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85
85. 휴가 아닌 휴가(1)
뒤늦게 의심이 치밀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불쑥 누군가 옆에 나타났다.
그는 경계하며―사실은 흠칫 놀라서―한 걸음 물러선 이쪽엔 시선도 던지지 않고 끝도 없을 것 같던 저 둘의 신경전을 단박에 끊어 놓았다.
“그래 드벨라니아. 혹시 모를 사태는 대비해야지.”
“……쳇.”
드벨라니아가 혀를 차며 물러서고, 벤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마왕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눈에 담았다. 눈이 마주치자 흰자와 검은자 색이 뒤바뀐 역안이 슬며시 휘어진다.
“0군단은 데려가지 않는다면서?”
“……네.”
“역시 방해되어서 그래? 아니면 네 몫을 빼앗기기 싫다거나?”
“네?”
이전부터 슬며시 소리를 내고 있던 경종이 뒤늦게 마구잡이로 울리기 시작했다.
너무 늦은 본능의 경고에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뭐라 답하지도 못하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옷 사러 간다는 건 핑계고, 아무리 봐도 싸우러 가는 느낌인데. 지금이라도 튀어야 하나.
그러나 그런 내 미미한 시도는 곧장 수포로 돌아갔다.
“그럼 어서 다녀와. 모든 준비는 다 되었으니 출발만 하면 돼.”
우연인지 의도한 것인지, 검은 손톱이 인상적인 흰 손이 내 어깨에 얹어졌다. 나는 그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표정 없는 얼굴로 마왕을 쳐다봤다.
그리고 내 존재를 눈치채고 어서 타라며 손을 흔드는 드벨라니아를 한 번, 다시 마왕 한 번.
“역시 무르는 건….”
“당연히 안 되지.”
…….
출발하고 처음 한동안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
단지 드벨라니아와 벤의 신경전에 하도 눈치를 보다 보니 상당히 피곤했을 뿐이지.
덜컹덜컹.
형편없이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나는 멀미와 두 마족의 기 싸움, 두 종류의 공격을 버티기에 여념이 없었다.
“주치의는 이제 그만 내려서 뛰어가지 그래?”
“죄송하지만 주치의는 담당 환자를 언제든 돌볼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럼 지붕 위에라도 올라가 있든가. 위험한 일이 생기면 신호 줄 테니-”
“마차도 넓은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만.”
신경 쓰지 말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야. 그러니까 무시하… 우욱, 멀미가.
‘신이시여.’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참고로 난 무신론자다. 무신론자가 신을 부르짖게 만들다니, 이 악독한 놈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와중에 심기가 한껏 비틀린 드벨라니아가 팔짱을 낀 채 특유의 말꼬리를 늘인 말을 뱉었다.
“한때 마왕님의 주치의였다고 아주 콧대가 높구나아?”
“지금은 0군단장님의 주치의이지요. 제 콧대가 높은 것은 당연합니다.”
“군단장은 즉결 처분권을 갖고 있는데, 그 대상이 네가 되고 싶지 않다면 정신 차리지 그래?”
“0군단장의 주치의를 감히 건들고도 무사할 자신이 있으시다면 어디 한번 해 보시지요. 주치의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 제발 가만히 있어 주면 안되나? 가뜩이나 속 울렁거리고 머리 아파 미치겠는데.
불길한 징조와 달리 아무 일도 터지지 않아서 처음엔 안심했는데… 이젠 제발 무슨 일이 터져 줬으면 싶다.
뭐든 좋으니 누가 날 이 분위기에서 꺼내줘. 제발.
-콰과광!!
“데몬 님, 드벨라니아 님! 마물입니다!”
이런 거 말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터지더라도 내가 감당이 가능한 일로 좀 터져 주면 안 되나?’
황급히 창문을 열고 밖을 확인했다.
새까맣게 몰려오는 마물의 파도. 다행히도 2군단원들이 쳐 놓은 실에 1차로 발목이 잘려 우르르 무너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인 것이 한눈에 보인다.
이리저리 밖의 상황을 살피던 나는 바닥을 기고 있는 마물들 중 유독 덩치 큰 놈을 발견하고 조금 전 굉음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저런 덩치가 넘어지는데, 그 정도의 굉음이 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지.’
저기서 싸우면 난 분명 죽을 텐데.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보이지?
