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48
48. 전조(3)
하마터면 차를 뿜을 뻔했다.
방심했더니 훅 치고 들어오네. 자네니까 하는 말이라니, 갑자기 이게 무슨…….
갑자기 확 무거워진 대화 내용에 적응하지 못하고 얼어버린 사이, 황태자의 말이 이어졌다.
“입장상 어쩔 수 없이 황태자 자리에 앉아 있긴 하지만 알 사람은 알고 있지 않나. 폐하와 내 나이 차이가 고작 8살이라는 걸. 폐하께서 은퇴할 나이가 되시면 나 역시 은퇴를 준비해야 할 나이가 되어 있겠지.”
8살 차이.
황태자 엘피디우스 데세르트는 20살로, 28세인 황제와는 8살 차이다.
간혹 정보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온 다른 왕국의 사신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에 대고 친아들이 맞느냐 묻지만,
그럴 리가 있나.
황태자는 황제의 조카다.
‘아니, 근데 왜 그걸 나한테 이야기 하냐고요…….’
난 이런 무거운 개인사와는 맞지 않는다.
곤란함이 듬뿍 담긴 내 표정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는데, 망할 황태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황위에 오르는 날이 온다면 그건 폐하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일 테니. 나는 그걸 바라지 않는다네.”
“…….”
“그리고 무엇보다 폐하께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확실히 깨달았지. 나는 그분처럼 하지 못해.”
그리 말하는 황태자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나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결코 부정적인 감정은 아니었다는 것 정도.
‘…….’
황제가 제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고,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그들의 자식까지 죄다 죽였던 것을 생각하면 조카의 존재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물론 그 조카가 숙부를 증오하지 않는 것 역시 이상할 테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유일하게 황제의 손에 죽지 않은 형제가 하나 있었으니까.
9왕자였던 황제가 검을 빼 들었을 당시엔 이미 죽고 없었던 단 한 명의 형제, 1왕자.
나는 잘 모르지만 ‘1왕자가 살아 있었다면 9왕자는 검을 빼 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도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사이는 어지간히 좋았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것 말고도 1왕자에 대해서는 소문이 많았다.
왕족 같지 않게 호구 같은 왕족. 끈 떨어진 연 신세인 9왕자에게 잘해 준 유일한 혈육.
심지어 결혼 후 아이를 낳고도 매일같이 찾아와 그와 제 자식을 함께 돌봤다고 했으니, 현 황제가 1왕자의 자식이자 제 조카인 황태자와 황녀에게 잘해 주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만큼 정이 들었을 테지. 아마 친자식 내지는 친형제처럼 느끼지 않았을까.
그러니 실제로 ‘황태자’와 ‘황녀’로 인정한 것일 테고.
“그러니 폐하를 잘 부탁하네.”
“예……. 예?”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감히 마주한 황태자의 눈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이 밑도 끝도 없는 신뢰는 대체 뭐지? 황족이라면 의심이 미덕 아닌가?’
심지어 잘 부탁한다는 상대가 무려 황제다. 8년 전쟁 때 직접 검을 빼 들고 전장을 휘저으며 영토를 점령해 나갔던 바로 그 황제!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오라버니, 백작님 부담스럽게 뭐하러 굳이 그런 말을 하세요!”
“황녀 전하…….”
“굳이 말 안 해도 백작님이라면 잘하시겠죠!”
절대 아닌데요. 그러니까 ‘나 잘했죠?’라는 눈빛으로 보지 마.
황태자, 댁은 왜 고개를 끄덕이는건데!
“내가 실례했군.”
“아, 아닙니다.”
결심했다. 아무래도 도망가야겠어. 이대로는 계속 부담스러운 화제만 나올 것 같다.
말도 없이 튈 수는 없으니 적당한 핑계를 대고 몸을 뺐다가 돌아오는 것이 좋겠다. 그럼 적어도 분위기가 전환되겠지.
마침 차를 너무 많이 마신 탓에 화장실이 가고 싶었으니 그걸 핑계로 자리를 비우면 되리라.
나는 황태자와 황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차를 많이 마셨지. 다녀오도록.”
손을 내젓는 황태자와 황녀를 향해 한 번 허리를 숙이고 티타임이 벌어지고 있던 정원을 서둘러 나왔다.
‘살았다!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지만, 일단 빠져나온 게 어딘가!
