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69
69. 굴러가는 수레바퀴(1)
황제, 전쟁, 대륙 정복, 마계, 감시, 시바아알…!
백작저로 돌아온 나는 집무실 책상에 얼굴을 박고 연신 욕을 읊조렸다.
미친 놈들이 득실거리는 그곳으로 다시 가야 한다니!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황제와 마왕의 손에서 평생을 도망다닐 정도로 내 각오가 굳건하지 않기에 결국 나는 퀭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짐이나 싸야지.’
또다시 시한폭탄 같은 놈들을 주위에 끼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위장이 쓰린 기분이지만 뭐 어쩌겠어. 상대가 황제랑 마왕인데. 하하하. 하하하하.
……시발.
“으으으…….”
“저, 마스터…?”
“……?”
“돌아오셨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습니다만… 어디 아프십니까?”
이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외모의 사내가 문밖에서 고개만 들이민 채 눈치를 살핀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 이쪽 북부인보다는 남부인에 가까운 외모.
그러니까… 이름이 단이랬나? 주술사의 마을에서부터 날 따라와 검을 배우고 있는… 그런데 왜?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
“아니, 괜찮아. 무슨 일이지?”
곧장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허리를 펴고 대응했다. 그런 내 태도가 황당했는지 잠시 침묵하던 그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연다.
약간의 망설임을 담고 열린 입술이 머뭇머뭇 말을 뱉었다.
“저…….”
“백작님!”
저런.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입을 연 것 같았는데.
나는 삽시간에 말이 잘려버린 그를 향해 속으로 혀를 쯧쯧 차고는 갑작스럽게 난입한 시종을 쳐다봤다.
따로 질책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하얗게 질린 저 얼굴이 퍽 안쓰럽거든. 여기서 나까지 혼냈다간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달까.
게다가 우리 백작저 사용인들은 나를 향한 예의만큼은 철저하게 지키려 노력하니까.
그러니 예의조차 잊을 정도로 무언가 큰일이 터졌다는 뜻일 것이다.
……젠장.
“화, 화, 화화화…….”
“화, 뭐?”
“황태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오, 황태자 전하가? 거봐, 큰일 맞잖아.
아니 잠깐만.
……황태자가?!
“또 왜!!”
“히익!”
왜 또 기별도 없이 찾아온 건데!
책상을 쾅 짚으며 벌떡 일어섰다. 최소한의 예를 갖추기 위해 겉옷을 걸치며 어느새 옆에서 패닉이 된 채 ‘죄송합니다’를 주문처럼 외우고 있는 시종에게 시선을 던졌다.
“황태자 전하께선 어디에 계시지?”
“죄송합니다! 예? 아니, 으, 응접실에 계십니다. 집사님께서 대접하고 계ㅅ…”
어쩐지 웬일로 레멤베르가 아닌 다른 이가 보고를 하러 왔다 했더니 상대가 황태자여서 그런 거였구만.
시종의 말을 더 들을 것도 없이 서둘러 걸음을 뗐다.
뒤에서 눈만 굴리며 눈치를 살피는 단의 존재는 까맣게 잊은 뒤였다.
***
“신 데온 하르트가 미래의 제국을 뵙습니다.”
“그래,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일 텐데도 차분하게 인사해오는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을 보며 황태자 엘피디우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도 오늘만큼은 평소보다 더 차분한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부터 꺼낼 말은 조금 예민한 말이니까.
“마계에 간다지?”
“…….”
순간 데온의 눈이 방 안을 빠르게 훑었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눈동자가 이내 황태자를 직시한다. 새빨간 눈과 황금색 눈이 마주쳤다.
경계심 가득한 붉은 눈을 물끄러미 본 것도 잠시, 이내 황금색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렇게 볼 필요 없네. 설마 내가 자네에 대한 비밀을 모를 줄 알았나?”
“…….”
“나는 차기 황제라네. 나이가 나이인 만큼 내가 황제가 된다면 정당한 절차를 밟는 것이 아닌 폐하께 변고가 있어 갑작스럽게 그 자리를 물려받는 것이 될 테지. 그러니 언제, 어느 때 황제가 되건 별 문제 없이 제국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다시 말해 황제가 모든 주요 정보를 공유해주고 있다는 뜻이 된다.
