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9
9. 0군단장 데온 하르트(7)
그리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겠다니,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오래 기다리게 해도 돼. 기왕이면 내가 죽을 때까지 쭉.
하지만 아실드는 제가 한 말은 꼭 지키는 타입이다. 이 약속을 잊는 일은 절대 없겠지. 다시 말해 언제가 됐든 내가 저 무시무시한 녀석과 검을 맞대는 순간이 반드시 오게 된다는 뜻이다.
“데몬 님?”
“아.”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뭐라 말했던 것 같은데…. 그래, 구경하러 가도 되냐고 물었었다.
무심코 나오려는 한숨을 꾹꾹 눌러 삼켰다.
이건 거절할 명분도 없다.
그래도 대련보단 나으니 그것으로라도 위안을 얻어야 하나.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의 딱딱한 얼굴 위로 희미한 웃음기가 스몄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진….”
전장에서는 미친 듯이 인간을 썰어대는 녀석이 이리도 정중하게 나오니 오히려 부담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차라리 반말을 해줬으면. 하다못해 조금이라도 뻔뻔하게 나왔으면 마음이 좀 편할 텐데.
“어, 그럼 저도 가도 될까요? 0군단의 훈련 방식은 어떨지 궁금하네요.”
아실드랑 사이도 안 좋으면서 이델리아는 왜 오려는 걸까. 아, 혹시 그건가, 염탐?
뭐 쓸 만한 정보 없나, 하고 염탐하려는 것 같은데, 이걸 어쩌나.
“오는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만….”
기대하고 있는 이델리아에겐 미안하지만 내 훈련 방식은 ‘방치’다.
말 그대로 방치해 두고 가끔씩 들러서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그게 전부인데… 아무래도 실망하지 않을까.
그래도 양심상 차마 방치 중이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나는 조용히 식기를 정리했다.
여전히 음식이 가득한 그릇들을 죄다 쟁반 위에 올린 뒤 들고 일어섰다. 그러자 진작부터 다 먹고 앉아있던 제이카르와 아실드가 덩달아 빈 그릇을 들고 일어섰다.
애초에 그릇까지 다 정리한 뒤 이쪽으로 왔던 이델리아가 내 접시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다 드신 거예요?”
“네.”
“혹시, 속이 안 좋으시다거나….”
“네, 조금.”
네놈들 때문에.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키고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자 제이카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그럼 주치의부터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
“괜찮습니다.”
아무리 벤이 착하다지만, 계속 별것도 아닌 일로 귀찮게 굴었다간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결국은 그도 ‘마족’이지 않은가.
얼굴 일부가 뱀 비늘에 덮여 있어 외형부터 스스로 마족이라 주장하는 것 같았던 그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쟁반을 사용인에게 넘겼다.
밖으로 나오자 나머지 군단장들이 우르르 내 뒤를 따라 나온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더해, 여기서 누군가의 모습이 겹치는 듯해, 나는 흠칫- 반사적으로 멈춰 섰다.
이러니까 마치….
‘내가 마왕 같잖아?’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끊이질 않던 시선이 한층 더 강렬해진 느낌이다.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식사만 하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분위기상 이대로 바로 군단으로 향해야 할 것 같아 어정쩡하게 멈춰 서서 눈치를 살피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다급히 달려왔다.
“제이카르 님!”
저건 또 뭐야. 당한 게 있다 보니 일단 경계심부터 생긴다.
적인지, 아군인지에 대한 판단은 금방 섰다.
“제이카르 님, 서류 작업이 밀렸으니 속히 와달라고 제이카르 님의 부관님이….”
아군이구나.
“……그러고 보니 책상에 서류가 쌓여 있던데, 설마 그게 전부?”
“예, 아마… 그럴 겁니다.”
무거운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짜증과 답답함을 고스란히 드러낸 제이카르가 이내 감정을 갈무리하고는 내 쪽을 돌아봤다.
“들었겠지만 오늘은 못 갈 것 같군.”
“네, 아쉽네요.”
전혀 아쉽지 않다.
희소식을 전해 준 마족에게 속으로 찬사를 보내며 새삼 처음부터 서류 작업에 선을 그어두었던 과거를 돌아보았다.
당시에는 말하면서도 목이 날아갈까 달달 떨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잘한 것 같다. 덕분에 부관에게 시달릴 일도 없고.
참고로 내 덕분에 덩달아 할 일이 없어진 부관은 지금 인간계에 나가 있다. 내가 너무 심심해했더니 새로운 퍼즐이나 큐브를 구하겠다고 나가버렸거든. 역시 마족이라 조심해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이지만, 나름 벤 못지않게 착하고 고마운 녀석이다.
