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79
79. 다시 마계(7)
확언하건대, 마왕성은 아주 넓다.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해 따로 봐도 말도 안 되게 넓다.
마왕성 자체를 하나의 도시로 봐도 무방할 정도라 말하면 이해가 될까.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길을 잃은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뜻이다. 멍청해서가 아니란 말이지.
‘여기가 어딜까….’
내성이라는 건 확실한데.
목적지 없이 마구잡이로 걸은 내 발을 욕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텅 빈 공터.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정돈된 흙바닥. 주위에 늘어져 있는 무기들.
‘…….’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머리로 떠올리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선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왜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일까.
‘이거 아무래도….’
“데몬 아루트?”
흠칫.
“여긴 무슨 일이지?”
“…….”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떠올린 감상은 오직 하나였다.
미…이친.
누군가의 연무장이라는 것은 눈치챘지만, 설마 1군단장의 연무장이었을 줄이야. 하고많은 군단장들 중에 하필이면 1군단장이라니.
삐걱거리는 목을 돌려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연무장 바깥쪽에서 한 손에 검을 든 채 물을 마시던 제이카르와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입니다.”
“그래, 오랜만이군.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래서 여긴 무슨 일이지?”
“…….”
“…….”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그냥 꾹 다물었다. 답을 요하듯 제이카르의 시선이 따라붙었으나 애써 외면했다.
어, 어쩔 수 없잖아. 심심해서 나와봤다가 길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찾아온 것도 잠시,
“아.”
제이카르가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0군단장 전용 연무장은 저쪽 방향이다. 하도 사용하지 않아서 위치를 헷갈린 모양이군.”
“아….”
“5군단 전용 연무장을 가로지르면 빨리 갈 수 있다.”
그게 아닌데.
사용하지 않아서 그렇지, 나도 내 전용 연무장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아마도.
그러나 제이카르는 아예 확신하는 듯 흡족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통 수련을 하는 것 같지 않아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물론 그대의 실력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대는 실전을 통해 강해지는 타입이라지만… 그래도 아예 연습을 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 아닌가.”
어디서 무슨 헛소리를 들으셨나. 내가 실전을 통해 강해지는 타입이라고? 실전을 겪으면 나 죽어, 이 망할 마족아.
“만약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면, 나와 대련이라도 하기 위해 온….”
“방향이 저쪽이라고요? 고맙습니다.”
“5군단 연무장은 찾기 쉬울 거다. 그렇지 않아도 무슨 기념 파티를 벌인다고 한바탕 난리를 쳤으니. 파티는 끝났을지 몰라도 그 흔적은 아직 치우지 못했겠지.”
“네….”
여기서 더 어물쩍거리다가는 정말 1군단장과 대련이라도 하게 될 것 같아 서둘러 자리를 떴다.
제이카르의 말대로 5군단의 연무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쭉 걸었더니 난장판이 된 공터가 나왔으니까.
엉망으로 널브러진 의자, 바닥에 나뒹구는 쓰레기, 테이블 위의 빈 접시와 술병들.
아무도 없는 걸 보아하니 5군단원들은 쉬러 들어간 모양이다. 덕분에 난 마음 편히 이 모든 것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이를테면 술병이라든가.
아, 딱히 먹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것도 맞긴 하지만… 이건 인간계에서 보편적으로 널리 퍼진 술이거든.
크게 비싸지도 않고, 조금 독하긴 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장점으로 내세워 평민들 사이에서 맥주와 양립하는 술. 귀족들도 간혹 즐겨 먹는 데다 나 역시 즐기던 술이기에 확신할 수 있다.
이게 왜 여기에….
‘5군단장이구나.’
바닥에 액체가 조금 남아 찰랑이는 술병을 집어 들었다.
오엘이 돌아왔다면 이 술도,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정체 모를 물건들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녀의 호기심은 마왕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니까.
오죽하면 마왕이 밖으로 내돌렸을까. 명목이야 정찰 겸, 정보 수집을 위해 마계 전역을 돌아다니게 했다지만 결국 그 왕성한 호기심, 괜한 마족 괴롭히지 말고 바깥에서 풀라고 내보낸 것이다.
효과는 좋았다. 다만 돌아올 때마다 뭔지 모를 이상한 것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와 소개를 해서 그렇지.
그래도 차라리 그게 무한정 질문을 받는 것보단 나으니 계속 외부로 돌리고 있는 거지만.
“자자, 빨리 마저 뒷정리하자고.”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리를 하려는 건지 사용인 둘이 집게와 쓰레기 담을 통을 들고 이곳에 들어서고 있었다.
