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40
40. 명예 백작 데온 하르트(5)
연회가 있었던 이후 일주일이 흘렀다.
숲 한가운데에 처박아두고 싶었던 살인귀 기사단 놈들은 예산 낭비를 할 수 없다는 레멤베르의 반대에 결국 운 좋게도 멀쩡한 숙소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고,
나는…….
“댐을 하나 더 만들겠다고? 그거 하나 만드는데 시간과 돈이 얼마나 드는데. 심지어 영지가 하르트 영지?! 미쳤어. 도대체 이걸 누가 올린 거야?”
“접니다.”
“아……. 생각하고 보니 하나 더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아무리 임시로 맡아둔 영지라지만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곤란할 테니, 가뭄이나 홍수를 방지할 수 있다면야……. 승인하겠습니다.”
쾅.
인장이 찍혔다.
……그래, 보다시피 지금 나는 서류의 산에 둘러싸여 일 처리를 하는데 여념이 없다.
무려 반년 치 서류가 밀려 있는 만큼 일주일째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서류 작업만 하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눈 밑에 시커먼 그림자가 생겨 버렸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마음 같아서는 그냥 읽지도 않고 인장만 쾅쾅 찍어 대고 싶다만, 그랬다간 레멤베르가 가만두질 않을 테니.
우리 집 집사는 정말 대단한 것이, 절대 언성을 높이지 않고 얼굴도 찌푸리지 않는데도 사람 기죽이는 데 일가견이 있다. 지금도 저 봐라, 뭘 말하려는 건지 입을 열고 있지 않나.
아마 하르트 영지 관리에 소홀한 나를 질책하려는 것이리라.
“아직 소식을 못 들으신 모양입니다.”
“……네?”
“일주일 전, 폐하께서 임시로 관리를 맡기셨던 하르트 영지를 온전히 백작님 소유로 돌리셨습니다.”
“그게 무슨?!”
임시로 맡아 두는 것도 간신히 받아들였는데, 뭘 어떻게 했다고?
“이……번 농담은 조금 과했습니다, 레멤베르.”
“농담 아닙니다.”
“공문 같은 거, 못 받았습니다만.”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
책상 위는 물론, 바닥까지 점령한 서류 더미를 바라봤다.
망연한 표정의 나를 향해 레멤베르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이제 하르트 영지는 백작님 소유입니다.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곤란합니다.”
“……애초에 ‘명예 백작’에게 이건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받은 영지도 한두 개가 아니고, 어째서 내가 국방 쪽까지 살피고 있어야 하는지…….”
국경선 근처 영지에 몬스터 무리가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보고가 담긴 서류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백작님의 영지 중 일부가 국경선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어째서 ‘명예 백작’이 변경백의 역할을 맡고 있어야 하는 겁니까!”
변경백, 백작, 명예 백작.
이 셋은 전부 백작이지만 그 대우나 특혜가 다르다.
명예 백작은 백작과 동등한 위치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만, 단승 작위다. 다른 이에게 작위를 물려줄 수 없고, 죽으면 그 영지는 제국에 귀속된다.
백작은? 알다시피 작위를 물려주는 것이 가능하다. 자신만의 ‘가문’을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변경백은 변경, 즉 다른 왕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영지를 갖고 있는 백작을 뜻한다.
사실상 이름만 백작이지, 후작과 거의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국방의 일부를 책임지고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백작이 변경백이 된 것도 아니고, 명예 백작이 변경백이 되어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폐하께 따지시지요. 백작님께 명예 백작 이상의 권리와 일을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폐하이시니까요.”
“따질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깊은 한숨과 함께 책상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괜히 반발했다가 목이 날아간 이들이 한둘이 아니거늘, 어느 누가 황제에게 따지겠는가.
아무리 그가 황실에서 관리해야 할 영지를 내게 하사했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 그 영지.’
내가 변경백 역할을 맡게 만든 그 영지는 사실 변경에 위치해 있지도 않다. 오히려 중앙에 더 가까운 편이지.
다시 말해 원래는 황실에서 관리해야 하는 영지였다는 것이다.
황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그 영지를 하사했던 거고. 빌어먹을.
