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60
60. Fate or Destiny(2)
“……음?”
젊은 여자의 목소리. 무심코 상대를 확인한 나는 내심 놀랐다.
주술사는 늙은 사람들이 많지 않았나? 저 여자는 이제 막 20살이 된 것 같은데.
하긴, 뭔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이긴 했다. 당장 난리 치던 할머니를 진정시킨 것부터가 평범한 건 아니었으니…….
“먼저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 네.”
“저는 란이라 합니다. 저기 계시는 할머니의 손녀 되는 사람이지요. 저 역시 할머니의 피를 이은 터라 주술에 능합니다. 무엇을 목적으로 주술사가 필요하신지 모르겠으나, 저를 데려가시면 목적하신 바를 충분히 달성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어려서 못 미더울 수도 있겠지만, 이 마을에서 란은 할머니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것으로 자자합니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랄 것도 없어 조금 부족하더라도 데려갈 생각이었다만, 마을 사람의 추가 설명을 들으니 귀가 솔깃하다.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다 한쪽에 서 있는 크루엘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참고로 저기 서 있는 남자는 일행이 아닙니다. 저 남자와 일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전 귀인을 따라가겠습니다.”
확신을 주겠다는 듯 여자의 두 눈이 또렷이 나를 담는다.
별다른 반박 없이 이쪽의 상황을 지켜보는 크루엘을 힐긋 본 나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
주술사를 놓치는 것은 상관없다. 쓸모를 증명하는 것과 별개로 공작은 자신의 승리를 바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새 주술사를 구해주든 다른 방법을 알려주든 할 테니까.
마침 이곳에 남아 하고 싶은 일도 생겼겠다, 크루엘은 굳이 딴지를 걸지 않고 순순히 하나뿐인 주술사가 데온 일행에 속하는 것을 지켜봤다.
그럼, 이제 바로 가지 않고 굳이 이곳에 남아 있던 목적을 달성해야 할 차례다.
멀어지는 데온 일행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크루엘이 시선을 돌렸다. 투박한 녹색 돌을 깎아놓은 듯한 눈동자가 주술사였다던 노인을 담았다.
그녀와는 나누고 싶은 대화가 많다.
날아온 돌, 죽여야 한다는 외침, 그리고 재앙. 하나같이 날이 바짝 서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 크루엘이 입을 꾹 다물고 노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지친 숨을 몰아쉬던 그녀에게 거친 기세를 은연중에 드러내며 말을 거는 순간, 노인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고, 노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가도 왔구나. 바쁠 텐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겠누?”
“……!”
금방이라도 휘몰아칠 듯한 기세가 순간 주춤했다.
조금 전 데온을 대하던 모습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맑고 투명한 눈을 한 노인이 이쪽을 올려다본다.
뛰어난 주술사였다면서 그가 데온의 형이라는 것을 모르는지, 노인은 현숙한 태도로 부드러이 양팔을 벌려 보였다. 경계라고는 조금도 없는 모습.
“이리 오렴. 한 번 안아보자꾸나.”
“…….”
“어서.”
노망이 났다더니, 지금 이 모습도 노망의 일부인 것일까.
손해 보는 것도 아닌 일로 굳이 노인의 증세를 악화시킬 생각은 없기에 크루엘은 어색하게 그녀에게 걸어갔다.
노인은 그런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팔을 살짝 당겨 품에 끌어안으며 제 손주를 대하듯 다정히 속삭였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
“정말 고생이 많아.”
크루엘은 안타까움이 절절히 묻어나는 노인의 얼굴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숫제 울 듯한 표정이었음에도 그의 두 눈은 미동도 없이 고요했다.
“아가야.”
“…….”
“너는 멸망의 시작이 될 아이란다.”
“……!”
“걱정 마려무나.”
혹여나 그녀가 제게도 해를 끼치려 들까 황급히 물러서려는 그를 꽉 잡아 끌어안으며 노인이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미워하는 일은 없을 테니. 나마저 너를 싫어하면 이 세상에 너를 사랑하는 이가 한 명도 없게 되잖니.”
이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이러려고 데온을 먼저 보낸 것이 아닌데.
머릿속이 빙빙 도는 기분이다. 온갖 의심과 계산이 머릿속에 섰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왜 내게는 다정히 대하는 거지? 조금 전과는 태도가 다른 이유는 뭐지? 같은 사람이 맞긴 한 건가? 이런 식의 노망도 있던가?
