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47
47. 전조(2)
“역시 재상은 눈치가 좋아.”
그제야 황제가 표정을 풀고 희미하게 웃었다.
전쟁을 하기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때까지 전쟁에 관한 것은 숨기는 게 좋겠지.
눈동자를 아래로 내려 조금 전까지 읽고 있던 서류를 눈에 담았다.
최근 빈민가에서 급격히 세를 넓혀 가는 사이비 종교에 대한 내용을 재차 훑으며, 황제가 읊조리듯 말했다.
“전쟁 중에 생기는 사이비 종교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전쟁 전에 청소는 한번 하고 가야지.”
나라가 혼란스러우면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친다.
이해한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백성들이 기댈 곳은 종교밖에 없을 테니.
그러나 전쟁을 치르지도 않는데 존재하는 사이비 종교는 재고의 여지가 없다. 심지어 그것이 몸집을 위협적으로 불리고 있는 종교라면 더더욱.
전쟁이 시작되면 세력이 더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테니 전쟁 전에 깡그리 소탕해야 한다.
‘누구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까…….’
바빠 보이는 재상을 손짓으로 물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역시 벌이라는 명목하에 데온 하르트에게 맡기는 것이…….”
고작 광신도를 소탕하는 것이니 부상을 입은 그라 할지라도 큰 무리 없이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무사히만 끝낸다면 그것으로 상을 내릴 수도 있고.
그러한 생각은 별다른 긴장감 없이 입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듣는 이라고는 네메세우스 밖에 없는 데다, 전쟁에 비하면 그리 중요한 사안도 아니니 툭 내뱉었을 뿐이건만.
“폐하, 지금 데온 하르트라 하셨습니까?”
“…….”
순간 아차 한 황제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잊고 말았다. 네메세우스는 데온 하르트의 중용을 극렬히 반대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왜 또 데온 하르트냐는 듯 드물게 똑바로 마주해 오는 단호한 눈동자를 보며, 그는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
“대장.”
“내일도 싸워야 하는데 왜 안 자고 나왔……. 너 얼굴이.”
“악몽을 꿔서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 있어. 너 지금 안색이 말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매일 밤 제가 죽인 이들이 꿈에 나옵니다. 그것도 죽었을 당시의 모습으로. 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피를 뚝뚝 흘리며 제게 다가오는데…….”
“…….”
“살려 주세요. 대장의 말대로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몇 번이고 되뇌면서, 맨정신으론 힘들어서 가르쳐 주신 대로 약도 했어요. 그런데도 미칠 것 같습니다. 괴로워요. 약은 싸울 당시에만 먹히지, 끝나고 나면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라서……!”
“진정해. 진정하고 조금만 생각을 달리해 보는 건 어때?”
“예?”
“넌 상대를 죽이기 위해 약을 한 것이 아니라, 약 기운에 휘둘려 상대를 죽인 거야. 약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거지.”
“대장……? 그건 무슨 쓰레기 같은 마인드…….”
“푸하, 그래? 그럼 이건 어때? 아, 그 전에, 내가 미처 말을 못 했는데, 너 여기 다쳤더라.”
“예? 어? 언제…….”
“…….”
“아! 만지지 마십쇼! 아프잖습니까!”
“그치, 의식하고 나니까 아프지? 사실 나 좀 전에도 그 상처 눌렀었어. 근데 넌 모르더라.”
“…….”
“모른 척해. 굳이 떠올리지 마. 생생하게 떠오른다 했지? 그건 의식해서 더 선명한 거야. 약을 했을 당시의 기억은 몽롱한 상태 그대로 둬. 떠오른다 해도 외면해. 그건 네가 한 게 아니니까.”
“…….”
“네가 한 게 아니야.”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 저택에 돌아와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국경선 근처에 있었는데, 정신 차리고 나니 내 집이라니!
어깨의 상처만 아니었다면 꿈인 줄 착각했으리라.
듣자 하니 날 습격했던 놈들은 어찌어찌 잘 해결했다고 한다. 나는 그 이상 캐묻지 않고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살인귀 놈들이 같이 있었으니 알아서 잘 해결했겠지. 솔직히 그것에 대해서는 굳이 진지하게 파고들고 싶지 않다.
그놈들의 손속이 잔인한 것은 온 세상이 알고 있는 사실이거니와, 그때 맞았던 화살과 뒤따라온 화끈한 고통을 다시 상기하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행위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유야무야 며칠간의 시간이 지나고, 오늘 레멤베르가 방대한 양의 서류를 들고 조용히 대화를 요청해 왔다.
