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89
89. 휴가 아닌 휴가(5)
온 도시가 침묵에 가라앉은 가운데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가이시텔이었다.
잠시 얼이 나가 있던 그는 무례를 깨달은 듯 서둘러 제 뺨을 후려치고는 돌아서서 주변에 길을 만들며 가마에 맞춰 걷고 있던 제 군단원들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어! 빨랑 꺼지시랍신다! 주변의 마족들이 거슬리시는 듯한데, 빨리 치워!”
군단원들의 표정이 순간 미묘하게 변했다.
‘……0군단장님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아무리 봐도 저쪽보다는 가이시텔 님이 더 거슬리실 것 같은데요.’
옆에서 자꾸 얼쩡대면서 통하지도 않는 아부만 떨어 대고 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아프셨던 것 같은데 옆에서 조잘거리기까지 하면….
물론 그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 상관에 그 부하라고, 괜히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를 말해 상관에게 찍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군단원들은 그저 빠르게 대답하고는 양몰이를 하듯 주위의 마족들을 향해 다가갔다.
이미 가이시텔의 발언을 들은 마족들이 짜증 어린 표정을 지으며 눈치껏 물러난다. 눈으로 욕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소문이 무성한 그 0군단장을 직접 본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하며 순순히 물러났지만,
‘보아하니 며칠은 머물 것 같은데, 지내는 곳 근처에라도 얼쩡거려 볼까. 그럼 얼굴 정도는 볼 수 있을지도….’
몇몇은 이런 생각을 하며 멀찍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화려한 가마를 지켜보았다.
이러한 시선들을 느낀 드벨라니아가 피식 웃었다.
“헬이 고생 좀 하겠네.”
***
꺼져.
이 말은 결코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이건 불가항력이다.
정말 그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도 모르게 우러나온 말이었다.
가마가 움직이고 왼쪽에선 벤이 틈틈이 아직도 머리가 아프시냐, 혹시 머리 말고 다른 편찮으신 덴 없냐 질문을 던져 대고,
오른쪽에선 가이시텔이 가마는 편안하시냐 혹 마음에 안 드는 곳은 없으시냐, 데몬 님께서 가마에 앉으시니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다 등등 정신이 혼미해지는 아부를 떨어 대고 있으니 어찌 내가 미치지 않겠는가.
‘제발 꺼져 이 새끼들아… 난 괜찮아, 괜찮다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신음 같은 속말이 튀어나왔다. 꺼지라고.
그게 이렇게까지 규모가 커질 줄은 몰랐지.
“뭣들 하고 있어! 빨랑 꺼지시랍신다! 주변의 마족들이 거슬리시는 듯한데, 빨리 치워!”
아니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온 도시 마족들을 내 적으로 만들 생각이야? 그냥 너만 꺼져 주면 돼, 너만!
따끔따끔한 시선들이 느껴진다. 슬쩍 눈을 굴리자 마족들의 일그러진 표정이 보였다.
아찔했다. 그들은 부조리한 10군단장의 명령에 눈으로 한껏 욕을 뱉으며 물러서고 있었다.
처음엔 자신들을 쫓아내는 10군단원들을, 그다음은 가이시텔을, 그리고 돌고 돌아 시선이 정착한 곳은 다름 아닌─ 나.
‘……이 도시에서 마음 편히 지내긴 글렀군.’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지금 이 상황은 누가 봐도 내가 명령을 내려 벌어진 꼴이다. 당연히 내게 짜증을 느꼈겠지. 이 도시에 계속 머무르고 있다간 언제 어디서 내 뒤통수를 노리는 놈들이 생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내 숙소―가이시텔이 도시 관리자에게서 빼앗아 내어준 화려한 저택―에 틀어박혔다.
……뭐, 왜.
아, 그리고 가마는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최악이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지금 내 꼴을 보면 알 수 있을 정도로.
‘……시발.’
방 안에 멍하니 누워 있다가 불쑥 떠오르는 기억에 조용히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이불을 매개체 삼아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며 쪽팔림에서 벗어나고자 애썼다.
퍽, 퍽퍽!!
“윽, 시발!”
발목 삐었다.
이불을 차다가 발목을 삐다니, 이건 어디 가서 말도 못 한다.
끙끙거리며 발목을 쥐고 소리 없이 뒹구는데 쾅! 하고 문이 열렸다. 재빨리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돌린 나는 눈에 들어온 인물의 모습에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어마어마한 기운을 풍기는 주치의가 있었다.
눈을 형형히 빛내며 방 안을 한차례 둘러본 벤이 날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며 속사포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데몬 님, 무슨 일이십니까! 머리가 또 아프십니까? 아니면 기습입니까? 아니지, 고작 기습 따위에 신음을 뱉으실 리는 없으니… 그렇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이상한 오해를 할까 재빨리 말을 끊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뢰가 가지 않는지 벤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얘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또 어제의 일이 떠오른다. 그래, 가마. 가마에 탔었지….
