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5
5. 0군단장 데온 하르트(3)
기특하게도 내 손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생명줄을 꼭 쥐고 있었다.
내 손에 꼭 쥐어진 채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횃불. 그 존재를 자각하기가 무섭게,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나는 그것을 다리를 옭아매고 있는 줄기를 향해 휘둘렀다.
“키에에에에엑!”
고막을 찢을 듯한 괴성과 함께 발목에서 줄기가 떨어져 나간다.
좋아! 역시 횃불을 직접 들고 있길 잘했어! 설마하니 정말 쓸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그런데… 왜 등 뒤가 시원하지?’
저 징그러운 꽃도 점점 멀어지는 것 같고… 아니, 멀어지는 건 좋은데, 뭔가….
‘잠깐만! 떨어지잖아!!’
여기 높이가 얼마였더라. 반경 10m는 커버하는 놈이니 역시 10m 가까이 되지 않을까.
“……하하, 시발.”
사람 살려어어어어!!
입으로 심장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경악하고 있는 와중에도, 전쟁터에서 구를 대로 구른 몸은 착실히 낙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 봤자 어디 한두 군데 부러질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 목이 부러지는 것보단 나을 테지.
마음속으로 단단히 각오하고 타이밍에 맞춰 낙법을 시도하려는데, 누군가 내 몸을 낚아챘다.
“데, 데데데데몬 님! 괜찮으세요?! 다치신 곳은! 다치신 곳은 없픅, 없으시고요?”
놀라야 할 사람은 난데, 네가 왜 말을 더듬니. 얼씨구, 심지어 혀까지 씹으셨어요?
당장이라도 모든 일의 원흉인 이 자식을 저 식인 식물의 주둥아리에 밀어 넣고 싶지만, 애써 눌러 참았다.
상대가 나보다 강해서가 아니다. 나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팔의 감촉에 고개를 들어 히엔을 봤다.
‘……잡아줬으니 이번만 봐준다.’
그 높은 데에서 떨어졌는데 무리 없이 받아내다니. 내가 아무리 가벼운 편이라 해도 결국 일반적인 성인 몸무게 범위 내인데, 역시 마족은 마족이구나.
“데몬 님?”
“……괜찮…습니다.”
슬그머니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생존본능에 의거한 거부를 내려오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인 히엔이 조심스럽게 나를 바닥에 내려준다.
바닥에 내려서자 세상이 이리저리 요동쳤다.
흔들리는 골이 제자리를 잡도록 잠시 눈을 감고 서 있던 나는 이내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리며 히엔을 돌아봤다. 그리고….
“…….”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히엔의 등 뒤로, 달빛의 은색과 밤의 검은색이 어우러졌어야 할 배경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뜨거운 열기가 피부를 달군다.
등 뒤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더워서가 아니라….
‘이거… 나 때문이지?’
떨어질 때 놓쳐버린 내 생명줄, 횃불 때문에 정원이 불타고 있었으니까.
***
난 오늘 죽을 것이다.
‘아니, 분명 죽는다.’
피부에 와닿는 뜨거운 열기에 히엔이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가꾸던 식물이 데몬 님을 잡아먹으려 했다. 물론 데몬 님께서 고작 식물 따위에 당할 리는 없으니, 저 식물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보잘것없는 공격에 부러 당해 줄 이유가 없을 테니까.
저 식물이 마음에 안 들어서, 아니, 이 정원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서 불태울 명분을 찾고 계셨던 것이다.
어쩌면 히엔 그 자체가 마음에 안 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식물의 잘못은 곧 정원사의 잘못.
데몬 님의 속셈이야 어쨌건 결국 먼저 공격한 쪽은 저가 가꾸던 식물이고, 데몬 님은 공격을 당해 반격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그로써 자신은 정원이 불탄 것에 대해 그를 탓할 수 없게 되었을뿐더러, 되레 책임을 져야 할 상황에 놓였다.
애당초 데몬 님께 불타버린 정원의 책임을 물을 생각 따위, 선택지에 올리지도 않았지만.
‘내가 마음에 안 든다면 그건 내 잘못이겠지.’
평소엔 상당히 너그러우신 분이다. 그분의 담당 주치의인 벤이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닌 것만 들어도 그랬다.
그러니 화가 났다면 필시 이쪽에서 뭔가 심기를 거스른 것이리라.
