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50
50. 전조(5)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두 분 전하.”
“그래.”
아니, 왜 전 빼놓고 대화하시는 겁니까. 내 의사는?
심지어 공작마저 슬쩍 몸을 뺐다.
“저도 이만 가 봐야겠군요. 실례하겠습니다.”
이러니까 정말 상황이 끝난 것 같잖아.
아니, 정말 끝나 버렸다.
공작과 크루엘이 사라지고, 황태자와 황녀가 나보고 어서 가 보라며 손을 내젓는다.
네메세우스 장군님 역시 빨리 따라오라며 턱짓을 하고는 손수 놈의 멱살을 잡은 채 바닥에 흩어진 서류를 주워 들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살피던 궁의는…….
“제가 나중에 댁으로 보약을 보내드릴 테니 잊지 말고 꼭 드십시오.”
“……?”
“그러니 제발 건강하십시오. 제발.”
어째서인지 필사적이기까지 한 어조로 단호히 속삭이고는 후다닥 물러갔다.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던 나는 힐긋 장군님 쪽을 쳐다봤다.
마치 따라오지 않으면 쳐죽일 것 같은 기세로 성큼성큼 걷고 있는 모습.
‘화장실은…….’
분위기를 보니 아무래도 안 될 것 같군.
결국 나는 쭈뼛쭈뼛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
황궁에서 나와 공작저로 향하는 마차에 탄 공작이 출발하기가 무섭게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조금 전, 시종이 떨어뜨렸던 서류들 중 하나.
하얀 종이 위에는 전쟁을 벌일 시의 예산안이 빽빽이 정리되어 적혀 있었다.
종이의 정체가 무엇인지 눈치챈 듯 크루엘의 시선이 그를 향했으나, 공작은 개의치 않았다.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고 서류의 내용을 죽 훑은 그가 이내 피식 웃으며 그것을 접어 품 안에 넣는다.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 황제를 알현했을 때의 대화가 재생되고 있었다.
“당장은 전쟁을 하지 않을 거라 하시더니.”
이렇게 예산안까지 작성해 놓으시고는.
“거짓말이 서투십니다.”
공작의 얼굴 위로 명백한 비웃음이 드러났다.
이렇게 된 거, 슬쩍 도와줘 볼까.
마계가 가장 걱정이시겠지요, 폐하.
‘적어도 폐하께서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기 전까지는 그들도 얌전히 있을 겁니다.’
공작은 심장 부근을 슬쩍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는 크루엘의 시선이 있었다.
***
“표정이 안 좋은데, 어디 아픈가?”
“아닙니다.”
“지금 식은땀이 나고 있는데?”
“괜찮습니다.”
화장실을 못 가서 그렇다고는 절대 말 못 한다. 쪽팔려서라도 절대 말 못 해.
애써 표정을 정돈하고 허리를 바로 세웠다.
테이블 건너편 의자에 앉은 황제가 내 몸 상태를 가늠하려는 듯 눈매를 좁히고 나를 훑는다.
그에 더욱 멀쩡한 척 앉아 있자, 그가 픽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노파심에 하는 말이다만, 몸이 좋지 않은 것을 숨기지는 말도록. 그대는 제국의 중요한 전력 중 하나이니.”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다시 묻지.”
“…….”
“첩자를 잡았다고 들었다. 몸은 괜찮은가?”
느른하고 여유로운 표정 아래, 맹수와 같은 황금빛 눈동자가 탐색하듯 날카롭게 빛난다.
차마 그 시선을 똑바로 받아칠 수 없어 나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다. 놈의 칼날에 스치긴 했지만 말 그대로 스친 것뿐이고, 식은땀이나 안색이 안 좋은 것은 그저 몸 어딘가가 터질 것처럼 빵빵해서 그럴 뿐이다.
정 걱정된다면 잠시 쉬는 시간을 주든가. 그럼 정말 괜찮아질 텐데.
나는 분명 진심이었는데,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황제의 미간이 꿈틀한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보일 듯 말 듯 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다른 걸 묻겠다. 무엇 때문에 이리 방문한 건가?”
