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37
37. 명예 백작 데온 하르트(2)
일단 최대한 볼이 부풀지 않게 조심히 입에 머금고 있는데, 보통이라면 기분이 상해 돌아섰을 상황에서 공작이 기어이 상냥한 웃음과 함께 인사를 해 왔다.
“이렇게 직접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지요? 반갑습니다, 하르트 백작.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
“백작?”
공작이 오자마자 한 걸음 뒤로 물러선 크루엘의 시선이 나를 향해 따갑게 내리꽂힌다.
리엔 경의 얼굴은 푸르죽죽해졌고, 주위 사람들의 안색 역시 창백하게 질렸다.
‘알아, 나도 안다고.’
일개 명예 백작 따위가 지금 감히 공작의 말을 씹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고!
안 되겠다. 이러다 쓸데없이 적을 하나 더 늘리겠어. 목구멍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이걸 넘기고 답하든가 해야지.
서둘러 입안 가득한 푸딩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억지로 목울대를 움직인 그 순간.
“백작니이이임!!”
“쿠흡!”
굉장한 습격이었다.
반쯤 넘어갔던 푸딩이 다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연회장 바닥을 망친 붉은 액체와 덩어리들을 망연히 보다가, 내 등에 찰싹 붙어 있는 이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쿨럭……. 화, 황녀 전하…….”
***
“오랜만이군, 일루스터 공.”
“예, 전하……. 그런데…….”
“요새 황궁에 발길이 뜸하던데, 많이 바쁜 모양이야.”
“송구합니다. 그런데 전하…….”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닙니다, 전하. 그…….”
“아,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다면 사과하지. 실례했어.”
황녀가 하르트 백작의 시선을 돌리고, 황태자가 공작의 시선을 돌린다.
이 모든 것은 공작이 하르트 백작에게 말을 건 순간 즉석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일루스터 공작은 귀족파의 수장이다. 그런 그가 황제의 훌륭한 검인 하르트 백작과 대화를 나눠서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분명 음흉한 속셈이 있을 테지.
황태자와 황녀는 그런 속 시커먼 계획에서 하르트 백작을 빼돌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황녀가 너무 과하게 군 모양이다.
“황공하오나 전하, 지금 하르트 명예 백작이…….”
“음?”
순간, 째지는 황녀의 비명이 들렸다.
“꺄악, 백작님! 피, 피가!”
“!?”
얼핏 하르트 백작이 ‘아니, 이건……’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 목소리는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소란에 묻혔다.
그냥 피도 아닌 덩어리까지 진 피다. 어느 누가 이를 그냥 넘어갈까.
“궁의! 궁의를!”
서둘러 궁의를 부르며 황태자는 슬쩍 황녀를 흘겨보았다.
그러게, 뒤에서 육탄 공격을 가하는 건 조심 좀 하라니까. 하르트 백작의 몸은 마왕의 저주 때문에 유리와도 같은 상태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하르트 백작을 꾀어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건 과했어.’
이 사건이 해결되면 다시 황녀를 앉혀놓고 주의를 줘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황태자는 서둘러 데온 하르트에게 다가갔다.
***
“꺄악, 백작님! 피, 피가!”
“아니, 이건…….”
“말하지 마십시오.”
피가 아니라 푸딩인데…….
해명하기도 전에 리엔 경이 내 입을 손수건으로 틀어막았다.
당황해 허우적거리다가 간신히 그녀의 손을 떼어낸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수건에 스며 나오는 상큼하기 짝이 없는 그것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연회장은 난리가 난 뒤였다.
“궁의! 궁의를!”
궁의를 부르는 황태자부터 시작해서.
“무슨 일이지?”
시발, 황제까지.
심지어 그 뒤에 따라오는 이는 분명 8년 전쟁 당시 총사령관이자 내 상관이었던 네메세우스 장군이다. 근래 들어 한 번도 못 봤다지만 얼굴을 가로지르는 저 흉터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러니 빌어먹을 영웅 크루엘과 스타베 공작까지 합하면 나는 지금 제국의 모든 거물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내가 정말 피를 토했다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문제는 이게 피가 아니라는 것이다.
