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96
96. 때가 되었다(1)
언제 도착했는지, 벌써 마왕성 성문이 코앞에 있었다.
드디어 해방이다…! 귀에서 피 나는 줄 알았네.
“데몬 님, 귀에서 피가…?!”
뭐야, 진짜 피 나고 있었어?
손가락으로 귓가를 스치듯 닦아 내자 피가 묻어난다.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벤이 걱정스럽게 나를 불렀다.
“내성까지 들어가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치료를 위해서라도 일단 마차에 타셔야겠습니다.”
“어, 그럼 저도!”
“…….”
내가 할 말을 잃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잠시나마 바깥바람을 쐬기 위해 내렸던 것이 무색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마차에 타야 했지만, 긍정적인 의미로도 부정적인 의미로도 내 기분이 특별히 바뀌는 일은 없었다.
밖에서도 옆에 붙어 종알거리던 5군단장이 마차 안으로도 따라왔거든. 장소만 바뀌었지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마차 안에는 나와 나를 진찰하기 위해 들어온 벤, 기어이 수다를 떨겠다고 쫓아 들어온 오엘과 그녀의 부관 데르니반이 앉아 있었다. 마차 자체가 매우 넓어 딱히 꽉 찬다든가 하는 느낌은 없지만 문제는 내 고막이다.
“있죠. 데몬 님, 인간들은 직접 배 속에서부터 아이를 만들어 낳는다고 들었어요. 이게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면 일정 확률로 가능한 거라 들었는데….”
“…….”
“…그렇게 만들어진 아이는 ‘축복’이래요. 저도 축복을 가져 보고 싶어서 데르니반에게….”
말이 안 끝나!
벤에게서 진찰 및 수습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또다시 귀에서 피가 흐를 징조가 보인다.
고막의 빠른 해방을 위해서라도 어서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데, 이게 웬걸?
우두둑.
“……!?”
마차가 멈추긴 했는데, 문이 열리는 대신 뜯겨 나갔다!
그리고 열린, 아니 뜯긴 입구로 웬 집채만 한 맹수가 뛰어 들어왔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쳐들어온 맹수는 다행히 나를 노리진 않았으나, 삽시간에 데르니반을 덮쳤고….
“……?!”
“이게 무슨 짓입니까, 9군단장 님.”
“대련하자!”
아, 맹수가 아니었구나. 잔상만 보여서 착각했다.
지금 마차에 뛰어든 이는 9군단장 트로버. 본인이 주장하길 ‘마법’이 주특기라지만, 실상은 육체를 극한으로 단련하여 사용하는 체술을 ‘마법’이라 주장하는… 아주 괴랄한 군단장이다.
‘……시발.’
나는 슬금슬금 마차 구석으로 몸을 물렸다.
다행히 트로버는 내 존재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아무렇지 않게 그의 주먹을 막아 낸 데르니반이 표정만큼이나 건조한 목소리로 말하기 전까지는.
“0군단장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행동을 삼가 주십시오.”
“아?”
맹수… 아니 9군단장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 순간 나는 그의 두 눈이 먹잇감을 발견한 짐승처럼 빛나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아니, 잠깐만… 왜 굳이 날 걸고넘어지는….
“실례했습니다, 데몬 님. 역시 훌륭한 은신이군요. 존재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네? 아니, 딱히 은신을 한 적이….”
은신이라면 역시 2군단장이지.
5군단과 합류한 이후부터 오엘의 질문 공세에 괜히 휘말리고 싶지 않은지 홀로 마차 지붕에 앉아 있던 드벨라니아를 떠올리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배신자 녀석.
‘그러고 보니 트로버가 들어오기 전에 드벨라니아부터 봤을 텐데, 왜 걔는 안 건드리고 바로 안으로 들어온 거지?’
내 의문을 콕 짚어 주듯 때마침 트로버가 마차 내부를 기웃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밖에 배치된 병력 중에 2군단도 보이던데, 2군단장은 안 따라왔습니까?”
“……마차 지붕에 없었습니까?”
“예? 예.”
“…….”
“……?”
이 나아쁜… 나만 두고 어디로 튄 거야?
속으로 드벨라니아를 향해 온갖 욕을 뱉고 있는데, 마차 창틈으로 웬 쪽지가 스르륵 들어와 내 무릎 위에 안착했다.
[데몬 님, 전 갑자기 일이 생겨서 먼저 가 볼게요. 끝까지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시발, 세상에….”
진짜로 튀었어!
