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reincarnated as a Doggo RAW novel - Chapter 166
167. 베아트리체(1)
이모의 집에서 돌아온 조은이는 다시 차트를 열어 몇 가지 종목들의 월봉, 주봉, 일봉과 공시 및 업계 현황, 대차대조표 등을 밤늦게까지 확인했다.
3,000만 원이라는 큰돈을 꾸준한 우상향이 예상되는 가치 투자주에 넣는다, 당연히 종목을 고르는 데에는 그만치나 숙고가 필요했다.
“아아아, 내일 다시 볼까나. 솔직히 오늘 본 종목들, 장기적으로 다 넣고 싶을 정도네!”
“왈! 왈!”
조은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오히려 젊을 때니까 훨씬 더 공격적으로 투자를 하라는 이모의 말, 그리고 직접 짜준 포트폴리오. 솔직히 이만치나 든든한 조력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때, 문이 열리고 노파가 참외를 깎아 들고 들어왔다.
“아유, 뭔 공부를 또 밤새 하는겨? 요것 좀 먹어봐. 아까 트럭에서 샀는데 먹을 만하겠드라. 알은 작은데 만 원에 열 개여.”
상큼하고 달달한 냄새가 그럴듯했다. 그러나 포크로 집어 한 입 베어 문 조은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냥 오이 맛 나네. 차라리 오이를 사지! 어쩜 이렇게 하나도 안 달지?”
“엥? 그럴 리가.”
노파도 조은이를 따라 하나 집어먹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아유, 진짜 그냥 쓴 오이 맛이네.”
“거봐. 잘 보고 사야지, 할머니. 전에도 트럭에서 ‘하늘엔 영광, 땅에는 굴비’라고 만 원에 스무 마리 샀던 거 거의 썩어서, 먹지도 못했잖아.”
하아… 진짜.
노파의 물건 고르는 수준은 암담한 것이었다. 싸다고 나쁜 것은 아니었다. 싼 것 중 좋은 것을 고르거나, 아니면 차라리 제값에 돈이 아깝지 않은 것을 사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싸다는 이유로, 살 게 아닌 것을 이렇게 족족 사 오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예전, 부족할 때에는 질보다 양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돈을 낭비할 바에는 안 사는 게 나았다.
“아유, 담에는 사지 말아야것어.”
“그러면서 또 살 거잖아. 차라리 내가 사 올 테니까 필요한 거 있음 말해줘, 응?”
“그리여. 그래도 아까우니 먹어.”
노파와 조은이는 전혀 달지 않은 제철 과일을 억지로 먹으며 초코똥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7월에 있을 ‘Animals Got Talent’의 미국 결선 준비 등을 이야기했다.
그러던 도중, 노파의 눈이 슬쩍 변했다.
“그런데, 조은아. 내가 진짜 괜찮은 자리를 알아놨는데, 거기서 분식집을 해 볼까 하는데 워뗘? 내가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 같은데.”
“분식집은 아무나 하나! 내가 그때 겨우 며칠 연습하고 이틀 해 봤는데 정말 힘이 들더라. 할머니가 못한다는 게 아니고, 할머니 몸 걱정 때문에 하는 말이야.”
“돈도 얼마 안 들더만! 그것 하나 못 해줘?”
“돈? 돈 하나도 없어.”
조은이의 그 말에 노파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돈이 왜 없어! 너, 그 많은 돈 다 어디 가고!”
“어디 가긴, 더 많이 돈 벌려고 펀드에 넣고 내일 주식에도 넣어야지. 일단 비상금 1천만 원은 있고, 매달 생활비도 넉넉하게 할머니에게 넣어드릴 거야. 나머지는 또 적립식 펀드에 넣기로 했어.”
“뽄드? 뽄드회사에 투자한다고?”
“아니, 뭐… 일단 회사가 투자를 대행해준다는 거야. 다양한 종목에.”
“자기 돈 그렇게 생판 남에게 맡기는 것 아니여! 정신 차려! 투자를 하려면 분식집에 투자를 해 봐라. 지나가는 애들 500원짜리 1,000원짜리 다 털어먹을 것이다.”
“그거, 정말로 힘든 일이라니까. 할머니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래.”
“아유! 됐다! 됐어! 내가 다시 공공근로 나가서 돈 모아 차릴 겨! 귀생분식.”
그 끔찍한 분식집 이름에 조은이와 내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파를 노려보았다.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말해버린 노파가 깜짝 놀라, 맛대가리 없는 참외를 들고 허둥지둥 안방으로 사라졌다.