“……실례했습니다.”
“아니야. 경계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아무튼─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폐하께서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전할 겸, 자네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네.”
“…….”
“당분간 못 볼 얼굴, 지금이라도 실컷 봐두어야 하지 않겠나.”
무언가 반대로 말한 것 같지만 사실이다.
하르트 명예 백작이라면 굳이 이 말을 전하지 않았어도 알아서 잘 했을 테니까.
그의 머리가 보통 이상임을 알고 있는 엘피디우스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더하며 느긋이 입을 뗐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폐하께서는 만일 마왕이 전쟁을 결정하면 곧바로 복귀하라 하셨네.”
“알겠습니다.”
“그 무슨 일이 있어도.”
“…….”
“반드시 복귀하라 말씀하셨지.”
데온은 황태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어쩐지 섬뜩하기까지 한 붉은 눈이 미동도 없이 엘피디우스를 향한다.
이번만큼은 엘피디우스도 피하지 않았다. 웃음기 하나 없는 맹수의 것과 닮은 황금색 눈동자가 시선을 맞받아친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먼저 물러선 쪽은 데온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순순한 대답과 달리 두 눈은 기묘하게 빛난다.
이내 아래로 내리깔려 소리 없이 감춰진 눈빛을 황태자는 조용히 지켜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의 노고에 언제나 감사를 표하는 바네.“
***
엘피디우스는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것은 긍정적인 의미이기도 했고,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도 했다.
데온 하르트가 누구던가.
결코 좋지 않은 칭호와 ‘영웅’이라는 칭호를 동시에 가졌으며, 마왕을 막아서고 용사의 시신을 수습한 자가 아닌가.
‘또한,’
마왕군의 군단장인 자.
그래, 무려 제국의 영웅인 동시에 마왕군의 군단장인 자다.
그렇기에 차기 황제인 엘피디우스로서는 그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고 있어야 했다.
제가 다룰 검에 대해 잘 모른 채 휘둘렀다간 되레 자신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
‘강압적인 관계보다는 친근한 관계를 맺고 싶은데.’
유대감은 그 어떤 것보다도 든든한 족쇄가 된다.
황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엘피디우스는 데온 하르트의 배신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기반이 이곳에 있는 만큼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 만약 저쪽에서 ‘인간계’의 장점을 뛰어넘을 정도의 환경과 이득을 제공한다면…….
“오라버니! 하르트 백작은 잘 만나고 오셨나요?”
“……알레테아.”
“저는 쏙 빼놓고 말이죠.”
저도 백작님 보고 싶은데-.
상념은 거기서 멈췄다. 곧장 다정한 미소를 띤 엘피디우스가 성큼 제 동생에게 다가갔다.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러게 네가 황태자가 되지 그랬니.”
“그런 귀찮은 자리는 사양이네요. 오라버니나 하세요.”
뒤따르던 시종에게 정원에 티테이블을 준비하라 명한 그가 알레테아의 걸음에 속도를 맞춰 걸으며 정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걸음을 유도하며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가 한 단계 소리를 낮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알레테아, 숙부님과 나 다음은 너란다.”
“알아요. 그래서 배울 건 다 배우고 있잖아요. 오라버니는 뭐가 그렇게 조급하세요?”
“…….”
내가 조급했던가?
어쩐지 정곡을 찔린 듯한 기분에 엘피디우스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하고 보니 최근 들어 조급해하긴 했다.
이전에 하르트 명예 백작에게서 인도받은 혁명군은 끝끝내 본거지 불지 않은 채 죽어버려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데다 그렇게 혁명군이 멀쩡히 버티고 있는 상태에서 숙부님은 전쟁까지 선포하셨으니.
게다가…….
생각보다 침묵이 길어진 듯 어느새 정원에 도착했다.
준비된 티테이블에 앉아 주위를 깔끔하게 물린 엘피디우스가 그제야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을 천천히 뗐다.
그를 조급하게 만든 가장 큰 문제.
“숙부님께서 환각을 보신다.”
황제의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
황제가 악몽을 꾸고 있음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태의를 부르려 했으나 숙부의 단호한 거절에 어쩔 수 없이 두고 보았을 뿐.
