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59
59. Fate or Destiny(1)
8년 전쟁 당시 황제는 바쁜 와중에도 전사자들의 명단을 꼭 외웠다. 그저 유족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그는 없는 시간을 쪼개 굳이 아군 전사자들의 명단과 제가 죽인 이들의 얼굴을 곱씹었다.
”그야, 짐이 아니었으면 죽지 않았을 이들이니까.“
피할 수 있었다. 8년 전쟁은 오롯이 그의 선택에 따라 벌어진 전쟁이었으니.
군주의 자리란 선택 한 번에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오가는 자리다.
에도아르도는 제 이기적인 선택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이들을 죽었다 하여 쉬이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한 나라의 우두머리가 제 선택에 따라 벌어진 일의 책임을 지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책임을 지겠는가.
제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한 책임.
이것은 군주이기 이전에 사람이라면 응당 짊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적이든 아군이든, 어쨌건 짐이 한 선택의 희생양 아닌가.“
그랬더니 이렇게 꿈과 환각으로 찾아왔다. 그로서는 기쁜 일이었다.
엘피디우스는 쉽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결국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간신히 튀어나온 말은 단 한 마디였다.
“……미련하십니다.”
감히 황제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었으나, 에도아르도는 그저 웃었다.
평소와 달리 힘없는 웃음이 넓은 방 안에 허무히 퍼져나갔다.
“안다. 이것도 병이지.”
방 한구석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이들을 마주 보며 황제가 중얼거렸다.
“입맛이 없으니 오늘 저녁은 건너뛰지. 알레테아와 둘이 먹거라.”
나는 저들과 놀아주어야 하니.
망설이던 엘피디우스가 나가고, 혼자 남은 황제는 제게 다가오는 이들의 익숙한 면면을 머릿속에 새겨두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환각이 맞긴 한 모양인지 눈을 감았음에도 저들이 다가오는 것이 훤히 보인다.
걱정은 없다. 어차피 저들은 자신을 직접적으로 해치진 못하니까. 그거면 된 거다.
목을 졸라오는 환각들을 생생히 느끼면서도 그는 그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고작 이런 것들에 무너지기엔, 그가 짊어진 것들이 너무 많았다.
***
그 후로 빌어먹게도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3일이면 마냥 짧다고만 볼 수 없다. 그 사이에 크루엘이 유능한 주술사를 찾았을지 누가 알겠나.
사실 주술사를 찾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주술사들은 백에 아흔아홉이 남부 출신인데 제국 땅은 거의 대부분 북부에 있으니까.
아흔아홉을 제외하고 남은 한 명마저 스승이 남부 출신이었으니 결국 주술사를 찾기 위해서는 남부로 가야 한다는 것인데, 유능한 집사 레멤베르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주술사를 찾아달라는 내 무리한 요청에도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용케 주술사가 있다는 가장 가까운 마을을 찾아내 보고했다.
이를 생각하면 3일은 말도 안 되게 짧은 시간이었다만, 크루엘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 영…….
“……그런데 리엔 경.”
“예, 주군.”
“뒤통수가 따끔거립니다만…….”
“기분 탓입니다.”
산 중턱에 있다는 마을을 찾기 위해 팔자에도 없는 등산을 하는 것은 괜찮다. 힘들지만 참을 만하니까.
하지만 뒤통수에 콕콕 박히는 이 시선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전 괜찮다니까요.”
“제가 안 괜찮습니다. 감히 주군의 뒤통…뒷모습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사태를 일으키다니.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이번에 머릿속에 새겨놓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방금 뒤통수라고…….”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백작님께선 제 주군이십니다.”
지금 말 돌린 거 맞지? 나는 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말을 편하게 하라니.’
그녀는 귀족이다. 명예직에 불과한 나와 달리 세습이 가능한 높은 가문의 귀족. 가주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집안의 권력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기에 주종관계에도 불구하고 내겐 그냥 상호존대를 하는 쪽이 더 편했다.
그러니 반말은 속으로 하는 것으로 적당히 타협하자.
“전 이게 편합니다…… 아, 저기!”
“마을이군요. 작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작을 줄이야.”
한눈에 들어오는 마을 규모에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정도는 되어야 주술사가 살 법하지. 주술사는 보통 은거하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저 작은 마을은 그런 주술사가 살기에 아주 적합해 보였다.
레멤베르가 정말 주술사가 있을지 장담은 못한다고 했지만…….
