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Only a Stepmother, but My Daughter is Just so Cute! RAW novel - Chapter 19
외전 2. 용이 지켜보는 곳
* * *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소금기가 섞인 바람에 여름 햇살이 어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테라스에 서서 동부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방문하는 동부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이 푸르른 바다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베르, 바다야! 바다!”
“바바!”
블랑슈가 이베르를 품에 안은 채 바다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베르는 열심히 옹알거리며 블랑슈의 말을 따라 하고 있었다.
두 아이가 사이좋게 바다 구경하는 걸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엄마 미소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크으, 그림일세. 그림이야. 아이를 낳았던 친구들이 그렇게 애들을 자랑하던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내 눈에 담으려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흠. 예쁘긴 하지만 이베르도 무럭무럭 자라 블랑슈가 들기엔 무거울 것 같은데.
“블랑슈, 이베르가 무겁지 않아요? 자, 이베르. 엄마에게 오렴.”
“마아!”
나는 가만히 이베르를 안아 들었다. 이베르는 조금 당황해서 나와 블랑슈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누나한테도 가고 싶고, 엄마한테도 가고 싶은데 이걸 어쩌나 하는 표정.
결국 내게 안긴 채, 블랑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정말이지 누나 껌딱지라니까.
이베르는 킁킁거리며 바람 냄새를 맡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네. 블랑슈가 이베르의 손을 잡은 채 흐뭇하게 말했다.
“이베르, 이제 곧 바다로 갈 거야. 신나지?”
“아앙.”
우리의 흥분이 이베르에게도 전달된 것일까?
이베르는 그 말을 이해한다는 듯이 방긋 미소 지었다. 블랑슈만큼이나 나도 잔뜩 들뜬 상태였다.
이번에 동부를 방문한 것은 단순한 휴양 때문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동부’가 아니라 ‘바다’를 보러 왔다.
“해저에 있는 왕국이라니. 너무 기대돼요.”
블랑슈의 두 눈은 바다를 옮겨 담은 것만 같았다. 기대감이 수면에 비친 물비늘처럼 반짝였다.
그랬다! 우리는 인어들의 왕국, 아틀란시아로 초청을 받았다.
바다 아래에 있는 인어 왕국은 역사 속에서 전설로나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실제로 가볼 수 있다니. 인간 방문자를 수백 년간 받아들이지 않던 곳이라 초청장이 왔을 때, 온 궁이 술렁였지.
“릴리, 여기 계셨습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뒤에서 세이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응접실로 온 그가 다급히 이베르를 받아갔다.
“무거울 텐데 저를 부르시지 않고.”
“별로 무겁지도 않은걸요.”
“그래도 안 됩니다.”
애를 낳은 지 반년이 넘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내 몸 상태를 우려하곤 했다.
사실 애가 좀 묵직하긴 했어. 세이블이 워낙 가볍게 들고 있긴 하지만. 이베르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옷 냄새를 맡았다.
“아바마마가 와서 좋은가 봐요!”
“음. 그런 거면 좋겠구나.”
블랑슈의 말에 세이블은 조금 부끄러운 기색이었다.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크으, 블랑슈랑 이베르가 있을 때도 그림이었는데 이렇게 셋이 모여 있으니 정말 눈이 호강한다.
누구 집 딸이, 누구 집 남편이, 누구 집 아들이 저렇게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나!
잠시 세이블의 자태를 감상하고 있는 사이, 베리테와 인어가 뒤를 따라 들어왔다. 인어는 우리를 향해 가볍게 조아렸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워낙 많은 인원이 이동을 할 예정이라 준비에 조금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베론 마마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곧 이동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게 다 내가 유능한 탓이지.”
베리테는 양 허리에 손을 올리고 엣헴 잘난 척을 했다.
누구네 사위가 이렇게 귀엽지요? 백합이 사위요!
“베리, 고생 많았어.”
“아니야. 우리 여보야를 위한 일인데 당연히 해야지.”
블랑슈에게 칭찬을 받자 베리테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 사이, 하인 한 명이 쟁반을 들고 왔다.
거기에는 유리병들이 놓여 있었다. 그는 정중한 어조로 설명을 덧붙였다.
“마법약입니다. 드시게 되면 물속에서도 편하게 호흡이 가능하고 움직이기도 수월하실 겁니다.”
병 속에 든 것은 물빛의 약이었다. 블랑슈가 잠시 고민하는 눈치가 되어 물었다.
“어린 이베르가 먹어도 아무 문제 없나요?”
“내가 다 확인해뒀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베리테가 씩 웃고는 마법 약을 삼켰다. 그리고는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양팔을 벌려보았다. 외형적으로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우리 가족이 마실 약인데, 꼼꼼하게 체크 했지.”
정말이지 그 어떤 사람의 말보다도 믿음직스러웠다. 나도 내심 이베르를 두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베리테의 보장을 받았으니 걱정이 없다. 나디아랑 카린에게도 이베르를 소개해 주고 싶고! 아이를 낳은 뒤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마법약을 나눠마신 뒤, 베리테가 설치한 거울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그 순간 상쾌한 바람 같은 것이 내 얼굴을 감쌌다. 아니, 바람이 아니라 물보라였다.
부드러운 물살이 내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흔들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온 세상은 파랑이 되어 있었다. 물속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무척이나 투명하고 아름다웠다.
그 물빛 세상 사이로 새하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오래된 신전 같은 고풍스러운 궁전.
발아래 부드럽게 밟히는 수초가 마치 카펫 같았다. 그리고 풍경만큼이나 놀라운 건 내 몸의 감각이었다.
“숨을 쉬는 게 편하군요.”
세이블이 신기하다는 듯이 제 목을 더듬으며 말했다. 목소리 역시 또렷하게 전달이 되고, 수압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영을 잘 못 했는데 이렇게 편하게 움직일 수 있다니. 하늘을 나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을 정도였다.
내 몸에 일어난 변화에 놀라워하던 중, 궁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짧은 금색 머리카락이 햇살처럼 반짝였다.
카린이었다. 그녀는 지상에서보다 이곳에서 더욱 자유로워 보였다. 그녀가 우리에게 다가와 깍듯한 태도로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블랑슈 폐하. 오베론 황후 마마, 선왕 전하, 선왕비 마마께도 인사 올립니다.”
예전에는 언제나 삐죽삐죽 성이 나 있었는데,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카린은 그저 노련한 외교관일 뿐이었다.
다 컸네, 다 컸어. 벅찬 마음으로 카린을 보고 있는데, 그녀가 나를 보고는 살짝 웃었다가 표정을 굳혔다.
“우선 안으로 오세요. 응접실로 안내해드릴게요.”
우리는 카린의 안내를 받아 궁 안으로 들어섰다. 계단이 없이 천장이 확 트여 있는 독특한 구조였다.
응접실로 들어선 뒤, 카린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시중을 들 사람들을 불러오겠습니다. 저는 나가 있을 테니, 편하게 있으세요.”
“가려고요?”
오랜만에 봤는데 이렇게 가다니. 어떻게 지냈는지 근황도 못 들었는데…….
카린이 움찔하는 기색이 되었다가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여기 있어도 되냐는 듯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블랑슈와 세이블이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그녀는 후다닥 달려와 내게 안겼다.
“왕비님, 보고 싶었어요! 왕자님도 낳으셨다면서요. 바로 찾아 뵙고 싶었는데……!”
카린이 허둥지둥 말을 쏟아냈다. 아까는 공적인 자리라 티를 못 낸 모양이었다.
아이구, 귀엽기도 하지. 나는 반가움을 온몸으로 표출하는 카린을 듬뿍 쓰다듬었다.
“나야 잘 지냈죠. 맞아, 카린이 지난번에 갖고 싶어 하던 옷 만들어 왔어요.”
“왕비님이 최고세요! 여기 옷도 좋지만 가끔은 인간의 옷이 그립거든요.”
그녀의 눈웃음에서 희미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그러다 카린과 세이블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고개를 조아렸다.
“선왕 전하, 이렇게 뵈어 무척 기쁩니다. 또한 이베르 왕자님의 탄생을 경하드립니다.”
한때 맹렬하게 구애를 하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돈된 목소리였다. 세이블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린 외교관, 먼 타지에서 고생이 많군.”
“당연히 제가 할 일입니다.”
카린과 세이블이 이토록 편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줄이야. 세이블은 자세를 틀어 품에 안은 이베르를 보여 주었다.
“이쪽은 알고 있겠지만 이베르일세.”
“아앙!”
“왕자님이시군요. 처음 뵙겠어요.”
이베르는 카린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그 모습을 본 카린은 어딘가 모르게 묘한 눈빛이 되었다.
흠? 왜 그러는 거지? 그 눈빛의 연유를 몰라 잠시 어리둥절하고 있던 사이, 카린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음, 사실…… 미리 보고 드리지 못한 것이 있어요.”
“보고? 무슨 일인지 말해보게.”
나도 그 옆에 서서 카린의 보고를 기다리는 사이, 무언가가 다가오는 듯 물살이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아비게일!”
그리고 경쾌한 목소리가 물보라를 타고 퍼져나갔다. 나디아가 붉은 망토를 흩날리며 응접실에 해일처럼 들어섰다.
그녀는 마치 돌고래처럼 우리의 주위를 빙글 돌았다. 나디아의 하체는 물고기의 꼬리인 상태였다.
나디아가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마치 강아지가 꼬리를 치는 것처럼 꼬리지느러미가 살랑대는 것이 보였다.
“아비게일, 어서와! 블랑슈도! 나머지도 안녕!”
그 말에 카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후다닥 나디아의 옆구리를 찌르곤 으름장을 놓았다.
“나디아 전하, 나머지라뇨. 예의를 지키세요.”
“세이블리안 선왕, 오베론 황후. 아틀란시아에 온 것을 환영하오.”
정말 빠른 태세 전환이다. 카린이 참 잘 길들였군. 이 나라의 미래가 밝아 보인다.
그렇게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와중, 한 아이가 나디아의 뒤를 따라 들어 왔다.
이베르만큼이나 작은 아이였다. 인어라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태어난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붉은 머리카락인 걸 보니 인어 왕족인가? 그러고 보니 뭔가가 조금 달랐다.
귀부분이나 목에 난 아가미 부분은 같은데, 아이에게는 물고기의 꼬리가 없었다. 나는 의아해져서 물었다.
“나디아, 뒤에 있는 애는 누구예요?”
“아, 힐드 말이지?”
그녀는 헤엄을 치며 돌아다니는 힐드를 끌고 와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랑 카린 딸이야!”
“……딸이요?”
“응!”
나디아가 너무도 태연해서 도리어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는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물었다.
“입양했나요?”
“아니? 친딸인데.”
“어떻게 낳은 거죠?”
그러자 나디아가 기세등등하게 코를 쓱 매만졌다. 그녀가 우쭐한 얼굴로 말했다.
“훗, 내가 힘 좀 썼지. 어떻게 했는지 듣고 싶…… 크억!”
얼굴이 새빨개진 카린이 거세게 나디아의 등짝을 갈겼다. 철썩철썩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조용히 해요! 이 사람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미안! 미안해, 카린! 한 번만 봐줘!”
한 나라의 왕이 무력하게 무너졌다. 역시 이 나라의 미래가 밝군. 카린이 씩씩대다가 헛기침을 했다.