난 명예 백작에 만족하는데, 어째서 뭘 더 안겨 주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다.
“……그보단 하르트 영지를 반납할 방도를 찾아야겠습니다.”
다른 영지, 심지어 날 변경백 역할을 맡게 한 그 영지마저도 순순히 넘어갈 수 있지만, 하르트 영지만큼은 싫다.
‘전’ 하르트 백작가가 맡고 있던 영지인 만큼 썩 좋은 추억이 없거든.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의 배신으로 좋았던 추억이 최악의 과거로 변모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임시로 맡아두는 것도 짜증 났는데, 누구 마음대로 소유권을 넘겨?
이건 절대 못 넘어간다.
“순순히 받아 줄 리는 없을 테고…….”
임시로 맡아 둔 것 자체가 황제가 억지로 떠맡긴 것이었으니.
역시 직접 만나서 도로 가져가 달라며 빌어야 하나.
뼈아프지만 한 번에 한해 황제가 원하는 것은 실행 가능한 선에서 뭐든 들어주겠다며 거래를 요청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황제가 마냥 미친놈은 아니라서 흥미로운 거래는 받아들인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조만간 폐하께 찾아가 봐야…….”
똑똑.
내 말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문 너머에서 절대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소식이 들려왔기에.
“백작님, 네메세우스 장군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두 눈이 크게 뜨여 있음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장군님이? 왜? 황제의 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째서 직접 온 거지? 뭔가 큰일이라도 생겼나?’
설마 날 잡기 위해 온 건 아니겠지?
벌컥 문을 열었다. 앞에 서 있던 시종과 눈이 마주쳤다.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 바들바들 떠는 시종을 보고 나서야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이곳에서 내 눈은 보기 거북스러운 것이었지.’
착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슬슬 인간계에 적응할 만도 하건만, 내 정신은 아직도 마계에 있는 모양이었다. 상식과도 같은 사실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다니.
방심했다.
황족들과 기사단, 레멤베르 등의 나와 관계가 깊은 이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내 눈을 보기 거북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슨 일로 오셨답니까?”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눈치 빠른 집사가 대신했다.
“이 늙은이의 생각에는 이번에 잡은 혁명군과 관련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공문 같은 거 못 받았습니다만.”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
어째, 기시감이 드는데. 그거 방금 했던 말 아닌가?
나는 다시 한번 방 안의 서류를 쭉 둘러보고는 이내 깊은 한숨과 함께 걸음을 뗐다.
어찌 되었건 장군님을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으니까.
네메세우스는 8년 전쟁 당시 내가 선봉장이 되었을 때 직속 상관이었던 사람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은근히 나와 거리를 두려 했다는 것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 사람이 굳이 이렇게 왔다는 것은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뜻일 터.
아마 황제의 명, 뭐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무의미한 추측을 이어 가며 응접실 문을 연 나는, 안에 있는 이들과 눈이 마주치고 그만 굳어 버렸다.
“오랜만이네, 백작.”
“……데온 하르트가 미래의 제국을 뵙습니다.”
***
“하르트 명예 백작이 저택을 습격한 혁명군을 생포했다네?”
“!”
“폭탄도 맨손으로 잡았다는군.”
정원에서 황녀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던 황태자가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앞에서 찻잔을 기울이던 황녀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침착하게 입안의 액체를 넘긴 그녀가 잔을 내려놓는다. 덩달아 고개가 숙어졌다.
“하르트 명예 백작…….”
“아니 뭘 또 시무룩해하고 그래.”
그녀의 머리 위로 먹구름이 보이는 것만 같아 황태자가 급히 꼬았던 다리를 풀며 얼굴 위에 난색을 띠었다.
연회가 있었던 이후 며칠째, 황녀는 우울해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제가 꼴 보기 싫겠죠?”
“지금까지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행동이었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하지만 피를 토했잖아요!”
기어이 언성을 높인 황녀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황태자는 보이지도 않는 눈치였다.
인정한다. 가만히 있어도 주변에 사람이 꼬이는 신분과 외모상 역으로 누군가를 꼬시려 든 적이 없어 서툴렀다.
애초에 다른 고급스러운 방법이 있었다 해도 사용할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큰 사고를 칠 생각은 없었는데.