“빨리 가죠.”
“예.”
역시 기대감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리엔과 나는 서둘러 마을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어 씨발?”
“…….”
“아, 제가 입으로 말했나요? 죄송합니다 형님.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공교롭게도 크루엘과 마주치고 말았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이쯤 되면 날 스토킹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런 비합리적인 의심을 하기 이전에 이 마주침을 설명할 수 있는 확실한 이유가 존재했기에 나는 입을 다물고 미간을 좁혔다.
‘주술사를 찾으러 왔구나.’
레멤베르의 말대로라면 이곳을 제외한 주술사는 가장 가까운 이조차 전부 훨씬 아래쪽에 산댔으니, 그도 정보력이 있다면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다.
때문에 인상을 쓴 채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보는데, 어째서인지 놈의 눈이 점점 커진다.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잠시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데?
──퍼억!
시야가 흔들렸다. 잠시지만 내 정신도 날아갔다.
***
“이 마을에서 썩 꺼지거라!!”
“아이고 할머니, 진정하세요! 저분들 옷차림 좀 보시라고요! 높으신 분들이에요! 이봐, 누가 할머니 좀 말려!!”
“재앙이, 재앙이 찾아왔다! 쫓아내야 해! 아니 죽여야 해!!”
“주군! 괜찮으십니… 아, 피가…….”
“……하.”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없던 데온이 짧은 실소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웃었다.
황당함과 어이없음을 담고 올라간 입꼬리를 멍하니 보던 리엔이 그의 눈을 확인하고는 흠칫 물러섰다.
그때의 그 눈이다. 습격이 있었을 때, 광기를 담고 번들거리던 그 눈.
“주, 주군…….”
“…….”
머리카락과 함께 맞은 부위를 쓸어올린 데온이 제 손바닥을 내려다 봤다.
흥건한 피. 지금도 뜨뜻한 액체가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지고 있으니 상처가 꽤 큰 것이리라.
피를 흘린 탓인지 더욱 소름 끼치게 빛나는 새빨간 눈동자가 스르륵 굴러가 난리를 피우고 있는 노인을 향한다. 늙은 사람이 힘은 어찌나 센지, 장정들이 매달려 있음에도 노인은 기어코 손에 쥔 돌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온이 손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내고 걸음을 옮겼다.
핏방울이 후두둑 흙바닥 위로 흩뿌려짐에 무심코 그를 향한 시선들이 불안함과 두려움에 휩싸여 얼어붙었다. 차마 함부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 미미한 광기를 담고 번들거리는 눈.
그렇지 않아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과 진득하고 음습한 분위기에 짓눌려있던 이들의 안색이 그의 걸음이 향하는 곳을 확인하고는 급격히 질려가기 시작했다.
그건 리엔도 마찬가지였다.
“주군…!”
“안 죽인다.”
누가 봐도 노인을 죽이려는 모양새이지만 주군의 말을 의심할 수는 없는 법. 단호히 쳐내는 말에 리엔은 그 자리에 멈췄다.
어떻게 좀 해보라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애써 외면했다.
주군이 확언한 이상 더 막아서는 것은 그를 의심한다는 뜻이고, 기사가 주군을 의심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니까.
게다가 그녀는 이미 두 가지 잘못을 했다.
하나는 주군을 지키지 못한 것. 다른 하나는 그가 돌에 맞았을 때 곧장 검을 빼 들고 대응하지 못한 것.
그런 그녀가 무슨 자격으로 그를 막아서겠는가.
‘주군과 주군의 형님의 대치 상황에 너무 집중했어.’
모시는 상관과 그의 가족의 불화는 다른 의미로 신경을 낭비하게 만든다.
그런 나머지 외부의 위협 요소를 간과해버렸다.
설마 이 산골짜기 시골 마을에서 주군에게 위협을 가할 사람이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아니, 이건 변명이지.’
주군이 돌에 맞은 순간 검을 들지 못했다는 점에서 앞의 변명은 무용지물이 된다.
‘상대가 노인이라 해도 망설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리엔이 주먹을 꾹 쥔 채 식은땀을 흘리는 사이, 느릿하게 걸어 기어이 노인의 앞에 선 데온이 살짝 허리를 굽혀 노인과 눈을 마주했다.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마주한 행동은 배려로 보이기에 충분할 터이건만 어째서인지 조롱으로만 보여 고개를 갸웃한 것도 잠시, 리엔은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억지로 홉뜬 눈과 소름 끼치는 붉은 눈이 미동도 없이 서로를 응시한 끝에 불안불안하게 시작된 대화. 그 대화에서─
“이봐, 노인네.”
