마족’을 가리켜 배설물에 빗댔었다. 인간들이 제 배 속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똥을 동족으로 여기지는 않지 않느냐고 했었지.
“하지만 소중한 것이나 중요한 것이나 큰 차이는 없을 텐데.”
“아니, 완전히 다르지. 소중한 것은 ‘소중하기에’ 가치가 생기지만, 중요한 것은 ‘가치가 있기에’ 중요한 것이니까. 이건 그 주인에게까지 타격을 입히느냐, 그저 손해만 끼치느냐의 차이이기도 하고. 넌 군단장을 잃었다 해서 정신적으로 무너지지는 않잖아.”
이 말은 데온 하르트는 로프티 기사단을 잃으면 정신적으로 무너진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감추지 않고 드러낸 약점이 의외라 마왕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그걸 이렇게 밝혀도 되겠어?”
“어차피 마지막인데 이제 와서 뭘 할 수 있다고.”
“하긴. 아무튼 네 말대로라면….”
역안을 품은 눈매가 살짝 접혔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 계산이 맞는 거 아닐까? 로프티 기사단 자체의 가치는 군단장에 비하면 보잘것없으니 너의 가치를 빌려 와야 겨우 맞먹을 수 있잖아.”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는데.”
오래 살았기에 감정에 해박할 줄 알았는데, 역으로 더 감정에 무뎌진 모양이다. 감정마저 계산에 넣으니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없겠지.
데온이 못 박듯 탁자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난 분명 그놈들이 죽으면 내가 망가진다고 말했어. 그러니 로프티 기사단의 가치에 내 가치를 통째로 얹어야지.”
“그 시점에서 로프티 기사단이 죽는다 한들 네가 취할 행동은 바뀌지 않을 텐데도?”
달그락. 마왕은 빈 찻잔을 내려놓고 데온의 앞에 있던 차를 가져왔다. 손도 안 댄 그것을 보란 듯이 입에 대고 기울이며 붉은 눈을 향해 샐쭉 웃었다.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했던가. 그렇다면 이쪽은 데온 하르트가 배경 자체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짚어 주고 싶다.
“로프티 기사단이 죽었든 살았든 결국 넌 이 자리에 섰겠지. 안 그래?”
군단장과 로프티 기사단의 가치에만 집중하지 말고 시야를 넓혀 보자.
고지가 코앞인데, 정신적으로 무너졌다고 하던 일을 그만둘 리 없잖은가. 정신적으로 무너진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데온이라면 몇 번이고 고비를 넘기며 버텨 온 시간이 억울해서라도 필시 목적한 바를 끝내고 무너지겠지. 이제 와 주저앉기엔 그가 걸어온 길에 희생된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 데온 하르트의 가치까지 통째로 얹을 필요는 없다. 마왕은 제 계산이 틀리지 않았노라 자신했다.
그를 물끄러미 마주 보던 데온이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니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 현시점에서는 별 쓸모없는 주제이니 이쯤하고.”
로프티 기사단 건은 그저 한 번은 짚어야 할 것 같아 입 밖에 내었을 뿐이다. 가치나 잘잘못을 따지려 한 게 아니었으니 이 이상 말려들어 쓸모없는 언쟁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우스울 터.
마왕은 이쪽이 분노하면 이득이라는 생각으로 찔러본 것 같은데,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생각은 없다. 지금의 무익한 주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에 따라 사고의 흐름은 다른 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그보다 궁금한 게 생겼는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의문인 점이 있었다.
마왕이 말하라는 듯 눈을 맞춰 온다. 그의 뒤에 있는 꽃이 존재감을 발했으나, 데온은 쓸데없이 화사한 배경엔 시선 한 줌 두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중요한’ 놈들인 군단장들이 허무하게 죽어 가고, 또 죽을 자리에 향하는데 그냥 두고 본 이유가 뭐지?”
“으음? 이미 알고 있는 걸 또 물어본 건 아닐 테고…….”
