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68
68. 선전포고(3)
이건 회의가 아니라 선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어이가 없을 지경인데, 심지어 삼일 뒤라니.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최대한 입을 다물고 있자고 다짐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무수히 많은 말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종전을 선언하신 것이 불과 2년 전입니다. 어찌하여 또 전쟁을 하신단 말씀이십니까!”
“짐이 종전을 선언한 이유는 더 이상 기어오르는 왕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과 2년 사이에 제국의 공포를 잊은 왕국이 생긴 모양이더군.”
이레온 왕국.
황제가 손가락을 튕기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각 귀족들 앞에 서류를 내려놓는다. 이를 읽은 이들이 나직이 신음했다.
확실히 제국이 잘못했다 할만한 것은 없다. 하지만 그래도 전쟁은 아니다. 얻는 것보단 잃는 것이 더 많지 않나.
이득에 눈이 먼 어리석은 왕국을 향해 이를 갈며 어떻게 황제를 설득할지 고민하는데, 그들의 귀에 조금 전보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리고 기왕 전쟁을 치르는 것이니, 이참에 짐은─”
“…….”
“─대륙정복을 목표로 움직일 생각이다.”
“!?”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던 일이다. 이레온 왕국을 쓸어버리는 김에 한 번에 끝내버리는 것이 낫겠지.”
“폐하! 그게 무슨…!”
오래 전, 군주의 자리에 오른 순간부터 정한 목표다. 대신들이 뭐라 하건 황제는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 건방진 것은 이레온 왕국만이 아니니까.
데온 하르트의 부상 소식이 물밑에서 소리 없이 퍼진 이후 제국을 대하는 다른 왕국들의 태도에 여유가 생겼다.
그 정도인 것이다. ‘데온 하르트’라는 이름의 무게가.
‘그럴 만도 하지.’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
8년이라는 긴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영웅’들이 탄생했고, 그 명성이 의미 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죽어 나갔다.
전쟁이 끝난 당시 살아남은 이들은 고작 세 명뿐.
데온 하르트는 이들 중 가장 늦게 영웅으로서 명성을 떨친 동시에, 가장 유명했다.
각자가 맡은 지역이 있던 다른 영웅들과 달리, 전쟁 내내 다양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선봉장으로서 활약했기 때문이다.
본래 이는 당시 데온 하르트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에 실행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치 못한 효과를 드러냈다.
다름 아닌 ‘데온 하르트’에 대한 공포.
그렇지 않아도 붉은 눈과 흰 머리라는 독특한 외모를 소유한 그다.
이것은 소문이 퍼지는 와중에 변질되어 적들에게 악마 그 자체로 알려지게 되었다. 단순히 독특한 것만이 아니라 훈훈하기까지 한 외모로 아군에게도 여러 의미로 유명세를 끈 것은 덤.
어떤 의미로 알려졌건, 그의 ‘유명세’는 존재만으로도 적들의 기세를 반쯤 꺾어놓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의식 중에 ‘제국 전력의 대부분은 데온 하르트가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데온 하르트의 부상 소식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다른 왕국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어 올릴 만도 했다.
‘사실이 아니니 상관은 없지만.’
귀찮다.
기가 살아날 때마다 짓밟아 눌러주고, 또다시 고개를 들고, 눌러주고…….
어차피 대륙 정복이 목표인데 굳이 이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러니 이참에 모두 끝내자.
그렇게 내려진 결론이었다.
당연히 다른 대신들은 기함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물건 사러 가는 김에 건물도 산다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나!
말려야 한다.
생각이 바뀌었다. 이레온 왕국과의 전쟁은 어쩔 수 없다 쳐도 대륙 정복만큼은 막아야 한다.
희게 질린 귀족들이 앞다투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대륙 정복은 아직 이릅니다! 준비할 것도 상당하고, 예산도…!”
“기본적인 준비는 이미 전부 끝냈다.”
도대체 언제 준비한 건지, 깔끔하게 정리된 예산안이 각 귀족들 앞에 놓였다.