“크, 크흠. 원래 인어들은 성별에 크게 상관없이 애를 낳을 수 있습니다. 혼혈도 해당이 되더라고요.”
“그, 그렇구나…….”
요정도 꽃밭에서 태어난다고 하니 그럴 수도 있지. 블랑슈와 세이블도 납득한 것 같았다.
“이름은 힐드야. 군힐드 언니 이름에서 따왔어. 힐드, 저기 아비게일 언니한테 가봐.”
“응!”
힐드는 나디아의 품을 벗어나 쪼르르 내 쪽으로 헤엄쳐 왔다. 그리고는 해맑은 얼굴로 헤실 웃었다.
크윽, 귀여워!
힐드가 몸을 한 바퀴 틀자 부드럽게 물거품이 일었다.
그렇게 내 주위를 헤엄치던 힐드가 잠시 멈춰 서더니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세이블 쪽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품에 안긴 이베르를 보고 있었다.
힐드가 이베르 쪽으로 으쌰으쌰 헤엄쳐서 다가간 뒤, 초록빛 눈을 빛내며 방긋 웃었다.
“나, 힐드!”
이베르는 그 모습을 보고 조금 겁을 먹은 기색이었다. 세이블의 옷을 꼭 잡고 얼굴을 숨겼다.
“음. 이 아이의 이름은 이베르란다. 이베르.”
세이블은 조용조용 이베르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힐드는 이베르를 빤히 바라보다가 꼬물꼬물 세이블의 품으로 들어갔다.
얼떨결에 두 아이를 품에 안은 세이블은 당황한 눈치였다. 그런데 좀…… 귀엽다?
양손으로 아이를 안고도 그는 무거운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저 새끼 고양이나 강아지를 처음 본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뿐.
“음. 이 아이가 왜 날 따르는지 모르겠군.”
아이 한 명만 안고 있어도 귀여웠는데 둘을 안고 있으니 더욱 귀엽군.
이 기회에 셋째를 만들어볼까.
그런 고민을 하던 사이, 어느새 이베르와 힐드는 사이 좋게 놀고 있었다. 나디아가 흐뭇하게 말했다.
“이거, 사돈이 될 수도 있겠네!”
“그건 안 돼요, 나디아 님. 제가 블랑슈 폐하의 이모니까요.”
아, 그렇네! 힐드가 우리 조카이기도 한 셈이구나.
새삼 네르겐의 위엄을 깨달았다. 요정 왕국, 인어 왕국 양쪽 모두 혈연으로 이어지다니.
조카라는 사실을 깨닫자 힐드가 좀 더 귀여워 보이는 것도 같네. 블랑슈가 힐드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내밀었다.
“안녕, 힐드. 나는 블랑슈야. 너와 나도 형제네.”
힐드가 까르륵 웃으며 블랑슈의 손을 잡았다. 흐뭇하게 내려다보는 세이블을 향해 블랑슈가 웃어 보였다.
“아바마마, 저에게 동생이 두 명이나 생겼어요!”
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역시 셋째를 낳아야 할 것 같네.
세이블이랑 시선이 순간 마주쳤다. 왠지 그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와 나 사이의 뜨거운 신호가 오가던 중. 블랑슈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카린을 향해 물었다.
“아, 힐드에게 인어 꼬리가 없는 건 혼혈이라서 그런가요?”
“네, 맞아요. 혼혈인 아이가 오랜만에 태어나 문헌에서 간신히 찾아봤어요.”
어, 그러고 보니 나디아와 카린의 결혼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아이가 생겼으니 하려나? 나는 나디아를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두 사람 결혼은 아직이죠?”
“응. 카린한테 계속 결혼하자고는 하는데…….”
나디아가 카린을 힐끗 보더니 조심조심 다가갔다. 그리고는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손을 끌어당겼다.
그녀는 손등에 입을 맞춘 뒤, 그윽하게 카린을 바라보았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진지한 얼굴이었다.
“카린,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어?”
“외교관 은퇴하고요.”
아! 냉정한 거절이었다. 나디아는 말라버린 미역 같은 꼴이 되어 훌쩍거렸다.
“지금 531번째 차였어!”
“어머, 그랬어요?”
나디아와 달리 카린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531번이나 프로포즈라니.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굉장하다.
그렇게 나디아가 실연의 슬픔을 삼키던 중. 한 인어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왔다. 무척이나 다급해 보였다.
“나디아 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신하가 들어오자 나디아는 황급히 표정을 바꾸었다. 그리고는 제법 근엄한, 왕 같은 얼굴로 물었다.
“보고하라. 혹시 그 건인가?”
“예. 죄송합니다.”
“……귀찮게 되었군.”
그 건? 그 건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보고를 듣는 나디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갔다.
으음. 왠지 심각한 일 같은데. 블랑슈가 그 모습을 살피다 입을 열었다.
“나디아 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게…….”
나디아는 신하를 물린 뒤 블랑슈를 마주 보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가라앉고 물이 조금 서늘해진 것 같았다.
방금까지는 친구끼리의 만남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왕들의 대화였다. 나디아가 냉철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이번에 아틀란시아로 초대한 이유는 알고 있지?”
“네. 중립 지대 건 아닌가요?”
몇 년 전, 인간과 인어가 함께 살 수 있는 중립 지대를 만들고자 하는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블랑슈와 베리테가 결혼하며 중립 지대 건설에 요정도 협력하게 되었다.
모두를 받아들인다는 게 중립 지대의 규칙. 이제는 종족 구분 없이 머물 수 있는 도시가 되었다고 들었다.
어느 정도 도시로서 안정기에 들어서자, 아틀란시아 측에서는 중립 지대를 보여 주기 위해 우리를 초청했다.
“중립 지대는 잘 조성이 되어서 별 탈 없이……. 아니, 탈이 생겼군.”
“탈이라면요?”
“중립 지대에 여러 종족이 모여들자, 자연스럽게 무역업이 성행하게 되었어.
동방에서도 찾아오는 상인이 늘었고. 그래서 이 근방에 등대를 건설하려 했는데…….”
그때 나는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 마치 지진, 아니면 해일 같은 감각. 그와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꼬맹이 왔냐!”
우렁우렁한 목소리와 함께 군힐드가 들이닥쳤다. 우와, 오랜만에 보지만 변함없이 자연재해 같은 사람이다!
그녀는 폭풍처럼 들이닥쳐 블랑슈를 번쩍 들어 올렸다. 군힐드는 오랜만에 조카를 보는 사람처럼 싱글싱글 웃는 낯이었다.
“꼬맹이는 하나도 안 자랐네!”
“구, 군힐드 님. 괜찮으세요?”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군힐드와 달리 블랑슈는 경악하고 있었다. 나 역시 군힐드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왜 이렇게 많이 다쳤어? 온몸을 붕대로 꽁꽁 싸매고 있었고, 그 외에도 최근에 생긴 붉은 상처가 가득했다.
누가 봐도 중상인데 저렇게 움직여도 되는 건가? 군힐드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었다.
“아, 좀 다쳤어. 괜찮아.”
“조금이 아닌데요!”
그 와중에 태평한 것은 나디아 정도였다. 나디아는 심드렁하게 군힐드에게 말을 걸었다.
“언니, 그 꼬맹이는 인간 제국의 황제 폐하야. 내려드려.”
“예, 예. 명대로 하죠.”
군힐드는 다소 비꼬는 듯한 말투로 답하더니 블랑슈를 내려놓았다. 블랑슈는 여전히 놀란 얼굴이었다.
“어, 어쩌다 그렇게 다치셨나요?”
“그게…….”
군힐드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보기 드물게 망설이다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용이랑 싸우다 좀 다쳤어.”
용? 지금 용이라고 했지?
용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군힐드가 말하는 용이 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하는 가상의 동물은 아닐 터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디아가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뭐, 아까 말했던 문제가 이거야. 등대 건설 중에 문제가 생겼어. 블랑슈, 혹시 용에 대해 알고 있어?”
“동양의 이종족인 용을 말하는 건가요?”
“맞아. 보통은 동양에서 지내고 서쪽까지는 잘 오지 않는데, 이 근처에 둥지를 틀었더군.”
군힐드의 저 상처도 용에게 당한 건가? 그 강한 군힐드가 저렇게 큰 부상을 입을 정도라니. 어쩐지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나디아는 입술을 짓씹고는 우울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 갔다.
“영생을 산다고 할 정도로 수명이 길고, 강하지만 무리 지어 살지는 않는 종족이라 평생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공격적인 종족은 아니라고 들었어요. 어쩌다 싸움이 일어난 건가요?”
블랑슈의 물음에 나디아는 울적한 어조로 말했다.
“아마도 용의 둥지 근처에 접근한 게 문제였던 것 같아. 등대를 지으려는 섬이 둥지 근처였거든.”
격노한 용이 바다를 날뛰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나디아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 탓에 일단 등대 건설은 중지됐어. 힐드 언니가 싸워보긴 했는데 저렇게 됐지.”
나디아 옆에 선 군힐드는 팔짱을 낀 채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아프다기보다는 자존심이 상한 탓인 것 같았다.
“젠장. 다시 붙으면 내가 이길 텐데. 그땐 기습이었다고.”
“용을 어떻게 이기겠어? 개체로만 따지면 이종족 중에서는 가장 강력한데.”
베리테가 지적하자 군힐드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그녀가 눈을 부릅뜬 채 목소리를 키웠다.
“용에게는 역린이 있다. 그 급소를 찌르기만 하면 내 승리야. 용의 둥지에 결계만 처져 있지 않았다면, 당장 가서 죽였을……!”
“힐드! 착하지! 진정해!”
그때, 나디아가 갑자기 힐드를 붙들고 소리쳤다. 가만히 있던 힐드는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힐드는 착한 아이! 힐드 얌전히 있자!”
“너 자꾸 딸한테 말 거는 척하면서 지적할래?”
“난 힐드한테 말한 거야. 힐드 언니는 무시해도 돼!”
그 말에 군힐드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저걸 동생이라고’하는 눈으로 나디아를 잠시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군힐드의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은 것 같았다. 블랑슈가 눈치를 보다 말을 건넸다.
“다른 섬에 등대를 세우면 안 되는 건가요?”
“할 수는 있는데……. 등대 건설보다 다른 게 문제야. 용이 날씨를 조종해서 방해하고 있어.”
“날씨요? 오늘은 화창하던데요.”
“얼마 전까지는 태풍이라 어업이랑 무역에 문제가 있더니, 지금은 또 가뭄이야.”
그러고 보니 아틀란시아에 오기 전, 동부 영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이블이 씹어 뱉듯이 말했다.
“동부 영주로부터 가뭄이 문제라고 들었는데, 그것도 용의 짓이었나.”
“아마도.”
으음. 정말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네. 등대는 둘째 치더라도 날씨까지 조종한다니…….
이종족이라기보다는 신이 현신한 것처럼 느껴졌다. 다들 숙연하게 침묵을 삼키던 중, 나디아의 짧은 박수 소리가 정적을 깼다.
“뭐! 골치 아픈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아니, 뒤로 미루면 안 될 것 같은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마냥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말을 건넸다.
“일단 부른 건 중립 지대를 보여 주고 싶어서야. 너도 세이블리안도 늘 일 때문에 바빴지?
