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70
70. 굴러가는 수레바퀴(2)
의미심장한 말만 남긴 채, 황태자가 떠났다.
황태자를 배웅하고 집무실로 돌아온 데온은 책상 앞에 앉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류를 들었다. 태연한 태도와 달리 서류를 보는 그의 시선은 초점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번들거리는 새빨간 눈으로 서류 한구석을 노려보며, 데온이 생각했다.
‘뭘 알고 있는 거지?’
그리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황제는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전하게 했을까.
“……마스터?”
“…….”
상념을 깨뜨리는 목소리에 순간 굳은 그가 이내 작은 한숨과 함께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얼마나 정신이 팔려 있었으면 존재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표정 없는 얼굴로 단을 쳐다봤다.
무미건조한 시선이 이쪽을 똑바로 향하자 소파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조심스럽게 그를 살피던 단이 작게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괜찮으십니까?”
그의 목소리는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저택에 머물며 다양한 기술을 배우는 동안 저택 주인의 성격이 극과 극을 오간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실제로 그에게 대뜸 저를 거두어달라 말했을 때, 그러한 면모를 직접 보기도 했었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차원이 다르다.
심기가 불편한 듯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날카롭게 벼려져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 사방을 겨누고 있었다.
말문을 떼기가 무섭게 수많은 칼날이 이쪽을 겨누는 듯한 기분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러고 보니 할 말이 있다고 했었지.”
“네? 네!”
“말해봐.”
“다름이 아니라…….”
이런 분위기의 그에게 과연 이 말을 꺼내도 될 것인가.
몇 번이고 꺼낼 말을 입안에서 굴리며 말할지 말지 고민하던 단은 결국 데온의 눈초리에 못 이겨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돈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뭐?”
황당함을 가득 담은 음성이 돌아왔다.
이렇게 된 거, 말은 확실히 끝맺어야 한다. 이대로 멈춰버리면 엄청난 오해만 사게 될 테니까.
단이 황급히 말을 덧댔다.
“돈에 욕심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저는 그저…….”
“……?”
“……돈을, 굴려보고 싶습니다.”
데온의 고개가 기울었다.
돈을 굴림으로써 들어오는 모든 수익을 제게 주겠다는 단의 말을 말없이 듣던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실 책상을 빙 돌아 나와 단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천천히 다리를 꼬고 고개를 갸웃하며 입가를 매만진다.
얼핏 천진해 보이기까지 한 행동이었으나, 이어서 나온 목소리는 소름 끼칠 만큼 낮았다.
“원래부터 돈을 굴릴 줄 알았나?”
“……아니요.”
“그렇다는 것은 이곳에서 배웠다는 뜻일 텐데. 이상하네? 네가 배우고 싶다는 것은 분명 검술이었을 텐데.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아니면 집사가 내 말을 어긴 걸까?”
새빨간 눈동자가 핏빛으로 빛난다.
그 속에서 슬그머니 드러나는 미친 자 특유의 눈빛에 단이 잠시 숨을 멈췄다.
마주하는 것만으로 숨통이 조이는 듯한, 음습하고 진득하며 소름 끼치는 온갖 감정이 뒤섞인 눈빛.
숨을 멈춘 것과는 별개로,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거짓 미소가 아니다. 진심이 담긴 미소에 데온의 눈매가 가늘어졌으나 단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정말로 기뻤으니까.
‘재앙이라면 응당 이래야지.’
역시 나는 틀리지 않았다.
남아 있던 일말의 의심조차 날려버린 단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몸을 떨고 있을 때, 데온이 꼬았던 다리를 풀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맹수가 먹잇감을 향해 나아가듯 테이블을 짚고, 상체를 그 너머까지 들이밀어 단의 얼굴 가까이에 제 얼굴을 가져간다.
단의 시야를 가득 차지한 붉은 눈동자가 슬며시 휘어진 눈꺼풀 사이로 숨어들었다.
“네 목적이 뭔지 생각해봤어. 넌 나를 따르겠다 했으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지.”