“전쟁은 제국에도 큰 피해를 입힐 겁니다! 꼭 적들이 우리 영토에 들어와 짓밟아야만 피해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국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짐이 그것도 고려하지 않았을 것 같은가.”
“아직 혁명군을 뿌리 뽑지 못했습니다! 내부에 적을 둔 채 전쟁을 치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짐이 그대들을 부른 것이다. 방안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나.”
“아직 8년 전쟁의 여파가 완전히 수습되지 않았습니다. 제국민들이 불안해할 겁니다. 제국의 안정을 생각하셔서라도…….“
”8년 전쟁 때 적들이 제국민들의 터전까지 밀고 들어온 적이 있었던가. 이번에도 그들은 안전할 것이다.“
”하, 하오나…… 심리적인 불안감이…….“
그 뒤로 나온 말들은 대부분 엇비슷했다.
제국을, 제국민들을 생각해서라도 대륙 정복만큼은 보류해달라, 뭐 그런.
귀족들은 황제가 우선시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책임.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는 의무와 책임을 중요시 여긴다. 황제가 된 이상 그는 내키지 않을지라도 제국을 책임지고 제국민들을 돌보는 일을 절대 소홀히 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폭군이라 칭하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행보였다.
그러니 제국과 제국민들을 들먹인다면 조금은 다시 생각해줄지도 모른다 생각했으나, 황제는 역시 강적이었다.
“제국을 위해서, 라고?”
서늘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던 목소리가 삽시간에 사그라들고, 황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귀족들을 둘러보는 그의 금안은 자존심이 건드려진 맹수처럼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피부로 느끼고 실감한 순간, 황제가 으르렁거리듯 공작을 불렀다.
“일루스터 공.”
“예, 폐하.”
“황제를 향해 하는 인사가 무엇이었지?”
……아아.
공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일을 이런 식으로 해결하려 하다니.’
이렇게 나오신다면야, 이용당해드려야지요.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고 황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입에서는 옅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신 스타베 일루스터가 ‘현재의 제국’을 뵙습니다.”
“그래.”
당연하다는 듯 황제가 시선을 뗀다. 그대로 얼어붙은 귀족들을 둘러보며 머릿속에 되새겨주듯 강하게 말한다.
“짐이 곧 제국이다.”
“…….”
“제국을 걱정하는 것에 대한 짐의 대답을 들었음에도 계속하여 이를 언급한 것은 짐의 말이 말 같지 않다는 뜻인가?”
“다,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는 단지 충심으로…….”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긴장감이 회의장을 짓누르자 여기저기서 필사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황제가 분노를 터트리면, 반드시 누구 하나는 죽어 나간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제 목이라도 날아갈까 추스르는 기색이 역력해 황제는 잠시 입을 다문 뒤 한층 누그러진 기색으로 천천히 입을 뗐다.
”경들의 충심은 잘 알고 있다. 하나 짐을 모욕하고 싶지 않다면 이 이상의 말은 삼가는 편이 좋겠군.“
“명심하겠습니다.”
귀족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내심 한숨을 삼켰다.
완전히 말려들었다. 이렇게 되면 황제를 설득하는 것은 물 건너간 셈이다. 황제도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을 터.
역시나 황제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이만 회의를 파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못을 박듯 말했다.
“전쟁은 확정되었다. 이후 한 번 더 회의를 열 테니 그대들은 그때까지 혁명군에 대한 방안을 마련해오도록.”
“……명을 받듭니다.”
“그리고 일루스터 공.”
저를 향한 황제의 시선을 마주하며, 공작이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회의는 끝났다. 모여들었던 귀족들은 저마다 심각한 표정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회의장은 텅 비었다.
본래 그들 사이에 섞여서 돌아갔어야 할 공작은 다른 방에서 황제를 마주하고 있었다.
여전히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는 공작을 매서운 눈으로 보던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작.”
“예 폐하.”
“덕분에 구원교의 배후를 잡을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일단 감사를 표하지.”
“그것은 제가 아니라 크루엘 경이 한 것입니다.”