“마족이 동족이 아니고 따로 애착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아. 내가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라, 그간 마족을 책임지는 자로서 움직여 온 주제에 이제 와서 갑자기 다 놓아 버린 것에 대한 답이야.”
“아하.”
확실히 궁금할 만도 하다.
마왕은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화사한 꽃밭을 배경으로 달빛처럼 은은한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어차피 내가 죽으면 멸족할 종족이어서.”
“…….”
본인의 죽음을 상정에 둔 대답.
데온은 말없이 도르륵 눈을 굴렸다. 아무 생각 없이 옮긴 시선 끝에 노란 개나리가 닿았다.
“……그리고 굳이 이곳에서 기다린 이유는?”
배경이 영 적응되지 않는다.
분명 태도를 봐서는 내가 그를 찾아오고 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왜 하필 이 장소인 건지.
마왕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자랑하듯 한쪽 팔을 펼쳤다.
“겨울인데도 별로 춥지 않지? 온실치고는 그렇게 덥지도 않고.”
“…….”
“이곳 기온을 3월 중순 정도로 해 두었거든. 인간계의 날짜로 따지면… 3월 15일 정도가 되려나. 그런데도 꽃이 제법 다양하고 예쁘지 않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붉은 눈동자에 의문과 경계, 지루한 기색이 뒤섞여 떠오를 때쯤, 마왕이 눈매를 휘어 웃었다.
“어때, 이런 곳에서 죽는다면 인간계에서 죽는 듯한 기분이겠지?”
“……허?”
“아무래도 넌 인간인데, 인간계에서 죽지 못한다는 게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이건 또 ‘데온 하르트’의 죽음을 상정에 둔 대답이다.
아무리 너덜너덜한 상태가 된다 해도 이 싸움의 끝에는 분명 한 명이 살아남을 터인데, 어째서 ‘마왕’의 죽음도 ‘데온 하르트’의 죽음도 전부 확신하고 있는 건지. 불쾌함보다는 의문이 앞서 고개를 갸웃 기울인 것도 잠시, 답해 줄 생각이 없는 듯 그저 싱글싱글 웃고 있는 마왕을 본 데온이 얼굴을 찌푸렸다.
“글쎄. 난 밀폐된 공간은 별로여서.”
꽃이 아무리 예쁘다 한들 핏물에 잠겨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거기서 무슨 긍정적인 감상을 얻겠는가. 지금도 전부 거기서 거기로만 보인다.
“……아아, 그렇겠네.”
“…….”
“저주가 많이 차올랐어.”
마왕은 데온의 얼굴에 닿아 있던 시선을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목 언저리, 정확히 핏물이 차오른 위치에 눈길이 닿았다.
보이지는 않지만 마법의 주인이자 근원으로서 느낄 수 있었다. 곧 있으면 데온 하르트는 저주에 집어삼켜지리라.
“그게 네 숨을 틀어막기 전에 어서 결판을 내어야겠네.”
이제 슬슬 싸워야 할 때가 왔다.
내키지 않는 몸을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기를 잔뜩 챙겨 온 용사를 위해서라도 나 역시 그에 걸맞은 무기로 상대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뭐가 좋을까.
의자 옆에 떨어져 있던 작은 주머니를 들고 안을 뒤적였다.
“역시 마지막은 화끈하게 가는 게 좋겠지?”
흉흉한 형태의 대검이 손에 들렸다.
데온은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작은 주머니에서 대검이 나왔다는 것에 놀라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미 마왕성에 온 초기부터 마법이 걸린 주머니를 몇 번이고 유용하게 사용했는데 이제 와 새삼 놀란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
그저, 느릿한 마왕의 움직임에 묘한 망설임이 서려 있는 것 같아서.
“……별 의미 없는 대화로 시간을 소모한 이유가 궁금한데.”
입을 열었다.
“그야, 마….”
