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13
기사와 귀인 (1)
짝을 이룬 평기사들이 성벽 위를 기어오르는 그림자 거미를 베어 넘기는 동안, 미에츠는 로브를 벗어던지고 훈련장 한복판에 섰다.
망루의 첨단을 부수고 포탑을 뭉개놓은 두 마리 뱀이 파괴를 위해 되돌아오고 있었다.
“흐읍!”
구르르르르릉!
보통 사람은 들어 올릴 수도 없을 무게의 그레이트 소드를 훈련장 한복판에 박아 넣자, 온 성채가 몸을 뒤틀었다.
고오오오오!
마침내 본신의 힘을 전부 드러낸 미에츠의 주변으로 무색투명한 에테르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엣!
거대한 에테르의 기척을 느낀 두 마리의 뱀은 탐욕스런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며 미에츠를 향해 달려들었다.
피이이이잇!
이 고요한 [진격의 원]은 검은 광택을 띤 마수의 비늘을 몇 개나 뒤집어 놓고, 한 마리의 눈과 한 마리의 입가를 베었다.
달도 흐린 밤, 검게 보이는 자줏빛 피가 훈련장의 흙을 적셨다.
연이은 참격에도 두 마리의 마수는 궤도를 바꾸지 않고 미에츠에게로 달라붙었다.
미에츠는 한 박자 늦게 훈련장의 바닥에서 검을 뽑아냈다. 위급한 상황으로 보였으나, 실상은 달랐다.
미에츠는 [이형화]를 써야 할지에 대해 망설이고 있었다. 어두운 밤이라도 온 성채의 기사와 병사들이 모두 나와 있어, 보는 눈이 여럿이었다.
[이형화]는 소드마스터만의 공용 스킬.‘페히테’라는 이름에는 시큰둥하던 트리스테인의 기사들이라도, 저들의 공작이 가진 스킬에 대해서 무지할 리 없었다.
오랜 세월 스스로를 숨기고 살았던 미에츠는 선택의 순간이 왔단 것을 알았다.
그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도중에도, 사람의 힘이라 볼 수 없는 무력을 가지고서 검신이 넓은 거대한 검을 날렵하게 휘둘렀다.
마수의 발톱과 부닥친 검은 날 것의 불꽃을 튀어 낸다. 그의 무위는 용맹했으나, 공중으로부터 쏟아지는 두 마리의 여덟 개 발, 스물네 개 발톱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강화]가 옅어지고 마수의 발톱이 미에츠의 몸에 무시 못 할 생채기를 늘려갔다.푸슛!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마수의 살을 뚫고 박혔다. 에테르가 전도된 마석 은화살이었다. 미에츠가 뒤집어 놓았던 비늘 아래에 귀신같이 박혀든 화살은 트루데의 작품이었다.
“뭔데! 혼자 폼 잡지 말라고, 미에츠!”
화살을 맞은 피톤은 휙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저를 공격한 자를 찾아 날개를 퍼덕였다.
이어 몇 대의 은화살이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대부분은 마수의 단단한 비늘에 부닥쳐 빗겨갔지만, 마지막 한 대는 피톤의 입 안에 가 박혔다.
크에에에에에에엨!
“그래 오라고, 비얌 새끼야!”
피 섞인 침을 질질 흘리며 피톤은 화살대를 콰직콰직 부쉈다. 마수의 검은 눈이 살의로 번들거렸다. 트루데는 전혀 떨지 않고 에테르의 기세를 높였다.
“이번엔 같이 나눠 먹자! 기다려라 오닉스야!”
“아, 형 좀!”
작은 트루데는 사촌 형제를 왼편에서 엄호하며 검기를 뽑아냈고, 궁수의 오른편에선 이시엘이 환한 검기를 드러냈다.
그들 뒤에는 네 명의 궁수가 자리를 잡고 새로이 화살을 메겼다.
포탑이 부서진 후 한 발 물러섰던 트루데의 궁수조였다. 그들은 모두 기사였으며, 은화살에 에테르를 전도할 수 있었다.
사제의 시선이 짧게 마주쳤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이시엘은 그저 필요한 말만을 입에 담았다.
“스승님, 나머지 한 마리는 저와 트루데 경이 맡겠습니다.”
[에테르 감지]로 마수의 높은 레벨을 느꼈을 텐데도 이시엘의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고, 어조는 단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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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위에서는 라이사가 떨쳐 일어나 병사와 평기사들을 독려했다.
웅웅 우는 바스타드 소드는 황금빛 에테르를 입고 횃불처럼 빛났다. 수많은 전투경험이 그녀의 검격마다 묻어났다.
그림자 거미 따위 라이사의 검기에 스치기만 해도 소리 없이 소멸했다.