***
다음 날.
조은이가 학교로 간 후, 나와 노파는 또 서로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며 사회적, 심리적 거리 두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노파의 전화가 울렸다. 그래, 난 당신을 모르오. 이해할 수가 없소, 박복녀 여사.
드라마를 보다 감상에 방해받은 듯, 노파는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엉금엉금 기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유, 해자 할매! 웬일이여!”
– 웬일은 무슨 웬일이여! 아니, 워쩜 고로케 이사 가고 나서 연락 한 번이 없능가?
“연락은 나만 하나! 해자 할매도 할 수 있는 거지. 그냥, 살다 보니 여기 일도 바쁘고 그렇지 뭐.”
– 한번 놀러와부소. 밥이라도 먹잖게라.
“전에 그 동네에 있는 점쟁이 집에 몇 번 놀러는 갔었는데, 어째 가는 김에 전화할까 생각을 해 보기는 했지. 그리여, 얼굴이나 봅시다.”
한참을 즐거이 통화하던 노파는 마침 오늘 할 것도 없으니 지금 가도 괜찮냐고 물었다.
– 그라제, 점심때 도착허믄 맞아불것소. 딱 좋네.
“알았어. 지금 준비해서 나갈 테니 시장에서 국밥 하나 먹으면 좋겠네.”
– 그라믄 추어탕 먹소, 추어탕. 근디 그 전에 우리 차라도 한잔 헙시다.
“차야 해자 할매 집에서 마시면 되지, 뭐.”
– 아니, 그러지 말고 기분 좀 내붑시다. 오래간만에 본다 안 허요. 그 시장 끝에 보면 목욕탕 건물 있소잉. 고 옆에 2층에 약속 다방에서 봐불게. 12시에.
“다방? 그리여. 뭔 바람이 들었는지 모르것네. 가방에 해피도 넣어서 갈겨. 해피도 오래간만에 그 동네 구경 좀 시켜줘야지.”
하아, 용숭동. 추억의 동네.
노파가 전화를 끊고 일어나 흥얼거리며 안방으로 향했다. 나는 미리 거실에 놓인 가방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서로 기 싸움을 하고 있을 바에야, 이렇게 바깥 마실이라도 나가는 것이 좋을 듯했다.
버스를 타고 다시 지하철을 갈아타 내린 역.
내리자마자 역 앞 사거리에 보이는 저 커다란 빌딩. 내가 서류를 물고 미친 듯이 경찰서로 뛰어갔던 곳. 그리고 조은이와 수없이 오갔던 시장. 저쪽에는 처음 애견 펜션과 카페 촬영 알바를 한다고 사진을 찍었던 근린공원이 있었다.
‘벌써 8개월이 넘게 지났네. 그사이에도 바뀌긴 바뀌는구나…’
기분 좋게 등뼈를 담아주던 충남 정육점은 그대로였으나, 그 옆에 있던 화장품 가게에는 커피 프랜차이즈가 들어와 있었다.
노파도 사거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십여 분 정도를 저 위로 걸어 올라가면 예전의 반지하 집이 나왔다. 그 뒤로 도성암, 도화선녀의 집도 있을 것이었다.
“처묵소도 그대로 있네.”
인심 좋은 사장이 운영하던 고기 뷔페도 그대로였다. 이 출구 앞에서 조은이는 나를 한쪽에 묶어놓은 채 전단지를 돌리고 또 돌렸었다.
“이제 가 볼까, 해피야.”
“왈!”
무언가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노파와 나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때, 도로를 따라 ‘둠칫! 둠칫!’하는 낯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새하얀 준중형차가 천둥 같은 유로 비트 속에 머플러에서 굉음을 내며 시장 앞 2차선 도로를 지나갔다. 운전석에 탄 범재와 그 옆, 한층 더 표독스러워진 지혜가 마치 내 귀와 같은 머리 색깔을 한 채 ‘이건, 영정사진이 허락해 준 마약’ 같은 뽕 찬 표정으로 ‘즐겨어!’하고 외치고 있었다.
[팔 하나 오 칠, 팔 하나 오 칠! 차 대세요. 차 옆으로 대세요!]그리고 그 뒤로 경찰차가 따라붙었다. 바로 근처가 용숭 지구대인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저것들도 하나도 안 바뀌었네.’
우리는 차에서 내려 고개를 푹 숙인 채 경찰에게 무엇인가를 대답하는 그들의 곁을 지나갔다.
