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71
71. 굴러가는 수레바퀴(3)
좀 불안하긴 하다만 어쨌든 레멤베르는 부정할 수 없는 훌륭한 집사다.
나는 집사가 은밀하고도 빠르게 준비해준 짐을 챙기고 여행용 로브까지 뒤집어쓴 뒤 저택 계단을 내려갔다.
1층에 도착하자 입구에서 말 고삐를 쥐고 대기하고 있던 레멤베르가 고삐와 함께 촉 대신 고무공이 달린 화살과 활을 건넨다. 나는 그것을 말없이 받아들었다.
갑자기 웬 활과 화살이냐 하면, 지금부터 한바탕 일을 치르게 될 테니까.
역시나, 내가 막 말 위에 올라탔을 때였다.
“백작니이이이임!!”
“가신다면서요? 우릴 버리고 가신다면서요?!”
“인사도 없이 떠나시다니,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아니, 그보다 폐하께서 다시 저희를 맡으신다던데 그것만이라도 좀 막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 멀리서 흰 기사복을 입은 놈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튀자.
저건 미친개다. 미친개한테 물리는 일은 상상도 하기 싫다.
급히 말 배를 걷어찼다. 정문이 이미 열려있는 덕분에 도망치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레멤베르, 고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놈들이 아니다.
순조롭게 도시를 빠져나가 벌판을 달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여러 개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백즈악니이이임!”
“거기 서시죠!”
“지금 순순히 멈춰선다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잡아라!!”
“시발 꺼져 이 미친놈들아!!”
뒤에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인다. 흡사 뭉게구름과도 같은 광경에 나는 속으로 비명을 토했다.
저런 미친놈들! 리엔은 어디서 뭐 하는 거야? 네 주군이 지금 위기에 빠졌는데!
“네놈들! 당장 안 멈춰?!”
“……아.”
있긴 있었구나. 쟤들이 말을 안 들었을 뿐.
우르르 달려오는 말 무리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무시무시한 기세로 쫓아오는 말을 확인한 나는 질린 표정으로 등 뒤를 더듬었다.
조금 전에 챙긴 화살통이 만져진다. 거기서 화살을 하나 꺼내 들었다.
활시위에 화살을 걸고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상체를 틀어 가장 앞에서 달리는 녀석의 말머리를 조준했다.
화살촉 대신 고무공이 달려 있으니 별 문제는 없겠지. 자칫하면 위에 있는 놈이 말에서 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괴물 같았던 놈들을 생각하면 그리 위험할 것 같지도 않다.
지가 알아서 위험을 피하거나, 다른 놈들이 알아서 건지겠지.
“백작님!! 전 황제, 아니 황궁이 싫다고요! 폐하도 그렇고 장군님도 그렇고, 무섭으갹!”
저놈이 누구까지 같이 죽이려고!
‘아차, 실수했다!’
말의 머리를 맞추려고 했는데, 놈의 이마를 맞춰버렸다!
자칫 황실 모독죄가 생길뻔한 놈의 고개가 튕기듯 뒤로 꺾였다. 고삐를 꽉 쥐고 있던 손이 일순 풀리고, 몸이 스르륵 옆으로 떨어진다.
바로 뒤에서 오는 말발굽에 짓밟힐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으나 놈이 바닥에 처박히기 전에 건져 올리는 손이 있었다.
“와잣! 잡았다!”
“오, 나이스!”
“하핫…….”
“하…….”
“……역겨우니까 이제 그만 비키지 그래?”
“나라고 네놈 무릎 위가 좋은 줄 아냐?! 비켜! 내가 고삐 잡을 거니까!”
한쪽에서 알콩달콩 연애(?)를 하는 사이, 다른 한쪽은 난리가 났다.
주인 잃은 말의 경로가 다른 말들과 엉킨 것이다.
직선으로 달리는 멀쩡한 말 앞에 끼어들기도 하고, 그러다 다른 말과 충돌해 넘어지기도 하니 뒤에서 따라오던 다른 말들이 한꺼번에 넘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으갸아아악!!”
“후! 피했다!”
“봤냐? 내 낙법 실력?”
바닥에서는 나름대로 안전하게 착지한 놈들이 그 위로 우르르 떨어지는 놈들을 피하며 뻐기고 있고,
“멍청이들, 난 먼저 간다!”
“으럇!”
말고삐를 쥔 다른 놈들은 그런 녀석들을 훌쩍 뛰어넘어 계속해서 나를 추격한다.
내가 아는 놈들이었다면 한 명이 넘어진 순간 다른 방법은 생각도 못 하고 다 같이 우르르 넘어졌을 텐데, 저런 대처까지 할 수 있게 되다니…?!
물론 그래 봤자 일부긴 하지만, 그래도 말이지. 도대체 황궁에서 뭘 가르친 거야?
