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66
66. 선전포고(1)
문이 완전히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한 내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누가 제국 아니랄까 봐.’
웅장하고 화려하기 짝이 없는 내부가 자칫하면 황제를 앞에 두고 눈이 다른 데로 돌아갈 위험도 있겠다 싶었으나,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런 가정은 집어치워 버렸다.
어느 누가 감히 그를 두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수 있을까. 이 길의 끝, 가장 상석에 앉은 남자의 위압감이 여기까지 미치고 있는데.
에도아르도 데세르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이 땅의 유일무이한 황제.
공적인 자리라 그런지 더욱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드러내고 있는 그가, 바로 저기에 있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옆에 서 있던 크루엘이 먼저 걸음을 옮긴다. 그에 질세라 나 역시 서둘러 정신 차리고 황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걸음이 멈추고, 크루엘과 내 입이 동시에 열렸다.
“제국에 광명을.”
전쟁 중일 때는 ‘영광을’, 평소에는 ‘광명을’.
“신 크루엘 하르트가 현재의 제국을 뵙습니다.”
“신 데온 하르트가 현재의 제국을 뵙습니다.”
그리고 그 뒤는 똑같다.
가만히 예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자, 머리 위로 황제의 목소리가 떨어진다.
기분 탓인지 그의 목소리는 공치사를 위해 부른 것 답지 않게 그다지 기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개를 들도록.”
아, 기분 탓이 아니구나. 저 얼굴 좀 봐라. 저게 어디가 기쁜 얼굴이야.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는데.
‘왜지? 나 때문인가?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하고 보니 내가 좀 못 미더운 짓을 많이 하긴 했다.
사이비 종교에 홀린 이들을 그냥 보내기도 했고, 그 난리를 친 주제에 서류는 한 장도 못 챙겼고…….
아무래도 내가 그리 쓸만한 인재가 아니란 걸 눈치챈 모양이다. 조용히 눈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나와 크루엘 외의 다른 사람은 안 보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공식적으로 질책할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내게도 기회가 있지 않을까?
일단은 최선을 다해 빌어보고, 안 되면 도망치든가 하자.
황제를 공격한다는 선택지는 당연히 넣지 않았다.
황제를 지키는 이들을 상대로 내가 이길 수 있을 리도 없을 뿐더러, 난 네메세우스 장군님과는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황제는 용사의 파편을 지닌 영웅이니까.’
어떻게 아무 기반 없는 9왕자가 모든 이들을 쳐 죽이고 왕의 자리에 올랐겠는가. 어떻게 즉위한 지 8년 만에 모두가 인정하는 황제가 되었겠는가.
압도적인 무력이 있어서다.
그는 지금까지 등장한 영웅들 중에서 가장 큰 용사의 파편을 지닌 사람이다. 파편의 크기는 알 수 없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영웅도 황제만큼의 무위를 보이진 못했으니까.
그런 그를 내가 죽인다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잖은가. 일반인을 상대로도 위태로운 수준인데.
‘그저 빌자.’
혹시 모르잖아?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살려둘 수도.
아니, 아니지. 황제를 상대로는 ‘정’ 따위 보단 아직은 ‘스파이’로서의 쓸모가 있다는 것에 거는 것이 훨씬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나는 마왕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니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사이, 황제의 공치사가 이어졌다.
형식적인 말들이 떨어지고, 마침내 그가 본론을 꺼냈다.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은 사이비 종교에 홀린 일반인들을 그냥 보내주는 등의 무른 행동을 보였으나 적극적인 행동을 하며 배후를 잡을 수 있는 길을 열었고, 크루엘 하르트는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배후를 알아내고 그 증거를 가져왔다.”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에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것 같은 건 착각일까.
황제는 아까보다 더 심기 불편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고생한 둘 모두에게 소원권을 주고 싶지만, 소원권은 하나이기에 한 명만 선택해야 하지. 그렇기에 짐은 고심 끝에 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크루엘 하르트의 손을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황송합니다.”
쳇. 역시나인가.
여기서 저 새끼가 서류를 불태웠습니다! 라고 외칠 수도 없고.
그나마 다행인 건 황제가 내가 지른 불 때문에 서류가 불탔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이상 그것으로 무언가 불이익을 주진 않을 테니 그게 어딘가.
“그래서, 무엇을 바라지?”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가 묻는다.
크루엘은 한 번 더 깊게 허리를 숙이며 담담히 답했다.
“현재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이 소유하고 있는 하르트 영지를 제게 주시길 감히 청합니다.”
……뭐?
“……하르트 명예 백작의 생각은 어떤가.”