“그…러고 보니 저도 아슬아슬하군요.”
옆에 서 있던 아실드가 한탄인지 신음인지 모를 말을 뱉어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탈탈 털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아무래도 구경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부탁한 주제에 정말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으니 사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선을 다해 괜찮다는 뜻을 내보이며 좋은 소식을 전해 준 마족에게 애정을 듬뿍 담은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녀석이 경비대를 마주한 좀도둑처럼 몸을 움찔한다.
딱히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애초에 군단장들을 앞에 두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이 이상한 거니까. 게다가 그들에게 서류 작업이 밀렸으니 어서 해야 한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인데, 무서울 만도 하지.
“그…그리고 이델리아 님은……응? 이델리아 님?! 이델리아 님 어디 가셨습니까?”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며 이델리아를 찾던 시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이델리아? 이델리아라면 바로 여기……응? 얘 어디 갔어?’
뭐야, 사라진 거 나만 몰랐던 거야?
아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아실드도, 제이카르도 미묘하게 감탄과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어딜 간 거래. 설마 서류 작업하기 싫다고 도망친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군단장인데.
“또 도망친 모양이군.”
“날이 갈수록 실력이 느는 것 같습니다.”
정말?!
잊고 있었다. 군단장들은 정상이 아니랬지.
시종 역시 도망쳤다는 것을 파악했는지 잔뜩 울상을 지으며, 아니 울상이라기보다는 거의 울먹이는 수준으로 상대가 누구인지도 잊은 듯 한탄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이델리아 님 부관의 얼굴을 보셨습니까. 거의 송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뿐이면 안쓰럽다고 하고 넘어갈 수 있겠는데, 문제는 지금 부관이 사직서를 내겠다고 난리를 치는 중이라….”
“……수고가 많군.”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시라도 이델리아 님을 발견하신다면….”
“꼭 잡아서 부관 앞에 던져주지.”
“예,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좀 더 찾아보려는 듯, 시종이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물러갔다.
그리고 그 모습이 시야에서 흐려질 때쯤, 제이카르와 아실드가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그럼 다음에 보지.”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예에, 서류 작업 힘내시길….”
앗, 이게 아니었나 보다.
나름 응원이라고 한 말에 둘이 짜기라도 한 듯 한숨을 내쉰다.
설마 화를 내려나 싶어 긴장했으나, 다행스럽게도 둘은 별말 없이 돌아서더니 내키지 않는 걸음을 느릿느릿 옮겼다.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군단을 찾아가… 봐야겠지.
딱히 기한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미룰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서류 작업을 끝낸 군단장들이 들러붙을지도 모른다.
모두 바쁘게 사라져버린 지금이 바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최적의 타이밍.
때문에 나는 자꾸만 방으로 향하려는 걸음을 억지로 붙잡아 0군단 전용 연무장을 향해 틀었다.
아, 가기 싫다.
***
막 점심시간이 끝났을 때라 그런지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다.
하긴, 누가 식사하고 곧바로 뛰겠어. 옆구리만 아프지.
이대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지만, 군단원 얼굴 하나 마주하지 않고 돌아가면 그건 군단을 살핀 것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때문에 난 기다릴 생각으로 거치대에서 목검을 하나 뽑아 들고 연무장 한쪽 구석에 터벅터벅 걸어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손잡이 부분이 변색된 목검을 만지작거리며 새삼 느낀다.
마계의 것이라 그런지 아니면 그냥 내가 약한 것인지, 역시 무겁다. 휘두르려 한다면 휘두를 수는 있겠지만 그건 내가 목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목검이 나를 휘두르는 게 되어버릴 것이다.
철검은커녕, 목검 하나 제어하지 못하는 저주받은 근력.
그것 때문에 처음 전쟁터에 끌려나갔을 때 이렇다 할 무기를 쥐지 못한 채 피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서야 내가 선택한 무기는 작고 가벼운 단검이었고.
“헉.”
문득 들려온 작은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 연무장 입구에 군단원으로 보이는 녀석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0군단 전용 연무장이니 아마 우리 쪽 군단원이겠지. 훈련하러 온 건가? 부지런하네.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녀석이 연무장 밖으로 후다닥 달려나갔다.
“…….”
뭐야. 돌아갈 거면 왜 왔던 거야?
아니면 설마, 내가 싫어서? 내가 싫어서 돌아갈 때까지 아무도 오지 말자고 공모하려는 건가?