우리가 살던 곳에 그대로 이사 온 범재와 지혜. 그때 그들의 뒤로 따라 들어갔던 바퀴벌레들은 얼마나 불어났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아유, 저긴가보다.”
내가 처음 깨어났던 동물병원을 지나 목욕탕 건물. 그 옆에 약속 다방이 보였다. 노파가 잠시 숨을 고른 후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 끼이이익!
문을 열자 들려오는 음악 소리.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암만 용숭동이 번화가와는 전혀 거리가 멀고 ‘첨단 편의시설’과도 거리가 멀다지만, 그래도 순식간에 30년 가까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 음악은 무엇인가.
고색창연한 초록색 고리땡 천에 하얀 커버가 인상적인 의자와 테이블.
노파가 나를 든 채 고개를 여기저기 돌렸다.
“왐마! 여그요! 복녀 할매!”
“아유! 이런 멋진 곳은 또 워떻게 알았디야? 여기서 그리 오래 살았어도 이런 곳 와 볼 줄은 몰랐네.”
해자 할매를 발견한 노파가 서둘러 자리로 가 맞은편에 앉았다.
“복녀 할매, 얼굴이 겁나게 좋아부럿소. 이사 가니 아주 좋은 일만 가득하나 보네.”
“그리여? 나야 뭐 좋아질 게 있나. 다 우리 조은이가 호강시켜 주는 것인디. 얼마 전 뉴스도 나왔어. 뭔 강아지 장기자랑 대회에서 1등 해가지고.”
“참말로 잘되얏소잉.”
“그 뿐이여? 우리 해피를 가지고 큰 인형 회사에서 인형도 만들고.”
노파는 신이 나서 이사 가고 난 뒤 여태 있었던 일들을 해자 할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종업원이 커피 두 잔을 가지고 와 아래에 내려놓았다. 해자 할매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옆의 자기 병을 열어 프림과 설탕을 부었다.
“세상에! 조은이가 그렇게 잘되부러? 아이고 좋네. 나가 다 뿌듯허다. 손녀 정말 잘 뒀어.”
“그러게. 부모 복도 없어, 할매 복도 없어. 그냥 그렇게 바르게만 자라라고 기도혔는디 이렇게나 잘 자라서 이제 대학교 2학년인데 자기 앞가림을 다 해버리고 생활비를 통장에 막 집어넣는다니께.”
“긍게 고마운 줄 아시오! 그런 손녀가 어디 또 있간디?”
“그리여. 그나저나 내가 주책없이 내 이야기만 이렇게 실컷 해 버렸다.”
이제 아셨습니까? 무려 장장 30분 동안 커피는 입에 대지도 않고 자기 자랑, 조은이 자랑만 하셨습니다.
게다가… 그 모든 것의 시발점이 된 내 이야기는 하나도 안 하고!
그때 해자 할매의 눈이 가방 안에서 고개만 내밀고 있는 내게 닿았다.
“해피도 잘 있고?”
“이 똥강아지야 세상 편하지. 맨날 먹고 싸고, 하는 것이 뭐가 있겠슈.”
네? 뭐라고요? 자기객관화가 안 되면 타인객관화, 아니 타견(犬)객관화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해자 할매는 어떻게 지냈는데?”
“나야 뭐가 있것능가. 아니, 사실은 있긴 허제. 이번에 사업 하나 해 불까 허요. 그래서 우리 아들이 쩌그 뭐시냐 대출도 해주고, 딸도 모아둔 돈도 빌려줘불고.”
“뭐? 해자 할매가 사업을 해? 아니, 뭘로? 아유, 요즘 사업하면 다 망해. 혹시나 식당이나 분식집 이런 것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런 것 다 쫄딱 망해. 우리 나이대에 하는 것 아니야.”
이 뻔뻔스러운 인간. 직경 15cm는 될 듯한 인두겁의 두께를 보라.
“그냥. 좋게 할 만한 거시기가 있응게 그라제. 귀인이 들어왔응께. 인자 시방부터 나를 제대로 가르쳐 줄 사람. 그 뭐시냐, 천생연분이제.”
해자 할매의 말에 노파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천생연분? 해자 할매헌티? 우리 나이에?”
“아따, 이 냥반아. 사랑에 나이가 뭐시 필요하간디. 안 그요? 다 잘될 인연이 잘되는 것이고. 그러잖아도 나가 같이 식사도 할라고 불렀소.”
“잉? 이 자리에?”
순간, ‘짤랑짤랑’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열린 문 쪽을 바라보던 노파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귀, 귀생 오라버니?”
“아유, 우리 박복녀 여사님, 잘 지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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