모든 것이 연기일 가능성은? 그렇다면 무엇을 바라는 거지? 이 노인은, 전직 주술사는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혼잡해진 머리를 차마 부여잡지도 못하고 크루엘은 그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조금 전보다 더 단단해진 눈동자가 노인을 쳐다봤다.
그에 보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노인이 눈을 감은 채 빙긋 웃었다.
“사랑받지 못한 생명체는 수명이 짧기 마련이란다. 오래 살아야 하지 않겠니.”
─동생과의 암묵적인 내기에서 이겨야 할 테니.
파악! 그 순간 크루엘이 노인의 양어깨를 잡아 거칠게 떼어놓았다. 그의 손아귀에서 노인의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퍽 보기 안 좋은 장면임에도 크루엘은 이를 신경 쓸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단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도대체 무슨 수로.
노인의 말대로 자신은 데온과 암묵적인 경쟁을 하는 중이다. 따로 말을 주고받은 것은 아니다. 무언가 신호가 오간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각자의 목적을 위해 달려가다 보니 이리 되었다.
누가 더 오래 살아남느냐의 싸움을.
아마 데온은 ‘누가 더 먼저 상대를 죽이느냐’의 싸움을 하고 있겠지. 다르다고 보면 다를 수 있겠지만, 제게는 거기서 거기인 같은 내기다.
어차피 자신이 죽을 때는, 이미 데온이 죽은 뒤여야 하니까.
“부디 이기려무나.”
“…….”
“네가 이기면 재앙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 멸망의 시작도 아예 오지 않겠지. 그러니 정 죽을 것 같거나 죽고 싶거든 먼저 그 아이를 죽이고 죽거라.”
“……하.”
노망이 났다는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다. 이렇게 할 말과 못할 말을 구분 못 하는 것을 보면.
안절부절 못 하며 슬그머니 다가온 마을 청년을 향해 거칠게 그녀를 밀었다. 속절없이 밀려난 그녀가 청년의 품에 안착한다.
크루엘은 그녀를 싸늘하게 쳐다봤다.
‘같잖은 애정을 미끼로 쓸데없는 간섭을…….’
무슨 말을 무슨 목적으로 하는지 궁금해 그냥 두고 봤더니만, 이렇게 선을 넘을 줄이야.
‘죽일까.’
오른손이 검 손잡이 근처를 맴돈다. 그 모습에 노인을 부축하던 청년이 헉하고 작게 숨을 들이켰으나 정작 당사자인 크루엘과 노인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담담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녹색 눈이 노인의 깊고 검은 눈을 노려본 것도 잠시, 결국 크루엘은 검에서 손을 떼고 돌아섰다.
아직 그는 노망난 노인을 향해 검을 휘두를 정도로 망가지지 않았다.
***
“할머니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했었죠?”
산을 내려가는 내내 말이 없던 란을 슬쩍 살핀 내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이 침묵을 유지한 채 내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걸리는 것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나보고 ‘재앙’이라고 하지 않았나. 죽여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난 아직 살고 싶거든. 영문도 모른 채 죽는 것은 사양이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전직 주술사라 찝찝하기도 하고…….
“재능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니 알 수 없지요.”
“……그럼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당신의 할머니가 당신에게 한 말이 있었죠. ‘너도 보았잖니’라고.”
“귀인의 운명과 미래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네 그렇습니다.”
그리 말하며 란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지금도 보이고 있습니다.”
“…….”
나는 천천히 란의 얼굴을 훑었다. 웃음기라고는 일절 보이지 않는 표정과 맑고 또렷한 눈동자.
전혀 미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헛소리가 아니었단 말인가.
“아마 귀인께서는 조금 전 그 말을 단순히 노망난 노인의 헛소리로 치부하고 싶으실지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저희 할머니께서 노망이 나신 것은 그 미래를 본 이후의 일입니다.”
“……설마, 노망이 난 이유가…….”
란은 씁쓸하게 웃었다.
“너무 많은 것을 안다는 것도 마냥 좋은 것은 아니더군요.”
“……그 할머니가 날 알고 있었습니까? 어떻게 만나본 적도 없는 내 미래를 점칠 수 있었던 거죠?”