“하아.”
그래, 한낱 인간이 어딜 감히 군단장 노릇을 하겠다고.
돌아가자. 난 할 만큼 했어.
사실 할 만큼 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내 양심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외치고 있으니 됐겠지.
목검을 돌려놓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 걸음을 떼는데, 땅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처음에는 기분 탓이려니 했으나….
두두두두두두두.
저 멀리, 먼지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미친, 저거 뭐야. 마물인가? 마왕성에 마물도 있었나?’
아, 먼지구름 사이로 사람과 닮은 형상이 드러난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저놈들, 군단원들이구나. 그것도 우리 쪽.
“…….”
도망가자.
뭔진 모르겠지만 느낌이 안 좋아. 군단을 살피는 건 나중으로 미뤄도 되겠지. 아니, 이 정도면 반드시 미뤄야 한다고 하늘이 계시를 주는 수준이다.
내가 주춤주춤 물러서는 사이, 그새 코앞까지 다가온 녀석들이 오와 열을 맞춰 섰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각이 잡힌 행동이었다.
“…….”
“…….”
드넓은 연무장에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조용한 공간과 달리 내 머릿속은 한창 복잡해져 있었다.
이건 뭐지. 군단장 대우를 해줬으니 빨리 꺼지라는 뜻인가. 언제 돌아가지? 지금 돌아가야 하나? 저 눈빛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지금 가야 할 것 같다.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보인 뒤 막 돌아서려는데, 저들 중 대표로 보이는 이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저, 데몬 님.”
“네?”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건지….”
왜 내게는 저 말이 ‘할 일도 없으면서 왜 왔냐’는 말로 들리는 걸까.
하지만 내 해석이 맞다 해도 딱히 틀린 말이 아니라 뭐라 할 수도 없다.
불안함을 이기지 못한 손이 멋대로 움직이려 한다. 옷깃을 움켜쥐려 하는데, 그럴 바엔 차라리 목검을 만지는 게 보기에 훨씬 낫겠지.
나는 목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궁금해서요.”
우리 군단원들의 실력이.
올 때마다 거의 늘 훈련만 하고 있었으니 평균 이상은 할 거라 믿고 있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한 번쯤은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
뭐, 저 태도를 보아하니 무슨 사건이 있지 않은 한 직접 보는 일은 요원하겠지만.
빨리 돌아가라는 무언의 압박에 못 이겨 목검을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 목검 거치대로 향했다.
최대한 떠는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려 했는데, 너무 긴장한 모양이다.
발과 발이 꼬여버렸다!
오늘도 부실한 하체가 제 몫을 톡톡히 해내는구나!
‘너, 넘어진다!’
이대로 넘어지면 개쪽이다. 단순히 개쪽에서만 끝나면 다행이지.
그렇지 않아도 인간이랍시고 날 보는 시선이 좋지 않은데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는 소문이 들려봐라.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다.
넘어지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중심을 잡기 위해 한 발을 크게 내디뎠다.
이어서 상체를 낮추며 안정된 자세를 잡…기가 무섭게, 머리 위로 무언가 지나갔다!
“데몬 님!!”
뭔가 싶어 살짝 고개를 들자 눈앞에 무언가 살랑살랑 떨어진다.
마치 하얀 털 같은… 이건 내 머리카락이잖아?
기겁하며 상체를 세우는 동시에 몸을 뒤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팔꿈치에 무언가 둔탁한 것이 부딪혔다.
그리고 이어진 신음.
“커헉!”
“……?“
뒤늦게 시야가 완전히 확보되었을 때, 상대는 이미 명치를 부여잡고 허리를 숙인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친숙한 외모에 내 눈이 커졌다.
“인간?”
꼬리도 없고, 뿔도 없고, 비늘도 없다. 어느 한구석은 인간과 다른 부분이 있는 마족들과 달리 이 녀석은 아무리 봐도 인간처럼 생겼다.
인간이 어떻게 마왕성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잠시, 그가 들고 있는 검이 눈에 들어왔다.
침입자구나. 설마 내 팔꿈치에 부딪혔던 게 이 녀석 명치인 건가?
운이 좋았다. 자칫했으면 역으로 내가 당했으리라.
놀란 가슴을 다독인 뒤, 두 손으로 목검을 쥐고 들어 올렸다.
인간이든 뭐든 그가 침입자이고 나를 공격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때문에 내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오히려 이대로 두었다간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체중까지 실어 있는 힘껏 목검을 내리쳤다.
빠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