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87
87. 휴가 아닌 휴가(3)
실의 위치를 훤히 꿰고 있는 만큼 그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실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설치된 실을 이용하기도 했다.
유연하게 실을 넘나들며 마물들이 잘려 나가기를 유도하기도, 직접 난도질을 하기도 하며 체력을 조절한다. 그것이 조금 익숙해지자 때로는 근처 2군단원들이 실을 휘두르는 순간에 맞춰 마물을 밀어 넣기도 했다.
왕진 가방을 꼭 끌어안은 채 상황을 지켜보던 벤의 표정이 점차 묘하게 변했다.
‘흐름이 바뀌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무작정 돌진하던 마물들의 행동이 소극적으로 변했다. 데몬 님의 특성상 그런 놈들의 태도는 더욱 날뛸 수 있는 판을 만들어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부족해.’
그럼에도 부족하다. 이렇게 많이 죽였음에도 마물의 수는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지원은 언제 오는 거지? 15분이 이렇게 길었던가?
“쿨럭!”
“데몬 님!”
“오지 마!”
황급히 달려오려는 벤을 저지하며 마물의 미간에 꽂은 단검을 밟아 더 깊숙히 밀어 넣은 데온이 그 반동을 이용해 뒤로 몸을 날려 실 안쪽으로 들어왔다.
달려오던 속도를 이기지 못한 마물이 실에 잘려 나가 후두둑 떨어진다. 쏟아지는 잔해 가운데에서 데온이 조용히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마물의 피인지 제 피인지 모를 것이 흥건히 묻어났다.
“괘, 괜찮으십….”
“별거 아니야.”
나름대로 정면충돌은 피한다고 피했는데, 결국 충격이 체내에 쌓이고 쌓여 이렇게 터진 모양이다.
쿨럭, 한 번 더 속에 고인 피를 뱉어낸 데온이 문득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제길. 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 거였는데.’
간신히 끌고 온 분위기가 바뀌었다. 가장 강해 보이던 존재가 피를 보인 것이다. 주춤했던 마물의 공세가 다시… 아니, 처음보다 더 강하게 변했음에 데온이 이를 악물었다.
‘15분, 거의 다 된 것 같은데.’
대충 몸을 추스르고 새 단검을 뽑아 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근처에 있던 마물을 잡고 화풀이를 하듯 마구잡이로 단검을 찔러 넣는다.
무작위로 난도질을 하는 듯하면서도 숨은 일부러 붙여 뒀다. 더, 더 잔인하게 굴어야 저들도 주춤할 테니까. 그래야 흐름을 다시 끌고 올 수 있다.
“하지만… 데몬 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
“진찰을 받을 정도의 시간이라면 2군단장님과 2군단으로도 충분히 벌 수 있을 테니 한 번 진찰을 받고 움직이시는 게….”
“…….”
“데몬 님!”
데온이 거침없이 돌아서서 단검을 날렸다. 콱! 벤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 단검이 마차 벽에 박혔다.
뺨에서 피가 주룩 흘러내리고, 벤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단순히 단검 때문이 아니라, 저를 노려보는 붉은 눈이 음습하고 질척한 살기를 담고 빛나고 있어서.
“입 다물어. 방해되잖아.”
“…….”
“분명 별거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거리가 있음에도 으르렁거리듯 낮게 깔린 목소리가 선명히 고막을 건드린다.
마물의 피가 얼굴을 잔뜩 적셔 시야가 가리는 모양인 듯 가늘게 내려뜬 눈은 그 상태에서도 넘치는 광기를 감추지 못하고 선명히 그를 향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걸 예상하고 벌인 짓 아니었어?”
“……!”
왕진 가방을 안은 팔이 움찔 떨렸다. 벤의 두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크게 흔들린다.
차마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그를 싸늘한 표정으로 보던 데온이 조용조용 입을 뗐다.
분노보다는 화낼 가치도 없다는 듯 한심함에 가까운 감정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똑바로 처신해.”
어설프게 굴지 말고.
“…….”
“…….”
시끄러운 배경을 두고 짧은 침묵이 오간 것도 잠시, 데온이 먼저 시선을 거뒀다.
거슬리는 목소리가 사라진 것에 티 없는 만족스러움을 표하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데몬 님!!”
이제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여 버리겠다는 듯 단검을 던질 자세를 취하며 돌아본 데온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뒤!! 뒤에!