어떡해야 하나 싶어 마차 내부를 돌아본 나는 잠시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느긋이 창밖을 보는 드벨라니아와 챙겨 온 가방을 뒤적이는 벤, 둘의 태도가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 태연했다.
마치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아하.’
상황 판단은 빨랐다. 나는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외곽으로 돌아서 간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빌어먹을 마왕 같으니.
어쩐지 출발할 때부터 반응들이 이상하다 했다. 조금만 더 의심하고 생각을 했으면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사실 아예 예상조차 못 한 건 아니야.’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설마’ 하며 모른 척 넘겨 버렸을 뿐.
마물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제국에 다녀오기 전에도 그 수가 너무 많은 탓에 도시 방어전까지 벌였는데, 시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명색이 0군단장이라 방 안에만 처박혀 있어도 꼬박꼬박 들려오던 소식들 중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도시 방어전이 있었던 이후 아예 그곳에 군단장을 배치했댔지.’
그리고 마물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고 했다.
여전히 도시의 성벽을 두드리는 마물들도 있지만, 본능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고 좀 더 손쉬운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 자리를 옮겨 다른 이종족들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고. 그 탓에 각 이종족 수장들의 항의가 있었다고 한다.
마물은 마왕의 힘에서 탄생하는 오류 덩어리.
그러니 그 책임은 당연하게도 마왕에게 있다.
청소를 해야 했겠지. 마물들이 다른 종족들의 땅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마족의 영역 가장자리를 돌면서.
다른 이종족들의 영역과 맞닿은 경계선. 그게 바로 ‘마계의 외곽’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지금 나는 ‘마계’의 가장자리를 돌면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물 청소를 위해!
‘마왕의 외곽으로 돌아서 가라는 말은 가는 김에 마물 청소를 하면서 가 달라는 말이었고.’
순진한 나는 이를 덥석 수락해 버린 것이지. 제기랄.
‘난 못 해.’
저것 좀 봐. 저건 거의 마물의 파도 수준이잖아. 검은 물결이 마구잡이로 이쪽으로 몰려오는데, 나보고 저걸 상대하라고?
절대 못 해. 아니, 안 해.
생각할 것도 없이 결론이 내려졌다.
‘그냥 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두 번째 도시를 향해 직진하면 충분히 생존 가능성이 있다. 인간계의 말이라면 모를까, 이곳의 말들은 말이 아니라 괴물에 가까우니까.
문제는 어떻게 해야 이 마차 안의 위험 덩어리들을 납득시키며 튈 수 있느냐인데….
내 의견을 어떻게 포장해 말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창밖을 보며 손안에서 투명한 실을 가지고 놀던 드벨라니아가 씩 웃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럼 전 먼저 나가서 상대하고 있을 테니까 데몬 님은 천천히 나오세요.”
“……네?”
뭐? 아니, 잠깐…!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마차 문이 열렸다 닫혔다.
나는 문을 향해 어정쩡하게 손을 뻗은 채 굳어 버렸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리니 창밖으로 무언가 반짝일 때마다 조각난 마물들이 후두둑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그래, 2군단장의 주 무기는 마물 가죽에서 뽑아낸 실이었지. 멋있네. 멋있긴 한데… 젠장. 이로써 죄다 무시하고 도시로 질주하려던 내 계획은 무산되었군.
아직까지도 뻗고 있던 손을 거두고 마차 안에 남은 이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
이 어색한 분위기를 먼저 깬 쪽은 벤이었다.
그는 자연스레 시선을 내려 가방을 다시 뒤적이며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데몬 님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
아닐걸.
일단 이 상황에서 뜬금없는 말을 꺼낸 것부터가 확실히 아니야.
“모처럼의 전투이니 독식하고 싶으셨겠지요. 하지만 마물의 수는 충분하니 굳이 2군단장을 말릴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거봐, 아니잖아. 애초에 기대도 안 했지만.
그럼 그렇지- 하는 시선으로 벤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는데, 그가 원하던 것을 찾은 듯 가방에서 무언가 쑤욱 꺼내 들었다.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내 눈이 일순간 잘게 흔들렸다.
“물론 그로 인해 데몬 님의 흥이 깨진 것은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흥을 돋울 수 있도록 이것을 준비했습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술.
나는 멍한 얼굴로 술과 왕진 가방을 번갈아 보았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말을 꾹꾹 눌러 삼키며.
