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77
77. 다시 마계(5)
“첫 번째 도시에서, 데몬 님에 대해 외부인에게 떠벌리는 놈이 있더라.”
“!”
“아, 아니…! 헤, 헬 님!!”
화들짝 놀란 그의 부관이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헬이 사라졌다. 말 그대로, 땅으로 꺼지듯.
놀란 것도 잠시,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쟤 그림자 출신이었지.’
비유적 표현이 아닌 말 그대로의 그림자.
마왕의 힘은 순수하게 자기들끼리만 뭉쳐 마족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오우거에 깃들면 오우거 출신의 마족이 탄생하고, 사물에 깃들면 그 사물 형태의 마족이 탄생한다.
8군단장 헬은 그림자에 마왕의 힘이 깃들어 탄생한 마족이다.
그래서인지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입체감을 가지고 일어난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지만, 설마 저런 능력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그런데 왜 사라진 거지?
“본인의 임무도 다하지 못한 녀석이 데몬 님의 쿠키를 먹을 자격은 없지. 그러니까 데몬 님.”
“네, 네?”
“두 개 다 저 주시면 안 될까요오?”
“드벨라니아 님!”
내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헬이 사라진 곳에 무릎 꿇고 앉아 망연히 바닥을 들여다보던 부관이 버럭 소리쳤다. 정작 그에 기겁한 것은 나였다.
부관이 군단장을 향해 큰소리를 치다니. 그것도 본인의 직속상관이 아닌 다른 군단장이다.
쟤가 미쳤나, 진짜!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서 싸워, 새끼들아….’
내 방에서 피 튀기지 마.
***
자신의 영역에서 으르렁거리는 두 마족이 퍽 불편했는지 데온은 드벨라니아와 헬의 부관 나인에게 쿠키 봉지를 하나씩 쥐여 주고는 밖으로 내보냈다.
아니, 정확하게는 ‘데몬 아루트’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챈 둘이 알아서 자중하며 먼저 물러선 것에 가까웠다.
여기서 더 했다간 필시 사달이 터졌을 테니까.
그의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익히 알고 있다. 평소 온건한 사람이라 하여 우습게 볼 만큼 둘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러나 한 사람 때문에 일시적으로 멈춘 다툼이 그대로 끝날 리 없다.
방 밖으로 나오고, 문이 닫히기 무섭게 나인이 쿠키 봉지를 품에 꼭 끌어안으며 드벨라니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드벨라니아의 눈에 흥미가 돌았다.
“어머, 지금 날 노려본 거니?”
“우리 헬 님 좀 그만 괴롭히십시오!”
“내가? 왜애, 난 그냥 맞는 말을 한 것뿐인데?”
“그렇지 않아도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분인데, 양심도 없으십니까?! 너무하십니다!”
8군단장 헬. 모든 무기를 제 몸처럼 다룰 정도로 무기술에 통달한 자.
그림자 출신인 그가 가지고 있는 고유능력은 잠입과 관련된 임무에 적합한 듯하여 처음엔 마왕조차 그를 2군단장에 앉히고 싶어했으나,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자존감이 터무니없이 낮다는 것이다.
‘내게 이런 중요한 일을 맡길 리가 없어’, ‘나 따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나 같은 게 이런 걸 해도 정말 괜찮을까?’
그래 놓고서는 조금만 실패를 하면 ‘역시 나 같은 쓰레기는 나가 죽어야 해’, ‘난 왜 사는 걸까?’, ‘역시 난 숨 쉴 가치도 없는 쓰….’
“쓰레기… 난 역시 쓰레기야….”
발밑 그림자에서 불쑥 튀어나와 그대로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제 상관을 보며 나인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새 일 처리를 다 끝내고 왔는지 옷 끄트머리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는 핏방울.
이렇게 빨리 일을 처리하고 온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몇 번이고 설명했건만….
“아뇨! 지금이라도 정리를 하고 오신 게 어디입니까!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수습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법이죠. 그런 의미에서 헬 님은 훌륭하게 뒷수습을 하셨습니다! 아주 잘하셨어요!”
“……정말?”
“물론입니다! 만약 헬 님께서 정말 큰 잘못을 하셨다면 데몬 님께서 이렇게 쿠키를 주셨을 리도 없지 않습니까! 이것 보세요.”
