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04
트리스테인 기사단 (5)
숙소 건물의 지하층, 성의 기단부에 위치한 대욕탕에는 온천수가 연결돼 있었다.
뜨끈한 물로 뽀얗게 씻은 아이들이 숙소 1층, 식당과 연결된 응접실에 모여 앉았다.
응접실의 가구는 모두 거친 생나무로 깎은 것이었지만, 벽난로를 활활 지펴 놓아 아늑한 분위기가 돌았다.
말끔한 셔츠에 바지를 입은 첼이 자신의 양어깨에 번갈아 코를 킁킁대며 물었다.
“나 아직도 냄새나지 않아?”
“막 빤 이불보처럼 깨끗하니 그만 숨들이셔.”
“아냐, 찝찝한걸. 향수를 가져와야 했는데. 이건 레이디들에 대해 예의가 아닌데.”
“걱정 마, 첼. 트리스테인 공작부인은 이미 이십 년 전에 돌아가셨고, 트리스테인 공자는 결혼 안 했대. 이 성에 레이디 같은 건 없어.”
“무슨 소리야, 리피. 아침에 우리에게 빵을 구워다 주는 레이디, 씻을 물을 길어다 준 레이디, 화덕 앞에도 레이디들이 계시잖아.”
지금은 첼의 박애주의 지론을 들을 때가 아니었다. 아서는 난처한 표정으로 아이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려 노력했다.
“얘들아 잡담 그만하고, 그래서 여기 마석 오닉스는 트리스테인 기사단에 양도하는 데 동의하는 거야?”
“아까 대답했잖아. 주라니까.”
“저거 찔러주면, 부단장 아저씨 표정이 어떨지 궁금하다. 그치, 레티샤!”
“응, 완전 궁금함.”
“사실 아까도 웃겼는데, 심각한 상황에서 웃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도 그랬어. 히히히.”
마석에 대해선 신경을 끈 첼과 쌍둥이들은 저들끼리 좋다고 시시덕댔다. 아서는 도움을 청하듯 이시엘을 쳐다봤다.
“아서 님, 실습 중에 취득한 물품은 감독책임자에게 맡기는 것이 규정에도 맞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훈련에 매진하느라 동작이 빠르고 규율이 있는 아이들과 달리, 씻는 것도 느리고, 차림새를 정리하는 것도 굼뜬 클레이오가 뒤늦게 응접실로 들어왔다. 군대 있을 때 빠릿하던 것도 옛말이지, 그때가 언제란 말인가.
“물론 실습 시 습득물 규정도 이만한 크기의 마석 오닉스를 상정한 건 아니겠지만.”
“왔어, 레이?”
마수 피톤이 남긴 마석 오닉스는 거의 어린애 주먹만 한 크기였다. 『마석 일람』에서 본바 오닉스는 지극한 희귀 마석으로, 알려진 물건은 피어스 클라겐 단장의 칼에 박힌 것 정도였다.
“한 번 보자.”
“여기.”
클레이오는 아서의 거친 손 위에 놓인 보석을 유심히 살폈다.
‘꽤나 값나가게 생겼는데, 이것도 지난 원고에선 언급이 안 됐군. 흠.’
‘정진’이 읽은 건 이시엘과 아서 위주로 서술되던 원고인데, 이 두 사람은 재물에 큰 관심이 없다보니 벌어진 불상사였다.
‘약속’만이 어김없이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침잠의 오닉스:신체와 정신에 안정을 불러온다.]
‘피어스가 오닉스를 가진 건 우연인가? 아니면 성격이 그따위니 좀 가라앉히라고 왕이 하사한 건가. 후자라고 해도 큰 도움은 안 된 것 같군.’
이렇게 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사용처가 없었다. 클레이오가 생각에 잠겨 있자 다른 수라도 있는 줄 아는지, 아서가 의견을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어떡하긴. 규정대로 해. 네 선택이 옳아.”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든든한데?”
별말도 안 했는데 아서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세상 다 가진 듯 환하게 웃었다.
클레이오는 가끔 주인공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춘기 청소년의 정서를 어떻게 다 파악하나 싶어 대충 넘겼다.
“뭐래.”
오닉스를 기사단에 넘기자고 맨 처음 제안한 건 아서였다.