일단 볼일부터 보고 돌아올 때 좀 천천히 걸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경쾌한 걸음으로 황궁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호기롭게 걸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여기가 어디지?’
길을 잃고 말았다.
황궁에 자주 들락날락하는 주제에 길을 잃었다고 한심하게 생각하지 마라.
나는 언제나 곧바로 황제를 만나고 다른 길로 새는 일 없이 바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니 다른 길을 알 턱이 있나.
‘황족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면 곤란한데…….’
내 목숨이 곤란하다.
만에 하나 저들이 내가 자신들을 바람맞혔다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큰일 아닌가.
당혹스러운 마음에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그리 오래지 않아 한쪽 복도 구석에 서 있는 한 시종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
“……!”
아, 너무 반가운 마음에 그만 소리치다시피 부르고 말았네.
화들짝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이쪽을 보는데, 미안한 마음에 살짝 웃어주었더니 어째서인지 흠칫- 몸을 떤다.
……뭐, 착각이겠지.
혹여나 도망갈까 웃음을 지우지 않고 보폭을 넓혀 성큼성큼 다가갔다.
내 악명 때문인지 잔뜩 불안해 보이는 녀석의 표정이 조금 신경 쓰였으나, 지금은 내가 더 급했다.
터질 것 같거든. 이러다 쌀 것 같다.
그게 무엇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여기─”
“으아아아아아!!”
……화장실이 어디냐고 미친놈아.
갑자기 칼을 꺼내 들고 내게 달려드는 녀석을, 나는 놀람보다는 황당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
“갔군.”
“그러게요.”
필시 도망간 것일 테지. 대화가 어지간히도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솔직히 갑작스럽긴 했지.’
하지만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쉽게 생길 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었다.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리며 황태자 엘피디우스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부담을 준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내뱉은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다.
평화로운 수면과 달리 물밑에서는 음습한 움직임이 바삐 일고 있고, 그것의 칼날은 명백히 숙부인 황제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숙부님이 황제가 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움직임.
[지고의 자리에 앉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대로면 평생이 가도 황제의 자리에 앉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귀족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부디 폭군을 처단하여 주시옵소서.]8년 전쟁이 한창 진행되는 중에도 그들은 꾸준히 그를 찾아왔다.
그렇다 해서 그 얼토당토않은 말에 흔들린다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언제까지 이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스스로조차 장담하지 못한다.
저들이 자신도 몰랐던 약점을 쥐고 찾아와 흔들려 들지도 모르니.
약점이 괜히 약점이겠는가. 그 순간이 찾아온다면 자신은 아마…….
‘…….’
군주의 자리가 바뀐 지 10년이다. 전쟁 기간 동안은 여유가 없어 뒷수작을 부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약점 한둘 정도는 충분히 찾아내고도 남을 시간.
지금까지 황태자는 황제의 든든한 방벽 역할을 해 왔다.
황제를 끌어내리려면 그럴싸한 명분뿐만 아니라 빈 옥좌에 앉을 ‘황족’이 필요하니 결국 황태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그들의 행동은 한낱 반란으로 끝난다.
황녀로 대체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이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황태자가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데다 그녀 역시 이에 동의하지 않을 테니.
불순분자들의 ‘행동’은 계속해서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도 이제 한계다. 아니, 한계는 진즉에 맞이했다.
놈들의 행동이 ‘회유’에서 ‘회유를 가장한 협박’으로 바뀌기 시작한 지도 어언 2년.
언제 약점을 잡혀 원치 않는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는 황태자로서는 대비책 마련을 서둘러야 했다.
그렇기에 황제가 유독 신임하는 영웅인 데온 하르트를 주목하는 것은 당연했고.
‘그래도 그 말은 하지 않아서 다행이군.’
고작 그런 말에도 부담감을 못 이겨 도망친 그가 이 말을 들었다면 필시 황궁 밖으로 도망쳤을 테니. 아마 평생 나와 마주치지 않으려 했으리라.
‘만일 황제를 보필하는 데 있어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설령 그것이 황족일지라도.
‘……죽이라고.’
황녀에게 쿠키를 챙겨 주며 다정히 웃었다.
황녀가 눈을 마주하더니 이내 안다는 듯 초승달처럼 눈가를 접고 고개를 끄덕인다. 거기에 맞춰 고개를 끄덕여 주는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다정한 오라버니의 모습이었다.
