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83
83. 격동하는(3)
황제가 조소를 짓는 사이, 척척 걸어가 쌓여 있는 서류를 뒤져 보고서 한 뭉치를 꺼낸 아르달이 종이를 몇 장 넘기더니 펜을 꺼내 그 자리에서 내역을 수정하며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왕실 도자기 3개….”
왕실 도자기 개수에 두 줄을 찍찍 긋고 새로 3을 적어 놓은 그가 보고서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투덜거렸다.
회의실에서도 그렇고, 이젠 하다 하다 귀한 도자기까지 깨다니.
황제가 폭군을 자처하긴 하지만 그도 나름의 선을 정해 놓고 행동했었는데, 요즘은 좀 이상하다.
제가 아는 황제라면 하지 않았을 짓들이 연속해서 펼쳐짐에 품었던 의문들이 최근 들어 급격히 쌓인 불만과 뒤섞여 속속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폐하 요즘 이상하신 거 아십니까? 이 중요한 시기에 틈만 나면 멍하니 있고, 어쩔 땐 과하게 예민해지시고, 뭘 보고 있는 것 같아 확인해 보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나 보고 있고. 마치….”
우뚝, 아르달의 행동이 멈췄다.
기묘한 정적 속에서 그의 동공이 커지고, 허공에서 멈춘 손이 달달 떨린다.
고개를 돌려 황제를 쳐다봤다.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건지, 아니면 정답을 꼬집을 때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겠다는 건지, 황제는 침묵하고 있었다.
“……헛것이라도 보는 것처럼.”
“…….”
돌아오는 대답이 없음에 아르달은 도리어 확신했다. 그것이 어디에서 기인된 것인지도.
“의원은 부르지 않으셨겠군요.”
책임의 탈을 쓴, 죄책감.
“그래.”
“하….”
무례라는 것도 잊고 이마를 짚었다.
아르달은 황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는 그가 아는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설명하기 힘든 인간이었다.
그래, 인간.
전투와 서류작업, 심지어는 일상생활마저도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해내던 황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곱씹다가 이내 쓰게 웃었다.
그도 결국은 인간인 것이다.
“적아는 구분 가능하십니까.”
“아직까지는.”
“예, 반드시 그러셔야 할 겁니다. 폐하께서 판별력을 잃고 아군에게 검을 휘두르는 순간, 황권은 교체가 될 테니.”
자신이 직접 나서서 황제를 교체하는 데 앞장서겠다는 뜻이다.
황제는 그 말의 뜻을 명백히 알아들었음에도 뭐라 하지 않았다. 아르달에게 있어서 최우선은 ‘제국’이라는 것을 알기에.
욕심만 그득한 이들 사이에서, 이런 자가 하나 정도 있어도 나쁘지 않잖은가.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는 알고 계십니까?”
“황태자는 안다.”
“그렇다면 황녀 전하께서도 알고 계실 가능성이 크군요. 진찰을 받으라는 청은 없으셨습니까? …아니,”
당연히 있었겠지. 질문을 바꿔야겠다.
“폐하께서는 여전히 진찰을 받을 생각이 없으십니까?”
“없다. 그보다 재상,”
더 이상 그에 대해 대화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황제가 단호히 화제를 바꿨다. 무어라 하려던 아르달이 이어진 말에 입을 다물었다.
정확하게는 지도의 어느 한 곳을 짚은 황제의 행동 때문에.
“그대도 회의에 참여해서 알겠지만, 다음 전쟁 상대는 스라한 왕국으로 정해졌다. 짐은 이 지역부터 공격해 들어갈 생각이니, 이 지역의 특징이 정리된 서류를….”
“진심이십니까.”
아르달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말이 끊긴 황제가 고개를 든다. 침묵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맹수의 것과 같은 화려한 금안은 언제나 그렇듯 강한 의지를 담고 스스로의 영혼을 제물 삼아 강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말없이 그를 보던 아르달이 천천히 입을 열어 침묵을 몰아냈다.
“상태도 좋지 않으시면서요.”
“그건 정신의 영역이지 육체의 영역이 아니지 않은가.”
“정신은 곧 육체에 영향을 끼치기 마련입니다.”
