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43
43. 명예 백작 데온 하르트(8)
“아니, 애초에 평민인 우리가 글을 뗀 것이 기적 아니냐? 거기까지 읽은 걸 뿌듯해해야지.”
“흐핫, 교사들이 고생 좀 하긴 했지.”
“고생은 무슨. 달달 떠는 게 재밌어서 장난 몇 번 쳤더니만 다들 그만둬 버리고. 그 탓에 네메세우스 장군님께 글을 배웠잖아. 무서웠다고.”
“그래서, 우리 기사단만 간다고? 백작님도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던 대화가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런 식의 대화법은 로프티 기사단의 특징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클레터가 한숨 쉬듯 답했다.
“그래.”
“왜?”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한심하단 눈빛이 바로 내리꽂혔다.
녀석이 상처받았다느니 어쩌니 하며 웅얼웅얼 물러나고, 침묵이 찾아왔다.
골똘히 머리를 굴리던 클레터가 생각보다 길어지는 침묵에 문득 동료들을 둘러봤다.
생각을 하는 건지 멍을 때리는 건지, 드물게도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
“……침 흐른다.”
“쓰읍.”
그래, 이놈들한테 뭘 바라겠어. 사고나 안 치면 다행이지.
결국 운을 떼는 역할을 하는 것은 이번에도 이쪽이다.
“일단 우리 기사단만 가는 건…… 근처에 국경선이 있어서일 테고.”
한 개의 기사단으로만 몬스터 토벌을 나서는 경우는 드물다.
토벌해야 할 몬스터의 수가 많을수록 운용하는 기사단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보통 아무리 적어도 2개에서 평균 3개의 기사단이 움직이는데, 그런 의미에서 일반적인 기사단이었다면 이번 토벌은 조금 위험할 수도 있었겠지만…….
클레터는 피식 웃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기사단의 경우일 뿐.
‘몬스터가 감정이 있는 한, 걱정은 없지.’
전부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쫓아낼 수는 있으리라.
그렇다면 남은 것은 백작님이다.
백작님 성격을 생각하면 반드시 같이 가려 하셨을 텐데. 심지어 피를 본 지 꽤 된 데다 하루 종일 집무실에서 살고 계시니 분명 상당히 답답하셨을 것이다.
그런 분의 눈앞에 이리도 좋은 탈출로가 생겼건만, 어째서 안 가시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려던 찰나, 초를 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왜?”
클레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것들이 멍청하다 멍청하다 했더니만, 두 배로 멍청해진 모양이다.
근처에 국경선이 있어서 한 개의 기사단만 움직인다는 말이 그리도 어려웠을까.
“등신아, 일반 몬스터 토벌을 하듯이 여러 기사단이 우르르 가면 상대 왕국 입장에서 어떨 것 같냐?”
“뭐 이 등신아? 그 정도는 나도 알거든?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우리 기사단만 가는 게 뭐가 문제냐고. 백작님은 혼자서 가시기도 했잖아.”
“아 그거? 그 지역 근처 영주의 군대를 통솔하여 토벌했다고 들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혼자가 아니지.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백작님이…….”
“같이 안 가시는 거? 난 이유 알 것 같은데.”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리자 여기 있다는 듯 밀란이 손을 번쩍 든다.
실컷 얻어맞았는지 꼴이 아주 엉망이다. 옷에 묻은 흙이라도 털 것이지. 흰옷이라 눈에 잘 띄어도 너무 잘 띈다.
생각은 그리하면서도, 클레터는 남의 옷에 오지랖을 부리는 대신 그의 말에 주목했다.
“알 것 같다고? 뭔데?”
“내가 전에 집무실에 방문했을 때 서류가 바닥까지 꽉꽉 차 있었거든. 일이 어지간히도 밀린 모양이던데.”
“한 마디로, 너무 바빠서 토벌을 나갈 여력조차 없다?”
“세상에.”
“우리 백작님, 안쓰러워서 어째…….”
단원들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엔 코피를 흘리며 기절하셨댔지. 그게 다 밀린 서류를 처리하느라 무리한 탓인 듯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모든 단원들의 머릿속엔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역시 백작님도 토벌에 데려가야겠어.”
“아무래도 백작님을 구출할 사람은 우리밖에 없는 것 같지?”
“마침 의사도 피로랑 스트레스를 조심하라 했댔고.”
“스트레스…… 역시 몬스터 토벌이 답이네.”