아니, 잠깐만. 하르트 영지는 내 땅이잖아!
물론 갖기 싫다며 온갖 생떼를 다 부리고 황제에게 달려가 따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빼앗기는 것은 기분이 더럽다. 사실상 당사자의 동의 여부는 고려하지 않은 영지 소유권 이동 아닌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황제를 바라봤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
선택의 여지는 없다. 여기서 거절했다간 내 체면만 상한다. 내가 뭐라 말하든 그렇게 갖기 싫다며 난리 치던 영지이니 상관없지 않느냐는 대답 하나면 와르르 무너질 테니까.
황제도 그걸 알기에 선택권을 주는 척, 내 생각을 물은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부담스러웠던 영지입니다. 감사할 따름이지요.”
이를 악물고 크루엘을 노려봤다. 분명 내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놈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불편한 내 심기를 황제가 모를 리가 없다. 그는 모르는 척 가볍게 팔걸이를 두드려 자신에게 이목을 모으고 입을 열었다.
“하르트 영지의 소유권을 크루엘 하르트에게 넘기는 것에 앞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영지를 갖기 위해서는 작위가 필요하지.”
흠칫, 나와 크루엘의 몸이 동시에 떨렸다.
‘……응? 뭐야, 얘는 왜 떨어?’
아니 나야 저놈이 작위까지 갖게 된다는 것에 위기감을 느껴서 그렇다 치더라도, 크루엘 너는 왜?
“이전에도 말했지만, 크루엘 하르트. 아직도 그대의 생각은 변함없는가?”
“……소신은 하르트가를 잇고 싶지도 않고, 성을 바꾸고 싶지도 않습니다.”
“……!”
아,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채버렸다. 나도 같은 이유로 황제의 제안을 거절했었으니까.
내가 그저 ‘명예 백작’의 자리에서 멈춘 것에 대한 직접적인 이유.
8년 전쟁이 끝나고 처음 황제를 대면했을 때, 그는 내 공로를 칭찬하며 자신이 밀어줄 테니 하르트가의 가주 자리에 앉아보라 했었다.
지금의 명예 백작 자리 따위가 아닌, 유구한 역사를 가진 ‘진짜’ 하르트 백작가의 가주 자리에.
보통의 차남들이었다면 조금은 욕심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나는 하르트가의 이름만 들어도 진저리를 칠 정도로 가문을 혐오하고 있었다.
그토록 혐오하는 자리에 내가 앉을 리가 없지 않은가.
딱 잘라 거절하자 그 다음으로 황제가 추천한 것은 다른 작위였다. 기본 백작위, 황제가 좀 더 힘을 쓰면 후작위 정도는 가뿐히 얻어낼 수 있다고 했었지.
물론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하르트’의 성을 버려야 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냉큼 받았을 정도로.’
본인이 새로운 성을 짓거나, 황제가 새로운 성을 하사하거나.
어쨌건 이미 ‘하르트 백작가’가 존재하는 이상 똑같은 성의 다른 작위가 등장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고 나는 깔끔하게 작위를 포기해버렸다.
그런 내게 황제가 기어코 쥐어준 것이 바로 ‘명예 백작’ 자리였고.
명예 백작은 단승 작위여서 내가 죽으면 자연스럽게 그 맥이 끊긴다. 즉 ‘하르트가’가 두 개가 생겨 후에 혼란이 빚어질 여지는 없다는 것.
원래 황제는 명예 후작 자리를 주고 싶어 했으나 역사상 ‘명예’ 작위는 백작위까지 밖에 주어지지 않았기에 그렇지 않아도 전쟁 후 뒷처리로 대신들과 싸울 일이 많았던 황제는 여건상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크루엘도 비슷한 제안을 받았었구나.’
하긴, 당연하다. 그도 이젠 ‘영웅’이니.
생각하고 보니 현재 제국에 존재하는 공식적인 영웅들 중 크루엘 하르트만 작위가 없다.
내가 하르트의 성을 버리기 싫어하는 이유가 분노와 복수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면, 녀석은 그리움 때문일까.
어쩌면 그 역시 복수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족들을 눈앞에서 죽인 나를 향한 복수심.
녀석이 하르트가의 가주 자리를 거부하는 것도 어쩐지 이해가 간다.
아마 괴롭기 때문이리라.
“곤란하군. 명예 백작 작위는 이미 같은 성을 가진 이가 갖고 있는데. 그렇다고 그보다 더한 공을 세우지 못한 그대를 명예 후작 자리에 앉힐 수도 없고, 무려 영웅을 고작 명예 자작이나 남작 자리에 앉힐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거짓말. 그냥 주기 싫은 거면서.