“…….”
“지금도 마찬가지야. 기껏 와서 부탁한 것이, 돈을 굴려보고 싶다고? 그걸로 버는 수익은 모두 내게 주고?”
이런 건 ‘바라는’ 수준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이 마음에 들어 받아들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마냥 아무 생각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생판 남을 아무 이유 없이 따를 리가 없다.
데온은 그 진리와도 다름없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두 가지 가정을 꺼내 들었다.
“지금까지 나온 추측은 두 가지야.”
“…….”
“네가 요구할 것이 너무 큰 나머지 일단은 신뢰부터 쌓으려는 것일 수도 있고─”
“…….”
“아니면 나를 따르는 것 자체가 네 목적일 수도 있을 테지.”
그리고 지금, 그의 미소를 보고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느릿하게 숙였던 상체를 펴고 제자리로 돌아간 데온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린 채였다.
“네가 이 저택 사용인들을 어떻게 꼬여내서 무엇을 배웠는지 캐묻진 않겠어.”
“……!”
“그보다, 돈을 굴려보고 싶다고 했지?”
***
한쪽 옆구리에 서류를 낀 레멤베르가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방문에 대한 충격에서 아직 못 벗어난 탓에 정신 놓고 멍하니 있던 내게 군더더기 없는 태도로 인사를 올린 그가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이 늙은이를 불렀다는 것은 결론이 내려졌다는 뜻이겠지요.”
“?”
“아무래도 투자를 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을 것 같은데, 맞습니까?”
“……투자?”
가출했던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다. 갑자기 투자라니?
이거 정신 놓고 있다가 졸지에 웬 날벼락을 맞게 생겼다.
투자 한 번 잘못하면 골로 간다는 건 투자에 관심 없는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인데, 이게 무슨…….
좀 더 자세히 캐물으려는데, 내 말을 가로채는 이가 있었다.
“네, 마스터께서 제게 돈을 맡기겠다 하셨습니다.”
깜짝이야! 단이랬나?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지? 아니, 그보다…….
내가 그랬다고?!
“그렇군요. 나쁘지 않은 판단입니다. 단의 실력은 제가 직접 확인했으니 말이지요.”
이 사람들이 나를 빼놓고 뭔가 굉장히 중요할 것 같은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미친 척 끼어들어서 막아야 하나?
상황 파악을 위해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던 찰나, 내 시선을 확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바로 레멤베르의 옆구리에 끼워져 있는 서류.
양이 미칠 듯이 많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서류… 양이 적어 보이는데…….”
“아, 이것 말씀이십니까. 모두 저 단이라는 사내 덕분입니다.”
또 단이다.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사뭇 경계하던 초반과 달리 단을 따스한 눈으로 보며 레멤베르가 시키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밀린 서류를 보더니 도움이 되고 싶다며 가르침을 청하길래 기본적인 것만 가르쳤는데, 일 처리를 아주 잘하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어째서인지 날 쳐다본다.
어쩐지 ‘백작님보다도 말입니다’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그래서 호의적이었냐?! 처리할 서류가 줄어들어서?
“심지어 비효율적인 체계를 골라내 좀 더 효율적으로 바꾸기까지 했습니다. 그 결과가 이겁니다.”
그의 손가락이 내 앞에 놓인 서류 뭉치를 가리켰다.
이전과 달리 4 – 5 시간이면 충분히 처리 끝낼만한 양의 서류 뭉치.
……설마.
고개를 번쩍 들었다. 흐뭇한 표정의 레멤베르와 눈이 마주쳤다.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할까 봐 직접 묻는 대신, 나는 조심스레 눈빛으로 물었다.
‘설마, 이게 끝?’
‘예, 그렇습니다.’
“……합격.”
절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레멤베르가 왜 그렇게 호의적이었는지 이해된다.
이런 녀석은 반드시 붙잡아야지! 놓치는 놈은 붙잡아서 양 싸대기를 날려야 한다.
“그러니까… 돈을 맡겨달라고?”
“네.”