“사실 할머니께서 점친 것은 귀인이 아닌 한 마을 아이의 미래였습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쳐다본다.
“귀인께서 그 아이의 운명에 깊게 얽혀있던 탓에 볼 수밖에 없었지요.”
덩달아 그 시선의 끝을 좇자 한 남자가 나무 뒤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깜짝이야! 저거 뭐야!’
보아하니 19살? 20살? 아무튼 옆의 란이란 여자와 나이가 엇비슷한 것 같은데, 애도 아니고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무섭잖아.
심지어 눈이 마주쳤는데도 숨지 않는다.
어두운 색의 머리와 눈이 특징인 남부인답게 어두운 눈동자가 이쪽을 똑바로 향한다.
마치 탐색하듯 이쪽을 훑어내리는 그의 시선에 잠시 얼어붙어 있던 나는 뒤늦게 더듬더듬 리엔을 불렀다.
“……리엔 경…….”
“예, 주군.”
“알고 있었습니까?”
“예.”
그런데 왜 말을 안 한 건데 이 사람아.
“주군께서 별말씀이 없어 그냥 두고 봤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아니, 아닙니다.”
맞다, 얘도 날 무지막지하게 강한 놈으로 착각하고 있었지.
차마 뭐라 말도 못 하고 한숨만 내뱉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저 남자의 미래에 내가 있었단 말이지? 내 미래를 점친 것도 아니고, 고작 남의 미래 속에 있는 나를 본 것뿐인데 그런 반응이었다니…….
“……도대체 무엇을 보았던 건지.”
“운명과 미래는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자칫 입 밖에 내었다간 오히려 그로 인해 최악의 결과가 도래할 수도 있으니까요.”
“…….”
“하지만 이 정도는 말할 수 있겠군요. 귀인에게 증오는 산불과도 같습니다. 처음엔 별 것 아닐지 몰라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급격히 덩치를 키워 종국엔 모든 것을 집어삼키겠지요. 그러니 저희 할머니께서 아무것도 증오하지 말라 하셨을 겁니다.”
머릿속이 더 복잡해진 기분이지만 하나는 확실히 이해가 된다.
시발 그러니까 뭔진 몰라도 내가 미래에 큰일을 치른다는 거 아니야.
되도록 평온한 삶을 지향하는 내가 어째서 큰일을 치르게 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원흉이 ‘증오’라는 거고.
현재 내가 증오하고 있는 사람은 크루엘 밖에 없으니 아마 그가 도화선이 되지 않을까.
‘역시 크루엘부터 처리해야겠어.’
그렇지 않아도 눈에 거슬리던 참이다.
영웅이 된 탓에 황제가 누구의 편을 들지 장담할 수도 없고, 뒤에는 공작까지 업은 데다 사교계의 주목 때문에 지금까지 차마 건들지 못했다만, 빨리 방법을 찾든가 해야지.
‘암살은 시끄러워질 가능성이 크고, 저주라도 걸어야 하나…….’
음? 나쁘지 않은데? 마침 옆에 주술사도 있고.
저주에 대해 슬쩍 물어볼까 생각하는데, 끝난 줄 알았던 란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저 아이는 언젠간 터질 폭발물에 가깝지요.”
“아.”
쟤 아직도 저러고 있었냐?
나는 떨떠름한 눈으로 아직도 이쪽을 보고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그런 내 시선을 ‘남자를 향한 흥미’ 혹은 그 비슷한 감정으로 해석한 듯 란이 희미한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폭발물이 터지면 불이 나고, 반대로 불이 나면 폭발물이 터집니다. 그 탓에 되도록이면 저 아이와 마주치지 않길 바랐지만…… 운명이라는 게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겠지요.”
……뭐라는 거야?
그것보단 아까부터 자꾸 운명 타령을 하는데, 어감이 좀 그렇다.
그냥 ‘미래에 어쩌다 제대로 얽히게 되는 사이’ 정도로 명명해주면 안 되나?
그 와중에 확인할 건 다 확인했는지 남자가 뭔가 결심한 듯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덩달아 리엔이 검집에 손을 올리며 경계한다.
그녀가 검을 빼 들기 전에 걸음을 멈춘 남자가 나를 똑바로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심 긴장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황당한 말이 튀어나왔다.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