그녀와 보조를 맞춘 첼 역시 화려한 검식을 펼쳐, 달려드는 마수들을 일거에 서너 마리씩 베어 넘겼다.
제 몸을 아끼지 않고 최전열로 나선다는 점에서 라이사와 첼은 죽이 잘 맞았다.
“아가씨 제법 하는데!”
“라이사 경이야말로 말입니다!”
기름이 부어지고, 불이 타오른다.
함성과, 독려가 이어진다.
고립된 성채이나, 병사들의 사기는 끝도 없이 높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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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한쪽이 뜯겨 나간 공작의 침실에선 성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동시에 보였다. 이 총체적 조망 가운데 클레이오는 생각했다.
‘뭐가 빈한한 북부의 영지야. 궁사들한테 마석 은화살 같은 걸 쥐여주니까, 돈을 아무리 벌어도 살림살이가 쪼들리지….’
딴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만 딴생각이라도 해야 진정이 되었다.
열리지 않는 문고리를 잡고 선 클레이오는 필사적으로 에테르를 순환시키고 있었다.
직전에 멜키오르를 치료한 일 때문에 무슨 마법을 쓰려 해도 에테르 잔여량이 부족했다.
저 앞에선 눈자위가 모두 시커멓게 변하고 핏줄이 검어진 테오 트리스테인, 아니 과거에 트리스테인 공작이었던 자의 육신을 입은 마수 그렌델이 그르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저딴 놈은 원고에도 나온 적 없잖아. 또 이런 전개냐고, 시발.’
여왕의 정원에서 나왔던 호수의 이녕과 마찬가지였다. 에만 나오는 히든 보스들은 하나같이 골치 아프고, 더럽게 센 놈들뿐이었다.
도망갈 수만 있다면 진작 도망갔을 것이다. 문제는, 건물이 흔들리며 문틀이 뒤틀려 입구가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몇 차례 발로 걷어차 보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새카만 고목 문은 강철만큼이나 단단했다. 마법 없이 낼 수 있는 클레이오의 힘은 미약했다.
이미 피톤을 잡기 위해 [진격의 원]을 몇 번이나 썼던 태서턴 역시 에테르 잔여량이 결코 넉넉하진 않을 것이다.
‘태서턴이 세기야 세지만, 소드 마스터의 능력을 쓰는 괴물과 상대가 될 거 같진 않아.’
피톤이 낸 상처로 태서턴의 어깨는 피에 젖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상처 따위 아랑곳 않고 그렌델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등 뒤에는 멜키오르가 있었다.
자신의 생명을 바치더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을 기사의 등은 태산처럼 단단해 보였다.
‘엄청난 충성심이네… 근데 충성심만으로 놈을 잡겠냐고.’
예도를 집어 들자마자 에테르를 굽이굽이 뽑아내던 그렌델은,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듯 몸을 도사리고선 태서턴과 팽팽히 대치했다.
‘에테르… 에테르를 조금이라도 더 모아야 해.’
마침내 태서턴의 기량을 파악한 마수의 얇은 입술이 푸스스 찢기며, 양옆으로 쭉 벌어졌다. 새카매진 입 안을 드러낸 그렌델이 웃고 있었다.
클레이오는 필사적으로 방어마법을 펼쳤다. 에테르 부족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여섯 개의 분신으로 갈라진 그렌델이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그것들은 벽과 바닥을 부수며 검기를 날렸다.
태서턴 역시 지지 않고 긴 팔다리와 강건한 육신을 이용하여 비쩍 마른 이형들을 베어 넘겼으나, 둘 이상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카카카카캉!
채채챙!
태서턴에게 이형 네 놈이 붙었고, 클레이오 쪽엔 고작 두 놈이었는데도 막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8레벨 마수의 연속 공격은 몇 합만 막아내도 얻어맞는 것처럼 세찬 타격이 왔다. 치솟은 코피를 막지도 못하고 클레이오는 완드를 꽉 쥐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클레이오의 방어마법 범위 안에는 멜키오르 역시 들어와 있었다.
전부는 아니고, 왼팔과 왼다리는 서클의 범위 밖으로 애매하게 벗어나 그렌델의 새카만 검기에 피륙이 갈렸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기절을 했어도 부족할 판인데, 멜키오르는 미간만 조금 움찔하더니 느릿하게 팔다리를 추스르고서, 찬찬히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저 꼿꼿이 서, 태서턴의 목덜미에 검을 꽂아 넣으려던 그렌델을 지긋이 응시했다.
별안간 ‘약속’이 움직였다.
한 눈에는 다 읽어 내릴 수조차 없이 긴 메시지가 어두운 밤을 밝혔다.
[고유 스킬: ‘간파의 구조시(構造視)’―대상의 본질을 간파하는 눈입니다.