여타 귀족들이 그러하듯 아르달 역시 이 전쟁이 달갑지 않았다.
이레온 왕국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굳이 다른 왕국들을 건드려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물론 황제의 목적이 대륙 정복인 만큼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무엇보다 그는 황제가 대륙 정복을 목적으로 삼은 이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확인했을 때, 계획을 취소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전쟁을 미룰 것이라 생각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재상은, 이미 회의까지 한 계획을 뒤엎으라는 건가?”
“……하지만.”
그것이 회의에 참여한 귀족들을 무시하는 처사가 된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건 미친 짓입니다.”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제는 제국의 전력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괜히 제국의 암묵적인 첫 번째 영웅이 황제라는 이야기가 있겠는가. 황제는 용사의 파편을 지닌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다.
지휘관으로서도, 한 명의 장수로서도 핵심 비중을 차지하는 그의 상태가 좋지 않은데 전쟁을 강행하겠다니.
전쟁이란 자칫 삐끗하기라도 하면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단숨에 증발하는 위험한 것이다.
황제의 상태가 악화되어 사리 분별 못 하고 그릇된 명을 내리거나 적아 구분 없이 검을 휘두르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안다.”
“한데도 왜…!”
“글쎄….”
생각에 잠기듯 금안이 조용히 내리깔렸다. 속눈썹이 길게 드리우며 음영을 자아낸다.
말없이 바닥의 깨진 도자기 파편을 눈에 담던 황제가 이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재상을 쳐다봤다.
속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가만가만 흘러나왔다.
“미친놈이 미친 짓을 하겠다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쾅!
이어진 소음에 느른하게 웃던 황제가 즉시 미소를 거뒀다. 황금색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가 책상을 내리친 손을 확인하더니 다시 올라가 그 주인을 담는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이를 악문 재상의 얼굴을 표정 없이 보던 황제가 나직이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재상?”
“미칠 거면 곱게 미치고 죽고 싶으면 애꿎은 제국민들 희생시키지 말고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죽으십시오! 자학을 하고 싶으면 제국을 움직이지 말고 제 몸에 칼집을 내란 말입니다!!”
결국 터져 버렸다.
황제의 눈동자에 차가움이 돌았으나 아르달은 두렵지도 않은지 거침없이 분노를 터트리며 지금껏 참아 왔던 말을 쏟아 냈다.
황제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만큼, 또 누구보다 제국을 위하는 만큼, 화가 났다.
“전쟁에 희생되는 병사들 또한 제국민이라는 것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요. 그런데도 어찌하여 전쟁을 밀어붙이시는 겁니까! 죽은 뒤에 책임을 다하면 그게 전부랍니까! 어째서 아예 전쟁을 치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배제해 두시는 겁니까! 왜 당신의 사적인 목적에 제국민들이 희생되어야 하고 제국이 이용당해야 하는 겁니까! 도대체 왜!!”
“재상.”
“책임, 좋습니다. 인간이라면 무릇 짊어져야 마땅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황제의 첫 번째가 ‘책임’인 줄 알았던가. 아니다. 황제는 책임을 우선시하지만 그것이 첫 번째인 건 아니었다.
만약 황제가 정말 책임을 최우선으로 여겼다면,
“당신에겐 제국민과 제국보다 다른 것에 대한 책임이 더 우선인 겁니까!”
죽은 형제자매에 대한 책임보다 제국과 제국민을 더 우선시했을 테니까.
그에게 있어 첫 번째는….
‘죄책감.’
책임은 1등 없는 2등이라고 해야 할까. 애초에 ‘죄책감’은 목록에조차 들어갈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니.
황제는 책임이라는 이름을 붙인 죄책감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있었다.
결국 그 역시 죄책감에 휘둘리는 한낱 나약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재상.”
“…….”
아르달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를 말 없이 보던 황제가 이내 한 자 한 자 곱씹듯 천천히 말을 뱉었다.
“짐이 곧 무어라 했지?”
“……하.”
결국 이야기는 돌고 돌아 이렇게 결론이 난다.
저 말의 뜻이 ‘짐이 곧 제국이기에, 제국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걱정 마라’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그저 ‘짐이 곧 제국이니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라는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건 결론은 하나였다.
황제의 뜻대로.