각오를 했다지만 그래도 죽음은 두렵다. 하얗게 질렸을 것이 분명한 얼굴을 매만지고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데몬 님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뒷모습이어서일까, 표정을 알 수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평소의 데몬 님과는 분위기부터가 다른 것 같다.
‘아니, 아니지. 지금은 분위기를 살필 때가 아니야.’
납작 엎드려야 할 때다.
이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정원을 집어삼키는 불길만 바라보는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뒤꿈치를 보이던 그의 발이 서서히 돌아선다.
히엔은 자신을 향한 상대의 신발을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이야, 활활 잘도 탄다.
영주의 과도한 세금을 피해 도망친 화전민들이 산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불을 지른다던 게 이런 모습일까.
문제는 여긴 산이 아니라 마왕성이고, 농사를 지을 일도 없다는 것이지만.
‘어떡하지…?’
잘 타도 너무 잘 탄다.
날 공격했던 괘씸한 식인 식물은 이미 불길에 완전히 잡아먹혀 더 이상 그 끔찍한 괴성을 내지르지 않았고, 주위에 있던 다른 징그러운 식물들도 소리 소문 없이 불 속으로 사라졌다.
벌써 이곳, 서쪽 정원의 반을 집어삼키고도 불은 아직 모자란다는 듯 남은 식물을 잡아먹을 기세로 탐욕스럽게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필시 히엔의 시선일 터.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차마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아 부러 반쯤 넋을 놓고 붉게 물든 정원만 바라봤다.
아, 그래. 부정할 생각 없다. 이건 현실 도피다.
여긴 마왕성의 정원이고 정원사는 당연히 마족이다. 마족이란 말이다.
‘누가 이 불 좀 꺼봐. 아무나 좋으니까 제발.’
하다못해 비라도 오길 바라며 속으로나마 기우제를 지내는데, 등 뒤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분명 이 상황은 내가 사과해야 할 상황인데, 왜 저놈이 사과하는지.
귀는 제대로 들었다고 주장하고, 머리는 잘못 들었을 거라 주장하고 있어 잔뜩 망설이면서도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천천히 돌아섰다.
다행스럽게도 시야에 들어온 것은 분노한 표정의 히엔이 아닌, 허리를 숙이고 있는 히엔.
반쯤 안도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아 침묵하고 있자니, 그가 알아서 설명을 덧붙였다.
“저 식물이, 아니, 이 정원이 마음에 안 드신 줄은 몰랐습니다.”
“…….”
“아니면 혹시, 제게 화가 나신 건지….”
“아니, 그건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양심 없는 사람으로 보이나? 슬쩍 얼굴을 매만지고는 다시 히엔을 쳐다봤다.
아무튼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내가 저 식인 식물이나 이 정원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서 불을 지른 거라 생각하고 있다는 거지? 그런데도 화를 내긴커녕 사과를 한 거고.
“미친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라….”
이제 보니 이 새끼 호구였네.
어찌 됐든 상황을 보니 그가 이걸로 내게 화를 낼 일은 없을 것 같다. 나로서도 멍청하게 실수로 횃불을 놓친 것보단 이쪽이 생존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고.
그렇다면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정원이 썩 마음에 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닙니다.”
아니, 솔직히 싫다. 완전 싫어. 징그러워!
하지만 마왕성의 정원사에게 장미나 백합 같은 인간계의 평범한 꽃을 키우라고는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쩌겠나. 내가 참아야지.
“그럼….”
“그, 조금 전 보여준 그 식물을 키우는 것만 좀 자제해 줬으면 합니다만.”
“아, 네! 알겠습니다. 종자는 싹 다 갖다 버리겠습니다.”
버릴 것까지야. 네 집에서 네 마음대로 키우는 것까진 관여할 생각 없는데.
아무튼 어찌어찌 잘 해결된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는데, 결연한 표정을 한 히엔의 등 뒤로 웬 그림자가 드리웠다.
누가 봐도 사람, 아니 마족의 형체. 누구인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쳐다보는 순간, 그림자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이게 웬 불이야?”
히엔의 몸이 바짝 굳었다. 티는 나지 않았지만, 나도 얼어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목소리는 분명….
“누가 낸 거지? 일부러 낸 건가?”
역대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마계의 유일무이한 왕, 통칭 마왕의 것이었으니까.
“마, 마왕님께서 여기엔 어쩐 일로….”