……‘방대한 양의 서류를 들고’.
‘불길한데.’
일단 명목은 대화 요청이니 수락하긴 했다만, 저 서류의 위용이 엄청나다.
오죽하면 레멤베르가 들어올 때 웬 서류 더미가 걸어오는 줄 알았을까. 난 내가 서류 작업 스트레스로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아무튼 서류를 든 채 대화를 할 수는 없는 노릇. 그가 근처 책상 위에 서류를 내려놓는다. ‘쿵!’ 하는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책상이 잘게 진동했다.
“쿨럭.”
“괜찮으십니까?”
“아, 예.”
“피를 토하진 않으셨는지요.”
“예.”
아쉽게도.
“다행입니다. 어깨를 다치셨는데 피를 토하셨다면 참으로 당혹스러울 뻔했습니다”
지금 비꼬냐?
삐뚜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레멤베르가 부드럽게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나직이 헛기침을 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백작님께서 토벌을 나가신 사이, 세작을 잡아냈습니다.”
“오.”
“아쉽게도 배후를 캐내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가 허리를 숙인다. 군더더기 없는 몸짓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제국의 귀족들보다 더 고급스럽다. 도대체 이 집사, 뭐 하던 사람일까. 대륙 중앙에 있는 고립된 작은 나라 출신이라고는 들었는데……. 혹시 고위 귀족 출신인 거 아니야?
의심이 담긴 잡생각은 금세 이어진 목소리에 끊겼다.
“백작님 역시 배후를 캐내는 데 실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렇다고 듣긴 했다. 그런데 그건 왜? 시비 거는 건가?
“그렇다는 것은 그 배후가 만만하지 않은 존재라는 뜻이겠지요. 후보로는 혁명군 또는 적대 왕국이나 귀족파의 수장인 일루스터 공작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비가 아니었구나. 우리 집사님 정말 유능하시네.
저택 관리도 잘하고, 서류 작업도 잘하고, 예법도 깍듯이 잘 차리는 데다 추리까지 잘하시니.
이거 거의 만능 아니냐? 전투만 잘하면 진짜 만능인데?
‘아니, 싸움도 제법 했던 것 같은데…….’
그가 혁명군을 엎어치기로 제압했던 것이 떠올랐다.
레멤베르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제 사견으로는 일루스터 공작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어느 쪽이건 백작님께서 혼자 손을 대기엔 버거운 존재일 테니 여기서 물러나거나 황제 폐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주제넘은 참견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뇨……. 감사합니다.”
너무 넋을 놓고 답한 모양이다. 오묘한 은청색 눈이 잠시 나를 담았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그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빙긋 웃더니 조금 전 내려놓았던 서류 더미를 향해 발을 뗐다.
어, 아니, 잠깐, 그건 왜…….
“서류가 많이 밀렸습니다.”
“으, 으음…….”
“다행히도 다친 곳은 왼쪽 어깨이니, 펜을 쥐고 쓰는 데에는 문제가 없겠지요. 백작님은 오른손잡이시잖습니까.”
쿵! 저쪽 책상에서 울렸던 소리와 진동이 이번엔 내 책상에서 울렸다.
나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앞에 쌓인 서류 더미를 보다가 슬쩍 레멤베르의 눈치를 살피고는 맨 위의 서류를 하나 집어 들었다.
[하르트 영지의 댐 건설에 관한 설계 도면…….]“아!”
“왜 그러십니까?”
“폐하를 뵈어야겠습니다.”
하르트 영지의 반납을 요청해야지.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잠시 잊고 있었다.
절대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원래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다.
눈치를 살펴서 분위기가 괜찮다 싶으면 지금 내 저택에서 농땡이 피우는 살인귀 기사단 놈들도 반납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겉옷을 챙겨 들었다.
뒤따라붙는 레멤베르의 시선은 끝까지 무시한 채였다.
***
왼쪽을 봤다. 황태자가 차를 마시고 있다.
오른쪽을 봤다. 황녀가 내 팔에 매달려 있다.
여긴 어디. 난 누구.
난 그냥 황제를 만나러 왔을 뿐인데, 어째서 지금 황족들과 티타임을 갖고 있는 걸까.
새삼 상황을 다시 자각하니 목이 타는 것 같아 반쯤 영혼이 나간 표정으로 차를 들이켰다.