이 기회에 정체를 숨기고 ‘시찰’을 다녀오면 어때? 여기저기 구경할 곳이 많을 거야. 연인끼리 가기 좋은 곳도 많고.”
나디아는 어딘가 모르게 짓궂게 웃는 낯이었다.
혹시 이거…… 시찰이라고 쓰고 데이트라고 읽는 건가?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사실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해 본 적은 없었다.
워낙 여러 일이 있기도 했고, 세이블이 왕위에 있다 보니 쉽게 자리를 떠날 수도 없었지.
하지만 문제가 있는데 이렇게 나가도 될까. 시찰보다는 용에 대한 대처를 마련하는 게 먼저인 것 같은데.
“꼬맹이랑 꼬맹이 남편도 다녀와. 보면 제법 즐거울 거야.”
군힐드의 제안에 블랑슈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망설인 끝에 블랑슈가 배시시 웃었다.
“저는 일단 용에 대해서 좀 알아보고 싶어요. 시찰은 어마마마랑 아바마마께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 우리가요?”
으음. 어떻게 하면 좋으려나. 세이블도 조금 곤란해하는 눈치였다. 우리가 머뭇대고 있자 블랑슈가 엄하게 말했다.
“황제의 명령입니다. 두 분은 시찰을 다녀와 주세요.”
말투는 근엄했지만 우리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 말에 세이블이 피식 웃더니 가볍게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 폐하의 명령이니 도리가 없군요. 그러면 시찰을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왕 전하.”
귀여운지 엄중한지 알 수 없는 부녀간의 대화가 오갔다. 세이블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릴리, 함께 시찰 갑시다. 저도 중립 지대가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군요.”
황제 폐하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네! 어느새 베리테가 세이블의 곁으로 다가와 이베르를 받아갔다.
“이베르는 내가 보고 있을게. 장모님, 장인어른. 시찰 잘 다녀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세이블과 팔짱을 꼈다. 이베르도 우리를 향해 잘 다녀오라는 듯이 옹알이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 * *
길거리에 수많은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길 양쪽에 위치한 가게들 위로 온갖 색깔의 천이 가림막처럼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중립 지대는 커다란 무인도를 일궈 만든 도시였다. 곶에는 수많은 배가 정박한 채였다.
그리고 그 배를 타고 온 온갖 물건과 사람들이 시장에 흘러넘치고 있었다. 복식만큼이나 종족도 다양했다.
요정 손님과 인간 상인이 흥정을 하기도 하고, 한쪽에서는 인어가 광주리에 생선을 그득히 담아 팔고 있기도 했다.
“와, 정말 다 같이 사는구나…….”
나디아는 언제나 인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주고 싶어 했다. 이 모습을 보니 그녀가 왜 그런 미래를 꿈꿨는지 알 것 같았다.
놀라움에 잠시 멈춰서 있는 사이, 내 옆으로 인간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헉, 가까워! 내가 선왕비라는 걸 눈치채진 않겠지?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지만 다행히 내 정체를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사람들이 지나간 뒤, 나는 세이블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우리를 못 알아보는 것 같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세이블과 나는 준 귀족이 입을 법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수수하지만 정갈한 옷.
하지만 그런 옷으로도 세이블의 후광은 숨길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나는 왕족이라는 오오라를 뿜고 있어서 좀 걱정이 되었다.
역시 마법을 써서 변화하는 편이 좋을까. 세이블은 나를 달래듯이 말했다.
“왕족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소수니까요. 릴리가 실종되었을 때, 이 모습으로 돌아다녀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 그때 내가 일하는 의상실에 왔을 때도 가게 사람들이 그를 못 알아봤지.
나를 찾아와 주었던 세이블이 생각나자 나도 모르게 먹먹함이 밀려왔다.
이렇게 그와 다시 만나 데이트도 하게 되다니. 그와의 재회가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알겠어요. 그러면 맘 놓고 다녀야겠네요. 이렇게 세이블이랑 번화가에 나온 건 처음이기도 하고.”
“그러게 말입니다. 진작 나오면 좋았을걸. 네르겐에 돌아가서도 ‘시찰’을 나오면 좋을 것 같군요.”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처음 하는 비밀 데이트에 나 역시 소리 없이 웃었다.
우리는 손을 꼭 잡은 채, 인파가 가득한 거리를 지나다녔다. 시선을 돌릴 때마다 온갖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보. 저쪽에 장신구와 의류를 파는 것 같습니다. 여보는 의상이 가장 먼저 보고 싶으시죠?”
그가 골목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여러 옷감이 가게 앞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내 남편, 센스도 좋지.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정말 잘 안다니까!
나는 헤실 웃으며 그의 손을 끌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가게들을 둘러보는 데 가슴이 마구 뛰었다.
“우와, 이건 뭐지? 처음 보는 옷이랑 옷감이 잔뜩 있어요……!”
요정의 옷을 파는 가게도, 인어의 옷을 파는 가게도 있었다. 어디부터 가야 하지?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그때, 어떤 상인의 기운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쁜 아가씨! 동방에서 들여온 비단과 노리개 보고 가세요!”
동방? 동방의 의상이라는 말에 잠시 발을 멈추는데, 세이블이 나보다 먼저 상인 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저 상인이 릴리를 부르고 있군요.”
“저요? 저 상인은 예쁜 아가씨를 찾았는데요.”
그는 내 말에 의아한 기색이 되었다. 세이블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말했다.
“예. 예쁜 아가씨요. 여기서 제일 예쁜 아가씨는 릴리입니다만.”
으악! 콩깍지다, 콩깍지! 나는 혹여라도 지나가는 사람이 들었을까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궁 안에서였으면 나도 안다고 되받아쳤을 텐데. 여기는 사람들이 다니는 대로였다.
다행히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이 사람 눈에 붙은 콩깍지는 떼질 기색이 없다니까!
“저, 저 말고 다른 사람이 더 예쁜데요?”
“아뇨. 릴리가 제일 예쁩니다.”
세이블의 뜨거운 눈빛에 흐물흐물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으윽, 부끄럽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고…….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때. 어느 틈엔가 상인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맞아요, 거기 단발머리 예쁜 아가씨! 와서 옷 좀 보고 가세요.”
나랑 세이블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나? 어쩐지 민망해져서 얼굴을 푹 숙이는데 세이블이 나를 끌고 가게로 갔다.
마침 궁금하기도 했으니까. 나는 히죽 웃는 상인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게 안에서는 무척 익숙한 분위기가 풍겼다. 상인이 입고 있는 옷도 그랬다.
따지자면 조선 시대풍의 한복과 비슷한 옷이었다. 가게 안에 걸린 것들도 그런 분위기였다.
왠지 모르게 고향에 온 것 같았다. 내 고향이 조선 시대는 아니지만.
“동방의 옷은 구하기 힘들죠. 이번에 특별히 가져온 물건입니다.”
언뜻 봐도 상당히 고운 옷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내 눈이 두 개뿐인 게 아쉬울 정도였다.
청색 두루마기를 하나 집어 세이블을 돌아보았다. 흐음, 세이블한테는 뭐든 다 잘 어울릴 것 같긴 한데.
눈대중으로는 잘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옷가지를 몇 개 집어 든 뒤, 주인을 향해 물었다.
“혹시 여기서 입어볼 수 있나요?”
“예. 물론입니다.”
일단 두루마기를 걸쳐보실까! 매번 내가 옷을 만들어줬는데. 이렇게 쇼핑을 나온 것도 참 신선했다.
“여보, 일단 이거 걸쳐볼래요? 내가 입혀줄게요.”
“예. 릴리.”
그는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세이블에게 두루마기를 걸쳐준 뒤, 몇 발자국 물러서서 살펴보자…….
너, 너무 잘 어울려……! 어울릴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예상보다도 더욱 찰떡같았다!
큰 키 덕분에 두루마기의 맵시가 잘 살아났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동방의 이국적인 의복과도 꽤 어울렸다.
단아하면서도 기품있고, 그 와중에 살짝 벌어진 깃 사이로 보이는 목선……!
아니, 한복이 이렇게 섹시한 옷이었던가? 나는 나도 모르게 다른 옷을 집어 들었다.
“이것도 입어봐요! 주인장, 여기 옷 갈아입는 곳 있어요?”
“네? 네, 네! 저기 커튼 뒤에 있습니다.”
나는 세이블에게 옷을 안긴 뒤 커튼 너머로 밀어 넣었다. 그는 당황해하면서도 순순히 내 요구를 따랐다.
하아, 너무 기대된다.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던 중, 세이블이 커튼을 걷고 나왔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이거 살게요!”
살 수밖에 없는 비주얼이었다. 그는 소매가 좁은 검은색 철릭에 푸른빛이 도는 답호를 입은 채였다. 마치 사극에 등장하는 무사 같은 모습이었다.
왜 나한테 카메라가 없지? 이거 찍어 놔야 하는데! 돌아가자마자 베리테한테 카메라 만들어달라고 해야겠다.
세이블은 약간 어색한 자세로 제 모습을 돌아보았다. 좀 민망해하는 기색이었다.
“괜찮습니까?”
“네! 엄청, 엄청, 엄청 멋져요.”
장난 아니야. 연예인 데뷔해야겠다. 내가 좋아 어쩔 줄 몰라 하자, 어색하게 굳어 있던 세이블의 뺨이 펴졌다.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당신 옷은요?”
나?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도 한 벌 살까.
가게 안을 둘러보자 여자 한복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쪽빛 원단인 한복을 보자 블랑슈가 생각났다.
와, 이거 블랑슈한테 잘 어울리겠다. 비슷한 색으로 해서 베리테랑 커플룩 해도 엄청 예쁘겠어!
그 옆에 있는 색동저고리는 이베르한테 딱 맞겠다. 애들 사이즈에 맞는 옷을 고르던 중, 장신구가 눈에 들어왔다.
“이 비녀도 하나 주세요.”
나비 장식 비녀였다. 상인은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아, 이건 머리카락이 좀 길어야 할 수 있습니다. 손님이 하시기에는 머리카락이 짧을 것 같은데요.”
“우리 딸 사다 주려고요.”
“아하, 알겠습니다.”
블랑슈가 머리를 틀어 올려 비녀를 꽂은 모습을 상상하니 당장 궁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한복을 입고 다소곳하게 앉은 블랑슈라니! 댕기도 예쁜 거 많은데 사서 머리 땋아줘야겠다.
흐뭇하게 그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데 세이블이 입을 열었다. 의아해하는 목소리였다.
“여보, 지금 산 옷들…… 여보 옷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 저는 안 사도 괜찮아요.”
“여보 것도 하나 삽시다.”
그의 눈빛이 조용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거, 안 산다고 하면 여기서 안 내보낼 기세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작은 머리 장식을 집어 들었다. 흰 꽃 장식인 것, 그리고 매듭 장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둘 중 뭐가 나아요? 이건 어때요?”
우선 꽃 모양 장식을 귓가에 꽂아보고 세이블을 돌아보았다. 그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쁩니다.”
“그러면 이건요?”
이번에는 매듭 장식을 가져다 댔다. 세이블은 이번에도 같은 반응이었다.
“그것도 예쁩니다.”
뭐야, 다 예쁘다고 하면 어떡해. 나는 괜히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뭐 전부 예쁘대요?”
“릴리가 예쁜 걸 어떡합니까?”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진중했다. 아니, 그렇게 진지하게 나오면 오히려 내가 부끄럽잖아!