“망했어……. 그동안의 노력이……!”
“애초에 별로 먹히는 수작도 아니었던 것 같다만…….”
“역시 사과해야겠죠?”
“직접?”
“네!”
“안 돼.”
황태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지간한 것은 막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두겠지만 이건 아니다.
“네가 그의 저택을 방문하든 그가 네 부름을 받고 황궁으로 오든 직접 만나게 된다면 필시 추문이 생길 거다.”
“그럼 저야 좋죠. 추문을 기정사실로 만들어서 그대로 혼인하면…….”
“알레테아.”
짧은 침묵이 일었다.
그는 동생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넌 그를 사랑하지 않잖니.”
“…….”
“그리고 사과는 네 연기에도 오점을 남길 거야.”
‘황녀’는 고작 그런 일로 사과를 할 정도로 똑똑하지 않으니까.
그제야 황녀의 눈에 동요가 일었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나쁘게 말하면 멍청한 황녀. 그게 알레테아에 대한 세간의 평이다.
“그만두고 싶다면 나야 환영이지만.”
“……됐어요.”
황녀가 의도한, 황제와 황태자를 위해 뒤집어쓴 오명.
황태자의 입장에서는 동생의 희생을 증명하는 미안한 평가.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에 황위 계승 문제로 또 편을 가를 수는 없잖아요.”
“그래……. 계승 싸움은 지긋지긋하지.”
“그리고 하르트 명예 백작 문제라면 걱정 마세요. 그를 사랑하진 않더라도 좋아는 하니까.”
저 작은 머리통이 무슨 생각을 품고 일을 진행하는지 추측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황태자는 황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 그만둬도 좋단다. 누구도 네게 무언가를 강요한 적은 없으니.”
가만히 그를 보던 황녀가 배시시 웃었다.
“알아요. 그러니까 오라버니는 하르트 명예 백작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고 오세요.”
“……뭐?”
“어서요. 제가 갈 수는 없잖아요?”
“아니, 뭔가 결론이 이상한데…….”
오라비의 등을 떠밀며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황녀는 감이 좋다.
그녀의 감이 데온 하르트는 제국의 가장 불안한 영웅이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 그를 혼인을 통해 황실에 완벽하게 묶어 둘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을 뿐.
“정말 하르트 명예 백작을 꾀어내고 싶다면 방법부터 바꿔야 할 거다.”
“멍청한 황녀는 이런 방법밖에 몰라서 죄송하네요!”
“…….”
데온 하르트가 넘어오든 넘어오지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황녀’가 그에게 호감을 표했다는 것과 그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것.
물론 넘어와 주면 고맙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청혼서를 보내는 순간 데온 하르트는 선택해야 한다.
거절하고 평생 혼자 살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물론 어디까지나 감일 뿐이니 청혼서는 아직 보류해 뒀지만.’
“그래, 간다, 가. 어차피 하르트 명예 백작을 만나려 했으니 겸사겸사 알아봐 주마.”
“역시 오라버니!”
“하지만 네 실례를 불쾌히 여기는지 정도만 확인할 거니 기대하진 말고.”
***
아슬아슬하게 정신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내 심정을 대신하듯 딱딱하게 굳어 어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황태자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장군님이 아닌 황태자가!
‘어째서 아무런 기별도 없이……!’
심지어 그걸 아무도 알리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으로 ‘네메세우스의 방문’만을 알린 시종을 노려보았다. 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찰나, 황태자가 부드럽게 나를 불렀다.
“사용인들을 질책하진 말게. 내가 말하지 말라 했으니.”
“……네, 전하.”
황태자의 앞이다. 즉시 자세를 바로 했다.
약간의 여유가 생기고 나서야 뒤늦게 네메세우스 장군이 눈에 들어왔다. 연회장에서는 하도 정신이 없어 대충 보고 넘어갔던 그의 모습이.
전장을 휘젓느라 햇빛에 그을린 피부.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
전쟁 당시와 변함없는 모습을 한 자신의 전 상관은,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눈치로 살펴보건대, 아무래도 황태자가 따라온 것이 불만인 듯싶다.