비록 자원이 풍부하다 하나 이런 변방의 험지에서 마수까지 준동한다면, 마석을 직접 쓰든, 팔아서 자금으로 보태든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짐작에서였다.
“레이까지 동의했으니 전원 동의. 그럼 그 부단장 아저씨한테 찔러 주자고.”
“아서 님, 뇌물을 건네는 것도 아닌데 그런 표현은 좀….”
.
.
.
몇 분 후.
얼떨결에 마석 오닉스를 마주한 로탄 부단장은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겉보기와는 달리 꽤 소심하고 꼼꼼한 성격인 듯한 로탄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아서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두 사람의 대치 아닌 대치는 로탄을 따라 들어온 사자머리 기사에 의해 끝났다.
“빨리 받아요, 부단장. 지금 감사인사를 해도 모자랄 판에, 허리 뻣뻣하게 세우고 뭔 꼴이에요!”
“라이사!”
“못 받겠음 일단 내가 받아두지 뭐. 이 정도 마석은 공작님 병에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구요. 오 년 전인가 이런 게 있단 걸 듣고서 백방으로 찾아도 못 구했었잖아.”
오닉스를 휙 낚아챈 사자머리는, 아까 견습 마법사를 끼고 달려왔던 기사였다.
키가 크고 체격이 장대한 데다, 뭔가에 뜯겼다 붙은 듯한 턱의 상처가 무시무시해 한눈에 간파하긴 어려웠지만, 진한 이목구비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누구보다도 빠르게 첼이 그 사실을 알아챘다. 화려한 미소를 지은 첼은, 아서를 쓱 밀치고는 앞으로 나섰다.
“모쪼록 적절한 데 써주시길 바랍니다. 저희의 성의니까요.”
“거물급 마수를 잡은 데다, 이런 대단한 전리품을 희사해주어 고맙다. 잘 쓸게. 그래서, 학생은 이름이?”
“첼이라고 불러주세요.”
첼은 라이사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린애처럼 이를 드러내고 웃은 기사는 첼의 손을 꽉 맞잡아 주었다. 어찌나 힘이 센지, 붙들린 첼의 손등이 허옇게 질렸다.
“들었겠지만, 나는 라이사야. 인사가 늦었다. 트리스테인 성에 온 걸 환영해.”
“저는 리피요. 얘는 레티샤.”
“아서라고 부르심 됩니다.”
“…클레이오입니다.”
인사가 끝날 무렵, 라이사보다 한발 늦게 기사 세 명이 와글와글 응접실로 쏟아져 들어왔다.
각기 어깨와 팔에 부목을 대고 있거나, 지팡이를 짚은 부상자들이었다.
갑주를 벗고 마주하자, 아까 절도 넘치던 모습을 보여주던 이들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햐아, 씻고 오니 신수들 훤하네! 아까 싸우는 거 봤다. 진짜 엄청나던데!”
“무슨 수도에서 온 얼굴만 하얀 귀족 자제들이에요. 수습 기사들보다 낫던데.”
아이들을 둘러싼 기사들은 제각기 소년소녀를 치하하며 순수한 감탄을 표했다.
적어도 학생들을 질투할 만큼 속이 꼬인 자는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엄청난 호기심만 느껴졌다.
클레이오는 아이들이 추켜세워지는 모습을 보며 차분히 기사들을 파악해 보았다
‘이 애들을 냉대하는 건 부기사단장 개인의 성향이고, 평기사들은 그 정도까진 아닌가보군. 좋은 신호야.’
“게다가 난 그렇게 신묘한 마법이 세상에 있는 줄 난생처음 알았네.”
“트루데, 도대체 뭔 마법을 봤기에 아까부터 노랠 불러.”
클레이오가 마석으로 화살을 만들어 선제공격한 건 전투의 초반이다 보니, 트루데라 불린 키 작은 기사 혼자만 목격한 모양이었다.
클레이오는 내심 자신이 마법을 더 안 쓰고 아서와 아이들끼리 마수를 처리할 수 있었던 데 안도했다.
‘나 말고 저 왕자랑 첼이랑 이시엘한테 감탄하라고! 지금 애들이 열여덟 살에 5 레벨 마수의 심장을 파냈잖아!’
자신이 미묘하게 열혈 학부모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클레이오는 속으로 툴툴댔다.