“알았어.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해 봐. 예산은 레멤베르가 배정해줄 거야.”
“아…! 감사합니다.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럼 나가봐.”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없다. 레멤베르가 어련히 알아서 잃어도 타격 없을 만큼의 돈을 주겠지.
그보단, 레멤베르가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니 할 말이 있는 듯 싶은데.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까지 감사 인사를 하며 단이 나가기가 무섭게 레멤베르가 한껏 얄팍해진 서류를 집무실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양이 적어졌다고는 하나 서류 작업이 싫은 것은 결국 매한가지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 앞에 앉았다.
맨 위의 서류를 집어 들자 곧장 레멤베르의 설명이 들려왔다.
“하르트 영지에 대한 인수인계는 모두 마쳤습니다.”
“아…….”
할 말이 이거였나. 곧바로 내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빼앗아가는 주제에 인수인계까지 절차대로 하다니. 기분이 더 더럽다. 마치 내가 동의한 것 같지 않나.
‘아니 동의한 건 맞긴 하지만, 그래도.’
더 듣기 싫어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집사인데 어디 간다는 말은 해두어야지.
마계에 간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소리소문없이 훌쩍 사라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동안 또 자리를 비울 예정입니다.”
“그러십니까. 이제야 예전의 백작님의 모습을 되찾으신 것 같은데, 아쉽군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왜 내 다크서클을 보는 건데. 피로에 찌든 모습이 내 원래 모습이냐?
그래도 어디를, 무슨 목적으로 가는지 묻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다시 거뭇해진 눈가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삼켰다.
“준비되는 대로 출발할 겁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준비해주세요.”
“예상 이동 시간은 저번과 같게 하면 되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대로 돌아나가려던 레멤베르가 뭔가 깜빡했다는 듯 ‘아’ 하는 탄성을 뱉으며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백작님께서 들이신 저 단이라는 사내 말입니다.”
“……네에.”
내가 투자까지 하게 만든 그 단 말이죠.
검만 배운다더니 서류 작업까지 배우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투자까지 하게 만든 ‘그’ 단 말이지요오.
물론 그 녀석이 회계를 배운 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시 생각해보니 왠지 낚인 기분이랄까. 아무튼 좀 미묘한 심정이다.
“백작님의 명대로 수상한 점은 없는지 감시했습니다만, 별다른 이상 행동은 보이지 않더군요.”
“예?”
“아직 신뢰를 쌓는 시기라 그런지,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건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예?”
“이 늙은이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아무래도 후자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잠깐만. 내가 명령했다고? 감시를? 도대체 언제?
그리고 집사님, 댁의 ‘개인적인 견해’ 말입니다. 정말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로군요. 눈빛에서부터 호감이 뚝뚝 묻어나고 있잖아.
“검술에도 제법 재능이 있더군요. 천재까지는 아니지만 수재 정도는 된다고 들었습니다.”
이건 거의 뭐, 손주에게 홀딱 빠진 할배의 꼴이다.
고작 서류 작업 하나로 레멤베르를 이렇게 만들다니. 그 녀석이 대단한 거야, 아니면 내가 그 정도로 서류 작업을 못 한 거야…?
“무엇보다 그가 확실하게 두각을 드러내는 쪽은 서류 작업입니다. 이건 확실히 아시겠지요.”
“아… 네.”
그 줄어든 서류 보고 내가 투자까지 했으니까, 뭐.
좀 찝찝하긴 하지만 후회는 없다. 이런 인재는 꼭 붙잡아야 하거든. 그가 바라는 것이 고작 돈의 일부를 맡겨달라는 것이면 더더욱.
……그런데, 조금 전까지는 레멤베르가 어련히 알아서 잘 배정하겠지 싶었다만… 이제 보니 좀 불안하다.
“아무튼 그래서 단이라는 사내, 꽤 괜찮은 아이 같습니다.”
“…….”
괜히 이쁘답시고 돈 왕창 쥐여주는 건 아니겠지…?
늦바람이 든 손주 바보 할배를, 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훑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