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56
56. 구원교(6)
저건 피다. 백작님께서 기침을 하실 때 얼핏 입에서 액체가 쏟아지는 것을 보았다.
피 외에 남은 가능성이라고 해봤자 구토나 침뿐인데 구토라고 하기엔 소리도 영 아닌 데다 이렇다 할 색이나 건더기도 없고, 침을 저렇게 많이 뱉을 리도 없을 테니 결국 남는 것은…….
‘마왕의 저주인가? 아니면 정체를 들켜서 공격이라도 당했나?’
공격당한 것 치고는 내부가 그다지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는데. 혼란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조용히 사건을 끝내려는 건가?
마왕의 저주. 그리고 정체를 들킨 것.
전자도 좋지 않지만 후자는 더 안 좋다. 두 개가 겹친 거라면 그야말로 최악이고.
어느 쪽일지 고민할 것도 없이 리엔은 가장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주군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는 언제나 최악을 가정해야 한다.’
그러니 백작님은 내부에 잠입했다가 정체를 들켜 죽을 위기를 겪으신 거다. 간신히 탈출하셨지만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으셨고, 설상가상으로 마왕의 저주마저 겹친 것이다.
그리고 나를 추격자로 오인해 미처 숨을 돌리기도 전에 다시 달리셔야 했고─
‘내부로 다시 들어가신 건?’
만족할만한 증거를 얻지 못한 것이리라.
’세상에, 그 지경이 되어서까지 포기하지 못하시다니. 역시 백작님은…….‘
격해지려는 감정을 황급히 억눌렀다. 기사가 평정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어떻게 대처하느냐다.
상태와 상황 둘 다 좋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 백작님을 모시러 가야 할까, 밖에서 대기해야 할까.
‘들어갈 경우 엇갈릴 수도 있어.’
그럴 경우 일이 더 복잡해진다.
하지만 백작님이 정말 위급한 상황에 처하셨다면?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젠장.’
소리 죽인 한숨을 길게 내쉬며 머리를 감쌌다. 자신은 이런 선택엔 영 젬병이었다.
그렇기에 명령만 들으면 되는 기사란 직업에 극도로 만족한 것이기도 한데, 하필이면 이런 시련이 닥칠 줄이야.
일생일대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리엔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긴장으로 예민해진 귀에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 꺾어지면 바로 보이는 곳, 구원교 입구에서.
“지금 당장 경비대장을 불러오세요.”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갑자기?”
“…….”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인데 낯설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닌 건가?
아니. 목소리는 입구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을 쫓아냈던 여자의 것이 확실히 맞다. 다만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다를 뿐.
저렇게나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라니.
상대 역시 당황한 듯 침묵하자 예의 그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침입자가 들어왔어요. 당신들은 그것을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었고.”
“……!”
“상대가 영웅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당신들은 목이 남아나지 않았을 거예요. 무능한 죄로 갈아치워졌을 거라고요. 운 좋은 줄 아세요.”
영웅!
리엔이 조용히 경악했다.
예상이 맞았다. 백작님의 정체가 들통난 것이다.
이어진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일단 그는 제 선에서 처리했으니 호들갑 떨지 말고 경비대장이나 불러오세요. 경비 강화에 대해 논해야겠으니.”
처리했다니! 그렇다는 건 백작님께서……!
더 생각할 것도, 망설일 이유도 없다. 리엔은 그대로 몸을 돌려 데온이 사라진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백작님!!’
여자가 ‘데온 하르트’가 아닌 ‘영웅’이라 말한 것도, ‘영웅’이 한 명이 아니라는 것도 떠올리지 못한 채였다.
와장창!
워낙 빠르게 사라진 터라 데온이 어느 창문으로 들어갔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기사 한 명이 요란스럽게 눈에 보이는 창문을 무작정 넘는다.
그리고 구원교에 재앙이 닥쳤다.
***
당연한 말이지만 구원교에는 기도실이 있다.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도록 보초를 두어 특정 시간 외에는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
물론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이들뿐, 영웅인 크루엘에게는 예외였다.
툭.
아무도 없어 적막감만이 가득한 공간에 작지만 이질적인 소리가 퍼져나갔다.
천장에서 뚝 떨어진 검은 머리칼의 남자, 크루엘이 익숙하게 주위를 둘러본다. 무기질적인 녹색 눈이 내부를 훑었다.
설계도와 똑같은 공간. 제대로 도착했다.
크루엘은 품 안의 종이를 떠올리며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데온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게임은 애초에 불공평한 게임이었다. 자신은 설계도를 가지고 시작했으나, 그는 아니니까.