쪽지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조용히 경악하는데, 어째서인지 트로버가 주춤주춤 물러선다. 그러더니 조용히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먼 거리 이동을 하시느라 몸이 찌뿌둥하셨을 것 같아 대련을 신청하려 했는데, 역시 안 되겠지요….”
바빠 보이시고, 또 기분도 안 좋아 보이시고….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그보다 나는 앞서 들은 충격적인 내용에 집중했다.
대련? 대려언? 그것도 나랑?
“그야 당연히 안…!”
황급히 말을 멈췄다.
하마터면 생각 없이 떠오른 말을 입 밖에 낼 뻔했다. 이곳이 마계인 만큼 말을 하기 전에는 한번 검토를 해야 하는데, 조금 놀라서 흥분했어.
검고 손톱이 삐죽빼죽하여 흉악하기 그지없는 트로버의 왼손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조용히 입을 다물자 옆에서 내 기색을 살피던 주치의 벤이 나를 대변하듯 나섰다.
“대답할 가치도 없군요.”
아니, 잠깐.
“먼 거리 이동을 했으면 대련 이전에 상대가 피곤해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모든 마족들이 9군단장님처럼 괴물 같은 체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 데몬 님은 인간이시지만!”
“인간은 마족과 달라? 어떻게 다른데?”
“신체적으로는 인간이 더 약합니다. 물론 우리 데몬 님은 특별하지만!”
“데몬 님은 어떻게 특별한데?”
“오엘 님, 그 질문은 여기서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의미도 목적도 모를 환장할 만한 대화가 오간다.
그사이 잠시 입을 다물고 무언가 진지하게 고민하던 트로버가 고개를 치켜들고 벤을 보았다.
“그럼… 내일 대련하자 청하면 되는 건가?”
“여독을 완벽히 풀기 위해서는 일주일은 푹 쉬어야 할 겁니다. 특히 후유증이 남은 데몬 님의 신체 특성상….”
“좋아, 일주일!”
“…….”
왜 내 대련 일정이 멋대로 잡히는 거지…?
당장 거절해야 함이 옳지만, 거절 의사를 표했다간 더한 사태가 벌어질 것 같다고 내 감이 경고하고 있다.
‘괜히 거절했다가 괜한 오해가 겹쳐 일이 이상하게 흘러갈지도 몰라. 늘 그랬으니까.’
할 말을 잃고 거절도 못 한 채 입을 다문 날 뒤로 하고 트로버가 다시 데르니반을 향해 몸을 돌렸다. 데르니반은 시종일관 표정 없는 얼굴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너는 괜찮겠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제 특기는 체술이 아닌 활입니다.”
“그래도 잘만 대련했잖아. 거절할 거야?”
거절하면 무슨 짓을 벌일 것만 같은 표정으로 묻다니.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데르니반도 트로버의 표정에서 그 점을 읽어 낸 듯 잠시 침묵하더니 힐긋 오엘을 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대련하겠습니다.”
“그럼….”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안 됩니다.”
당장이라도 데르니반을 어디론가 끌고 가려던 트로버가 멈칫했다.
돌아보는 얼굴에서 불만이 고스란히 비친다. 군단장의 분노가 두렵지도 않은지 데르니반은 일말의 동요 없이 제 할 말을 늘어놓았다.
“오엘 님께서 챙겨 오신 잡동사니도 정리해야 하고, 몇 차례 전투를 치른 5군단 뒷정리도 해야 합니다.”
“잡동사니라니! 언젠간 쓸모가 있을지도 몰라!”
“아무튼 말입니다.”
“그럼 언제 가능한데? 너도 일주일?”
“일주일을 불러도 기다려 주시지 않을 것을 압니다.”
겉옷을 벗어 마차 한쪽에 얌전히 개어놓은 데르니반이 답답할 정도로 끝까지 채워진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 내리며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두 시간만 기다려 주십시오.”
…….
2군단과 5군단은 각기 해산했다. 맡은 바 임무를 다한 벤은 제 방으로 돌아갔고, 출발 전 통신석으로 마왕에게 보고를 전부 끝냈던 나는 굳이 그를 만나러 갈 일도 없이 곧장 내 방에 처박혔다.
……처박혀 있으려 했다.
“자, 심판은 데몬 님께서 보시는 겁니다.”
“…….”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마련된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조용히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내가 트로버와 데르니반의 대련의 심판으로 이곳에 있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저 둘이 전부가 아니잖아. 왜 다들 이곳에 모여 있냐고.