“마법으로 말야! 슈슈슉! 화살이 생겨가지고 그 커다란 마수한테 선빵을 먹였다니까. 하, 답답이들 내 말 안 믿고. 저기, 이 중 누가 마법사야?”
“접니다. 클레이오라고 합니다.”
클레이오가 나서자 기대에 가득 찼던 기사들의 눈동자가 의문과 실망에 물드는 게 똑똑히 보였다. 트루데 하나만 빼곤 체구들도 산도적처럼 커다래서는, 속마음을 숨길 줄 모르는 자들이었다.
“진짜 저 가시처럼 빼짝 곯은 애가 그 뭐 대단하다는 마법을 썼다고?”
“트루데, 네가 잘못 본 거 아냐?”
“나도 마법만 봤지 누가 쓴 건진 못 봐서….”
기사들의 뒤통수를 한 대씩 때린 라이사가 허리를 굽혔다. 그녀보다 키가 작은 클레이오와 눈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 화살인지 뭔지보다 난 이 애들의 상처가 말끔히 다 나은 게 더 신묘하다. 클레이오 학생, 에테르 잔량 회복하고 나면 나 다리 접질린 데 좀 봐줄 수 있어? 거의 나아가나 싶었는데, 아까 겁나게 뛰었더니 다시 지끈거려.”
“견습 마법사분은 사정이 여의치 않은 모양이지요?”
“견습이는 마수며 산짐승 연구는 좋아해도, 에테르 레벨이 시원찮아서, 원래도 치료엔 젬병이야. 걔 빼면 우리 성에 정식 마법사라곤 단 하난데, 마수 수색대에 가 있어서 고쳐줄 사람이 없네. 수색대에선 언제 중상자가 나올지도 몰라서 경상자는 성으로 돌려보내고 있거든.”
“고충은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이나 저녁 중 편할 때에 와 주십시오.”
에테르 그릇이 늘어난 클레이오에겐 지금이라도 한두 명 치료할 만한 에테르 잔여량이 있었지만, 별로 무리하고 싶지 않아 넉넉하게 계산했다.
물론 그 정도로도 라이사를 감탄시키기엔 충분했다.
“햐, 그 엄청난 마법을 쓰고도 하루면 회복이 되다니. 젊은 게 좋은 건가? 근데 아침이랑 저녁만 되는 건 왜야?”
“그건….”
‘너네 부단장이 계속 쓸데없는 잡일을 시키니까 그렇지.’라는 소릴 외교적으로 잘 돌려 말하기 위해 클레이오가 말을 가다듬는 동안, 눈치가 빠릿한 라이사는 먼저 원인을 파악했다.
양손을 허리에 짚은 라이사가 휙 돌아서더니, 마석 오닉스를 어색하게 들여다보던 로탄에게 쩌렁쩌렁 소리쳤다.
“부단장, 해자까지 팠으면 이제 삽질할 건 없지 않아요? 애들한테 심술 그만 부려요. 저렇게들 에테르를 능란하게 쓰는데, 삽에 전도시키기엔 에테르가 아깝다.”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가 하는 얼굴로 눈을 꿈뻑이던 로탄이 비슬비슬 반박했다.
“아니 너는…! 내막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평기사들마냥…! 우리가 중앙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알지 않나.”
“아니, 나도 거만한 귀족 도련님 아가씨들이 온다 그래서 뭔 수발이라도 들어줘야 하나 걱정하긴 했지. 근데 삽질도 푹푹 잘하고, 마수까지 잡았잖아요.”
“부단장, 또 뭐 혼자 복잡한 생각 끌어안고 있다 삽질한 거예요?”
“부단장은 그래서 위염이 안 낫는 거야. 마수 처음 나온 날부터 지금까지 잠도 제대로 못 잔 거 아뇨?”
“내가 나 좋자고 이러냐? 다 우리 기사단과 아르모리크 공작각하를 위해서…!”
“알아요, 알아.”
“주판알 세느라 잠도 못 자고.”
“요 성이 이렇게 훤하고 따숴진 것도 부단장이 장부 잡은 후잖아. 나도 알아요.”