연회장 가득한 향수 냄새 때문에 피 냄새가 묻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러다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은 와중에 들려온 황제의 중얼거림은 더했다.
“마왕의 저주 때문인가.”
아뇨, 애초에 마왕한테 저주받은 적도 없는데요.
내가 용사의 시신을 챙겨 들고 황궁에 돌아온 날, 체력이 부족한 나머지 황제의 앞에서 울컥 피를 토한 적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게 마왕의 저주로 알려져서 이렇게 되어 버렸는데…….
‘맙소사, 저거 궁의 맞지?’
시, 시발 망했다.
진짜 궁의까지 와 버렸다.
***
궁의는 드물게 심각한 표정으로 상대를 진찰하고 있었다.
사실 심각하다기보다는 표정이 굳어버렸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무려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 황녀 전하, 귀족파의 수장인 일루스터 공작에 이어서 네메세우스 장군과 영웅 크루엘 하르트까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상대 환자는 무시무시한 이명을 잔뜩 가지고 있는 그 유명한 영웅 데온 하르트다.
무언가 심기에 거슬리기라도 했다간 목숨이 온전치 못할 터.
그렇기에 잔뜩 긴장한 채 혼신의 힘을 다해 꼼꼼히 진찰하고 있는데.
‘왜…….’
아무 이상이 없는 걸까?
몸이 지나치게 허약하다뿐이지, 정말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심지어 피를 토했다면 비릿한 향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는데, 놀라우리만큼 피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엔 향수 냄새에 묻힌 줄 알았다. 이곳은 온갖 향수 냄새가 가득한 연회장이니까.
그에게서 진하게 풍겨오는 체리 향 역시 어딘가에서 묻혀 온 향수 냄새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입에서까지 체리 향이 날 리가 없잖아!’
정말 피를 토한 게 맞긴 한 건지 확인을 위해 살짝 입을 벌리자 피비린내 대신 진한 체리 냄새가 훅 풍겼다.
거기서 궁의는 하르트 백작이 피를 토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입에서 튀어나온 붉은 액체와 덩어리가 문제인데…….
‘체리 향이 나는 것을 보니 체리와 관련된 것일 테고.’
그러고 보니 디저트 중에 체리 푸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래도 이거, 푸딩을 먹다가 사레들린 것 같은데…….
짜게 식은 눈으로 시종들에 의해 깨끗이 치워지고 있는 붉은 덩어리들을 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말해야 할까?’
다른 이들이 알아차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처음에야 정신이 없는 데다 주위에 가득한 향수 냄새 때문에 눈치를 못 챘다 하더라도, 결국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태반이 피를 경험한 이들이다.
반정으로 자리에 오른 것도 모자라 즉위와 거의 동시에 8년 전쟁을 시작한 폭군 에도아르도 데세르트, 8년 전쟁의 총사령관이었던 네메세우스 장군, 당연히 전투와 떼어놓을 수 없는 영웅 크루엘.
피라면 지긋지긋하게 봐 온 만큼, 조금만 여유가 주어진다면 금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무심코 고개를 든 궁의의 눈이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새빨간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히익!’
저건 분명 말하면 죽이겠다는 눈빛이다!
반사적으로 헛숨을 들이켰다.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인 주변 이들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으나, 궁의는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폐하께 거짓을 고하느냐, 아니면 죽을 각오로 진실을 고하느냐.
생사의 기로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이, 이곳에 올 때 습격이 있었다 하셨지요. 그때 입었던 내상에 피로가 겹쳐진 나머지 각혈을 하신 모양입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당장의 목숨을 택했다.
***
“이, 이곳에 올 때 습격이 있었다 하셨지요. 그때 입었던 내상에 피로가 겹쳐진 나머지 각혈을 하신 모양입니다.”
살았다! 내 간절한 애원의 눈빛이 통한 모양이다.
말을 조금 더듬긴 했지만, 주치의는 훌륭하게 둘러댔다.
솔직히 그가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땐 사실대로 말하려는 줄 알고 심장이 철렁했다.
정말이지 사실대로 말했으면 어쩔 뻔했어.
쪽팔린 것도 있고 다른 이들의 분노도 샀을 테지만, 그전에 황제의 반응부터가 예상이 안 간다.