[설계도입니다. 그러니 되도록 안전하게 이 게임을 끝내도록 하세요. 설마 그것도 못 하진 않겠지요?] […….]되도록 안전하게.
그 말의 뜻을 모를 수가 없었다. 크루엘은 그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 일방적인 게임의 일방적일 결과를, 데온이 과연 납득할 수 있을까?
펄펄 날뛸지도 모른다. 의혹을 제기하고, 공작 앞에서 제게 따지려 들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입매를 굳힌 크루엘이 성큼 걸음을 뗀다. 망설임 없이 창문으로 향하더니 이어서 잠금장치에 손을 뻗었다.
잠시 망설이는 듯 차마 섣불리 닿지 못하고 주위에서 맴돌던 손이 이내 능숙하게 그것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뭐 하세요?”
“…….”
일순간 모든 행동이 멈췄다. 잠금장치에 닿았던 손이 스르륵 떨어진다.
덩달아 완벽하게 해체된 잠금장치를 흘긋 확인한 사에린이 다시 크루엘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낯선 침입자인 줄 알고 바짝 긴장했던 몸이 아직 덜 풀려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대답 안 하셔도 돼요. 안 들어도 뻔하니까. 창문으로 들어온 거죠? 이 건물의 창문은 분명 전부 잠가놓았을 텐데, 어떻게 들어온 건지…… 나 참.”
뾰족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봤다.
같은 주인을 모시는 사이라 이렇게 담담히 말을 거는 것이지, 아니었다면 진작에 경비를 부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당신의 목적은 알고 있어요. 무엇을 노리는지, 그게 어디에 있는지도요.”
“…….”
“물론 도와줄 생각은 없지만요.”
사에린은 영민하다. 그녀는 모든 상황을 파악하기 무섭게 주인의 뜻을 알아차렸다.
제게 명령하면 손쉽게 해결될 것을 굳이 크루엘에게 시켰다. 그렇다는 것은 그를 시험하겠다는 뜻이겠지.
그에게 호의라도 있다면 모를까, 안타깝게도 그녀는 크루엘을 경계하는 쪽에 속했다.
“공작님은 당신을 시험할 생각이시겠죠. 전 그분의 뜻을 충실히 받들 생각이고요. 정말 필요한 정보 같은 것은 진작에 당신에게 넘기셨을 테니 굳이 제가 도울 필요는 없겠죠.”
“…….”
“지금 당장 경비를 부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를 한 것이니 괜한 소란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볼일 보고 떠나세요. 아, 그 창문은 꼭 다시 잠그시고요. 전 경비대장을 좀 만나봐야겠으니까.”
데온 하르트도 같은 임무를 받았다고 들었다.
우직한 전사 타입인 크루엘의 침입을 허용할 정도라면 날렵한 몸놀림을 가진 데온 하르트는 더욱 잡아내지 못할 테지.
상대가 영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두 눈 멀쩡히 뜨고 순순히 당할 생각은 없기에 사에린은 서둘러 방을 나갔다.
다시 조용해진 공간 속에서, 크루엘은 그녀가 나간 문을 물끄러미 보다가 등을 돌렸다. 창문의 잠금장치는 보지도 않은 채였다.
훌쩍 몸을 날려 단상에 올라간 그가 바닥을 꼼꼼히 살피더니 그 뒤의 보라색 커튼을 확 걷는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벽이 드러났다.
‘……설계도 상으로는 이 기도실이 가장 수상했는데.’
착각인가.
공작이 설계도를 줬다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다. 비밀의 공간 같은 것은 전혀 표기되어 있지 않은 생략된 설계도였다.
공작은 정말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했을 뿐, 그 외의 것들은 전혀 지원하지 않았다.
하긴, 그러니 ‘시험’인 것이겠지만.
어쨌든 이곳이 아니라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조사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크루엘이 커튼을 놓고 막 몸을 돌렸을 때,
– 드르륵.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민하게 소리를 잡아낸 그가 커튼 뒤로 숨고, 그와 거의 동시에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
내가 들어선 곳은 꽤나 신성해 보이는 방이었다. 아니, 방이라고 해야 하나?
줄지어 놓인 기다란 나무 의자. 앞에는 단상이 존재하고, 위치가 빈민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싸 보이는 대리석 바닥과 깨끗한 흰색의 벽까지.
더해서 보라색 커튼이 이 배경과 어우러져 오묘하게 늘어져 있으니 그에 내가 느낀 것은 같잖게도 신성함과 신비로움이었다.
‘보아하니 기도실 같은데…….’
생각보다 방이 넓다.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다가 이내 가장 눈에 띄는 단상으로 향했다.