쪽팔려서 고개를 숙였더니 또 그거 가지고 역시 머리가 아프신 거냐, 얼마나 아프신 거냐, 후유증이냐 등등 호들갑을 떨어서 다시 고개를 들고 시선을 정면에 고정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내가 괜찮다는 것을 알아줄까 고민하던 때, 열린 문 너머 복도에서 드벨라니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벤 너는 가만 보면 데몬 님을 너무 연약하게 보는 것 같더라?”
“……주치의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이, ‘그’ 데몬 님이신데 말이야.”
“…….”
“뭐, 난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됐지만. 그보다 데몬 니임-.”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그녀가 이쪽을 휙 돌아본다.
평소보다 더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불길해 흠칫 튀어 오르려는 몸을 억누르고 간신히 답했다. 기다렸다는 듯 나긋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바깥에 호기심 많은 쥐새끼들이 기웃거리고 있는데, 혹시 심기가 불편하진 않으세요오? 이를테면 거슬려서 옷을 사러 나가기 싫어졌다든가….”
“그건….”
굳이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옷을 사러 나가기 싫으시다 하셨습니까!”
넌 또 어디서 나온 거니.
천장에서 불쑥 등장해 저 좀 보라는 듯 등 뒤의 박쥐 날개를 촥 펼쳤다 접은 가이시텔이 밖을 향해 손뼉을 두 번 마주쳤다.
촤르르.
촤르르르.
“…….”
“어머?”
“아마 귀찮으신 거겠죠! 그래서 제가 미리 디자이너들을 불러 놓았습니다! ……사실 이 도시에 2군단장과 함께 올 이유는 그것밖에 없기도 하고….”
다 들린다.
드벨라니아의 옷 구매는 여기서도 유명하구나.
어째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꼬리를 파들파들 떨며 웃고 있는 디자이너들을 보다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분명 침대와 옷장, 테이블 외엔 텅 비어 있었는데 삽시간에 옷으로 가득 찼다.
첫 번째 도시가 ‘유흥의 도시’라면 두 번째 도시는 ‘쇼핑의 도시’ 혹은 ‘무역의 도시’랬던가. 확실히 옷만 봐도 종류가 다양하다. 인간계의 북부식 복장부터 남부식까지 골고루 보이니.
‘……그런데 묘하게 남부식이 더 많아 보이네.’
그러고 보니 이 도시에서 남부식 문물이 유독 눈에 들어왔던 것 같다.
마계에 막 도착했을 때 드벨라니아가 새로 건넸던 옷도 그렇고, 빌어먹을 가마에 더해 여기 걸린 옷들까지.
‘뭐, 어디 남부와 연결된 통로라도 발견되었나?’
에이, 설마. 마왕은 내가 나설 일이 아닌 이상 굳이 나서서 알려 주지 않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만일 그렇다면 제국에서 이미 알고 조치를 취했을 테니 내게 소식이 들어오지 않을 리 없다.
‘그냥 우연이겠지.’
***
제국이, 아니 황제가 미쳐 날뛰고 있다. 내정은 황태자에게 일임한 뒤 직접 전장에 나서 검을 휘두르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상황 탓에 촉을 곤두세우고 있던 남부의 한 작은 왕국의 국왕은, 이어서 들려온 새로운 소식에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야속하게도 하늘이 우리 왕국에 시련을 주시려는 모양이다.
“마계와의 경계선이 발견되었다고?”
이곳, 우리 왕국에서?
“하필이면 이 시국에….”
평소였다면 제국에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방안을 논의했을 것이다.
암묵적으로 제국은 마계와의 일을 전담하고 있고, 괜한 신경 낭비, 전력 낭비를 하고 싶지 않은 다른 왕국들은 이를 별다른 반발 없이 수긍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제국이 이유 없이 날뛰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 상대하고 있는 왕국을 정복하면, 그다음 상대가 우리 왕국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 아닌가.
섣불리 이런 중요한 정보를 적이 될지도 모르는 나라에 넘길 수는 없다.
연신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뒤적이던 국왕이 무언가 발견한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별다른 사고가 없다, 라?”
마족들이 넘어와 어설픈 로브를 쓰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별다른 사고가 없단다.
“예, 주로 시장이나 작은 축제가 열리는 곳에서 기웃거리는 모습이 목격되고 있으며 이따금 옷이나 물건 등을 훔치는 것 외에는 큰 사고를 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살인 등의 중범죄는 아직까진 없다?”
“예.”
“후우, 그래. 우선은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일단 자체적으로 감시와 경계를 늘리고, 제국에 알리는 것은 보류해야겠다. 지금의 제국은 믿을 수 없으니.