어쩌면 능멸죄로 날 죽이려 들지 않았을까.
“휴식 외에는 따로 치료할 방도가 없으니 아무래도 푹 쉬시는 것이…….”
“그런가.”
태연하게 답하며 반강제로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일어나네. 부담스러워 미치는 줄 알았다. 환자는 앉아야 한다며 의자를 내미는데, 심장이 어지간히 튼튼하지 않고서야 황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홀로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황제조차도 서 있는 와중에!
아마 황제가 명령이라는 말만 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끝까지 꿋꿋하게 서서 진찰을 받았을 것이다.
‘아무튼 대충 해결된 것 같고.’
이제 이걸 핑계로 집에 돌아가면 되겠지. 설마 환자를 붙잡으려 들까.
황제를 향해 몸을 틀었다. 이대로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려는데, 불행히도 내 몸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만 다리가 풀려 버릴 정도로!
분명 마음은 무리 없이 황제를 향해 인사를 올리고 있었는데 말이지. 어째서 내 몸은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는 걸까.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몸뚱이를 느끼며 나는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
‘아, 젠장.’
황제 앞에서 별의별 꼴을 다 보이는구나. 연회장의 사람들은 날 얼마나 우습게 볼까.
사교계에 드나들 일이 없었던 만큼 이번 일로 난 저들의 뇌리에 단단히 각인될 것이다.
황제 앞에서 꼴사납게 넘어진 명예 백작으로.
‘내 사교계 인생은 망했군.’
그런 생각과 함께 가까워지는 바닥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가까워지지 않고 있는데?’
시간이 원래 이렇게 느리게 흐르던가.
아 그건가, 주마등? 아닌데. 주마등은 예전의 기억도 떠올라야 하는데.
여러 가지 실없는 생각을 떠올리던 나는, 몇 초간의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서야 누군가 내 팔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구지? 근처에 있던 사람들 중 날 잡아 줄 사람이라면……. 리엔 경인가?
흐트러진 중심을 잡고, 팔을 잡은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입을 뗐다.
“고…….”
……맙지 않아!
입 밖으로 나오던 감사 인사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쑥 들어가 버렸다.
감사 인사를 해야 하는 만큼 호의가 담겼던 눈은 싸늘하게 식었고, 그와 거의 동시에 나는 극심한 혐오감을 드러내며 몸을 받쳐 주던 손을 뿌리쳤다.
“…….”
“…….”
싸한 침묵 속에서 크루엘이 제 손과 나를 말 없이 번갈아 보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나 역시 입술을 꾹 깨물고 뒤로 두어 걸음 비척비척 물러났다.
나도 황제 앞에서 이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다. 이건 반사적인 행동이었으니까.
8년을 전쟁터에서 구르며 몇 번이고 증오를 곱씹었다.
혐오감이 각인 수준으로 뿌리 깊게 남아버렸는데, 어찌 놈의 손길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게 아무리 나를 위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말이지.
다행히 침묵은 금세 깨졌다.
“……몸이 상당히 좋지 않은 모양이군. 이만 돌아가 쉬는 것이 어떻겠나.”
“송구합니다.”
순순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황제가 한 말은 흔히 연회에서 주최자가 상대에게 내리는 축객령이다.
쓰임에 따라 모욕이 되기도 하고, 배려가 되기도 하는 이 말은 지금 내게 있어서는 배려였다.
내가 크루엘에게 가진 감정이 어떻건 이 연회의 주인공은 크루엘이며, 주최자는 황실이다.
그런 만큼 자칫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던 나의 무례를 ‘몸이 좋지 않은 탓’으로 포장하고 황제가 먼저 나서 가볍게 질책함으로써 누구도 대놓고 나를 질책하지 못하게 막았다.
황제는 확실하게 나를 감싼 것이다.
‘그는 인재에게 너그러운 사람이니까.’
그래서 더 부담스럽다. 난 댁이 생각하는 그런 인재가 아닌데.
그 기대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순간 황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부터 두렵다.
새삼 자각하니 다시 다리에 힘이 빠지는 듯해, 나는 옆에서 부축해오는 리엔 경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고 서둘러 연회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크루엘에 관한 일은 의도적으로 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