양손에 장식을 들고 굳어 있는 사이, 세이블은 가게 안을 둘러보고는 옷을 하나 집어 들었다.
연보라색 비단을 쓴 저고리였다. 그가 옷을 내게 살짝 대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다음은 분홍색 한복, 그다음에는 연두색 한복, 그다음에는 자수가 놓인 연노란색 한복…….
그가 이토록 옷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이 옷도 예쁘군요. 이것도 잘 어울립니다.”
그는 대부분의 옷을 집어 들며 말했다. 한복이 무척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이 사람, 핏속에 한국인의 혼이 흐르는 건가.
“아가씨에게 잘 어울리시네요!”
“주인장의 안목이 탁월하군요.”
가게 주인은 옆에 서서 열심히 세이블을 부추기고 있었고, 세이블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세이블 혼자서 쇼핑 보내지 말아야겠다. 그런 다짐을 하던 중, 주인이 꽃신 한 켤레를 가져왔다.
“이 신발은 꽃신이라고 하는데…….”
가게 주인이 세이블에게 뭐라 작게 속삭이자, 그의 눈에 광채가 돌았다. 세이블이 고개를 끄덕였다.
“색깔별로 다 주시오. 꽃신 말고 옷이랑 장신구도.”
“네?”
나와 가게 주인이 동시에 말을 뱉었다. 몇 초 뒤, 주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안돼! 내 남편이 덤터기 쓰는 걸 볼 수는 없어! 나는 부리나케 그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뇨! 다 안 살 거예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다급히 세이블을 끌고 가게 구석으로 향했다. 그가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세이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가게에 있는 걸 다 사겠다니!”
“전부 릴리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사고 싶습니다.”
“돈 낭비하면 안 돼요!”
“낭비 아닙니다. 릴리의 옷을 사는 거니까요. 제 개인적인 돈으로 사는 거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국인이 아니라 팔불출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기쁘지만, 기쁘지만……! 그래도 이렇게 과소비하는 건 안 돼!
나는 간신히 세이블을 설득해서 우리가 당장 입을 옷과 장신구 몇 개만을 사기로 했다.
음, 우리 것은 그래도 적게 샀는데……. 왜 이렇게 상자가 많지?
블랑슈랑 베리테, 이베르에게 줄 선물을 고르다 보니 자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다 귀여운걸! 우리 애들 선물은 하나도 아깝지 않아!
“다른 짐은 돌아오는 길에 들러 가져갈게요.”
“예, 예. 알겠습니다.”
가게 주인은 밝은 얼굴로 우리를 배웅했다. 돈을 너무 많이 썼나 싶다가도 세이블이 입은 옷을 보니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잘 샀네, 잘 샀어. 후회 없는 소비였다. 세이블도 나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릴리한테 그 옷이 참 잘 어울립니다. 꽃신도 잘 어울리고요.”
그러고 보니 아까 가게 주인이 꽃신을 가져오며 세이블에게 귓속말을 했었지. 뭐라고 했던 걸까?
“세이블, 아까 주인이 꽃신 가져왔을 때 뭐라고 했어요?”
“아, 그게…….”
그는 잠시 고민하다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내 손가락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꽃신을 신으면 꽃길만 걷는다는 이야기가 있다더군요. 우리 여보, 꽃길만 걸으셔야지요.”
으악, 으아악!
너무 부끄러워서 속으로 비명을 질러댔다. 와중에 세이블은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었다.
“그러면 계속 시찰을 해볼까요.”
이 사람, 언제부터 이렇게 능글맞아졌지?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우리는 동방의 옷을 입은 채 거리를 걸어 다녔다. 하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온갖 사람과 온갖 옷이 흘러넘치고 있다 보니 동방의 옷은 도리어 자연스러워 보였다. 우리가 왕족임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아니, 알아보는 편이 나았으려나?
“거기 형씨, 예쁜 애인에게 선물 하나 어때요?”
“사겠소.”
“손님, 요즘 이 목걸이가 아내분에게 참 잘 어울릴 것 같네요.”
“사겠소.”
가는 길마다 여러 상인이 우리를 호객했고, 세이블은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큰일이다. 이러다가 이 거리에 있는 물건을 다 사겠어!
어떡하지? 나는 세이블을 열심히 말리다가,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황급히 어딘가를 가리켰다.
“여보! 저 저거 먹고 싶어요!”
먹을 거 사다가 파산하는 일은 없겠지! 다행히 세이블은 내 말을 듣고는 집어 들었던 진주 목걸이를 내려놓았다.
“뭐가 드시고 싶으십니까, 릴리.”
“으음, 으음……. 아, 저거요!”
과일상이나 작은 빵집이 있는 가운데 사탕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설탕을 녹여 모양을 내는 것이 마치 공예품처럼 보였다.
“저, 이거 먹고 싶어요.”
나는 작은 물고기 모양의 사탕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이블이 커다란 사탕 쪽을 힐끗 보며 말했다.
“하나로 충분하십니까?”
“네! 충분해요!”
세이블은 약간 아쉬운 표정으로 사탕값을 치렀다. 이 사람, 설마 사탕 가게를 통째로 사주려던 건 아니겠지.
분위기만 보면 충분히 그럴 것 같았다. 주인이 사탕을 건네며 생긋 웃었다.
“두 분, 관광객이신가 봐요? 처음 뵙는 것 같네요.”
“그렇소.”
“혹시 산호 해변에는 가보셨나요? 마력으로 만들어진 해변인데 무척 아름다워요. 이 근방에서 꽤 유명한 곳이에요.”
“산호 해변? 어디에 있습니까.”
가게 주인은 대략적인 위치를 설명해 주었다. 세이블은 고개를 끄덕이곤 나를 돌아보았다.
“가보시겠습니까.”
“네, 시찰을 나왔으니 구석구석 살펴봐야죠.”
그가 내 말에 빙긋 웃고는 가게 주인이 알려준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왁자지껄하던 거리를 벗어나 외곽으로 나오니 주위가 조금 한적해졌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이 근처 같은데……. 우리는 산호 해변으로 향하는 동굴 입구에 발을 내디뎠다.
“미끄러우니 조심하십시오.”
나는 세이블의 도움을 받아 조심조심 아래로 내려갔다. 곳곳에 등불이 걸려 있는 걸 보니 사람들이 이동하는 길은 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동굴, 생각보다 깊은데?
해변이라는데 이렇게 아래까지 내려가도 되는 건가. 길을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다시 돌아가자고 말하려던 찰나, 출구가 보였다. 그곳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동굴을 빠져 나와 고개를 든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트리고 말았다.
주위에는 오색의 산호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바닷속의 정원을 보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바다 밑으로 온 것 같았다. 사탕 가게 주인이 그랬지. 마력으로 만들어진 해변이라고.
아마도 마법을 사용해 바다 아래에 호흡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 같았다.
천천히 위를 올려다보자 수면에 닿은 햇빛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머리 위로 물고기 떼가 유유자적 헤엄을 치며 지나가는 것도 보였다.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놓고 있는데 세이블이 내 손을 꼬옥 쥐었다. 옆을 보니 그 역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답군요.”
그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수면에 비친 빛이 그의 눈동자에도 일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나는 작게 입을 열었다.
“저기, 세이블. 아까 그랬잖아요. 제가 꽃길을 걸어야 한다고.”
“예, 그랬죠.”
“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마치 그와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가슴이 콩콩 뛰고 있었다.
“이미 저는 꽃길을 걷고 있는걸요. 세이블, 당신이 제 세상을 꽃으로 가득 채워주었어요. 고마워요.”
그가 내게 프러포즈를 하며 백합 꽃다발을 건네주었을 때가 생각났다.
온 세상이 흰 꽃으로 가득 차 있던 기분. 이미 오래전부터 내 세상은 천국이었지만.
세이블은 내 말에 놀란 듯, 잠시 입이 벌어졌다가 이내 얼굴이 빨개졌다. 그가 빈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
“……정말, 무척 기쁩니다.”
더듬더듬 흘러나오는 말은 투박하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나한테는 낯부끄러운 말 잘하더니 정작 나한테 들으니까 부끄러워하는 거 봐!
흑흑, 내 남편이 너무 귀여워. 그 와중 그를 좀 더 놀리고 싶어졌다. 나는 그의 눈을 지긋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우리 여보, 귀엽고 사랑스럽고 어떡하면 좋지요. 매일 매일 이렇게 귀여워서 누가 잡아가면 어떡하나요?”
그 말에 세이블은 귀까지 빨개졌다.
아, 진짜 이러다 누가 데려가는 거 아냐? 그가 더듬더듬 말했다.
“저는 귀엽지 않습니다. 릴리가 귀엽지요.”
“아닌데요, 세이블이 더 귀여운데요.”
키득키득 웃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시선을 피하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열기, 애정, 그리고 묘한 긴장감.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가만히 내 손목을 잡았다. 밭게 뛰는 내 맥박이 그에게 전달되는 것은 아닐까.
세이블은 여전히 내 눈을 응시하더니,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키스하고 싶습니다, 릴리.”
나지막한 저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치명적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귀엽다가, 치명적이었다가. 정말이지 한순간도 방심을 못 하겠다.
“해도 됩니까?”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달아올랐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그가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는 빛 사이에서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방금 전 먹은 사탕 때문인지 유독 달콤한 키스였다.
그가 한참이나 내 숨을 삼키다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곤 나를 꼭 끌어안았다.
“……음. 셋째는 만들지 않으려고 했는데.”
셋째? 잠깐 놀랐지만 덕분에 긴장이 풀렸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왜요? 동생 만들어 주면 좋지.”
“릴리의 몸에 부담이 가지 않는 임신 방법을 찾을 때까진 안됩니다.”
“흠. 하지만……. 동생은 안 만들어도 할 수는 있잖아요?”
대낮부터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왠지 모르게 분위기에 휩쓸려서 민망한 말을 뱉고야 말았다.
농담이라고 하는 편이 나으려나? 웃으며 흘려보내려는데 세이블이 내 손을 꽉 잡았다.
“궁으로 돌아갑시다.”
“네, 네? 시찰은 어떡하고요?”
“내일 또 나옵시다.”
그의 눈빛은 그저 진지했다. 크, 크흠. 예상보다 조금 이르지만 돌아가도 괜찮겠지. 슬슬 해가 질 때도 되었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 근처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우리만 있던 게 아니었잖아? 키스하는 모습을 들킨 건 아니겠지.
그런데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 보니 어딘가 모르게 좀 위급한 상황 같았다.
“세이블. 들었어요? 지금 우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예. 저도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지? 설마 또 용이 나타난 건가? 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하자, 거기에는 한 아이가 앉아 있었다.
보아하니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아이는 눈물이 그렁한 상태로 제 다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독이 오른 듯 다리가 퉁퉁 부어 있었다. 나는 놀라 아이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니?”
“해, 해파리한테 쏘여서…….”
으아, 많이 아파 보인다. 이걸 어떡하면 좋지? 일단 의사한테 데려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으키려 했지만…….
아이는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세이블이 업어 주려고 했지만 그것도 무리였다.
으으. 상처가 꽤 심각한가 보네. 나는 잠시 고민 끝에 세이블을 돌아보았다.
“여보, 잠깐 가서 의사를 데려와 줄 수 있어요? 내가 이 애를 돌보고 있을게요.”