아무리 그래도 작위가 아예 없는 것보단 있는 편이 낫다. 그 탓에 귀족파에서도 몇 번 이 문제로 항의한 적이 있었는데, 황제는 그때마다 싸그리 무시했다.
아마 공작에게 휘두를 수 있는 패를 더 쥐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희한하게도 공작이 이 문제에 대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지만….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리는 크루엘을 향해 황제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목소리를 내었다.
“하르트 영지의 소유권을 일루스터 공작에게 넘기도록 하지. 어떤가?”
그대는 공작의 수하이고, 그대가 원한다면 공작은 흔쾌히 그대를 영지의 관리인으로 임명할 테니.
어쩐지 그런 속마음이 들리는 듯 했다.
잠시 침묵하던 크루엘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해결됐군. 하르트 명예 백작만 남고 다들 물러가라.”
크루엘이 날 힐긋 보더니 물러간다. 부릅뜬 내 눈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빌어처먹을 새끼.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거야?
아니, 그보다…….
‘……왜 저만 남기신 겁니까, 폐하. 무섭잖아.’
드디어 올 게 온 건가.
내가 인재가 아니란 걸 들통난 그 순간이.
하르트 영지에 관한 문제는 일단 뒤로 미뤘다. 지금은 황제의 분노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만 생각해야 한다.
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하여간 형제가 하나같이 고집불통이다. 죽어도 하르트 백작가는 잇지 않으려는 것 하며…….
둘은 지금 주인 없는 백작가가 망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거의 남이나 다름없는 방계가 모여서 주인 노릇하겠답시고 짖어대고 있는데.
하긴, 모를 리가 없겠지. 단지 신경 쓰지 않는 것뿐이리라.
황제는 한숨을 삼키며 홀로 남은 데온 하르트를 눈에 담았다.
‘표정이 안 좋군.’
하르트 영지를 빼앗긴 탓일 터.
굳이 그것을 언급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생각은 없기에 황제 에도아르도는 순순히 다른 화제를 입에 올렸다.
너무 강렬한 말이어서 하르트 영지 따위는 순식간에 잊혀질 수준의 그런 화제를.
“알현 뒤에 바로 회의를 할 예정이니 그대도 곧 알게 되겠지만, 지금 미리 말해두지. 짐은 전쟁을 할 생각이다.”
“……!”
꽤나 놀란 모양이다. 하긴, 전쟁이 끝난 지 이제 고작 2년 지났을 뿐이니.
온전하게 드러난 적안을 마주하며 황제가 슬쩍 웃었다.
“구원교 소탕이 아주 적절한 시기에 끝났지. 마침 이레온 왕국이 슬슬 못 봐줄 정도로 짖어대고 있던 터였다.”
“이레온 왕국과… 전쟁을 하시려는 겁니까?”
“시작은 그렇게 되겠지.”
시작은.
끝은 대륙 통일이 될 것이다.
말뜻을 눈치챈 데온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지긋지긋했던 8년 전쟁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 테지.
그러나 자신도 부상자를 전쟁에 내보낼 만큼 매정하진 않다. 아, 그래. 솔직하게 인재를 그런 식으로 허무히 잃고 싶지 않을 뿐이다.
단지 전쟁 준비를 명할 생각이었다면, 조금 뒤에 있을 회의에서 말해도 됐을 텐데 왜 굳이 이렇게 따로 만났겠는가.
“그대에겐 마계를 부탁하고 싶다.”
대륙 정복 자체는 별 문제가 없지만, 마계는 거슬린다.
제국이 대륙을 집어삼키는 것을 마왕이 순순히 지켜보고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데온 하르트는 효용 가치가 아주 높다.
그는 제국의 영웅이며 마왕군의 군단장이다. 마왕의 곁에 있을 수 있고 놈의 신뢰를 얻은 유일한 인간이다.
“마왕의 곁에서, 마왕군이 이 전쟁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최대한 손을 쓰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대가 돌아올 때까지 로프티 기사단은 짐이 맡아두겠다. 그대로 저택에 두었다간 언젠가 백작저마저 무너뜨릴지도 모르니.”
“…….”
“그리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긴 하지만 여름은 여름이라 가벼운 옷차림 사이로 드러난 쇄골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확하게는 쇄골 바로 위, 검은 낙인에.
[마왕의 저주.]입안에서 굴리기만 해도 절로 쓴 웃음이 나오는 그 단어를 되뇌며 손을 뻗었다.
“……다음에는 이것이 사라진 상태로 만났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