“재, 재앙이!!”
“그래, 나보고 재앙이라고?”
저를 노려보는 노인을 똑바로 마주하며 데온이 씩 웃는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웃는 모습이 가히 기괴해 모두가 숨을 멈추고.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이윽고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니지. 난 ‘재앙’이라기보다는 ‘죄악’에 가깝지. 안 그래?”
“이, 이…!!”
***
난 무언가 바락바락 외치며 난리를 치는 할머니를 멍하니 바라봤다.
나이답지 않게 기운이 넘치시네. 이건 단순히 난리를 치는 게 아니라 거의 악을 쓰는 수준인 것 같은데.
그 와중에 머리는 또 깨질 것처럼 아프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그러고 보니 웬 돌에 맞았었지. 그리고 이 할머니가 외쳤었다. 난 재앙이니 죽여야 한다고.
재앙. 재앙이라…….
‘글쎄.’
굳이 따지자면 재앙보다는 죄악에 가깝지 않을까.
고개를 틀어 크루엘을 찾았다. 놈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도통 알 수 없는 복잡한 눈으로 날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자연스럽게 내 너머로 시선을 옮기고 이쪽으로 다가온다. 아니, 정확하게는 난리를 치고 있는 할머니와 장정들에게.
“주술사를 찾으러 왔다만.”
지독하게 냉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친 날 걱정하는 모습은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나는 리엔이 내민 손수건을 받아 다친 머리에 대고 상황을 지켜봤다.
“사, 사실은 이 할머니가 주술사입니다만… 얼마 전에 노망이 나서…….”
“이거 놓아라 이것들아! 난 저놈을 죽여야 한다!!”
“……그럼 이 마을에 더는 주술사가 존재하지 않는 건가?”
“아, 그게…….”
장정의 눈이 도르륵 굴러간다. 그의 눈은 어느새 다가와 할머니를 붙잡고 조곤조곤 설득하고 있는 여자를 담고 있었다.
“할머니, 진정하세요.”
“란아, 저 놈을 죽이거라. 너도 보았잖니. 응?”
“물론 보았죠. 하지만 안돼요. 할머니께서 늘 말씀하셨잖아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사람을 대해서는 안 된다고.”
우뚝. 노인의 몸부림이 멈췄다.
머리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 어쩐지 멍한 눈으로 있던 노인이 이내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멍하니 중얼거린다.
“……그래, 그랬지.”
노인이 고개를 홱 돌려 나를 쳐다본다.
그 기세에 짓눌려 찔끔 물러서려 했으나, 그런 내 미약한 반응은 어깨를 단단히 틀어쥔 노인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아파! 장정들이 쩔쩔맬 때부터 알아봤더라니, 역시 어지간히 힘이 센 노인이다.
“아이야.”
“네, 네?”
“절대 아무것도 증오해서는 안 된다.”
“……예?”
“절대로. 알겠니?”
아까는 돌을 던지고 죽여야 한다고 난리를 치더니 이제는 어깨를 붙잡고 부드럽게 어르고 충고한다.
이런 걸 노망이라고 하는 건가? 노망난 사람을 봤어야 알지.
……아무리 노망이라 해도 그렇지, 억울한 건 억울한 거다. 여기 크루엘도 있고 리엔도 있는데 왜 나한테만…!
‘아아아! 이 할머니가 진짜!’
거기 화살에 맞았던 곳이라고!!
대답이 없자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무시할 수 없는 악력에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만족한 듯 노인의 손이 떨어지고.
나는 욱신거리는 어깨를 매만지며 불퉁하게 말했다.
“주술사가 필요해서 왔습니다만, 이 할머니가 주술사라고요?”
날 죽이려 든 것도 모자라 어깨마저 부술뻔한 이 할머니만큼은 절대 안 된다.
아무것도 증오하지 말라 했지? 솔직히 인간이라면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당장 지금의 나부터가…….
“…….”
크루엘을 한 번 본 뒤 고개를 홱 돌렸다.
……아무튼, 다른 주술사가 필요하다. 어쩔 수 없이 남부까지 내려가야 하나? 그럼 얼마나 걸리지?
“제가 따라가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