“피로도 몬스터 토벌을 다녀오면 싹 풀리지 않을까? 얼마 전에 백작님 홀로 토벌을 다녀오셨을 때, 얼굴이 아주 반질반질해져서 오셨던데. 솔직히 누가 봐도 피로가 싹 풀린 얼굴 아니었냐?”
살인귀 기사단은 데온 하르트를 좋아한다.
상관으로서는 존경스럽고, 전쟁터에서는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었으며, 고작 평민인 자신들을 신분으로 차별하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최대한 잃지 않기 위해 애쓴 훌륭한 지휘관이다.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기에 그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티를 내진 않았어도 적지 않게 놀랐다.
몸이 약한 그의 특성상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지만, 그래도 되도록이면 그 횟수가 줄어들길 바라는 기사단원들로서는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을 강구했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가자! 백작님을 조르러!”
백작님을 위해서 반드시 백작님을 몬스터 토벌에 데려가야 한다!
흰 기사복을 입은 장정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우르르 집무실을 향해 몰려간다.
위장약을 들고 비척비척 걸어가던 한 백작저의 기사가 우연히 이 장면을 목격하고 약통을 떨어뜨렸다.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
살인귀 기사단을 토벌에 보내겠다는 판단을 내린 후, 나는 한결 홀가분한 기분으로 일 처리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 미친개들이 내 눈앞에서 사라진다니 벌써부터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다.
위치가 국경선 근처라 좀 불안하긴 하지만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그놈들이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얼간이도 아니고.
“백작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니요. 멀쩡합니다.”
가장 큰 골칫거리도 대충 해결했겠다, 나는 집사 레멤베르와 백작저의 ‘세작’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신속하게 적에게 알려 황궁에 갈 때 습격받도록 만든 그 새끼. 그 새끼를 그냥 두고 넘어갈 리가 없잖은가.
그렇다고 사용인들을 싹 다 갈아엎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든 최대한 손해가 적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녀석을 걸러내야 하는데…….
“백작니이이이임!!”
“저희끼리만은 토벌 못 갑니다아!!”
“같이 가시죠!”
빨리 꺼졌으면 하는 놈들이 쳐들어왔다.
뭐, 이 새끼들아? 어딜 같이 가자고?
내 손에 들린 펜이 툭 떨어졌다. 이 상황이 꽤나 흥미로운 듯 레멤베르의 눈이 인자한 주름을 만들며 휘어졌다.
나는 황망한 얼굴로 집무실 한쪽을 당당히 차지한 놈들을 바라봤다.
이거 지금 내가 네놈들을 위험한 곳에 보낸다고 반항하는 거지?
설마, 날 죽이려고 같이 가자는 건가? 토벌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쓱싹하려고?
“정확히…… 너희끼리만은 아니잖아. 리엔 경도 같이 갈 텐데?”
“리엔 경도 우리 기사단 소속 아닙니까! ‘저희끼리’가 맞는 말이죠!”
얼씨구. 낙하산이니 어쩌니 할 때는 언제고.
물론 어디까지나 장난을 치려는 의도일 뿐 진심으로 무시하거나 경멸하지는 않았다만, 그래도 낙하산 타령하며 리엔 경을 외부인 취급을 했던 것은 이놈들이다.
황당함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데, 상황을 지켜보던 레멤베르가 느릿하게 나섰다.
“주제넘은 참견입니다만, 늙은이의 오지랖이라 생각하고 들어주십시오.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가요?”
“예, 최근 일주일간 이 늙은이가 백작님을 많이 괴롭혔잖습니까. 그에 대한 사죄이니, 짧은 휴가라 생각하고 다녀오시지요.”
사죄면 보통 내가 좋아하는 걸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이젠 나도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내 애매한 표정이 어떻게 비쳤는지 레멤베르가 얼굴 가득 중후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마침 주치의도 피로와 스트레스를 주의하라 했으니 중간에 한 번은 쉬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쉬어’야지.
몬스터 토벌은 쉬는 게 아니라 극악한 난이도의 ‘일’이라고!
보통 몬스터 토벌을 다녀오면 ‘피로’랑 ‘스트레스’가 둘 다 쌓이는 게 당연한 상식 아닌가?
나 역시 그 ‘보통’의 범위에 속하는데, 도대체 날 어떻게 보고 있으면 그런 말이 나오는지…….
“얼마 전에 백작님께서 홀로 몬스터 토벌을 다녀오셨을 때, 얼굴이 활짝 피어서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 짙던 눈 밑 그늘도 사라져 오셨던데, 말은 못 드렸지만 이 늙은이도 많이 놀랐습니다.”