‘차향은 또 끝내주네.’
하…….
누굴 탓하랴, 이게 다 타이밍을 잘못 맞춘 내 잘못이지.
조금 더 일찍 오거나 늦게 올 것을, 하필이면 황제가 누굴 만나고 있을 때 와 가지고.
항상 곧바로 황제를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이게도 오늘은 기다리라는 말이 돌아왔다.
먼저 온 손님이 있다는데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난 분명 얌전히 기다리려 했다. 오래 걸리지도 않는댔으니 정말 얌전히 기다리려 했는데…….
[백작니이이읽! 콜록, 콜록!!] [화, 황녀 전하?!] [실례했군, 백작.] [황태자 전하!]황태자와 황녀가 등장했다.
어째서인지 황태자가 황녀의 뒷덜미를 잡고 있는 묘한 상황이었으나 오히려 그 덕에 파악은 빨랐다.
황녀가 또 나를 기습하려 했구나. 황태자가 그걸 막아 준 거고.
어휴, 죽을 뻔했네. 이 허약한 몸은 황녀의 체중을 실은 포옹조차 견디기 버거우니 그런 상황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다.
눈빛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며 침착하게 예를 갖추는데, 나를 물끄러미 보던 황태자가 대뜸 폭탄을 던졌다.
[사과의 뜻으로 차를 대접하고 싶은데, 응해 주겠나?]거절은 거절한다.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도망갈 구멍을 미리 막아 놓기까지 했다.
[시종이 찾으면 바로 보내 주겠네. 폐하를 알현하기 전까지 잠시 쉰다고 생각하면 되겠군.] [아, 그게…….] [황궁에 올 때마다 종종 내게 들러 주겠다 하지 않았나. 혹, 그건 거짓말이었…….] [아닙니다. 너무 영광스러운 나머지 대답이 늦었습니다.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황태자 전하.]그리고 지금.
나는 바짝 마르는 입술을 축이기 위해 벌써 차를 네 잔째 들이켜고 있었다.
……아닌데요. 이건 쉬는 게 아니잖아.
어딜 봐서 이게 쉬는 거야. 정신적 압박을 가하는 거지.
“차가 입맛에 맞는 모양이군.”
“예, 예에…….”
“돌아갈 때 조금 챙겨 주지.”
“감사합니다.”
사실 별로 필요 없는데.
물론 향은 좋다, 향은.
맛은…… 당연하지만 달지도 짜지도 않다. 앞에 설탕이 있긴 한데, 눈치가 보여서 통 손을 뻗을 수가 없으니. 밍밍해서 향수를 잔뜩 뿌린 물을 마시는 기분이랄까.
다시 말해 내 취향은 아니라는 거다. 그냥 목이 타서 마시는 것일 뿐이지.
황태자가 찻잔을 입에 대고 가볍게 손목을 꺾어 기울인다.
그냥 차를 마시는 것일 뿐인데 행동에서 기품과 위엄이 묻어난다. 역시 황태자라는 건가.
그에 비하면 황녀는…….
“백작님, 차만 마시면 물리지 않나요? 쿠키도 좀 드셔 보세요.”
“……예, 감사합니다.”
그냥 생각하지 말자.
황녀가 내민 쿠키를 받아 들며 여전히 별말 없는 황태자를 곁눈질로 살폈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못 말리는 동생을 ‘저걸 어찌해야 하나’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나를 향해 시선을 틀었다.
황족 특유의 황금색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쳤다.
“부상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은가?”
“아, 예, 괜찮습니다.”
반사적으로 어깨를 감싸려던 것을 간신히 제지했다.
황태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주 탓에 몸도 약해졌는데, 되도록이면 조심해야지. 어째서 직접 몬스터 토벌에 나선 건지 이해가 안 되는군.”
“……송구합니다.”
나선 게 아니라 끌려간 겁니다.
하지만 말해도 믿지 않겠지. 백작이 저를 모시는 기사단에 휘둘린다는 걸 누가 믿겠어.
“나한테 송구해하지 말고 본인의 몸에 송구해하게. 오래도록 폐하를 보필해야 하지 않겠나.”
오래도록? 어우, 끔찍하다.
대놓고 거절의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긍정을 표할 수도 없어 말없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배부르다.’
물배가 차 버렸어.
배 속이 출렁이는 듯한 불쾌한 감각에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황태자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자네가 폐하를 잘 보필해 주었으면 하네. 자네니까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난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아.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