“하르트 영지에 관해…….”
“만일 반납하고 싶다거나, 그와 비슷한 것을 요청하려는 것이라면 미리 거절하도록 하지. 아, 로프티 기사단과 관련한 일도 마찬가지다.”
“……그럼 일을 그만두는.”
“것도 안 되지.”
거절까지는 예상했다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거절당할 줄이야.
마음 같아서는 멱살이라도 잡고 ‘주겠다는데 왜 안 받아!!’ 하고 소리치고 싶다. 물론 그랬다간 내 목은 자리를 온전히 보전하지 못하겠지.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려는 찰나, 황제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다만 짐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도록 하겠다. 그때 다시 청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황제의 요구라니, 찝찝하다.
그렇다고 달리 그를 설득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황제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떠보듯 물었다.
“크루엘 하르트도 같은 일을 맡기로 한 터라, 그대마저 참여한다면 먼저 성사시킨 쪽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하는데, 그래도 하겠나?”
“……하겠습니다.”
크루엘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 무슨 소원을 빌 줄 알고.
자칫하면 내게 불이익이 오는 소원을 빌지도 모른다.
상대가 일반 귀족이었다면 모를까, 크루엘은 나와 같은 ‘영웅’이다.
훌륭한 ‘인재’인 그의 정당한 요구 앞에서 황제가 내 손을 들어줄 가능성은 한없이 적었다.
그렇기에 나는 비장한 태도로 그를 향해 말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탐색하듯 무표정으로 나를 보던 황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네메세우스에게서 서류 한 장을 받아 내 앞에 밀어 놓는다. 자연스레 종이에 시선을 두자 가장 위에 적힌 제목으로 보이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구원교]“……구원교?”
“그래, 구원교. 요즘 빈민가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사이비 종교지. 그들을 소탕하면 된다.”
사이비 종교 소탕.
생전 처음 받아 보는 종류의 임무에, 나는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
벌써부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데온 하르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물러가고, 자리에 앉아 서류를 재차 읽던 황제가 눈동자를 올려 네메세우스를 쳐다봤다.
그의 표정에는 드물게도 부정적인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황제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흘리듯 말을 걸었다.
“아직도 불만인가.”
“저는 반대입니다.”
즉답이었다.
단호한 의지가 담긴 대답에 황제가 미간을 짚었다.
네메세우스는 데온 하르트를 싫어한다. 아니 지나치게 경계했다.
황제가 피곤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크루엘 하르트보다는 낫지 않나. 그는 공작의 수하이니.”
[요즘 폐하께서 광신도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침 크루엘 경이 폐하를 위해서라면 휴식 기간을 버려서라도 기꺼이 나서겠다 하더군요. 전쟁을 위해서라도 광신도들은 소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나갔군. 짐은 아직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저런, 제가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실례했습니다.]뻔뻔한 얼굴로 제 수하를 들이밀던 공작을 떠올린 황제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공작이 노리는 것이야, 뻔했다.
배후에 공작이 있는 영웅은 손쉽게 광신도를 해치울 것이다. 무려 ‘황제’가 골머리를 앓던 것들이니, 황제인 자신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보답을 해야 할 테고.
그 ‘보답’을 요구할 때 ‘반드시’라 할 정도로 공작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가겠지. 필시 공작 본인에게 이득이 되는 요구이리라.
원래도 데온 하르트를 끌어들일 생각이었다만, 덕분에 확신이 섰다.
그는 의심할 나위 없는 ‘황제파’, 정확하겐 ‘에도아르도 데세르트’의 편이다. 실력도 뛰어나 크루엘과의 경쟁에서 밀릴 걱정도 없고, 상대가 크루엘이기에 의욕 역시 넘쳐 난다.
실로 이상적인 패였다.
그런데 네메세우스는.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합니다.”
“…….”
“그는 위험합니다.”