“아, 그건…….”
마계에서 푹 쉬었으니 그런 겁니다만.
거기서는 서류 작업 같은 거 없이 하루 종일 뒹굴거리기만 하는데, 당연히 다크서클이 사라지고도 남지.
아, 생각하니 또 마계로 가고 싶다. 그곳에서는 정신만 피곤했는데, 여긴 육체까지 피곤하니 정말 미치겠다.
뭐, 정작 그쪽에 가면 다시 인간계를 그리워하겠지만.
“어차피 밀린 일입니다. 더 밀려봤자 티도 나지 않을 테니 마음 편히 다녀오십시오. 서류 정리는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놓겠습니다.”
“그게…….”
“맞습니다, 백작님! 같이 가시죠!!”
“그러니까…….”
난 가기 싫은데.
얼굴이 활짝 핀 것도 그게 이유가 아니고.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다크서클이 어째서 사라졌는지 설명해야 할 테고, 필연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될 테니.
결국 내게 선택지는 없었다. 더해서 덧붙인 레멤베르의 말이 결정타였다.
“백작님께서 움직이시면 백작저에 숨어 있는 녀석도 같이 움직이겠지요. 이 늙은이가 확실하게 잡아낼 테니 백작님께서는 그저 즐기다 오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세작을 잡아내겠다는데 뭐라고 해. 반대할 이유가 없잖아.
결국 나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긍정을 표했고,
그리고 지금.
“백작님! 저기 몬스터가 보입니다!”
“……그래…….”
“쳐부수러 가즈아앍!”
“상관의 명령도 없이 그렇게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건 어디서 배웠지?! 당장 정렬하지 못하나!”
“쿨럭, 쿨럭……. 단장…….”
“단장이 아니라 ‘단장님’이다.”
여긴 어디. 난 누구.
나는 왜 이 위험천만한 곳에서 미친놈들과 함께 있는 걸까.
그 와중에 리엔 경은 한 줄기 빛처럼 확실하게 이 미친개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리엔 경이 낙하산으로 오게 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지.
처음에는 이놈들 중 가장 잘 싸우는 밀란을 단장 자리에 앉혔는데, 지휘를 해야 할 녀석이 적을 보기가 무섭게 이렇다 할 말도 없이 가장 앞장서서 우렁찬 함성과 함께 달려 나가더라.
그래서 그다음은 가장 침착한 클레터를 단장 자리에 앉혔고.
[자아 새끼들아, 저기 적이 보이지?] [그럼 가자아! 돌겨어어어억!!]나는 깨달았다. 저놈은 침착한 것이 아니라, 침착해 보이는 것일 뿐이었다는 것을.
결국 저놈도 미친개들 중 하나일 뿐이다.
‘돌격’만 외치면 지휘인 줄 아나.
절대 이놈들 중에서 단장을 뽑아서는 안 되겠다. 그랬다간 망해. 분명 망한다.
그리하여 온 사람이 바로 리엔 라이너다.
이런 식의 낙하산이 아니더라도 정식으로 좋은 기사단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인데. 그녀에게는 미안할 따름이다.
그래서 언제나 애를 잘못 키운 어미의 심정으로 내심 리엔 경의 눈치를 살피곤 했는데, 이 몹쓸 것들은 내 마음도 모르고 눈치 없이 따박따박 말대꾸에 사고를 쳐 댔다.
심지어 그건 오늘도 그랬다.
“막무가내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에게 달려드는 것은 백작님께서 가르쳐 주셨는데…….”
“맞아, 무조건 달려들라고 하셨지.”
“미친놈도 꺼리는 미친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더해서 모함까지!
내가 언제?! 기껏 저택에서 지내는 걸 허락해 줬더니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기냐?
슬쩍 리엔 경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오해하는 건 아니겠지.
누가 봐도 질린 듯한 안색이지만, 오해한 건 아닐 거야.
‘젠장…….’
그럴 리가 없잖아. 확실히 오해했구만.
저러다 기사단장을 그만두겠다고 하면 어쩌지. 그나마 그녀가 있어서 저놈들이 통제 가능한 건데.
이러다 정말 사직서를 내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함에 서둘러 해명을 시도했다.
“저…….”
“백작님을 모욕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말을 제대로 꺼내 보기도 전에 진중한 사과가 훅 치고 들어왔다.
아니, 애초에 내가 그런 걸 가르치지 않았을 거란 가정은 없는 거냐? 저놈들의 모함이라는 가정은?
한 치의 의심도 없는 굳건한 눈동자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