“마지막이라는 이유만 있는 건 아닐 텐데?”
“…….”
“보아하니 지금도 망설이는 것 같고.”
─왜.
명백한 비웃음을 품은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이제 와서 겁이라도 나는 모양이지?”
“…….”
마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나 웃음기가 서려 있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온전히 드러난 역안이 읽을 수 없는 빛을 담고 데온 하르트를 향하더니 이내 아래로 내려가 제 손에 들린 대검을 담는다.
짧은 침묵 끝에 느릿한 음성이 공간을 채웠다.
“……일단은 네 성장에 감회가 새로워서 그런 거긴 하지만… 네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도 없겠네. 그래, 조금은 겁이 나긴 해.”
“……뭐?”
데온의 표정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일그러졌다.
먼저 말하긴 했지만 그건 비꼬기 위한 것이었을 뿐, 본 목적은 망설임의 이유를 캐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정말 겁이 난다고? 왜?
“……죽을까 봐?”
네가, ‘마왕’이 죽을까 봐?
“그래, 죽을까 봐.”
네가, ‘데온 하르트’가 죽을까 봐.
내가 이겨서, 데온 하르트라는 용사를 죽여서, 그래서 다시 기약 없는 긴 시간을 살아야 할까 봐.
모든 걸 걸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마왕은 제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길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편의상 간절하다고 표현했으나, 그것은 단순히 ‘간절하다’는 단어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하고, 깊고, 아주 무거운 바람이었다.
그러니 만약 이 전투에서 이기게 된다면…….
“…….”
“……무슨.”
데온은 순간 마왕의 얼굴에 스친 위험한 표정을 보았다. 그것은 분명, 자기 파괴적인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마왕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조금 전의 표정이 착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는 거짓말처럼 말끔한 미소를 만면에 띠고 있었다.
“아무튼 데온, 넌 정말 잘해 주었어.”
“…….”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고.”
우아하지 못한 대검을 나뭇가지 다루듯 가볍게 들어 올린 그가 그것을 데온에게 겨눴다. 더없이 차분하고 친절한 음성이 이어졌다.
금방이라도 산들바람에 실려 흩어질 듯, 가벼운 웃음기 서린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잘해 왔으니 너라면 마무리도 완벽하겠지.”
“…….”
“어디 한 번 마법 없이, 순수하게 무력으로 맞붙어 보자.”
대답은 없었다. 대신 데온은 조용히 등 뒤에 매고 있던 창을 꺼내 마주 겨눴다.
공기가 가라앉고, 침묵을 배경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길 잠시.
“그 전에.”
눈을 굴려 주위를 훑은 마왕이 검을 좌로 옮겼다.
“여긴 싸우기엔 너무 부적합하지?”
검 끝이 허공에 직선을 긋듯 우로 움직인다.
아주 기초적인 횡베기에 일반인도 충분히 눈으로 좇을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고 빠르지 않은 움직임. 이게 무슨 의도인가 싶어 검의 움직임을 좇던 붉은 눈동자가 다시 마왕에게 돌아간 순간.
─쨍그랑!!
온실을 덮고 있던 유리가 일제히 깨져 나갔다.
겹쳐지기 시작한 세 개의 달 아래, 어느 것 하나 큰 조각 없이 균일하게 부서진 유리 조각이 하얀 달빛을 반사하며 쏟아져 내린다.
반짝이는 유리비 사이로 붉고 검은 시선이 오갔다. 용사도 마왕도 이런 자잘한 유리 파편에 다칠 일은 없기에 자리를 피하는 이는 없었다.
“……이젠 주변 정리도 얼추 된 것 같으니.”
약속이라도 한 듯 둘이 동시에 걸음을 내디뎠다.
마왕이 얼마나 오래 살았을지, 데온이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입을 연다. 마왕은 본인이 살아온 시간을 곱씹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네게─”
내게.
“죽음을 알려 주지.”
죽음을 가르쳐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