“정말 그게 내 거야…? 데몬 님께서 내 몫으로 주신 거라고…?”
“예!”
사실 2군단장과 신경전을 벌여 가면서 악착같이 얻어 낸 거지만.
시치미를 뚝 뗀 나인이 보란 듯이 쿠키 봉지를 흔들어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니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어서 일어나세요. 방에서 이 쿠키 좀 드시면서 휴식을 취하자고요.”
이 광경을 보면 고작 데몬 님에 관한 이야기가 외부에 돌고 있다는 소식일 뿐인데, 왜 8군단장이 자책하느냐는 의문을 갖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당연했다.
마물로 인한 소동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무슨 임무를 맡았는지 알려지지도 않고,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아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던 8군단장이 현재 맡은 대외적인 임무는 ‘마계 주요 도시 경계’.
그러나 그 전부터 그가 맡아 온 비밀스러운 임무가 있다.
데몬 아루트가 마왕군에 합류한 그 순간부터 맡게 된 임무.
[데몬 아루트의 외형에 관한 정보가 인간계에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것.]어째서 0군단장에 관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어째서 제국은 0군단장의 생김새에 대해 갈피조차 못 잡고 있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이 과연 우연으로 느껴졌던가.
헬은 임무를 받은 그 순간부터 꾸준히 움직였다.
마왕성 밖으로 휴가 나간 사용인이 아는 이에게 ‘데몬 아루트’의 생김새에 대해 떠들려 할 때, 데몬이 마물 사냥을 나가 첫 번째 도시의 도박장에서 민낯을 드러낸 채 정체를 들켰을 때, 인간계와의 경계선에서 영웅과 전투를 벌였을 때도.
그는 꾸준히 그 흔적을 쫓아 죽이고, 입막음했다.
낮은 자존감과는 정반대로 한 치의 실수도 없는 훌륭한 솜씨였다.
지금도 보라, 2군단장의 제보가 있기 무섭게 곧장 움직여 상대를 처리하고 돌아오지 않았나. 떠벌렸다 했으니 그 이야기를 들은 이들도 같이 처리했을 텐데, 이 모든 일을 해치우는 데 걸린 시간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다.
‘그놈의 자존감만 어떻게 좀 하면 될 텐데… 하아.’
나인이 한숨을 삼키는 사이, 간신히 진정한 헬이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에 안심시켜 주듯 나인이 웃으며 정중히 손을 내밀고, 헬이 그 손을 잡으려던 순간.
“애초에 실수를 하지 않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
“……!”
“드벨라니아 님!”
헬이 모래성처럼 다시 무너진다. 즉각 돌아오는 반응에 드벨라니아가 키득거렸다.
이래서 8군단장을 괴롭히는 걸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재밌으니까.
드벨라니아 님과 상관없는 일인데 왜 자꾸 딴지를 거냐는 둥, 마족이 실수 좀 할 수 있지 왜 우리 애… 상관 기죽이냐는 둥, 마왕님께 이를 거라는 둥 왁왁거리는 나인을 뒤로한 채 돌아섰다.
‘이러면 당분간 방해할 생각은 꿈도 못 꾸겠지.’
조만간 데몬 님을 설득해 두 번째 도시로 옷을 사러 갈 생각인데 그때도 방해가 들어오면 곤란하다.
데온은 갈 생각도 없는데 벌써부터 무슨 옷을 살지 행복한 고민에 빠지며 드벨라니아는 경쾌한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건방진 8군단장의 부관의 외침에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
이레온 왕국은 난장판이었다.
“제국군이 벌써 도시 한 개를 짓밟고 이곳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고 하오! 곧 있으면 다음 도시에 도착할 것 같다는데,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이오? 무슨 대책이라도 내놓아야 할 것 아니오!!”
“댁도 못 내놓는 대책, 우리라고 별수가 있겠습니까!!”
“그럼 이대로 다 같이 죽자는 말이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탁상 앞에 앉아 목소리를 높이는 것 외엔 할 수 없는 이들이 제 목숨 아깝다며 활개 치고, 밖에서는 죄 없는 백성들이 죽어 나간다.
신성해야 할 회의장은 이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자리가 아닌 싸우기 위한 투기장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개판이군.’