눈치를 보니 아직 날 발견하지는 못한 것 같다. 날 봤다면 분명 어떤 방식으로는 호들갑을 떨었을 테니까.
들키기 전에 어서 몰래 빠져나가야지.
그렇게 몸을 돌리던 때였다.
“5군단장님이 돌아오신 지 꽤 되지 않았어? 이제 와서 갑자기 무슨 파티래?”
“5군단장님 성격 몰라? 그동안은 이상한 물건 여기저기에 소개하면서 활용하는 데 푹 빠지셔서 파티를 미뤘던 거지. 그리고 이건 단순한 복귀 기념 파티가 아니야.”
“그럼…?”
“데르니반 님 알지? 5군단장님의 부관 데르니반.”
“그야, 당연히 알지.”
“글쎄, 5군단장님이 그분이랑 사귀신댄다. 그래서 기념을 겸해 축하 파티를 여신 거고.”
“쿨럭.”
아, 이런. 당황한 나머지 기침이… 피는 안 나왔나? 음, 다행히 멀쩡하군.
데르니반이라면 나도 알고 있다. 호기심 덩어리인 오엘과는 정반대의 인물. 차라리 언데드가 더 감정이 많겠다 싶을 정도로 무감정한 마족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런 데르니반과 오엘이 사귄다고?
상상조차 되지 않는 장면에 잠시 멍하니 있는데, 그런 내 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 0군단장님…?”
안쓰러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 얼떨결에 고개를 들자 잠시 잊고 있었던 사용인들과 눈이 마주쳤다.
뭐야, 왜들 저래?
내 지위 때문에 알아서 수그린다고 하기엔 너무 심하게 겁을 먹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안색이 날 보더니 새하얗게 질려 있었으니까.
사용인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술을 향하더니 이내 내 앞의 테이블 위에 늘어진 빈 술병을 훑는다.
하나, 둘, 셋… 수가 늘어갈수록 사정없이 떨리던 동공이 다섯을 넘기자 기절할 듯이 커지고, 그 뒤로 아예 수를 세기를 포기한 듯 둘의 대화가 속삭이듯 이어졌다.
“테이블 위에 있던 술병 중에서… 멀쩡한 술은 원래 몇 개였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렇단 말이지…?”
“…….”
“…….”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문 둘이 눈빛을 주고받는다.
도대체 뭣들 하는가 싶어 기다리다 못한 내가 슬그머니 입을 떼려던 찰나,
“비상, 비사아아앙!!”
“0군단장님께서 술을 드셨다!!”
……?
비명을 내지르며 후다닥 달려 나가는 둘의 행동에 황망히 뒷모습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뭐야…?”
***
-특급 경보, 특급 경보. 0군단장 데몬 아루트가 술을 마심. 일동 방어 태세.
-다시 한번 알린다. 0군단장 데몬 아루트가 술을….
마왕성 곳곳에 설치된 확성 마법이 걸린 통신석에서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내성, 외성 할 것 없이 마왕성 전체에 울려 퍼진 경보에 마왕성에 있던 모든 이들이 망설임 없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일개 마구간지기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말에게 먹이를 주다 말고 주섬주섬 무기를 챙기는 선배를 본 신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0군단장은 아군 아닌가. 고작 아군이 술을 마신 것뿐인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긴장을 하는 건지.
이건 뭐, 전쟁을 치른다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선배, 왜 무기를…?”
“뭐? 야, 너 근무 수칙 안 읽었어?”
“네? 네, 아직….”
“미쳤어?! 이게 죽으려고 작정했나!”
근무 수칙이 한두 개도 아니고, 그걸 언제 다 읽겠는가. 들어오자마자 일부터 시켰으면서.
오늘 저녁에 완독할 생각이었는데.
펄펄 날뛰는 선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한 불안이 스멀스멀 밀려와 이를 감추기 위해 부러 입술을 비죽였다.
“오늘 다 읽을 생각이었단 말이에요.”
“하… 그래,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 일단 중요한 것만 설명할게. 잘 들어.”
신참의 허리춤과 등 뒤를 힐긋 살핀 선배가 이마를 짚었다.
이 새끼, 무기도 안 챙겼다. 근무 수칙에 분명 ‘호신을 위한 무기를 항시 소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을 텐데.
급한 대로 단검을 하나 내밀었다.
“일단 무기부터 들어. 0군단장님께서는 일정량 이상 술을 드시면 눈에 들어온 이들을 마구잡이로 베어 넘기시니까, 죽고 싶지 않으면 그거 잘 들고 있는 게 좋을 거야.”
“네? 네….”