역시나 고작 그 정도로 쉽게 넘어가진 않는다. 황제는 조용히 미간을 찌푸리며 공작을 똑바로 노려봤다. 공작 역시 지지 않고 웃는 얼굴로 마주했다.
허공에서 두 시선이 맞부딪쳤다.
어느 누구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길 한참, 여전히 공작을 노려보며 황제가 짓씹듯 말을 뱉었다.
“공교롭게도 그 배후가 귀족파 내에서 공과 대립하던 자더군.”
“그래도 귀족파는 귀족파입니다. 전력 손실을 어느 누가 반기겠습니까. 같은 귀족파로서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웃기는 소리.
공작은 자신에게 반(反)하는 자를 가만두지 않는다. 대놓고 황제파를 노릴 수는 없으니 귀족파 내에서 거슬리는 자를 골랐겠지. 뻔한 일이다.
조금 더 떠볼까.
상대에 따라 몰아붙이는 꼴이 될 수도 있지만, 공작이라면 분명 유들유들하게 빠져나갈 것이다. 제아무리 몰아붙여도 떠보는 꼴밖에 되지 않겠지.
하지만 그 떠보는 것조차 지금은 도움이 되기에.
“최근 들어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리던데.”
황제는 입을 열었다.
“황제는 ‘죄악’이요, 공작은 ‘구원’이랬던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자들의 헛소리입니다. 구원교도 소탕되었으니 이제 굳이 신경 쓰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차앙!
한순간이었다. 공작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시선을 내려 제 목을 겨눈 그것을 확인한 뒤 다시 황제를 쳐다봤다.
제 뒤에 있던 네메세우스의 검을 빼든 황제가 공작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는 드물게 빈정거리듯 입꼬리를 올리며 검을 살짝 추켜올렸다. 덩달아 공작의 고개 역시 올라갔다.
“확실히 헛소리지. 짐은 ‘죄악’보다는 ‘재앙’에 가까울 터이니. 그렇지 않은가, 공작?”
“…….”
입을 다물자 한순간 황제의 표정이 변했다.
언제 웃었냐는 듯 살기 가득한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짐이 그리도 우습게 보이더냐.”
분노 가득한 음산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린다. 황제의 몸에서 나오는 살기가 공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주륵.
검이 파고든 환부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보라색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가 그것을 확인하더니 이내 황제에게 고정된다.
공작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저를 죽이지 못하십니다.”
재앙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눈앞의 황제는 사람을 가린다.
고로, 너는 재앙이 아니다.
그렇기에 내가 너의 권력을 탐하는 것이다. 재앙을 상대로는 알력 다툼이 아무 소용 없으나 너를 상대로는 가능하니.
”……공은 짐이 이미 한 개의 공작가를 밀어버렸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 것 같더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지막 남은 공작가라 하여 짐이 망설일 것 같으냐.“
”그 이유 때문에 망설이지는 않으시겠지요. 하나, 그럼에도 폐하께서는 저를 죽이지 못하십니다.“
굳이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네겐 나를 죽이지 못할 이유가 많다.
‘짐이 못 죽일 것 같으냐.’
‘못 죽입니다.’
무수히 많은 눈빛이 오간다. 분노에 가득 찬 황금빛 눈을 마주하며, 공작은 보란 듯이 웃었다.
나를 죽이면 넌 상당히 귀찮아질 것이다. 수많은 귀족들의 반발을 사야겠지. 힘으로 누르는 것도 한계가 있다.
전쟁을 하고 싶겠지. 대륙 정복을 하고 싶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내부의 안정부터 꾀해야 한다.
그런 네가, 나를 죽일 리가 없지 않은가.
‘노려도 전쟁 중에 노리겠지.’
물론 그마저도 쉽진 않겠지만.
검을 거두느냐, 그대로 베어버리느냐.
한참의 기싸움 끝에, 결국 먼저 물러선 쪽은 황제였다.
그는 검을 거둬 네메세우스에게 다시 건네며 씹어뱉듯 말했다.
“짐더러 죄악이라더니, 죄악은 따로 있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