“알겠습니다. 금방 오죠.”
시내가 멀지 않았으니 30분이면 돌아오겠지. 세이블이 떠나간 뒤 나는 옆에 앉아 아이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와, 다리가 온갖 색깔로 변했다. 마치 엉망으로 섞어둔 물감 팔레트처럼.
아이는 고통을 참으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훌쩍거리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뭔가 도울 방법이 없으려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눈에 마력을 집중해 보았다.
고통을 내게 옮기는 저주를 걸까 싶었는데, 상처 부위를 보니 중독된 부분이 검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처음 보는 독이지만 해석이 어렵지는 않았다. 이거라면 내가 중화시킬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검은 마력이 흔하지 않으니 왕비라는 게 들통날지도 모르는걸. 나는 잠시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얘, 잠깐만 눈 좀 감아 볼래?”
“왜요?”
“치료할 건데, 보면 더 아플 것 같아서.”
그러자 아이는 황급히 두 눈을 감았다. 나는 근처에 나 있는 해초를 대강 뜯어낸 뒤, 상처를 가볍게 건드렸다.
그리고 조용히 해독 주문을 걸었다. 검은 마력이 잉크처럼 아이의 상처 위를 감싸더니, 서서히 부기가 빠지기 시작했다.
“이제 눈 떠도 돼.”
아이는 다리를 내려다보고는 놀란 눈이 되었다. 펄쩍 일어나는 걸 보니 완치가 된 모양이었다.
“어, 어떻게 하신 거예요?”
“약초가 마침 근처에 있어서. 혹시 몰라서 써봤는데 잘 들어서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도 안 아파요!”
아이는 눈물 자국이 말라붙은 얼굴로 방긋 웃었다. 금방 나아서 정말 다행이다.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한 뒤, 아이는 해변을 떠나갔다.
아이가 치료된 건 좋은데, 세이블을 괜히 보냈다. 세이블은 언제쯤 돌아오려나.
나도 거리 쪽으로 가는 게 나을까, 아니면 여기서 기다릴까 고민하다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길이 엇갈릴 수도 있고, 풍경도 멋지니까. 몇 시간이고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을 감아도 즐거웠다. 조용한 파도 소리. 물이 흘러가는 소리. 정적도 훌륭한 음악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뭔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물고기가 다가오듯, 조용히.
“그쪽도 동방 출신이오?”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낯선 이의 것이었다. 눈을 뜨자 저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흰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었다. 옷만큼이나 흰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치렁치렁한 백발이 허리까지 내려오고, 절반은 올려 묶은 상태였다.
그 와중에 눈만큼은 무척 붉었다. 나는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동방에서 왔소?”
그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진 뒤에야 아직 대답하지 않은 걸 깨달았다.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조금 다르긴 한데 비슷해요.”
“그렇군. 나도 그쪽 출신이오.”
나를 동방 사람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복장도 그렇고, 얼굴도 그러니까.
정작 나에게 말을 건 사람은 동방에서 온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그쪽은 검은 마력을 지니고 있나 보군.”
검은 마력.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에 등줄기가 쭈뼛 섰다. 뒤늦게 경계심이 찾아왔다.
아까 아이를 치료하는 모습을 본 건가? 굳이 내 마력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가 뭐지?
그를 가만히 노려보았지만 내 정체를 알아차린 기색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무해함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렇게 볼 필요 없네. 그저 동병상련의 처지를 만나, 반가워서 그런 것뿐이니.”
“……그쪽도 검은색 마력을 갖고 있나요?”
집중해 보니 그에게서도 마력이 느껴졌다. 그러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검은색 마력은 아니지만 비슷하네. 자네가 동방 출신은 아니지만 비슷한 것처럼.”
남자는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지도 않았고, 굳이 따지자면 내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 남자가 어째서 내게 말을 거는지, 나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았기에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먼저 여길 떠나는 게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중, 그가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들은 사람처럼.
“아. 생각보다 일찍 왔군. 나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네.”
그의 태도는 무척이나 가벼웠다. 그냥 고향 사람을 만나 반가웠던 걸까? 그가 천천히 산호 사이로 발을 옮기다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그쪽 이름은 뭔지 물어봐도 되나?”
“……릴리, 라고 해요.”
대외적인 이름은 아비게일이니까 별문제 없겠지? 그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것은 백합을 뜻하는 서역의 말이지? 좋은 이름이군. 나는 윤이라고 하네.”
그때 저 멀리서 세이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바람처럼 윤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그럼 다음에 또 봅세, 백합.”
다음? 나는 그 말에 놀라 윤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윤은 사라지고 없었다.
갑자기 어디로 간 거지? 마력을 지녔으니 딱히 이상할 일은 아닌가.
여러모로 묘한 사람이었다. 중립 지대다 보니 다양한 사람이 있나 보네.
그 사이 세이블이 의사로 보이는 사람을 데리고 다급하게 들어왔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릴리. 의사를 데리고 왔습니다. 아이는……?”
으으, 세이블을 보내지 말고 일단 마력으로 치료해볼걸. 미안한 마음에 목소리가 살짝 수그러들었다.
“다행히 근처에 약초가 있었어요. 고생시켜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빨리 치료했다면 다행인 일입니다.”
의사 역시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의사에게 감사의 말과 치료비를 전달한 뒤, 해변을 빠져나왔다.
수면에 노을이 비치고 있었다. 붉은 보석 파편이 머리 위를 덮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돌아오는 길은 고즈넉했다. 세이블이 물끄러미 내 안색을 살피다 물었다.
“릴리. 혹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으음, 그게…….”
나는 잠시 망설이다 윤과 만났던 일을 이야기했다. 세이블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홀로 자리를 비우면 안 되었는데.”
“아뇨, 괜찮아요! 그 사람이 저한테 해를 끼친 것도 아니고, 아이가 다쳤는걸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가게 문 닫기 전에 얼른 가서 짐 챙겨서 가요! 애들 옷 가져가야죠.”
나는 괜히 말을 돌린 뒤, 황급히 발걸음을 서둘렀다. 세이블 역시 묵묵히 내 뒤를 따랐다.
선물을 한 아름 들고 성으로 돌아오니 블랑슈와 베리테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마마마, 아바마마! 시찰 잘 다녀오셨어요? 와, 옷이 정말 예뻐요.”
블랑슈가 나와 세이블의 새 옷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예쁘죠? 블랑슈 옷도 사 왔어요. 식사 후에 보여 줄게요.”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보따리를 풀고 우리 애한테 옷을 입히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밤이 될 게 뻔했다.
한복을 입히고 곱게 머리를 땋아 댕기 머리를 해 주면 얼마나 귀여울까.
이베르도 색동저고리가 참 잘 어울리겠지. 광대가 치솟는 것을 참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어서 와, 아비게일. 시찰은 즐거웠어? 멋진 옷을 입었네!”
식당에 미리 도착해 있던 나디아와 카린이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나는 두 사람 몫으로 산 귀걸이를 건네주었다.
“네! 정말 좋았어요. 이렇게 많은 종족이 같이 지낼 수 있다니……. 산호 해변도 다녀왔는데 정말 멋지더군요.”
“그렇지? 그거 만드느라 고생했어. 카린한테 선물로 주려고.”
뭐? 해변이 카린에게 주는 선물이었다고? 카린은 민망한지 얼굴이 붉어진 채였다.
“그렇게 멋진 곳을 인간이나 요정이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웠을 뿐이에요!
그래서 인어 외의 종족도 편하게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별생각 없이 말을 꺼낸 건데…….”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줄 수 있어, 카린.”
우와, 물속에서도 불이 붙을 듯한 뜨거운 눈빛이었다. 카린 역시 그 눈빛에 감화된 것 같았다.
나디아는 천천히 카린의 뺨을 감쌌다. 그리고는 촉촉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 나랑…… 결혼해 줄래?”
“외교관…… 은퇴하고 나서요.”
정말이지 철벽같은 방어막이었다. 나디아가 532번째 실연을 삼키는 사이, 한 시종이 안으로 들어섰다.
“나디아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 지금 실연했어……. 급한 일이야?”
“예. 급한 일입니다.”
실연의 상처를 치료할 틈도 없다니. 정말이지 왕도 힘든 직업이라니까. 나디아가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무슨 일인지 보고하도록. 모두가 듣는 자리에서 해도 상관없다.”
“그것이…… 용인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교섭에 응하겠다고.”
용이 교섭에 응하겠다고? 이제까지는 결계 밖으로 나오지 않던 용에게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희소식이었다. 나디아 역시 잔뜩 들뜬 기색이 되었으나, 시종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조건이라면?”
“교섭인을 지정해 왔습니다.”
나디아는 이야기해보라는 듯 시선을 주었다. 시종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릴리라는 이름을 지닌 여자가 아니면 응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릴리? 예상치 못한 이름에 당황했다. 나디아도 놀라 나를 바라보자, 세이블이 입을 열었다.
“선왕비의 공식적인 이름은 아비게일이다. 릴리는 애칭 같은 것이니 해당하지 않는다. 설마 아비게일을 보낼 생각은 아니겠지?”
혹여라도 나를 교섭인으로 지정할까봐 다급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나디아가 뒤늦게 미소 지었다.
“아, 물론이지. 릴리라는 이름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이름 외의 인상착의도 지정해 왔습니다.”
시종은 그렇게 말하며 가죽으로 된 서신을 건넸다. 나디아가 서신을 읽어내려갈수록 표정이 좋지 않았다.
“검은 머리, 단발, 보라색 눈동자, 동방의 외모…….”
항목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벽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나디아의 시선이 떨리는 듯 하더니 그녀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검은색 마력을 소지하였음.”
검은색 마력. 용인은 명백하게 나를 지명하고 있었다. 시종은 못을 박듯 말을 덧붙였다.
“또한 오늘이 지나면 교섭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만약 교섭에 응하신다면 지금 바로 출발하셔야 합니다.”
* * *
밤바다 위로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그 빛이 바다 위에 만들어진 길처럼 보였다.
용인의 거처는 바닷가 근처의 동굴이었다. 만월이라 꽤 밝은 밤인데도 동굴의 입구는 그저 어두워 내부가 쉬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동굴 입구에 릴리가 서 있었다. 그녀는 초조한 기색이었다.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식사조차 제대로 끝내지 못한 채 이곳으로 왔으나 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문득 목소리가 들렸다.
“어마마마, 괜찮으세요?”
릴리는 퍼뜩 놀라 고개를 틀었다. 딸이 제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조차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그녀는 간신히 미소 지었다.
“네, 물론이죠.”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꺼림칙해 보였다. 그리고 그 감정은 모두가 느끼고 있을 터였다.
“당일만 교섭을 하겠다니. 우리가 수를 쓰지 못하게 할 생각인가.”
나디아가 짓씹듯이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왜 하필 아비게일을 지정한 거지? 이해가 가지 않아.”
릴리 역시 그 지점이 가장 의문스러웠다. 용이 어째서 자신을 부른 것일까.
하지만 릴리는 나디아를 달래려는 듯,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그래도 이제까지 교섭에 응하지 않았는데 잘된 일이죠.”
“끄응…… 하지만…….”
나디아는 앓는 소리를 내며 세이블리안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마치 죄수처럼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날이 서 있는 사람은 단연코 세이블리안이었다. 그 역시 경황이 없어 낮에 산 옷을 입은 채였다.