―사용자는 대면한 스킬 적용 대상의 본심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추가 기능으로 내력, 상태, 과거를 볼 수 있습니다.
―사용자는 스킬 적용 대상의 □□에 직접적인 물리력을 행사할…
사용자: 멜키오르 리오그난
지속시간: ∞
추가 기능 사용 가능 횟수:
추가 기능 「순종」 n회
추가 기능 「고‰⁑‡…
*이하 서사 개입도의 미달로 조회 불가합니다.]
서사 개입도가 3할을 넘어서일까. 처음 보았을 때보다 훨씬 상세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클레이오는 혀를 내둘렀다.
‘그냥도 사기스킬인데, 거기에 추가 기능이라니…!’
어느새 그렌델의 분신들은 모두 재가 되어 사라졌다.
멜키오르의 응시 속에서, 가드까지 날아간 예도를 높이 쥔 채 굳어진 그렌델은 단 한 마리였다.
그 스킬, 멜키오르의 보는 방식에는 권력과 권위가 있다.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실체적인 것이다.
태서턴은 저 두려운 존재를 기이한 열정 속에서 살핀다.
그 와중에도, 남자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상처와 출혈이 기사의 분노에 불을 당긴다. 에테르 소진의 징조로 피를 왈칵 토해낸 태서턴은, 아버지였던 육신의 심장에 망설임 없이 검을 박아 넣었다.
우드득.
무자비한 검기에 갈비뼈가 부서져 나가는 동안에도, 멜키오르에게 제압된 그렌델은 움직이지 못하고 눈가로 시커먼 진물만 뚝뚝 흘려냈다.
긴장 속에서 짧아진 숨을 쉬던 클레이오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왜 그렌델에겐 에테르 반응이 뭉친 데가 없지?’
모든 마수는 마석을 핵으로 가진다.
바르그는 양쪽 머리의 눈이었고, 피톤은 오른 심장, 호수의 이녕조차도 물 아래 잠긴 부분에서 에테르 구심점이 느껴졌다.
‘어째서 이놈은 핵이 안 잡히는 거야?!’
일반적으로는 마수의 심장이나, 눈이 핵이긴 했다. 태서턴도 그 원칙에 따라 싸움에 임한 것이리라.
태서턴의 검이 그렌델의 [강화]를 뚫고 그것의 등 뒤까지 청금빛 검기를 관통해내는 순간, 소년의 목소리가 두터운 벽을 넘어왔다.
“레이! 거기 있는 거지!”
“아서….”
그 맥없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일까?
뒤틀렸던 침실 문이 폭발하듯 부서져 나갔다.
퀘에에에엨!
동시에 태서턴은 그렌델을 사선으로 갈라버렸다. 왼팔이 달린 윗가슴과 머리가 바닥에 나뒹굴고, 오른팔이 붙은 허리와 두 발은 반대 방향으로 풀썩 비꾸러졌다. 무시무시한 힘과 검기가 결합된 결과였다.
몸이 동강나며 멜키오르가 건 금제도 풀린 듯, 둘로 나뉜 마수의 몸뚱이가 미친 듯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공작의 침실로 뛰어든 아서는 곧장 클레이오를 찾아, 펄떡이는 마수의 시체로부터 막아 섰다.
“괜찮아, 레이? 다친 데 없어?”
그렇게 말하는 막내 왕자의 꼬락서니야말로 엉망이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로 얼룩진 머리에, 외투는 어디론가 벗어던지고, 소매가 찢긴데다 땀에 푹 젖은 셔츠 한 장 차림.
걱정과 격정이 뒤엉켜 거의 초록색으로 보이는 소년의 눈빛에, 클레이오는 응답해줄 수가 없었다.
크에에에에에에엣!
아서의 어깨 너머로 보였다.
두 동강 나 있던 그렌델의 몸에서 수은처럼 끈적한 에테르가 스물스물 흐르더니, 결손된 팔다리와 목이 순식간에 돋았다.
이형화와도 달랐다.
그저 그렌델이 두 마리가 된 것이었다.
‘…그렌델의 마석은 수은인 거야!’
클레이오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저, 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멜키오르가 다시금 스킬을 썼다. ‘약속’의 메시지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고작 몇 초간이었지만 두 마리의 그렌델, 이제는 검조차 없이 바닥을 네 발로 짚은 마수가 찢어진 입을 벌리다 멈추었다.
뒤늦게 인식된 ‘약속’의 메시지는 온통 경고였다.
멜키오르의 고유 스킬이 과부하를 일으켰다.
왕세자의 흰 뺨 위로 피가 섞여 선홍빛이 된 눈물이 흘렀다. 성모상이 피를 흘리듯 불길한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