벤이 비명을 지르듯 그를 부르짖으며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뭐가 그리도 급한지, 왕진 가방을 방패 삼아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실을 쳐내고 파악해 가며 달려 나간 그가 데온에게 미처 도달하기 전에.
서걱-
피가 튀었다.
막 마물 하나를 걸레짝으로 만든 데온이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그곳에는 또 다른 마물이 급소에 단검을 찔린 채 멈춰 있었다.
마물의 손이 제 머리통을 향해 뻗어 있었음을 파악한 데온이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선다. 이윽고, 마물의 몸 여기저기에 자상이 생기며 피가 튀기 시작했다.
“……하.”
삽시간에 너덜너덜해진 마물.
명백히 그의 손속을 닮았지만 절대 그가 한 것이 아니었다. 누가 온 건지 알아차린 데온이 뜻 모를 미소를 입가에 걸치며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실루아.”
“안녕하십니까, 데몬 님! 오랜만이지 말입니다!”
***
충격적인 광경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멍하니 처참한 마물 사체와 눈앞의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시원스럽게 짧게 친 단발머리. 양손에 든 단검. 그렇지 않아도 돌아 버린 듯한 정신을 돋보이게 해 주는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에 더해, 이렇게 잔혹한 손속까지!
절대 저 마족과는 연을 터서는 안된다는 머리의 외침이 슬프게도 난 그녀와 이미 아는 사이였다.
7군단장 실루아.
단검을 사용하며 9군단장과 더불어 인간계와 마계의 경계선을 담당하는 군단장인데… 지금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건지.
“데몬 님께서 이런 곳에서 홀로 파티를 즐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지 말입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듣고.”
“마왕님께서 알려 주셨지 말입니다!”
“…….”
나는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특정한 모양을 이루고 공간을 형성한 실. 그 안으로 끝없이 밀려오는 마물 떼.
덫이다. 그것도 우리를 미끼로 한 덫.
술 때문에 잠시 기억이 날아갔다지만 이게 파티가 아니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겠다.
‘마왕님…!’
남은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데 파티라뇨….
아니, 아니지. 그냥 실루아가 멋대로 파티라 받아들인 쪽이 더 가능성 있겠다.
저 미친 마족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화는커녕 한숨마저 꾹꾹 누르고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아, 별거 아닙니다. 이렇게─”
실루아가 단검을 휘둘러 실의 위치를 파악하더니 그중 하나를 단검으로 꾸욱 눌러 공간을 벌린다. 단검에 쩌적, 쩍 하고 금이 갔으나 아랑곳 않고 그 틈에 몸을 밀어 넣어 이 덫을 벗어난 그녀가 밖에서 이쪽을 보며 활짝 웃었다.
“이렇게 하면 되지 말입니다.”
“……다음번에는 더 팽팽하게 설치해야겠네.”
적을 가두고 베어 내기 위한 실이 조금이나마 늘어난다는 것이 말이 된단 말인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보던 드벨라니아가 제 군단원들을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찝찝한 몸 상태를 뒤늦게 파악한 내가 들러붙은 정체불명의 살점들을 떼어 내는데, 다시 들어와 피에 젖어 추레할 내 몰골을 눈을 반짝이며 보던 실루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그런데 데몬 님. 뒤에 마물이….”
퍼억!!
후두둑.
“……?!”
“……있었는데 말입니다.”
와아악! 이게 뭐야!!
어쩐지 실망한 듯한 실루아의 목소리는 제쳐 두고 급히 뒤를 돌아봤다.
왼쪽 뒤편에서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의 잔해가 쏟아져 내렸다! 몸에 들러붙은 붉은 살점들을 털어 낼 겨를도 없이 돌아보니 창백하게 질린 벤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대체 뭐가 그리도 걸리는지 필사적으로 내 시선을 피하는 모습.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다 조금 시선을 내리자… 피 묻은 왕진 가방이 보였다.
저거 분명 기억상 깨끗했던 것 같은데….
‘그래, 얘도 미친놈이었지.’
정황상 저 단단한 왕진 가방으로 마물의 머리를 후려쳐 박살 낸 듯싶다. 아마 날 위해 그런 것일 테지.
고맙긴 한데… 무섭다.
“죄, 죄송합니다. 데몬 님, 그게….”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는데, 벤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내 눈치를 보며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더니 이내 입을 꾹 다문다. 다물린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기껏 지켜 줘 놓고 왜 사과하는 건데.’