그게 왜… 거기서 나와?
“어차피 술은 이게 전부이기도 하니 얼마큼 드시든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 마음껏 드시고 기분 풀어 주기만 하시면 됩니다.”
뭐…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이 빌어먹을 전투는 피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렇다면 술이라도 마셔서 긴장을 푸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복잡한 눈으로 내 손 안에서 채워지는 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죽더라도 맨정신으로 죽는 건 영 아니지? 아플 거 아니야.
나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
2군단장 드벨라니아와 둘이 가겠다는 이유로 부관까지 두고 출발한 데몬 아루트를, 주치의 벤은 악착같이 따라왔다.
마왕의 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언제 악화될지 모르는 그의 건강을 위해, 그리고 비밀리에 받은 명령은….
“데몬이 전투를 망설이는 기색을 보일 수도 있을 거야.”
“……데몬 님이 말씀이십니까?”
“그래. 물론 위험할 것 같다 싶으면 알아서 돌변해 쓸어 버리지만 평소의 걔는 온건해도 너무 온건하거든. 솔직히 온건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온순… 아니지, 온순하다 못해 나약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지.”
“그건….”
사실이다. 술을 마시거나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등,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 그분은 언제나 전투를 피했다.
아마 그분의 실체를 모르는 마족이 그분을 보게 된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제 밥으로 볼 게 뻔했다.
벤이 뭐라 답하지도 못하고 그저 입술만 달싹이자, 상석에 앉아 있던 마왕이 소리 없이 웃으며 손을 까닥였다.
줄곧 서 있던 시종이 조용히 걸어와 들고 있던 쟁반을 벤의 앞에 내려놓는다.
자연스레 그것을 따라 시선을 내리자, 술병이 시야에 들어왔다.
“싸움을 좋아하는 것은 확실한데, 평소에는 참을 이유가 없음에도 필요 이상으로 인내하지. 그래 놓고는 어느 순간 작은 것에도 폭발해서 필요 이상의 피를 보고.”
그러니 풀 수 있을 때 확실히 풀게 해 주는 게 좋지 않겠어?
모순적이던 그의 행동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마왕은 침묵하는 벤을 향해 나긋이 말했다.
“지난번 도시 수성전 때처럼 여유가 있다면 모를까, 스스로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기엔 현재로선 시간이 너무 아까워. 그렇다고 일부러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도 않고.”
“…….”
“그러니 네게 명령하지.”
은은한 달빛이 비쳐 드는 어두운 공간에서, 마왕은 턱을 괸 채 검지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싱긋 웃었다.
달빛 아래 유일하게 드러난 입술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올라간다.
“데몬에게서 전투를 망설이는 듯한 기색이 느껴지면, 술을 먹이도록 해.”
아, 벤이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결국 그도 마왕이었다.
활용할 수 있는 것은 한도 내에서 할 수 있는 한까지 활용해 내는, 마계의 군주.
속을 알 수 없는 매끈한 미소 앞에서, 벤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병을 챙길 뿐이었다.
‘사실 조금 걱정하기는 했지만….’
자칫했다가 0군단장이 적아 구분 없이 날뛰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의 술주정이 극에 달하면 재앙이 따로 없을 정도이니.
그러나 마왕은 그의 걱정을 예상한 듯, 정확한 기준까지 일러 주었다.
먹이더라도 딱 알코올 함량이 25%인 술을 기준으로 5병 이전까지만. 그걸 넘어가면 술주정이 시작된다고.
그리고 다시 지금.
“술이라….”
딱. 딱. 딱. 딱.
흰 손가락이 일정한 간격으로 마차 의자를 두드린다. 묘한 미소가 입가에 머물고, 평소와 다른 붉은 안광이 번뜩인다.
그가 마시던 잔은 어느 순간부턴가 마차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시선을 내리깐 채 술병을 빙글빙글 돌리던 데온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운 상태로 천천히 눈동자를 올려 벤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고, 그 순간.
딱.
손가락이 멈췄다.
“…….”
“…….”
공기조차 옥죄는 듯 집요한 정적.
숨소리조차 쉬이 낼 수 없는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미동도 없이 벤을 보던 데온이 씩 웃었다.
그와 동시에 억눌려 있던 광기가 폭발하듯, 피처럼 새빨간 눈동자에서 온갖 꺼림칙한 감정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그가 말했다.
“머리 좀 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