그렇지 않아도 전쟁으로 불안할 왕국민들에게 불안을 더 얹어 줄 수는 없으니 이 사실은 극비에 부쳐야겠다고 생각하며 서류를 마저 훑어 내리던 국왕이 마족들의 복장에 대한 보고를 읽고는 그만 뒷목을 잡았다.
마족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어디 한 군데는 인간과 다른 구석이 있다. 이를테면 뿔이라든가 꼬리라든가, 마왕을 예로 들면 ‘눈’이 되겠지.
그러니 인간계에 오려면 이를 잘 가려야 하는데, 이 어설픈 마족들이…!
‘꼬리가 달렸으면 꼬리를 가려야지 왜 얼굴을 가리냐고!’
세상에, 꼬리가 달렸으면 꼬리 위주로 감춰야지 로브 후드에는 왜 그리 집착하는 것이며, 뿔 달린 놈이 사람과 대화할 때 왜 후드의 앞쪽을 푹 잡아당긴단 말인가. 뿔 모양이 두드러지지 않나!
그나마 그때가 축제여서 그저 소품으로 여겨져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곳에 마족이 돌아다닌다고 널리 알릴 뻔했다.
‘이놈들은 숨길 생각이 있긴 한가?’
신경 쓸 것이 더 늘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피로가 쌓이는 듯했다.
***
“일단….”
방 안을 가득 채운 옷을 둘러보았다.
……음, 역시 부담스럽다.
“이것들부터 치우죠.”
“예? 아, 혹시 마음에 드는 옷이 전혀 없으신 겁니까?”
놀란 듯 커진 가이시텔의 눈이 이내 매섭게 변해 디자이너들을 향한다.
짜기라도 한 듯 디자이너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렇지 않아도 창백했는데 거기서 더 하얘지니 이건 뭐 거의 밀가루 칠을 한 수준이다.
혹여나 그가 애꿎은 디자이너들을 괴롭힐까, 나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
가이시텔의 되물음에도 말끝을 흐리던 나는 그냥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여기서 그냥 옷에 흥미가 없다고 어떻게 말해. 옆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대화를 듣고 있는 마족이 있는데.
힐긋 드벨라니아를 보자 기가 막히게도 눈이 딱 마주쳤다. 내 시선에서 무언가 읽은 건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고맙긴 하지만 데몬 님께서는 직접 가게를 돌며 옷을 구경하길 바라시는 것 같은데? 기왕 도시에 온 거,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맛도 있잖아.”
“아… 제가 어리석었군요. 죄송합니다, 데몬 님.”
“아, 네… 뭐….”
……나가기 싫은데. 그 난리를 쳐 놓고 나가자고…?
선뜻 나가자 말하지 못하고 뭉그적거리고만 있자 드벨라니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팔짱을 낀 채 연신 창밖과 나를 번갈아 보며 무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이내 방 창문을 벌컥 열어 한 다리를 걸치며 싱긋 웃었다.
“그럼 일단 밖의 쥐새끼들부터 처리하고 오겠습니다아-.”
“네? 아니, 잠깐!”
쥐새끼라면 근처에 얼쩡대는 마족들을 가리키는 거, 맞지?
또 괜한 원한 관계 만들까 급히 드벨라니아를 말리며 한숨을 삼켰다. 아무래도 얜 내가 뭉그적거리는 이유가 밖의 마족들에게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망할. 그래, 나갈게. 나간다고.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나가도록 하죠.”
손짓으로 디자이너들을 물리고 벤의 손에 들린 로브를 받아 걸쳤다. 내가 무슨 어린애로 보이는지, 이런 날 가만두지 않고 벤이 자연스레 손을 뻗어 후드를 정리하고 로브의 매듭을 단단히 맨다. 상당히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손길이었다.
‘……왜 이 녀석 손길에서 에드의 손길이 느껴지는 거지?’
에드야 할 일 없는 부관이니 이거라도 하겠다 나서서 그렇다 치더라도, 얘는 왜?
둘이 마주치는 일이 많다 보니 본의 아니게 닮아 간 건가?
에드나 벤, 둘 중 하나라도 들었다간 곧장 사투가 벌어질 법한 생각을 하며 멍하니 서 있는데 충격적인 말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아, 나가시려는 겁니까. 그럼 가마를 대령….”
“미친 꺼ㅈ… 아니, 필요 없… 음, 괜찮습니다.”
척수에 새겨진 거부가 즉각 튀어나왔다. 대뜸 욕부터 나오려는 것을 유하게 돌려 표현하느라 잠시 버벅거리긴 했지만 가이시텔의 반응을 보니 괜찮은 것 같다.
화난 표정이 아니라 창백하게 질린 얼굴인 걸 보면.
“바, 방금 욕을….”
하하, 그럼 그렇지. 괜찮을 리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