“나도 여기 출신인데 왜 몰라, 부단장. 겨울은 매년 넘겨도 매섭고 위험하다고. 중앙에서는 속도 모르고 뜯어갈 거나 뜯어가고. 속 터지는 거 알지.”
“그만 해라. 남들 듣는 데서 할 이야기가 아니다!”
클레이오는 표정관리를 하려고 노력하며 부단장을 곁눈질했다.
‘이미 다 들었는데.’
로탄은 말이 부단장이지, 성의 재무담당 수준인 모양이었다. 부하들의 폭로와 칭찬이 열탕 온탕을 오가자, 로탄의 얼굴이 달아오르더니 이내 귀와 목덜미까지 물에 삶은 것처럼 시뻘게졌다.
아이들은 제각기 시선을 돌리며 부단장의 모습을 못 본 척했다.
“봐요, 부단장. 산짐승에 산사태만 처리하기도 바쁜 겨울에 마수까지 날뛰는데, 수도방위대 학교 친구들이 와 준 건 감사할 일이지. 우리 걱정이랑 달라서 오히려 행운이잖아.”
‘우리 걱정’이 무엇이었을지 클레이오는 쉽게 짐작했다.
트리스테인 기사단원들은, 아서와 친구들이 아무 고생모르고 자란 중앙 귀족의 자제와 왕족인 줄만 알았을 테니까.
‘기사단이 상주하는 이 공작저엔 겨울이면 신문도 매일 배송이 안 되고 일주일치가 몰아서 들어오는 판이니, 이 사람들이 남부의 정치적 상황을 알 리도 없을 거고.’
군부와 정계를 휘두르는 ‘중앙 귀족’은 크뤼엘 공작을 위시한 국왕파 신귀족과, 귀족원을 창설했던 새빌 공작 일파의 구귀족들을 칭하는 말이었다.
사실 안젤리움 자작가와 키시온 자작가는 이들이 비난하는 ‘중앙 귀족’과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트리스테인공작가와 마찬가지로 냉대당하는 처지라는 걸 이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안젤리움 자작은 6대, 키시온 자작은 이제 겨우 4대인 신귀족이었다.
압살롬 2세의 왕조귀환 때 그를 지지하여 벽지의 영지를 받고 왕국을 수호할 무인으로서 귀족이 된 평민 출신 기사들이 두 자작가의 시조였다.
같은 신귀족이라도 브룬넨과 알비온 사이 정치적 합의의 결과로 공작의 지위를 얻은 크뤼엘 가문과 입장이 달랐다.
‘로탄은 아직도 트리스테인 공작을 정식 명칭으로 부르는군. 왕조귀환 이후의 이름을 거부하는 거지.’
테오 트리스테인 제22대 아르모리크 공작. 태서턴 트리스테인의 부친이자 척박한 영지를 부흥시킨 인물. 그가 받는 개인적 충성의 정도를 알려주는 방증이었다.
‘원래 알비온도 가문의 성과 영지의 이름이 다르고, 구귀족들은 다 그런 식인데, 왕조귀환 이후 브룬넨에서 자란 압살롬 2세의 영향으로 그냥 가문 성에 작위를 붙여 부르게 됐댔지?’
세르게프 후작가와 트리스테인 공작가는 양해왕을 꼭두각시로 삼은 새빌 공작의 뜻에 반하여 가문을 폐문한 후 중앙 정계에서 영향력을 잃었다.
그렇지만, 왕의 후계자를 정하는 선서에 서명하는 세 명의 공작 중, 오로지 트리스테인 공작만이 레오니드 1세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문의 가주였다.
‘니네베 여공작이야 왕비의 다른 이름이니 제외고. 나머지 두 공작가는 대가 끊겼다 그랬지. 그 자릴 새빌과 크뤼엘 가문이 채웠고 말야. 무시무시한 정통성이 있는데다가, 공자가 왕세자 측근이기까지 한데, 자력구제 하느라 저렇게 힘이 들면 사정을 좀 잘 봐달라고 하지.’
대가를 바라서 행하는 일은 충성이 아니다, 뭐 그런 멋진 대사가 지난 원고에 있긴 했다. 태서턴의 말이었다.
‘하긴 정치적 감각이 있는 핏줄이었음, 조상이 불륜 좀 했다고 이날 이때껏 북쪽을 지키며 짐승이나 잡고 있었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