네메세우스는 단호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황제를 설득하겠다는 듯, 그는 두 눈을 단단히 빛내며 감히 황제를 똑바로 바라봤다.
분명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황제는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불손한 눈빛이 아니었으니까.
이리도 자신의 말을 들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데, 어찌 질책할 수 있을까.
쫓기듯 조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가 8년 전쟁 때 무슨 짓을 한지 아십니까?”
“적들을 난도질해 놓는 등의 잔혹한 손속을 보였다고 들었다. 그게 이유인가?”
“아닙니다. 그건 아마 녀석 나름대로의 생존 방식이었을 테고, 전략이었겠지요. 그러니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흰 머리에 붉은 눈이라 더욱더 눈에 띄던 작은 남자아이.
귀족 출신이 일반 병사로 들어온 것은 처음인 데다 자신의 밑에 있는 아이라 절로 시선이 갔었다.
터무니없이 약한 아이는, 당연하게도 사람을 죽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일반인들도 첫 살인을 하면 후유증이 오래간다. 그러나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전쟁터에서 정신을 추스를 시간이 주어질 리 없었다.
그렇기에 성인 남성들조차 힘겨워하는데, ‘잔인함’을 생존 방식으로 택한 아이는 어떻겠는가.
어린아이의 정신은 성인보다 훨 약하다.
그런 아이가, 두 눈으로 보는 것조차 괴로운 시체를 제 손으로 직접 만들어야 했다.
작은 손에 버거워 보이는 단검을 쥐고, 사람을 찔러 그 감촉을 느껴야 했다.
광기에 물들고, 벗어나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 녀석은…….”
미칠 것 같았으리라.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에 한계가 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으리라.
잔인함을 유지하며, 광기에 먹혀가며, 밀려오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제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이가 택한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너…… 괜찮나?’
‘예? 무엇이 말입니까?’
‘그…….’
‘아, 다친 곳이라면 괜찮습니다. 그리 큰 부상도 아니었는걸요.’
‘아니, 그것이 아니라 조금 전 전투에서……!’
‘장군님.’
‘…….’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네메세우스는 떨리는 눈을 감추지 못했다.
“그 녀석은 스스로의 인격을 분리해 버렸단 말입니다!”
흔들리는 정신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혼란스러워하던 아이는 무언가 결심한 듯 술과 약을 들고 천막에 들어가 3일을 내리 처박혔고,
그렇게 두 개의 인격을 만들어 냈다.
아니, 인격이라 하기에도 애매하다. 오히려 ‘성격’이라 부르는 것이 더 맞겠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원하는 대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을 ‘두 개의 인격’이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을 테니까.
아이는 스스로에게 두 개의 성격을 부여했다.
철저히 전투와 생존에만 신경 쓴, 피에 미쳐 버린 ‘미친 성격’과,
기억해도 정상적인 전투와 평소의 평범한 자신의 모습만 기억하는 ‘정상적인 성격’.
“다시 말해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죄책감마저 저버렸단 말입니다!”
‘정상적인 성격’을 표방하고 있을 때의 아이에게 ‘미친 성격’일 때 저질렀던 일들을 언급하려 하면, 그는 모르는 척 말을 돌렸다.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그저 ‘합리화’라는 이름 아래 모른 척하고 있을 뿐.
자신이 저지른 일을 부정하고, 외면하고.
“그런 녀석의 정신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죄책감마저 버거워 이리도 극단적인 방법으로 저버렸다.
하니 녀석의 정신력은 모래성만도 못할 터. 분명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들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질 게 뻔했다.
그런 녀석을 자꾸만 중용하다가, 놈의 정신이 무너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심각한 사안을 제 귀로 직접 들은 사람답지 않게 황제는 담담했다.
느긋이 다리를 꼬고 앉아 네메세우스의 말을 끝까지 들은 그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하는 듯, 지독하게도 여유로운 종류의 것이었다.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꼬았던 다리를 풀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가까워진 네메세우스의 얼굴을 직시한 황제가 무표정 위로 차가운 미소를 덧그리며 말했다.
“짐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