늘 그랬듯 황태자의 하루는 오늘도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레온의 첩자는 나름대로 홀로 축포를 터트리고 있었다.
황제가 방문객을 상대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집무실에 숨어 들어가 주요 서류를 복사해 빼돌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무려 그 ‘제국’에서! 한낱 소국의 첩자가! 그 엄청난 일을 성공했단 말이다!
당연히 쉽지는 않았다.
황제의 집무실은 꿈도 못 꾸고, 재상의 집무실을 노렸음에도 경비는 빡빡했다.
이레온 왕국의 뻔뻔한 요구에 폭군 황제가 손익도 저울질하지 않고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생각하여 사전 조사 시간의 한계를 일주일로 두었기에 더 까다로웠다.
‘난 이제 내 모국으로 돌아간다 이 빌어먹을 놈들아!’
여기에 온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되건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돌아가지는 않는 모양이다.
“거기!”
“……!”
명백히 이쪽을 부르는듯한, 큰 목소리.
설마 눈치챈 것일까.
찔리는 것이 있는 터라 저도 모르게 몸을 크게 떤 첩자가 뒤늦게 아차 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부른 것일 뿐인데 화들짝 놀라는 시종이라니. 누가 봐도 수상하지 않나.
‘어떡하지?’
아직 품속에는 중요한 서류가 들어 있다. 이대로 잡히면 빼도 박도 못 할 터.
도망쳐야 하나? 하지만 그건 대놓고 ‘나 수상한 놈입니다’ 하고 소리치는 꼴이잖아.
‘아니야, 침착해. 의외로 둔한 사람일 수도 있어.’
일단 상대를 확인해…… 보니 이거 안 되겠네. 도망쳐야겠다.
급격히 질려 가는 얼굴을 애써 수습했다.
붉은 눈, 흰 머리. 재수도 없지. 하필이면 걸려도 그 ‘데온 하르트’라니.
피에 미친 존재로 유명한 인물이다. 예로부터 미친놈들은 감이 좋다는 역사적인 근거가 있었는데 눈앞의 그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심지어 전쟁터에서 8년을 지내기까지 했으니 동물적인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를 확률에 희망을 걸어 보려 했으나…….
‘저거……. 지금 웃고 있는 거지?’
명백히 이쪽의 정체를 파악했다는 듯한 웃음.
어떤 행동을 해도 넌 내 손바닥 안이라는 듯 여유로운 웃음에 첩자가 입을 꾹 다물고 안쪽 볼을 짓씹었다.
절대 상대해서는 안 된다. 상대하는 순간 분명 저놈의 장난감이 될 것이다.
‘그냥 도망쳐서도 안 돼.’
황제 앞에서 무기를 소지할 자격이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데온 하르트다. 분명 지금도 무기를 소지하고 있을 터.
단검을 휘두르는 것뿐만 아니라 던져서 목표물을 맞히는 것에도 능하다 알려진 그가 등을 돌려 달아나는 녀석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
아마 등을 보임과 동시에 단검이 날아오리라.
복잡한 심경을 눈치챈 듯 데온 하르트가 미소를 유지한 채 성큼성큼 다가온다.
저건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뜻인가.
어떻게든 가장 나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첩자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시종인 척 상대하는 것은 저놈의 뜻대로 놀아나는 것이 될 테고, 그냥 도망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그를 공격하는 것’ 뿐.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을 테니 당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자.’
척 보기에도 놀란 티를 내고 있는 어수룩한 첩자가 감히 그를 공격할 리 없다는 안이한 생각. 그 생각을 이용해야 한다.
갑작스러운 공격이라면 제아무리 그라 해도 당황하겠지. 그렇다면 잠시나마 틈이 생길 것이다. 그 틈을 타 도주한다.
계획이 세워지자 그 뒤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일단 무슨 말을 할지 들어나 보고, 첫마디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공격한다.’
말하고 있을 때는 저도 모르게 경계가 누그러들기 마련이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첩자가 고개를 들고 데온 하르트를 마주했다.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이내 데온 하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
“으아아아아아!!”
굳이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었다.
곧바로 칼을 꺼내 든 첩자가 지체 없이 돌진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그따위의 말을 끝까지 들을 바에야, 말하느라 방심한 틈을 노리는 편이 훨씬 이득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