그 모습이 마치 동방의 호위 무사 같았다. 그가 미간을 일그러트린 채 릴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릴리, 무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을 이런 위험한 곳에 혼자 보내다니……. 차라리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릴리가 교섭에 응하겠다 했을 때, 세이블리안은 그 누구보다도 맹렬히 반대했었다.
다른 곳도 아닌 용의 둥지다. 그런 곳에 아내를 보내다니. 그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제가 릴리로 변한 뒤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해 주십시오, 릴리.”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런 눈속임이 통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
릴리는 짐짓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굳어 있는 세이블리안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을 거예요. 게다가 이 기회를 놓치면 중립 지대에 큰 문제가 생기잖아요. 혼자 들어가는 것도 아닌걸요.”
용인은 호위병들을 데려오는 것은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호위병 정도로 세이블리안의 마음은 쉬이 풀어지지 않았다.
“어마마마, 괜찮으시겠어요? 베리테랑 같이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맞아. 호위병보다는 내가 나을 거야.”
블랑슈와 베리테 역시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릴리는 도리어 마음이 차분해졌다.
“둘 다 고마워요. 하지만 용인은 마력이 있는 자를 호위로 데려오는 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요.”
군힐드가 그 소식에 얼마나 분개했던가. 아마도 그런 사태를 예측하고 내건 조건이었을 터였다.
몰래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려 했지만, 마력에 반응하는 결계가 처져 있는 듯 군힐드는 곧바로 튕겨 나왔다.
“교섭이 잘 되면 네르겐에도 좋은 일이잖아요. 인어에게도, 요정에게도!”
“릴리, 그래도 저는 당신이 걱정됩니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시선과 함께. 그가 릴리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인간도, 인어도, 요정도 생각하지 마세요. 그 무엇보다 당신이 소중합니다.”
인간을 위해서, 인어를 위해서, 요정을 위해서. 그 모든 대의명분도 릴리와 비교하면 그저 빛바랜 종이와도 같았다.
릴리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슬픔이 이렇게 아름다운 색이었나.
릴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대신 짧게 입 맞춘 뒤 뒤로 물러섰다.
“저는 황제의 어머니이며, 제국의 선왕비예요. 겁을 먹고 도망칠 수는 없어요.”
자신은 세이블리안이, 블랑슈가, 베리테가, 이베르가 사는 이 세상을 지키기로 했다.
그러니 이 교섭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세이블리안은 그녀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더 만류하지는 못했으나 걱정하는 기색은 여전했다. 릴리가 당차게 웃었다.
“그리고 저는 마력이 두 종류나 있는 마법사라고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세이블.”
그리고는 재빠르게 호위병들을 돌아보았다. 혹여라도 세이블리안이 붙잡기 전에.
“자, 가죠.”
모두가 염려의 시선을 보내는 가운데, 그녀는 호위병들과 함께 동굴로 들어섰다.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녀는 꾹 참은 채 발을 내디뎠다. 돌아보지 않아도 세이블리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의 그림자가 동굴 벽에 그림처럼 드리워졌다. 선두에 서 있는 호위병이 랜턴을 든 채 말했다.
“선왕비 마마, 조심하십시오. 용이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르는 일입니다.”
무장 병사들이 릴리의 앞뒤로 포진한 채였다. 그들의 긴장이 릴리에게도 전해져 왔다.
다소 좁은 길을 지나자 동굴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아니, 밖이 아니라 거대한 공동이었다.
너무 넓은 공간인지라 밖이라고 착각을 해 버릴 정도였다. 천장에 뚫려 있는 구멍을 통해 달이 비치고 있었다.
우물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기분이었다. 만월의 밤이었다.
곳곳에 난 구멍을 통해 빛이 새어 들어오고, 그 빛을 받고 자라난 꽃들이 동굴 안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잠시 긴장을 풀어줄 정도로.
릴리가 멈춰 서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이 무언가가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호위병들이 차례차례 쓰러지고 있었다. 들고 있던 칼이 카랑카랑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추락하고, 횃불도 고개를 숙였다.
“서, 선왕비 마마…….”
그들은 자신을 침범하는 무언가를 저항해 보려 했지만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릴리가 다급히 사람들에게 달려갔다.
“이봐요, 정신 차려봐요!”
설마 죽은 것일까? 릴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호위병의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가느다란 숨이 와 닿았다. 실신한 모양이었다. 반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찰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하지 말게. 다들 잠시 잠든 것뿐이니.”
나지막한 목소리임에도 어딘가 모르게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다.
위를 올려다보자 누군가가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저 허상 같은 흰 옷자락.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더욱 은빛을 띠는 가운데,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윤?”
분명히 오늘 해변에서 본 얼굴이었다. 윤이 그때와 마찬가지로 긴장감 없는 얼굴로 빙긋 웃었다.
“기억해 주는가. 고마운 일이군.”
그가 천천히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그 모습이 너무도 가벼워 사람이라기보다는 유령처럼 느껴졌다.
그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릴리는 재빠르게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윤을 노려보며 물었다.
“윤이 용인가요?”
“그래, 내가 용일세.”
“하지만…….”
윤은 아무리 봐도 인간이었다. 요정이나 인어 역시 인간과 흡사하긴 하지만, 귀나 아가미 등의 차이점이 있었다.
릴리가 미심쩍어하는 눈치이자 윤이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이러면 믿겠나?”
그 말과 함께 순식간에 물보라 같은 것이 눈앞을 가로막는 듯했다.
릴리가 눈을 찌푸렸다가 다시 뜬 순간, 거기에는 용이 있었다.
마치 거대한 뱀 같은 모양새였으나 위압감은 뱀과 비교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발톱은 마치 매의 것 같았다. 흰 갈기가 불꽃처럼 너울거리고 거목 같은 사슴뿔이 머리에 자라나 있었다.
마치 작은 산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릴리가 경악한 눈으로 바라보자 백룡은 곧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시 윤이 나타나 있었다. 그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물었다.
“이제 믿겠는가?”
“……네.”
사실 아직도 얼떨떨했다. 마치 환상이라도 마주한 듯한 기분. 하지만 온몸에 돋아난 소름은 용의 존재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러면 차라도 한잔하지. 손님이 온 것은 무척 오랜만인지라.”
릴리는 쭈뼛대며 호위병들을 바라보았다. 윤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준 뒤에야, 그녀는 윤을 따라갔다.
긴장한 그녀와 달리 윤은 그저 유유자적해 보였다. 말씨도, 발걸음도 나긋하기 그지없었다.
동굴 안쪽으로 들어서자 거기에는 생활 공간으로 보이는 처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마치 집 하나를 이곳에 옮겨둔 것만 같았다. 낯선 동시에 낯익은 동양풍의 방이었다.
“제가 뭘 도우면 될까요?”
“앉아 있게. 손님에게 일을 시킬 수야 있나.”
윤이 미소 지을 때마다 눈매가 갸름해졌다. 붉은 눈의 살기를 흐리게 할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였다.
릴리는 어정쩡하게 앉아 윤을 기다렸다. 생각만큼 윤이 나쁜 용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윤이 다구를 들고 돌아왔다. 차에서는 국화 향기가 풍겨왔다.
용이 내려준 차라니. 이토록 호화로운 차는 또 없을 터였다. 릴리는 짐짓 감탄하며 국화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입에는 맞나?”
“네. 아주 맛있네요.”
“다행이로군.”
그렇게 말하며 윤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나 차보다는 릴리에게 관심이 있는 듯하였다.
붉은 눈이 다정하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릴리는 저 다정함의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알 수 없는 것이 한둘이 아녔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무엇인가?”
“왜 저를 교섭인으로 고르셨나요?”
윤이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자네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 보았다네.”
풉. 릴리는 마시던 차를 뱉을 뻔했다. 윤이 깜짝 놀라 릴리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가?”
“아, 아니……. 그런 말을 남에게 듣는 것은 처음이라…….”
아비게일의 모습일 때는 자주 들었지만, 릴리일 때는 드문 말이었다.
세이블리안이야 매일같이 예쁘다, 귀엽다, 사랑스럽다고 말하지만 릴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콩깍지가 씌었다는 걸.
윤에게도 콩깍지가 씌었나? 릴리가 수상쩍다는 눈으로 응시하자 윤은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동방과 서역의 미인상은 사뭇 다른 듯했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눈치였다. 그는 소년처럼 풋풋하게, 혹은 현자처럼 진중하게 웃어 보였다.
“자네가 동방에서 태어났다면 절세미인이라는 말을 인사처럼 들었을 걸세.”
릴리는 그 말에 웃고 말았다. 전생에 조선 시대에 태어났으면 미인이었을 상이라고 종종 듣곤 했었다.
“웃으니 더 예쁘군.”
윤은 부끄러움 없이 말했다. 그 말에 릴리는 황급히 얼굴을 굳혔다.
분위기가 어쩐지 묘해져 버렸다. 긴장이 풀린 것은 좋았지만,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사람과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달갑지는 않았다.
“외모 때문에 교섭인을 고르신 건가요?”
릴리의 어조는 사무적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외모를 보고 칭찬해 준 윤에게 고마움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고마움은 없었다. 그저 세이블리안이 보고 싶을 뿐.
아름다움이 상대적인 것이란 건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아비게일의 모습이었다면, 윤은 자신을 교섭인으로 요청하였을까?
자신이 어떤 모습이 되어도 변함이 없는 것은 세이블리안뿐이었다.
릴리가 그를 무뚝뚝하게 대하는 것에 비해 윤의 어조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외모, 외모라……. 그것만은 아닐세. 자네가 아이를 치료해 줄 때, 여러 생각이 들었지.”
그의 입가에 뜻 모를 연민이 스쳐 지나갔다. 윤이 쓸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검은색 마력이라니. 자네도 고생이 많았겠군. 숨기며 사는 것이 보통은 아니었을 게야.”
그 말에 릴리의 시선이 잠시 굳었다. 예쁘다는 말보다 고생이 많았겠다는 말이 더욱 가슴에 와닿았다.
평화로운 시대가 찾아와 잠시 잊고 있었다. 마력의 색깔만으로 죽을 뻔했었던 기억.
횃불을 든 병사들에게 쫓기던 그 밤은 쉬이 잊히지 않았다. 릴리가 찻잔을 만지작거리다 입가에 가져다 댔다.
“네. 고생을 좀 했죠.”
따스한 국화차로 입을 축였다. 잔이 비자 윤은 손수 찻주전자를 들어 다시 차를 따라주었다.
“그래서 자네에게 할 제안이 있네.”
“어떤 제안인가요?”
향긋한 꽃내음이 퍼지는 가운데, 윤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나와 같이 살지 않겠는가?”
찻잔을 쥐려던 릴리의 손이 멈칫하였다.
같이 살자니?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런 제안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용은 혼자 산다고 들었는데요?”
“혼자 살거나, 아니면 반려랑 단둘이 살거나 한다네. 이제까지는 홀로 살아왔지만…….”
윤의 목소리가 마치 젖은 낙엽처럼 처연했다. 그는 이내 말을 돌렸다.
“검은색 마력을 갖고 사는 것이 힘들었겠지. 나는 자네의 마력이 어떤 색이든 신경 쓰지 않고, 자네를 보호해 줄 수도 있네.”