“네가 기억할 건 세 가지야. 첫째, 0군단장님께서 적이냐는 질문을 하실 경우 즉시 아니라고 답할 것. 둘째,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유를 물을 시 최대한 확실하게 설명해 드릴 것. 셋째, 네 대답에 의심을 하실 경우 즉시 방어 태세에 돌입할 것.”
“네… 그런데 왜 굳이 방어 태세일까요? 살기 위해서는 방어보단 역시 공격이….”
“0군단장님께 상해를 입히면 마왕님 손에 죽어.”
“히익.”
그렇다는 건 말 그대로 최소한의 방어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괜히 과하게 대응했다가 0군단장님의 몸에 상처라도 나면….
반사적으로 목을 감싸고 바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데? 상대는 무려 0군단장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괜히 망설였다간 자각도 못 하고 목이 날아갈 터.
그러니 이건 거의 그냥 죽으라는…?
공포와 억울함, 살고 싶은 마음이 뒤섞인 신참의 눈동자를 본 선배가 피식 웃으며 제 무기를 고쳐 쥐었다.
“제압은 마왕님께서 하신다. 우린 그냥 최대한 살아남는 걸 목표로 하면 돼.”
시간만 끌면 마왕님께서 오셔서 제압해 주실 테니까.
그리 말하는 그의 목덜미는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
갑자기 마왕성 전체에 ‘특급 경보’가 뜬 것으로도 모자라, 그 이유가 ‘나’라는 소식을 들었다면 기분이 어떨까?
어떻긴 뭐가 어때, 말할 것도 없이 잣됐다 싶은 거지.
심지어 이유마저 사실과 거리가 머니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뛰겠다.
내가 술을 마셨다고? 아니 술을 마셔서 경보가 뜬 것도 어이가 없는데, 더 어이가 없는 건 난 술에는 입도 안 댔다는 것이다. 마시긴커녕 냄새도 못 맡았다고!
‘지금이라도 확 마셔?’
그렇게 생각하며 비교적 남은 양이 많은 술병을 지그시 쳐다보는데, 저 멀리서 방패를 든 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어디서 전쟁이라도 터진 것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달려온 그들은 내 주위에 일정 거리를 두고 원을 이루어 서더니 들고 있던 거대한 방패를 일제히 바닥에 찍어 세웠다.
쿵!
땅이 한 차례 진동했다.
“…….”
당황 이전에 떠오른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내가 뭘 했다고 참… 빈틈도 없이 완벽하게 세워 놓았다. 완벽하게 포위됐네, 하하하.
뭔가 익숙한 장면이 떠오르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그래, 마치 시골에서 마을에 쳐들어온 멧돼지를 사냥할 때 이런 식으로 포위망을 좁혀 가면서….
시발, 장난해?!
‘내가 멧돼지냐?!’
와락 미간을 찌푸린 것도 잠시, 나는 얼른 표정을 풀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신경질을 내 봤자 죽도 밥도 안 된다. 오히려 저들의 손에 죽을 확률만 높아지겠지. 지금도 봐, 고작 미간 좀 찌푸렸다고 흠칫하고 있잖아. 경계심이 더 올라간 게 보인다고.
이 빌어먹을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선 일단 저들의 경계심부터 풀어야 한다. 그래야 설득이든 뭐든 할 수 있을 터.
그래서 짜증을 억누르고 억지로나마 미소 지었더니만,
“히익.”
“지…지금 웃으신 거 맞지? 이제 우리 죽는 거지?”
“무, 물러서지 마. 한 명이라도 물러서면 다 죽는다. 방패 단단히 잡고, 긴장해.”
역효과가 났다.
……너희 8군단 아니었냐? 무식하게 큰 방패를 보면 분명 8군단이 맞는데.
일반 방패병도 아닌 놈들이 왜 이렇게 소심해? 군단장 때문인가? 군단장한테 영향을 받은 거야?
이래도 긴장하고, 저래도 긴장하고…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그냥 확 걷어차 버려?’
철벽과도 같은 방패를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지, 그랬다간 내 발목만 나간다.
성질은 나는데 그걸 마음대로 표출하지도 못한다. 이 망할 상황에 대한 분노를 육체적으로 표출하는 대신, 정색하고 방패를 노려보았다.
이걸 원인으로 또다시 조금 시끄러워지긴 했으나 그건 잠시였다.
“저 너머에 데몬이 있다고?”
방패 너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어, 시발…?’
상황과 달리 여유가 흘러넘치는 목소리였으나 도리어 내 심장은 쿵 하고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마왕이다. 조금 전 도서관에서 만났던 인물이 이곳에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