레멤베르가 화살을 넉넉히 챙겨줘서 다행이다.
집사의 훌륭한 준비성에 찬사를 보내며 나는 다시 시위를 당겼다.
***
데온 하르트가 비밀리에 황명을 받고 백작저를 떠났다.
대화를 나누던 도중 정보원을 통해 이 소식을 접한 공작 스타베 일루스터는 힐긋 상대를 쳐다봤다.
부러 그의 앞에서 정보를 전해들었다. 아마 본인의 예상이 맞다면 지금쯤 반응이…….
“데온 하르트라 하셨습니까. 이번 기회에 그자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낼 수 있겠군요.”
역시.
“네, 사람을 붙여야겠습니다.”
“각하께 수고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그간 많은 신세를 졌으니 이번엔 저희 측에서 사람을 붙이겠습니다.”
의도했던 반응에 공작이 눈을 휘었다. 음흉한 보라색 눈동자가 눈꺼풀 뒤로 숨어들었다.
“신세라니요. 그리 말씀하실만한 일은 행한 기억이 없는데 말이죠.“
”그리 말씀하시니 할 말이 없습니다. 그나저나… 조금 전부터 신경이 쓰였는데 말입니다. 목의 그 상처는 어쩌다 다치신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반사적으로 붕대가 감긴 목을 매만졌다.
”별 것 아닙니다. 앙탈이 조금 심한 아이가 있어서 말이지요.“
”조카가 있으셨습니까?“
”글쎄요. 그보다 아까 하던 이야기 말입니다.“
영양가 없는 화제를 이어갈 이유는 없다. 공작은 노골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상대 역시 특별히 흥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순순히 바뀐 화제를 따랐다.
“아, 황제가 대륙 정복을 선언했다는 이야기 말씀이시지요? 각하를 감히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유는 여쭤야겠습니다.“
”…….“
”왜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까?“
공작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가 이유를 말해주면 경청하겠다는 듯 자세를 고치며 물었다.
괜히 혁명군의 수장이 아니라는 건지, 사람들을 이끄는 자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가 방 안을 장악한다.
황제에게서 익히 보았던, 그런 분위기.
본인은 백날 노력해도 가질 수 없었던 바로 그 분위기에 눈을 가늘게 뜬 공작이 이내 싱긋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운을 뗐다.
빼앗긴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듯, 공작 본인 특유의 분위기가 조금씩 조금씩 방 전체를 잠식해나가기 시작했다.
“혁명군은 황제가 대륙의 반을 먹을 때까지는 본격적으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대체 왜…!”
“전쟁이 무르익었을 때. 그래서 더 이상 황제의 마음대로 전쟁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일 때, 그때가 적기입니다.”
혁명군의 수장이란 자리는 멍청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내, 다니엘이 입을 다물었다.
제국이 대륙의 반을 먹었을 때쯤이면 다른 왕국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행여 판단이 늦어 가만히 있었다 해도 상황이 그쯤 되면 움직이기 시작하겠지.
위협을 느꼈을 테니까. 이 상황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 황제가 만족해서 물러나고 싶다 해도 쉽게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는 뜻이다.
앞선 전쟁을 통해 잃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황제는 황궁을 포함한 각지에서 그곳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병력을 끌어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제국 안에서 혁명군이 날뛴다 해도 쉽게 제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들을 막을 인원이 부족할 테니까.
“……역시 공작님이시군요. 실례했습니다.”
납득한 다니엘이 물러가고, 스타베는 곧바로 움직였다.
지금쯤 혁명군 한 명이 데온 하르트의 뒤를 밟고 있겠지. 이대로 좋게 끝나면 좋겠지만, 황제가 그리 만만할 리 없다.
[지금 출발했다고 했나. 보나 마나 날파리들이 들러붙겠지. 그것들을 처리하고 돌아오도록. 하르트 명예 백작의 뒤를 쫓는 일 없이 날파리만 처리하고 돌아와야 한다.]자신이 괜히 혁명군이 움직이도록 유도한 것이 아니다. 데온 하르트의 뒤를 밟는 혁명군은 곧 죽을 것이다.
곧 죽을 혁명군원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런 의미 없는 짓을 하는 데에는 그리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노리는 것은 다름 아닌 황제를 엿 먹이는 것 그 자체.
‘뒷정리를 위해 보낸 사람이 돌아오지 않으면 꽤나 속이 타겠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았다면 배신한 것일 테니 제치더라도 죽었다면 일 처리는 끝내고 죽었는지, 아니면 그 전에 죽었는지 등등.
꽤나 속이 탈 황제를 생각하며 싱긋 웃은 공작이 크루엘에게 명령을 내렸다.
[혁명군의 흔적을 쫓다 보면 황제의 명을 받고 데온 하르트의 뒤를 봐주는 이가 있을 겁니다. 그자를 죽이세요. 그리고 만일 데온 하르트를 쫓을 여건이 된다면 그가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고 오도록 하세요.]푸욱!