옥좌에 앉아 있던 이레온의 국왕은 지그시 미간을 눌렀다. 분명 약을 먹고 왔는데도 벌써부터 두통이 오는 듯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러게, 황제를 건들지 말자 했었다. 우연히 마주했던 그의 두 눈에서 검은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기에.
붉은 불꽃이 아니다. 그것은 흔히들 장작이 되는 열정, 분노, 증오, 복수심 따위를 바탕으로 타오르고 있지 않았다.
공허하나 삶의 의지를 잃지 않고 악착같이 타오르는 불꽃. 굳이 색을 붙인다면 ‘빨강’이 아닌 ‘검정’에 가까운.
그래, 검은 불꽃이다. 그것이 무엇을 목적으로 불타오르고 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건드려서 좋을 게 없을 것이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전부터 이 나라는 글러 먹었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무너지게 되는군.
국왕의 말은 먹히지 않는다. 왕의 권위는 땅으로 떨어졌고, 귀족들은 제 잇속을 채우기 바빠 백성을 돌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름 정치를 하는 자들이라 그런지 아예 멍청하지는 않았으나, 이번만은 계산 착오였다.
귀족들이 마냥 돈에 눈이 멀어 제국에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 밑바탕에는 제국이 곧장 요구를 들어주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협상’을 시도해 올 것이라는 예상이 깔려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어찌 되었건 국경선 근처에서 작은 전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이는 관점에 따라 이레온 왕국에게 위협으로 느껴지기에 충분하다.
더해서 전쟁에는 많은 돈과 인력이 들어간다. 8년 전쟁이 끝난 지 이제 겨우 2년이 지났을 뿐이니 이런 상황에서 제국이 쉽게 ‘전쟁’이란 패를 꺼내 든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8년 전쟁 당시 훌륭한 선봉장이었던 데온 하르트마저 부상으로 쉬어야 하는 상태이니, 그 누가 전쟁을 예상할까.
물론 어디까지나 ‘상식적’으로만.
‘소심하게 툭 건든 것에 온 힘을 다한 주먹이 돌아왔으니.’
당황한 귀족들을 내버려 둔 채 국왕은 입가를 가렸다.
황제가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아서, 자칫하면 침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서.
‘…황제는 처음부터 전쟁을 바라고 있었나.’
조심스러운 추측은 이내 확신이 되었다.
황제는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명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레온 왕국은 그가 칼을 뽑아 들 기회를 착실히 마련해 주었고, 그 칼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겠지.
이 사실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그래도 똑같았겠지.’
그때도, 지금도 그는 힘없는 국왕이고, 그의 목소리는 귀족들의 발언에 묻힐 테니까.
“항복을…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난장판이 된 회의장 안에서 귀족들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발언했다.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는 다른 귀족들을 보며 국왕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 역시 예상했다.
잃을 것이 많은 자들은 싸우기를 두려워한다. 충신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가거나 실종되었고, 그나마 깨끗했던 이들마저 흙탕물에 물들어 버렸다.
이곳엔 간신들밖에 남지 않았다. 제 뱃속이 우선인 자들이 나라를 위할 리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이리 입맛이 쓴 것인지.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언제 싸웠냐는 듯 한마음 한뜻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들을 마주하며, 이레온의 국왕은 힘없이 미소 지었다.
“항복을 준비하도록 하지.”
***
어느덧 마왕성에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간과하고 있었던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심심해….”
바로 마왕성은 더럽게 할 게 없다는 것! 올 때 재밌는 놀 거리라도 가져올 걸 그랬다.
짤깍. 막 맞춘 큐브를 침대 한쪽에 던진 뒤 그 옆으로 몸을 날렸다. 고개를 틀어 베개에 얼굴 반쪽을 파묻고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곳엔 완성된 대형 퍼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방 벽에 장식할 거리가 하나 더 늘었군. 저게 몇 피스짜리였더라. 6000피스였나.
아마 그 정도는 될 것이다. 예전에 자괴감에 던진 적 있는 퍼즐이라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거든. 그걸 결국 맞춰 버리다니, 나도 참….
‘아, 몰라.’
한 달간 푹 쉰 덕분에 인간계에서 만들어 온 눈 밑의 그늘은 사라졌지만, 사람이 아무 짓도 안 하니 미칠 것 같다.
“……밖에라도 나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