조용히 황제를 노려보던 아르달이 책장에 보관된 서류철을 뒤져 그중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놓고 슥 밀었다.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그 지역의 특징.”
“…….”
“제가 폐하를 하루 이틀 본 줄 아십니까. 예상 정도는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판단을 내릴지, 전쟁을 치른다면 어느 경로로 갈지. 전부.
[짐이 곧 제국.]이 말을 ‘에도아르도 데세르트’가 아닌 다른 이가 했더라면 아르달은 상대가 자신을 거두어 준 사람이라 해도 가차 없이 떠났을 것이다.
보통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역사서에 길이길이 남을 답 없는 폭군이고, 그런 폭군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는….
“무얼 하든 폐하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제게는 폐하를 말릴 깜냥도 되지 않거니와….”
제국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어지간해서는 눈감아 드릴 테니까.
뒷말은 조용히 삼켰다. 서류를 넘기던 황제가 그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한다.
‘……그래.’
아시겠지.
당신이 제국을 손에서 놓아 버린다면, 그때의 당신은 황제가 아닐 테니.
나로서는 내 모든 역량을 동원해 당신의 목을 치고, 그 머리를 성벽에 걸어 둘 것이라는 걸.
아르달은 황제의 눈을 마주 보다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날, 제국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또 하나의 왕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분명 상대가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꾸만 전쟁을 하려는 제국의 행보를 의심스럽게 보던 몇몇 왕국은, 무언가 깨달은 듯 급히 전시체제에 돌입했다.
대륙에 피바람이 불 것을 예고하는 순간이었다.
***
현재 제국에는 네 명의 공식적인 영웅이 존재한다.
8년 전쟁을 배경으로 등장한 세 영웅, 그리고 그 후 추가적으로 공을 세워 영웅으로 인정받은 네 번째 영웅.
8년 전쟁의 세 영웅은 수없이 등장해 영웅이라 불리다 끝내 죽어 잊힌 이들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그 이름을 지켜 낸 이들이다.
그런 만큼 이들의 공로는 만만치 않았다.
첫 번째 영웅은 전쟁의 시작과 동시에 황제의 강력한 지지를 기반으로 총사령관의 자리에 올라 전투를 진두지휘했고,
두 번째 영웅은 전쟁 초반부터 두각을 드러내 거침없이 적들을 베어 넘겨 그 시신으로 산을 쌓아 명성을 떨쳤으며,
세 번째 영웅은 전쟁 초중반부터 선봉장으로 나서며 멀쩡한 시신 하나 남기지 않는 잔혹한 진가를 드러냈다.
스티그마 프리미로는 그중 두 번째 영웅이었다.
“이레온 왕국이 벌써 항복을?”
“예.”
“그럴 거였으면 왜 도발했는지 모르겠구나. 버러지 같은 놈들.”
제국식 복장에서 조금 거리가 먼 시원스러운 옷을 걸친 사내의 눈에 혐오가 스쳤다.
나약한 것들을 싫어하는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이미 후처리까지 끝난 패배자들에게 신경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듯 그가 꼬고 있던 다리를 내린다.
그는 대충 들고 있던 피 묻은 검을 거꾸로 세워 아래로 내리찍고는 그 위에 두 손을 얹고 턱을 괴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폐하께서 나는 왜 부르신 거니?”
“전쟁을 준비하라 하셨습니다.”
“전쟁? 전쟁은 이미 끝나지 않았… 설마.”
사내의 두 눈이 커졌다.
놀란 것도 잠시, 무언가 확신을 얻은 듯 그가 입술을 비틀었다.
“크핫.”
“…….”
“크하하하하하!!”
시원스러운 웃음소리가 하늘에 펴져 나간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사내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역시 폐하시군.”
드디어.
들릴 듯 말 듯 한 혼잣말을 뱉으며 스티그마가 몇 번 더 웃음을 토했다.
황제가 전쟁을 그렇게 끝내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8년 전쟁 당시 그의 움직임은 마치 대륙 정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기에.
대륙 정복을 향한 황제의 움직임 자체가 기쁜 것이 아니다. 스티그마는 자신이 전쟁에 참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공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이번에야말로.’
공에 대한 대가로 가문의 멸문을 청할 것이다.
그때 그 녀석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