현재진행형으로 혁명군을 죽이고 있었기에 그 ‘뒤를 봐주는 사내’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공작의 명대로 복면의 사내를 죽인 크루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 탓에 뺨에 튄 피가 턱선을 따라 굴러내려 바닥에 뚝 떨어졌으나, 그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한 곳만을 향했다.
저 멀리, 타고 온 말을 돌려보내고 숲으로 걸어 들어가는 데온이 보인다.
흔적이 남을 까봐 그런 것일까.
한참을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크루엘이 데온이 나무 사이로 사라지기 직전, 저벅- 숲에 발을 디뎠다.
딱 데온이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의 거리를 둔채 크루엘 역시 숲의 나무 사이로 사라지고,
그 후 얼마나 흘렀을까,
‘…….’
크루엘이 숲 밖으로 나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와 표정.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녹안이 물끄러미 제가 나온 숲을 돌아본다.
그것도 잠시, 크루엘은 몸을 틀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매어두었던 말을 찾아 타고,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향해 달린다.
가을이 온 탓인지 날카로워진 바람이 그를 매섭게 몰아쳤다.
…….
“왔군요, 일은 잘 처리했습니까?”
“예.”
“그럼, 데온 하르트가 어디로 향했는지는 알아냈습니까?”
“…….”
“…….”
“……제가 일을 처리했을 땐, 이미 데온 하르트는 자리를 벗어난 뒤였습니다. 죄송합니다.”
***
“떠났네.”
“응.”
“떠나셨어.”
“우릴 버리고 말이지.”
“난 이마에 멍도 들었다고!”
“입이 노는 걸 보니 여유가 있는 모양이군. 연무장 10바퀴 추가하도록 하지.”
“아, 단장님!!”
“저희 죽습니다!”
“시끄럽다! 계속 그렇게 떠들 때마다 10바퀴씩 추가할 테니 입 다물고 뛰도록!”
사납게 일갈해 기사단원들의 입을 막은 리엔이 한숨을 쉬며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어두운 하늘이 마치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만 같아 더욱 울적하다.
리엔은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내렸다. 언제 울적했냐는 듯 또렷한 두 눈이 비장함을 담고 결연하게 빛났다.
주군께서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나신 것은 그만큼 내가 못 미더워서다.
그러니까…….
‘다시 만나게 되는 날까지 더욱 믿음직한 기사가 되어 있겠습니다.’
아무도 듣지 못할 한 기사의 굳건한 다짐이 소리 없이 허공에 흩어졌다.
***
구원교가 무너졌다. 구원은 없었다.
시이아는 불타 없어져 잔재만 남은 공터 앞에 주저앉아 망연히 허공을 바라봤다. 멀쩡했을 당시의 구원교를 그리듯, 두 눈은 흐리게 물들어 있었다.
툭. 투둑.
차가운 빗방울이 그녀의 몸을 두드린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비는 이내 정신 차리라는 듯 폭우가 되어 온몸을 거세게 내리쳤다.
물벼락이나 다름없는 폭우 속에서도 시이아는 쉬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구원교는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안식처가 될 예정이었으니까.
따뜻한 빵과 깨끗한 물을 꾸준히 제공하고, 주변인들을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가 존재했다니.
한순간의 따뜻했던 꿈을 꾼 기분이다. 차라리 꿈이었다면, 그랬다면 더 나았을 텐데. 눈앞의 잔재가 꿈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어서, 시이아는 더더욱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꿈조차 꿀 수 없게 되었으니까.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냥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그렇게 모든 것을 놓아버린 한 아이의 시야에 누군가의 다리가 멈춰 서는 것이 비쳤다.
“시이아.”
“…….”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
“……제발, 시이아.”
대답만이라도 해 줘.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가 애원하듯 흘러나왔다.
여전히 묵묵부답인 시이아를 보며 폴이 어두운 표정으로 허벅지 근처의 옷깃을 꽉 쥐었다 놓았다.
막심한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 구원교를 소개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냥 일상대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나았을지도 몰라. 그런 의미 없는 가정이 몇 번이고 머릿속을 맴돈다.
‘……아니, 아니야.’
살인귀 기사단 그 자식들이, 아니 데온 하르트가, 아니 황제가…!
그래, 황제만 아니었다면. 그가 괜한 참견을 하지 않았더라면, 작금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황제가 문제인 것이다.
빈민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설프게 끼어든 높으신 분들이 문제인 것이다.
폴의 두 눈에 분노가 깃든다. 분노라는 감정은 좀 더 짙어져 맹렬한 증오로 변했고, 그것은 이내 어떠한 사명감을 띤 채 차갑게 굳어졌다.
“나, 혁명군에 들어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