즉, 황태자가 멋대로 따라왔다는 건데……
왜?
“폐하께서 자네가 잡은 혁명군의 인도를 원하시네. 뭐, 그건 장군에게 말씀하신 것이니 나와는 상관없지만……. 개인적으로 흥미가 생겨서 말이야.”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자네, 날아오는 폭탄을 맨손으로 잡았다면서?”
“…….”
순간 썩은 표정을 지을 뻔했다.
상대가 황태자라는 것을 자각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불손한 태도로 끌려갈 뻔했네.
그나저나 그 소식은 어디서 들은 거야?
그때 유난히 큰 감명을 받은 것 같았던 리엔 경을 떠올린 순간 황태자가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서 그 소식이 새어 나간 건지 고민할 필요 없네. 그날 많은 이들이 목격하지 않았나. 자네가 모든 사용인들의 입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사 막았다 하더라도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간 누군가 말을 퍼트렸을 수도 있지.”
덧붙여서 친절하게 이미 수도에 소문이 파다하다고까지 말해 주시니……. 위가 쓰리다.
이런 식으로 실력이 부풀려져 봤자 황제의 기대가 커지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참고로 난 황제의 기대 따위 전혀 반갑지 않다. 위험한 일에 더 자주 끌려 나가게 될 테니까. 더해서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커지는 법이다.
이렇게 내 수명이 더 짧아지는구나…….
“농이네.”
“네?”
“여기에 온 이유 말이야. 자네가 폭탄을 잡은 건 대단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 내가 이곳에 올 이유는 못 되지.”
“아, 그럼…….”
“연회 당시에 있었던 황녀의 무례를 대신 사과하러 왔네.”
“아…….”
뒤에서 급습한 걸 말하는 건가.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젠 익숙해서 괜찮은데.
게다가 진심으로 공격하려는 의도도 아니고 단순한 호감 표시이니 내 입장에서는 이를 뭐라 할 수도 없다.
그걸 알 텐데도…….
“미래의 황제라는 자리는 참 무거워서 사과도 함부로 못 하더군. 사적으로 찾아가면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게 될 테니 이렇게 공적인 일을 핑계로 따라왔네.”
“…….”
“황녀는 내가 따끔히 혼내 두었으니 당분간 이런 일은 없을 거야.”
……당분간?
황녀의 성격을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너무 솔직하신 거 아닌가? 그래도 황태자인데.
황태자는 스스로가 뱉은 ‘당분간’이라는 말이 양심에 찔렸는지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눈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사과를 받아 주겠나? 백작.”
“……물론입니다. 애초에 사과하실 필요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그랬겠지. 하나 자네는 피를 토하지 않았나.”
“…….”
그거 피 아니었는데.
차마 말하지도 못하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사이,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흘리듯 말했다.
충격적인 내용과 달리 여상한 말투였다.
“불쾌히 여기지 않는다니 다행이야. 사실 폐하께서 신임하시는 자네와 친해지고 싶었네.”
“……네?”
“자네는 너무 바쁘지 않은가. 그간 친분을 쌓았다고는 하나 거기까지일 뿐인 친분일 테니.”
“…….”
“그래서 알레테아가 무례를 저지르고 그 일로 자네가 피를 토했을 땐 망했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지.”
망했…….
지금 내가 뭘 듣고 있는 거지……?
“때문에 사과도 할 겸 친분을 쌓으러 이렇게 직접 왔네만, 이런 내가 거북한가?”
“아, 아닙니다.”
“그렇다는 건 자네와 친해지려는 내 노력이 괜찮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다행이군. 그럼 앞으로 황궁에 올 때마다 종종 내게 들러 줄 수 있겠나?”
“……네?”
지금 빠져나올 수 없는 무언가에 걸려든 기분인데.
어째서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건지 상황을 되짚으며 얼빠진 얼굴로 눈만 깜빡이자, 그런 내 기분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려 주듯 황태자가 얼굴 가득 따스한 미소를 피워내며 덧붙였다.
“굳이 날 보러 찾아와 달라곤 하지 않겠네. 황궁에 온 김에 들러 주면 돼. 같이 차도 마시고 검도 맞대며 대화를 나눠 보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