그랬더니만 설마 환각으로 이어질 줄이야.
하긴, 제법 오랜 시간 악몽을 꿔 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황제의 악몽은 그가 군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부터 시작되었으니까. 그것은 8년 전쟁을 치르며 극도로 심해졌고.
‘결국 이렇게…….’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아니, ‘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알면서도 태의를 부르지 않았다는 자신의 ‘행동’이지.
죄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태의를 부를 수 없었다.
“네? 아니, 도대체 언제부터… 아니 그 전에 태의는, 태의는 부르셨나요?!”
“숙부님께서 거절하셨어.”
“그렇다고 그냥 그대로 둘 수는!!”
“숙부님의 고집을 내가 어떻게 꺾겠니.”
그깟 이미 죽은 자들이 무어라고.
살아있는 자신의 숙부가 몇 배는 더 소중하기에 낮에 다시 그를 찾아가 재차 설득을 시도했었다. 진즉에 했단 말이다.
그러나 숙부는 단호했다.
“숙부님의 병적인 책임감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야.”
“말은 바로 하셔야죠. 책임감이 아니라 죄책감이에요.”
“그래, 죄책감.”
정확하게는 죄책감과 책임감의 지랄맞은 조화라 할 수 있겠지.
죽은 자들에 대한 책임까지 짊어지려던 숙부를 떠올린 엘피디우스가 조용히 한숨을 삼키고 드물게 굳은 표정의 알레테아를 보았다.
“알겠지, 알레테아? 우린 시간이 없어.”
서두르지 않아 생길 문제는 크지만 서둘러서 나쁠 것은 없다.
환각 문제를 알아챈 그 날부터 황태자는 황제로부터 거의 모든 인수인계를 끝마쳤다. 언제 문제가 터져도 곧바로 자리를 이어받아 일 처리를 이어갈 수 있도록.
──적어도 황제가 다른 문제에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전장에서 날뛸 수 있도록.
이제 남은 것은 데온 하르트에 관한 문제 뿐.
아무것도 몰랐던 처음에는 단순히 숙부님의 신임을 얻는 자라 생각하고 접근했다. 황태자로서 친분을 쌓아둬서 나쁠 것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모든 정보를 공유받은 지금으로서는 시선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군단장이라니. 이중첩자라니.’
물론 그 뒤로도 평소와 다름없이 아무렇지 않게 접근했지만…….
시선이 달라지고 보다 더 그를 자세히 살피게 된 오늘, 미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 생겼다.
‘정확하게는 발견했다고 해야겠지.’
정체를 확언할 수 없는, 어쩐지 위화감 가득한 구석이 있어 아직 완벽하게 정의하지 못한 그에 대해 떠올리며 엘피디우스는 중얼거리듯 말을 맺었다.
“……그러니 알레테아 넌 지금 배우고 있는 것에 집중해라. 나는 나대로 노력할 테니.”
“상황이 상황인데, 최소한 전쟁이라도 말려야…….”
“지금까지 우리의 설득이 먹힌 적이 있었니?“
“…….”
확실히.
그 말대로 자학에 가까운 황제의 행동을 둘은 몇 번이 말리고 막으려 든 적이 있었다.
그때 성공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도 않았겠지.
알레테아의 어깨가 축 처졌다.
“……노력할게요…….”
직접적으로 숙부를 위할 수 없다면 간접적으로나마 돕는다.
알레테아와 엘피디우스에게 있어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는 세상을 적으로 돌려도 상관없을 정도의 소중한 가족이기에.
[미안하다.]아직도 귓가에 생생한 숙부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날과는 달리 지독하리만치 맑고 깨끗한 하늘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내 탓이다. 전부 책임지겠다.]‘아니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와서 속으로 답한들 뭐가 달라질까.
사과하지 않아도 될 것을 사과하고,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을 책임지려 하는 숙부의 목소리에 이제서야 속으로 답하며 엘피디우스는 태연히 식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시간은 그때로부터 한참이 흘렀고, 자신들의 숙부는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을 책임지려다 끝내 더 큰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그때는 모두가 어렸다. 단지 황궁에서 어린 것은 죄가 되었을 뿐.
──차가 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