그 말에 릴리는 의아함을 느꼈다. 이제 검은색 마력은 차별받지 않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윤은 그 사실을 모르는 걸까?
윤은 자신의 찻잔을 채운 뒤 조곤조곤 말을 이어 갔다.
“또한 자네가 여기에서 살아준다면 등대를 만드는 것도 허락해 주고. 나 역시 외로웠던 참이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겠지. 그러니 내 반려가…….”
“아니, 잠깐. 잠깐만요!”
물 흐르듯 흘러가는 이야기에 릴리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그녀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저는 남편이 있어요!”
“아, 그런가. 그래도 괜찮네. 신경 쓰지 않네.”
괜찮긴 뭐가 괜찮단 말인가. 릴리는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이런 제안을 들은 것 자체만으로도 모욕받은 기분이었다.
나쁜 사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은 취소하기로 했다. 이 자는 유부녀임을 알면서도 협박을 하는 불한당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상이라도 엎은 뒤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곳은 교섭의 자리. 어떻게든 설득을 해야 했다.
릴리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며 어떻게든 상식적인 대화를 이어 가보려 했다.
“윤 님이 저와 같이 살고 싶어 하는 건, 외로워서 그러시는 거죠?”
“뭐, 그런 이유도 있지.”
“그렇다면 밖으로 나오면 되지 않나요? 중립 지대에서는 이종족들도 편하게 지낼 수 있어요.”
그 말에 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색을 달리하고 있었다.
마치 순진무구한 아이를 보는 듯한 눈. 약간의 동정, 측은함도 느껴졌다.
“자네는 다른 종족이 서로를 이해하며 교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회의와 비웃음이 어린 목소리였다. 그런 한편 왠지 모를 중압감이 느껴졌다.
릴리가 그 중압감에 뭐라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윤이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오랜 세월을 살아왔네.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왔어.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느낀 것은…….”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흰 속눈썹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비치고,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타 종족끼리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네.”
그 붉은 눈동자에는 수백, 혹은 수천 년의 세월이 고여 있는 것 같았다. 어쩐지 핏빛 같았다.
“인어와 인간이 평화롭게 살던 시대도 있었으나, 결국은 전쟁으로 끝났네.
다른 종족끼리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네. 특히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라면 더더욱.”
달이 구름 뒤로 숨었는지, 창 너머로 들어오던 달빛이 한순간 사그라들었다.
아니면 윤이 내보이는 살기에 달빛마저 도망간 것인지도 몰랐다.
릴리 역시 숨이 조금 밭아졌다. 윤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단순한 이종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강력했다.
“나는 인간으로 화해 그들과 살아가려 했네. 그러나 내가 용인 것을 알게 되면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 없었지.”
어둠 속에서 그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백 년간 벼려온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사람은 강인한 힘을 지닌 존재를 두려워할 뿐. 서로를 이해할 수는 없지. 자네도 알지 않는가?”
윤의 질문에 릴리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안다니. 용의 기분을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저는…… 잘 모르겠는걸요.”
“자네도 검은 마력이 있으니 비슷한 일을 겪었겠지.”
그제야 윤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빽빽하게 날이 서 있던 어둠도 조용히 바람에 흩어지는 것 같았다.
“검은 마력을 지닌 자들은 오랫동안 박해를 받아왔지. 내 눈으로 몇 번이나 봐왔어.
너무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는 배척받기 마련이고, 자네의 마력을 알게 되면 모두가 자네를 떠나겠지. 하지만 나는 달라.”
다르다. 그는 못을 박듯 그 단어를 발음했다. 윤이 릴리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뱀의 피부처럼 차가운 손이었다.
“나는 자네를 이해할 수 있네. 자네가 가진 고독을 이해할 수 있어. 그리고 자네도 나를 이해할 수 있겠지.
자네의 낭군이라는 자도 별 다를 바 없을 걸세. 자네가 검은 마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면 태도가 바뀌겠지.”
“세이블리안은 그렇지 않아요!”
릴리가 참다못해 소리를 쳤다. 아무리 교섭이 중요하다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거칠게 손을 빼내는 탓에 잔이 엎어지며 차가 왈칵 흘러내렸다.
아직 윤은 상 위에 손을 올려두고 있어, 그의 옷자락이 회색빛으로 젖어 들어갔다.
“그는 오래전부터 제 마력의 색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 것으로 태도가 변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릴리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교섭인이라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녀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이 모습을 본다면 세이블리안도, 블랑슈도, 베리테도. 나디아나 카린 역시 분노할 것이 뻔했다.
이것은 자신에 대한, 세이블리안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해 작별 인사를 남겼다.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차는 잘 마셨습니다.”
그녀는 문을 박차고 나왔다. 잠이 든 호위병들을 어떻게든 깨워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저벅저벅 걸어가던 중. 뒤에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어쩔 수 없군.”
포기한 것일까? 그러나 릴리는 그것이 착각임을 곧 깨달았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덫이라도 밟은 것처럼. 뒤에서 윤이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릴리를 조롱하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그녀와 마주 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죠? 당장 풀어요!”
“나는 자네를 보호하려는 걸세.”
“당신……!”
릴리는 마법을 풀려고 해 봤지만 저주 계통의 마법이 아니었다. 윤의 눈웃음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뱀처럼 빛났다.
“편하게 지내도록 하게. 원하는 것은 뭐든 마련해 주겠네. 그러다 보면 생각이 바뀌…….”
그 순간, 릴리는 윤의 얼굴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뒤로 물러선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안아 들고 있었다.
자신을 감싼 이 품, 이 익숙한 감각.
“감히 누구를 겁박하려 하느냐!”
세이블리안의 노성이 동굴을 울렸다. 이를 드러낸 채 증오의 빛을 드러낸 그는 마치 맹수와도 같았다.
용을 앞에 두고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릴리는 반가움과 동시에 당혹감을 느꼈다.
“세이블리안?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죄송합니다, 여보. 당신이 걱정되어 몰래 따라 들어왔습니다.”
윤이 불쾌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릴리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 마치 하찮은 벌레라도 보는 듯 멸시와 조롱이 섞인 얼굴이었다.
“마력이 없는 인간인가. 그래서 기척을 못 느꼈군.”
그는 당황 없이, 조급함 없이 세이블리안을 훑어보았다. 마치 어떻게 죽일지 고민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윤은 결정을 내렸다. 어디선가 바람이라도 불어오는 듯, 그의 옷자락이 흩날리는가 싶더니 점점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두 사람 앞에는 거대한 용이 나타나 있었다. 한 인간이 대적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존재였다.
“마력도 없는 인간 따위가 나를 상대하려 하다니. 무지하구나.”
조롱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용의 얼굴이라 표정을 읽기 어려웠지만, 그에게는 잔인한 무관심이 어려 있었다.
세이블리안을 상대할 생각 따위는 없어 보였다. 붉은 눈이 커다란 보석처럼 세이블리안과 릴리를 반사하고 있었다.
“그 여자를 여기에 두고 가라. 그렇게만 한다면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다 주겠다.”
용의 둥지에 들어와 목숨을 건지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데 윤은 그 외에도 원하는 것은 뭐든 주겠다 말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혹할 만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세이블리안은 뒤로 물러서는 대신, 검집에서 칼을 빼 들었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피조차 얼려버릴 듯한 시선이었다. 그는 앞으로 나와 릴리를 보호한 채, 검을 겨누며 말했다.
“이 사람이 내가 원하는 세상의 전부다.”
더 이상의 자비는 없었다. 용이 거대한 꼬리를 휘둘러 세이블리안을 압사시키려 했다.
세이블리안이 날렵하게 공격을 피해낸 뒤,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시선이 용을 뚫을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 찰나, 용이 다시 한번 꼬리를 들어 올렸다. 세이블리안이 검을 머리 위로 올려 공격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꼬리가 향한 곳은 아래가 아니었다. 동굴 벽을 강하게 내리치자, 천장에서 돌무더기가 산사태처럼 쏟아져 내렸다.
“세이블리안!”
릴리의 비명조차 삼킬 정도의 굉음이었다. 돌무더기가 단말마처럼 무너져 내린 자리에 흙 안개가 피어올랐다.
세이블리안의 모습은 없었다. 돌무더기 아래로 빠져나온 옷자락이, 그 아래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저토록 커다란 돌무더기에 깔렸으니 크게 다쳤을 게 틀림없었다. 윤은 무정한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죽지는 않았네. 곧 치료해 줄 테니 안심하게.”
돌무더기 아래에서 생명의 기운이 감지되고 있었다. 윤은 몸을 틀어 릴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치려 했다. 하지만 아직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윤은 그것을 기뻐해야 할지, 비참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두려움으로 자네를 속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용의 그림자가 천천히 기울었다. 윤이 릴리에게 다가가는 찰나. 무언가 왼편에서 번쩍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몸을 튼 순간, 통증과 함께 얼굴에 피가 튀었다. 달빛을 받은 검날이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세이블리안의 검이 용의 얼굴을 예리하게 배어 내자, 윤의 잇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자상에서 피가 흘러내려 눈을 적셨다. 윤은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어떻게, 어떻게 빠져나왔지?”
“다 내 아내 덕분이지.”
다급히 릴리를 바라보자, 그녀의 손에서 보라색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느새 돌무더기는 먼지로 부스러지고 있었다.
윤의 이빨이 원수의 목덜미라도 물어뜯는 듯, 으득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포효와 함께 꼬리를 휘두르자 돌무더기가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멍청한 놈 같으니! 아까 같은 요행이 또 있을 것 같은가!”
방금 전보다 훨씬 많은 낙석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리, 세이블리안은 무너지는 돌 사이를 가볍게 내달렸다.
마치 바위산을 오르는, 아니 먹이를 노리는 흑표범과도 같았다.
그의 눈은 오로지 단 한 곳, 윤의 가슴을 응시하고 있었다.
딱 하나. 비늘이 거꾸로 난 곳이 있었다. 저곳이 군힐드가 말했던 용의 급소, 역린이었다.
역린을 찾느라 첫 번째 낙석은 피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역린에 대해 알고 있나. 하지만 아무 소용 없어.’
역린은 용의 가슴 중앙. 인간의 힘으로는 도약할 수 없는 위치였다.
때문에 윤은 그의 시선이 제 급소를 향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경계하지 않았다.
단,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릴리가 이곳에 있었다.
보라색 마력이 순식간에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방금 전, 무너졌던 돌무더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형태를 바꾸었다.
그것은 마치 계단처럼 윤에게 향하고 있었다. 세이블리안은 즉시 그곳으로 향했다. 윤은 그 움직임에 당황했다.
‘두 사람은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을 텐데?’
두 사람은 아무런 의논도 하지 않았다. 이런 사태를 염두에 두고 사전에 계획을 짰을 리도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마치 하나의 영혼이 두 개의 몸에 들어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런 말 없이도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릴리가 만들어 준 계단을 세이블리안이 날쌔게 박차 오르고, 답호의 옷자락이 날개처럼 흩날렸다. 윤이 피할 새도 없이 검이 역린에 박혔다.
까드득 하며 역린이 부서지는 감각이 손끝을 향해 전달 되었다. 윤의 비명이 동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용은 사라졌다. 동굴을 가득 채우던 그 거구가 어디 갔나 싶어 릴리가 주위를 살피던 중, 바닥으로 시선이 갔다.