가슴 높이의 단상에 손을 짚고 올라가려다 구석에 있는 계단을 발견하고 얌전히 걸어 올라갔다. 내 몸은 소중하거든.
‘생각보다 별거 없네.’
금세 흥미를 잃은 난 이번엔 기묘하게 늘어진 커튼에 집중했다.
창문 주위에 늘어진 것은 이해한다만, 창문도 없을 단상 뒤의 벽에 커튼이 달려 있는 것은 조금 의외다. 물론 아무것도 없이 하얀 벽만 있으면 밋밋하고 지금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낼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이곳은 빈민가잖아?
맨 벽에 장식으로 커튼을 붙여놓는다는 귀족스러운 사고방식을 따르기엔 조금 어울리지 않는달까.
‘아니면 설마 이 뒤에 창문이라도 있는 건가?’
일단 커튼 사이로 보이는 건 벽뿐인데.
슬쩍 커튼을 움켜쥐었다. 걷어보기 위해서였으나 그런 내 행동은 아쉽게도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문밖에서 여럿의 발소리가 들렸으니까.
아니, 어, 어떡하지?! 어디에 숨지?
빌어먹을 귀소본능은 하필 이럴 때 반응했다. 허둥거리던 나는 바로 옆에 있는 커튼을 두고 굳이 단상 아래로 내려가 들어왔던 창문 옆의 커튼 뒤에 숨었다.
그런 내 멍청한 행동을 자각한 것은 그로부터 대략 3초쯤 뒤였다.
‘……나 새끼 뭐한 거냐.’
마음 같아서는 벽에 머리라도 한번 박고 싶다. 그러나 이어서 벌컥 열린 문에 나는 그대로 숨죽이고 멈춰야 했다.
커튼 틈새로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보인다. 그 틈에 섞여 있는 익숙한 얼굴들 역시도.
내게 말을 걸었던 시이아라는 여자아이와 나를 노려보던 폴이라는 남자아이가 분명했다.
그렇다는 건 여기가 바로 그 기도실인 건가?
“자 오늘도 구원을 위해 기도합시다.”
사람들이 각자 나무 의자에 앉고, 이들을 데려온 한 사제복을 입은 남자가 단상 위로 올라가 책을 펼친다.
제법 고급스러운 껍데기의 책이었다.
‘뭐야, 꼴에 성경도 있는 거야? 아주 가지가지 하네.’
놈이 책을 읽기 시작한다. 무슨 내용일지 기대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내용은 여타 성경이 그러하듯 그럴싸하고 지루했다.
‘……게다가 길어.’
그것까지 똑같을 필요는 없잖아. 저기 눈 감고 기도하는 사람들, 사실 기도가 아니라 자는 거 아니야?
……방금 저기 한 놈, 고개 떨군 것 같은데? 설마 진짜였냐.
몇 번이고 소리 죽여 하품하기를 반복했을까, 슬슬 다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저려와 이러다 정말 위험할 것 같다 싶을 때, 간신히 사제의 말이 끝났다.
녀석이 책을 덮으며 싱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독실한 신도가 또 들어왔지요? 이미 알고 계시는 분이 대다수이겠지만, 새로 추가된 신도분을 위해 짧게 설명하겠습니다.”
“……?”
“오늘부터는 여기서 이렇게 단순한 기도로 끝을 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구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드릴 예정입니다.”
구원? 구원이면 구원인 거지, 뭘 어떻게 더 자세히 설명한단 말인가.
본능적으로 아주 중요한 내용일 것이라는 걸 직감하고 귀를 쫑긋 세웠다.
분명 짧게 설명한다고 했던 것 같은 녀석의 말은 생각보다 길었다. 심지어 요약도 가능한 내용이었다!
결국 ‘구원은 실재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잖아. 레멤베르의 잔소리를 가장한 독설도 이보단 짧겠다!
“여러분은 독실한 신도만 들어갈 수 있는 방에서 따로 설명을 듣게 될 거예요.”
아, 방금 말은 사제가 한 것이 아니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딱 맞는 타이밍에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가 한 말이었다.
몇 안 되는 아는 얼굴의 등장에 나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익숙한 얼굴인데. 조금 전 그 여자 맞지?’
내 로브 후드를 벗긴 여자.
이렇게 난입했는데도 아무도, 심지어는 말을 하던 사제조차도 제지하지 않는 걸 보니 생각보다 높은 위치인 모양이다.
그녀가 걸음 속도를 높여 단상에 오르자 사제가 조용히 물러선다. 자연스러운 교체였다.
여자가 단상 뒤 커튼 사이의 벽에 손을 댄다.
의식하지 못할 만큼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으나 그 결과는 절대 자연스럽지 않았다.
‘어? 어? 잠깐만, 저거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