의문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앞서 실루아가 그의 멱살을 잡아챘으니까.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잘못한 것을 알면 꿇어야지. 네까짓 게 감히 데몬 님을 무시해?”
“…….”
“데몬 님께서 그것 하나 모르셨을 것 같아?”
갑자기 왜 화를 내고 그래. 무섭게.
그리고 무시라니. 무시 아닌데. 덕분에 난 살았는데.
‘내 뒤에 마물이 있는 줄 알았다면 진즉에 몸을 날려 피했지, 멀뚱히 서 있었을 리가 없잖아.’
군단장답게 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살벌한 기세였으나 벤 역시 만만치 않았다. 움찔한 것도 잠시, 그는 손을 들어 제 멱살을 틀어쥔 실루아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제가 사과한 대상은 데몬 님이시지 7군단장님이 아닙니다.”
“……건방지군. 한때 마왕님의 주치의여서 그런가? 이러다 데몬 님한테도 건방지게 굴겠어.”
“……그래서 무례를 사과드리고 있었습니다. 이 손 놓으시죠.”
“끝까지 뻣뻣하네. 이러다 정말 내가 화나서 죽여 버리면 어쩌려고.”
“제약을 어기시렵니까? 제 담당은 0군단장님이십니다. 저를 벌할 권리는 마왕님과 0군단장이신 데몬 님만이 가지고 있다는 뜻이죠.”
기본적으로 주치의들은 맡은 바 임무를 제대로 수행 못 하지 않는 이상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제약이 있다. 역할 수행을 제대로 했는지 못 했는지, 못 했다면 그것이 죽어 마땅한 수준인지의 판단은 그로 인해 피해를 본 담당 환자의 몫.
이것이 바로 벤이 다른 군단장들에게 대거리를 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겠다.
담당 환자인 나는 그를 함부로 대할 만큼 간이 크지 않고, 타 군단장들은 제약 탓에 그를 죽일 수 없으니까.
‘…….’
저들의 기 싸움에 끼어들었다간 뼈도 못 추린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발끈해서 단검을 들어 올리던 실루아가 나를 힐긋 보더니 이내 손을 내리고 씨근덕거린다. 어떻게든 짜증을 삼키려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 벤은 또 그걸 가만두지 않고 입을 나불댔다.
“애초에 당신이 화가 난 건 ‘데몬 님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데몬 님이 마물을 찢어 죽이는 것을 못 봐서’ 그런 거잖습니까.”
그, 그만해. 지금 마물들이 득실대는 곳에서 뭐 하자는 거야.
저 둘이 기 싸움을 벌이는 동안에도 드벨라니아와 2군단이 열심히 움직였지만 어째서인지 마물들의 기세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드벨라니아도 느낀 모양이다. 동강 난 마물 조각을 냅다 둘 사이에 집어 던지며 짜증 섞인 음성을 뱉었다.
“작작하지이? 경계선은 어쩌고 이렇게 와서 한다는 것이 고작 기 싸움이야? 방해하러 왔어?”
“아, 드벨라니아도 있었습니까? 경계선은 부관에게 맡겨 놓고 왔습니다. 마왕님께서도 아마 괜찮을 거라 하셨지 말입니다. 제국은 여기를 공격할 겨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마왕님께서 보내셔서 왔다고?”
“네! 제가 최근 며칠 내내 마왕님께 통신을 걸어서 심심하다고 징징댔더니 이렇게 보내 주셨습니다.”
마왕한테 징징댔….
그나저나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 그녀와 마찬가지로 경계선 담당인 9군단장도 내가 오기 전부터 마왕성에 와서는 그대로 눌러앉아 있다던데.
즉, 지금 인간계와의 경계선에는 군단장이 한 명도 없다는 뜻이다. 이러다 정말 ‘영웅’쯤 되는 인간이 공격이라도 해 오면 어쩌려고.
드벨라니아도 말문이 막혔는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어쨌거나 도울 거 아니면 다시 가지 그래?”
“당연히 도울 거지 말입니다! 아, 그 전에 데몬 님께서 마물 한 마리만 다져 놓으시는 걸 보고 돕겠습니다!”
“……네?”
갑자기 나는 왜…?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실루아를 쳐다보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미칠 듯한 흥분으로 반짝이던 눈이 점차 탁하게 죽어 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삽시간에 생기를 잃고 축 처진 실루아가 잔뜩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데몬 님이 아니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