그 자리에 인간으로 변한 윤이 쓰러져 있었다. 아직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도망칠 기운도 없었고, 마력도 모두 소진해 버렸다. 그는 갓 태어난 새끼 뱀보다 약한 존재였다.
윤은 씨근덕거리며 세이블리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이블리안은 동정심 없는 시선으로 말했다.
“릴리, 어떻게 할까요?”
죽인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용을 죽일 기회가 또 찾아올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릴리는 망설이고 있었다. 정말 죽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나?
“정말로 마력이 없는 이 자가 자네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믿는가?”
그때, 윤이 사력을 다해 소리쳤다. 빈사에 가까운 상태임에도 그의 눈에는 간절한 애원이 담겨 있었다.
“겉모습은 같아도 자네랑 이 인간은 다른 종족이야. 타 종족이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는가?”
윤의 그 절박한 시선에 담긴 감정을, 릴리는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믿어요.”
망설임 없는 목소리였다. 릴리는 세이블리안의 손을 꼭 잡았다.
“온 세상이 나를 배신해도, 나는 이 사람을 믿어요.”
서로 다른 부분이 있다 한들 그것이 이별의 이유는 될 수 없었다. 세이블리안 역시 그녀의 손을 깍지껴 굳게 잡았다.
“그리고 세상은 바뀌어 가고 있어요. 더 이상 검은색 마력을 갖고 있어도 박해받지 않아요.”
“웃기는 소리. 그게 얼마나 갈 것 같지? 자네와 자네의 반려 같은 사람이 또 있을 것 같나?”
“여기에 있다.”
어느새 동굴 안으로 여러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뜻밖의 손님이었다. 윤이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인어의 왕인가.”
“그렇다. 용인이여.”
나디아와 카린, 그리고 군힐드도 함께였다. 인어의 왕은 서늘한 시선으로 윤을 내려다보았다.
“그대는 방금 전, 다른 종족이 함께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지.”
윤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나디아는 제 손을 카린 쪽으로 내밀며 말을 이어 갔다.
“이쪽은 카린 스토크. 인간이고, 나의 연인이지.”
그 말에 윤의 눈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카린 역시 당황한 듯 얼굴이 붉어졌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딸도 태어났다. 인간 황제는 요정을 반려로 맞이했고.”
윤은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놀라움은 사라지고 회의적인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모두 일시적인 일이네. 결국 또다시 흩어지고, 전쟁이 일어나서 파괴되겠지.
나는 수 백년간 그것을 지켜봐 왔다. 너희들이 아이를 낳았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 없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요?”
그 말에 카린이 발끈해서 나섰다. 그녀는 저벅저벅 걸어가 윤의 앞에 섰다.
“우리 아버지 같은 소리를 하고 계시네요. 안 될 거라고, 안 바뀔 거라고. 변하는 건 없을 거라고. 뭐, 나도 인어랑 결혼할 줄은 몰랐지만.”
그리고 그 아버지는 지금 감옥에 갇힌 채였다. 카린이 팔짱을 끼고는 윤을 쏘아보았다.
“그러면 지켜봐요.”
“……무슨 뜻이지?”
“당신은 오래 산다면서요? 그러면 지켜보라고요. 당신이 맞는지, 내가 맞는지.”
그 말에 윤이 피식 웃었다. 가소롭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기껏해야 백 년을 사는 종족 주제에…….”
“백 년으로 모자라면 이백 년, 이 백 년으로 모자라면 삼백 년 지켜보라고요!
내가 죽으면 내 아이가, 그리고 그 다음 세대가 증명할 테니.”
그 앙칼진 목소리에 윤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나디아는 역시 내 아내라는 듯이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해요. 내기할래요? 내가 옳은지, 당신이 옳은지.”
카린의 도발에 윤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간신히 앉았다. 그리고 낮게 웃기 시작하더니, 곧 웃음 소리가 우렁우렁하게 퍼져나갔다.
“이번 세대의 인간들은 참 당돌하군, 그래.”
그가 카린을 올려다본 뒤, 릴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윤이 바람처럼 미소 지으며 말했다.
“좋다. 지켜봐 주마. 내 수명이 다할 때까지.”
* * *
저 멀리 작은 섬에 여러 일꾼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바쁘게 석재를 나르고 등대의 토대가 될 부분을 쌓고 있었다.
날씨는 잔잔하고 맑았다. 흐음.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떠나기 아까운 지경이네. 나는 나디아를 돌아보았다.
“다음에 또 오고 싶어요. 그때는 등대가 건설되어 있을까요?”
“그럼 물론이지.”
그 미소를 보자 다음 방문이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이별의 아쉬움을 접을 수 있을 만큼.
다른 사람들 역시 이별을 준비하느라 여러모로 분주해 보였다. 카린이 조금 침울한 기색으로 다가왔다.
“왕비님. 이제 가시면 또 언제 보려나요…….”
“카린, 괜찮아요. 거울도 있고, 무슨 일 있으면 또 올게요.”
나는 카린을 가볍게 포옹한 채 등을 도닥여 주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나디아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아마 곧 보지 않을까?”
“응? 무슨 일 있어요?”
“나랑 카린 결혼식 때 와야지.”
오잉? 결혼이라고? 드디어 카린이 승낙을 해 준 것인가!
그러나 결혼 당사자인 카린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카린이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결혼이라뇨, 전하? 저는 승낙한 적 없는데요.”
“지난번에 윤 앞에서 그랬잖아! 나도 인어랑 결혼할 줄은 몰랐다고.”
아. 맞아. 분명히 카린이 그렇게 말했지.
카린도 뒤늦게 그 사실이 떠올랐는지, 어물어물하다가 몸을 홱 틀었다.
“그, 그건 분위기상 그런 거고요! 아무튼 당장은 결혼 안 할 거예요!”
“카린, 너무해!”
“전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이만 가 볼게요!”
카린이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갔다. 나는 쿡쿡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작별 인사를 하느라 바빠 보였다.
다른 쪽을 보자 군힐드와 블랑슈가 있었다. 군힐드가 덩치에 맞지 않게 조금 시무룩해진 모습으로 말했다.
“빨리 돌아가는군.”
“네. 아무래도 너무 오래 비울 수는 없을 듯하니…….”
블랑슈도 아쉬운 눈치였다. 군힐드가 블랑슈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많이 먹고 많이 커라. 너는 너무 작아.”
“헤헤, 그럴게요.”
“특산물을 많이 챙겨놨으니 넉넉히 먹을 수 있을 거다. 베리테, 너도.”
“요정은 원래 작다고! 그나저나 얼마나 옮길 셈이야? 옮길 때마다 마력을 쓴단 말이야!”
그녀의 말대로 하인들이 엄청난 양의 짐을 옮기고 있었다. 이거, 다 옮길 수는 있으려나.
그리고 세이블은 아이들을 돌보느라 경황이 없어 보였다. 힐드가 이베르의 옷자락을 잡고 빽빽 울고 있었다.
“시허! 가지 마!”
“으앙……!”
세이블은 이걸 어찌해야 하나 쩔쩔매는 중이었다. 카린이 다급히 다가가 힐드를 말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애들 때문이라도 조만간 다시 봐야겠네. 그렇게 웃음을 참으며 사람들을 둘러보던 중, 나는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누군가를 보았다.
흰 머리카락과 흰 옷자락. 윤이었다. 그는 그늘진 곳에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나는 나디아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저어, 윤은 이제 어떻게 되나요?”
“음. 일단 중립 지대에서 같이 지내기로 했어. 모두를 받아들인다는 게 이 지역의 규칙이니까.”
와, 정말 대범한 판단이다. 용마저 수용하겠다니.
그 결단력에 내심 감탄하던 와중, 나디아가 씩 웃으면서 엄지를 치켜들었다.
“대신 카린이 피해 보상은 철저하게 받아내자고 했어. 용이니까 써먹을 곳이 많겠지. 휴, 카린은 정말 똑똑하다니까.”
아니, 용을 그렇게 이용해도 괜찮은 거야? 대범한 건지 무모한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위험하지는 않겠죠? 아무래도 용이니까.”
“뭐, 일단은 역린이 회복되기 전까지는 용으로 변하지도 못한다고 하더라. 군힐드 언니가 무지 섭섭해 했어. 못 싸운다고.”
음. 최소한 심심하지는 않겠네. 윤과 군힐드가 싸우는 모습을 생각하니 왠지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윤은 이곳에서 받아 들여졌다. 여전히 그늘 속에 있었지만. 나는 잠시 망설이다 발을 옮겼다.
“나디아, 저 잠깐 윤이랑 이야기 나누고 올게요.”
지난 번 용으로 변했던 게 떠올라 조금 무섭긴 했지만 나는 주춤주춤 윤에게 다가갔다. 그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돌아가는가 보군.”
그는 조금 힘없이 웃었다. 가슴에 생긴 균열이 목까지 뻗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윤의 시선에는 어떤 따스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그의 입술이 달싹이더니 간신히 열렸다.
“……백합.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는가?”
“제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요. 어떤 부탁인가요?”
또 자기랑 살자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는 한참이나 말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자네가 여든이 되거나, 아흔이 되었을 때. 낭군도 죽고 홀로 남게 되었을 때. 그 이후에는 내게 와줄 수 있겠는가?”
나는 그의 부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해를 못 했다는 걸 눈치챘는지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인간일 때의 삶은 그와 살고, 그 이후에는 용이 되어 나와 함께 살아가 줄 수 있겠는가?”
“어? 용이 될 수 있어요?”
“그렇다네. 용이 되고 싶어 수많은 재물을 바치는 사람들도 있었지. 불로장생은 수많은 사람의 꿈이니까.”
불로장생이라니. 어안이 벙벙해지는 제안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것을 원할까.
게다가 윤은 기다려 주겠다 했다. 내가 여든이 되고, 아흔이 되어 호호 할머니가 될 때까지 나를 수십 년이나 기다리겠다니.
정말 엄청난 제안이지만……. 내가 할 대답을 오로지 하나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 반려자는 언제나 세이블리안 한 사람뿐이니까요.”
영생을 살아도 세이블이 없다면 의미가 없었다. 짧은 생이라도 그와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중요했다.
비록 세이블리안이 죽은 뒤라 할지라도. 나는 언제까지나 세이블리안의 아내, 그의 동반자였다.
“음. 역시 그렇군. 괜한 말을 해서 미안하네.”
그는 예상했다는 듯 실망한 기색은 없었다. 윤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언제나 자네와 자네의 나라를 지켜보고 있겠네. 건강하시게, 백합.”
“윤도 건강하세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떴다. 어느새 세이블이 이야기를 끝내고 나를 찾고 있었다.
“릴리, 이제 슬슬 가실까요.”
“네, 세이블.”
나는 내 영원한 반려의 손을 잡았다. 그때, 무언가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라, 비?”
때아닌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먹구름 한 점 없는데? 세이블이 옷을 벗어 내 머리 위를 가려 주며 말했다.
“동부의 가뭄도 해소가 되겠군요.”
설마 윤인가?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윤은 어느새인가 사라지고 없었다.
언제나 나를, 이 나라를 지켜보겠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지켜보겠다는 게 아니라 지켜 주겠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비는 바람도, 구름도 없이 오래오래 마른 땅을 적셔주었다. 따스한 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