“그럼, 내 성에 불이 났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히엔의 의문을 단번에 잘라버린 마왕이 고개를 돌렸다. 스르륵 굴러간 그의 역안이 불길을 한 번 보더니 유독 섬뜩한 빛을 내며 히엔과 나를 시야에 담는다.
히엔을 보았을 때만 해도 무기질적이었던 그의 눈이 나를 보기가 무섭게 이채를 띠었다.
“왜 불이 났는데도 아무도 안 끄나 했더니….”
그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싱긋 웃었다. 명백히, 나를 향해.
아, 이거 그거죠?
오늘이 바로 네놈의 제삿날이다, 같은.
역시나 예상대로 마왕은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주위에 다른 이들이 있어서인지 본명이 아닌 마계에 알려진 이름으로.
“네가 있었구나, 데몬.”
동시에 손을 휘젓자 주위에 자욱했던 연기가 후욱 밀려 저 멀리 사라진다. 그제야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주위에 잔뜩 깔려 있는 마족들.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곤란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니, 진작 왔으면 빨리 불이나 끌 것이지 왜 저기 서서 구경이나 하고 있어? 덕분에 마왕까지 와버렸잖아.
“그래서, 뭐가 마음에 안 든거지?”
“……?”
“저 정원사한테 화가 난 건가, 아니면 정원이 마음에 안 든 건가? 원한다면 저놈을 죽여줄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해줄까?”
아니 잠시만요. 저 정원사, 댁이 직접 데려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무슨 죽인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해?
농담이라 치부하기엔 눈에 웃음기가 전혀 없다. 당황해 히엔을 돌아봤으나, 애원이든 뭐든 열심히 자기변호를 해야 할 그마저도 어떤 결정이든 받아들이겠다는 듯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마왕이 히엔을 죽일 것만 같아 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정원사에게 화가 난 것도, 정원이 싫은 것도 아닙니다.”
“그럼 왜? ……아니 그 전에. 그럼 저 불, 꺼도 되는 거야?”
“네? 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우르르 달려와 마법을 시전한다.
아무것도 없던 하늘에 거대한 물방울들이 생성되어 일제히 쏟아진다. 한두 명이었으면 모를까, 저 많은 이들이 이러고 있으니 불이 꺼지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뭐야, 빠릿하게 잘할 수 있었으면서 왜….
“그럼 왜 정원에 불을 지른 거야?”
여기서 난 잠시 멈칫했다.
일단 히엔의 오해를 내 입으로 말해 괜한 이들의 눈 밖에 나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고작 식물 하나 때문에 죽을 뻔했다고 하면 어떤 반응일까.’
‘식물 하나에 쩔쩔맬 정도로 약하다니, 지금까지 날 속였다 이거지? 죽어라!’라고 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겨우 그것 때문에 내 정원을 태워?’ 하면서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마왕의 질문에 답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어떤 답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데,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도 히엔이 불쑥 끼어들어 대신 설명을 늘어놓았다.
“제가 이번에 들인 식물이 데몬 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분노하신 데몬 님이 불을 지르셨고요.”
“…….”
이야. 이 새끼 스파이였네. 누가 보냈냐? 혁명군? 아님 제국의 귀족파가 보냈든?
이걸 어떻게 조져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는데, 아직 말이 끝난 것이 아니었는지 잠깐의 틈을 두고 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 잘못입니다.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습니다.”
식물에게 교육이란 단어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하긴, 조금 전 그 모습을 생각하면 그건 식물보다는 동물에 가까웠으니.
“컥.”
순간 짧은 신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퍼뜩 고개를 들자 시야에 비친 것은 한 손으로 히엔의 목을 움켜쥔 채 들어 올리고 있는 마왕과… 단절된 호흡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도 저항하지 않는 히엔이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유야무야 잘 끝낼 수 있었는데 왜….’
공기부터가 다르다. 무겁고 심각하다 못해 사람 하나 충분히 눌러 터뜨리고도 남을 지경이다.
말문이 막혀 어버버거리는 사이, 히엔의 목을 쥔 마왕이 고개만 돌려 이쪽을 본다. 분명 히엔을 볼 때까지만 해도 험악했던 얼굴이 이쪽을 향하자 유하게 풀어졌다. 아니 분명, 웃고 있었다.
“어떡할까?”
“……네?”
“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