“누가 이길까요?”
“글쎄, 보통은 군단장인 트로버의 승리를 점쳤겠지만… 알다시피 저 둘은 상황이 좀 달라서.”
“하긴, 비어 있는 9군단장의 자리를 제의받았던 건 트로버보다 데르니반이 먼저였으니….”
“보통은 군단장 제의가 다음으로 넘어갈 일도 없이 다들 덥석덥석 받았을 텐데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거절을 많이 했지, 아마?”
“그렇죠. 가장 먼저 제의를 받았던 건 0군단장님의 부관 에드였고, 그다음이 데르니반, 그러고도 거절당하자 트로버에게 넘어갔죠.”
“에드는 그렇다 치고, 데르니반은 왜 거절한 거지?”
11군단장 리리넬, 3군단장 아실드, 2군단장 드벨라니아, 4군단장 이델리아와 1군단장 제이카르.
지금 장난해? 마왕성에 상주하는 거의 모든 군단장들이 이곳에 모여 있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렇게 할 일들이 없나.
‘게다가 드벨라니아는 바쁘다고 도망갈 땐 언제고….’
슬그머니 연무장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마족을 슬쩍 째려봤다.
심장 쫄려서 못 있겠다. 그 와중에 제이카르가 ‘에드는 그렇다 치고’를 말하며 나를 쳐다봤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쪽팔리게 대놓고 흠칫하는 일은 없었지만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다행히 그의 시선이 내게 오래 머무는 일은 없었다. 한껏 신이 난 기색의 리리넬이 곧장 대답을 해 왔으니까.
“앗, 아직도 모르고 있었어요? 오엘이랑 데르니반이랑 연인 사이잖아요.”
“……데르니반이 연애를 한다고?”
그것도 오엘이랑?
미처 뱉지 못한 뒷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의미 없는 되물음에 리리넬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을 뿐.
그곳에는 데르니반에게 다가가는 오엘이 있었다.
“인간계의 연애 소설을 읽어 봤는데, 대련에 나가는 기사는 여주인공에게 승리를 바치겠다고 하더라.”
“그렇습니까.”
“응. 그러니까 데르니반, 이겨서 내게 승리를 바쳐.”
“알겠습니다.”
“그래, 이건 미리 주는 보답.”
오엘이 데르니반의 목에 팔을 두르며 뒤꿈치를 든다. 제게 매달리다시피 기대 오는 그녀를 데르니반이 허리를 잡아 단단히 받쳐 주고, 이내 두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진다.
노골적인 마찰음이 울렸다.
-쪽.
그 장면을 본 군단장들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매사에 무심한 데르니반과 자신만의 세상에 갇힌 오엘은 저들만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때, 데르니반? 심장이 뛰는 것 같아?”
“제 심장은 원래부터 뛰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좀 더 특별하게 뛰거나 그러는 건?”
“평소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 그럼 곤란한데. 심장이 뛰어야 사랑이랬는데. 그래야 아기를 가진다고….”
기어이 나름의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제이카르의 얼굴마저 무너졌다.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일그러진 표정을 한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드벨라니아가 멀찍이서 바닥을 구르며 웃고 있을 때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저 둘은… 마족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나?”
“오엘은 그렇다 쳐도 데르니반은 알고 있을걸요. 뻔하죠. 데르니반이 오엘의 장단을 맞춰 주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설마 그 장단을 맞춰 준다는 게 ‘사랑’까지 가능할 줄은 몰랐지만.”
이델리아가 접은 부채로 입가를 툭툭 두드리며 답했다.
마족은 마왕의 힘에서 탄생한다.
제아무리 저 둘이 인간들처럼 사랑을 하고 몸을 섞어도 그들 사이에서 마족 아이가 태어나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좋으니 빨리 시작했으면.’
내가 왜 이곳에 앉아서 저 둘의 연애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저 꼴을 더 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다. 질투 나서? 아니, 니글거려서.
오엘과 데르니반의 두 눈 뜨고 보기 힘든 기행은 기다리던 트로버가 시작 안 하냐며 버럭 소리치고 나서야 그칠 수 있었다.
간신히 정리된 상황 속에서 데르니반과 트로버가 마주 서고, 언제 소란스러웠냐는 듯 장내가 조용해진다.
그 속에서 나는 날 향한 수많은 시선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내가 심판이니 말을 꺼내야 한다는 건 아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인간계의 대련과 마계의 대련은 규칙이 같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