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33
세 번의 봄 (2)
“훌쩍.”
“이제 좀 진정이 돼?”
“펭~.”
자전거와, 자전거에 매인 샴페인 두 박스를 조심스레 내려둔 아서는, 근처의 그루터기에 1학년을 앉힌 뒤 인내심을 가지고 울음을 달래주었다.
더럽고 구깃구깃한 자신의 무명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기 미안했는지, 클레이오의 빳빳한 손수건까지 징발해 간 그였다.
“갑자기 자전거가 튀어나와서 놀랐지. 정말 미안해.”
조그만 여자애가 울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클레이오보다는 아서가 이 상황에 훨씬 도움이 됐다.
“어디 가던 길이야? 데려다줄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혼자서 괜찮겠어? 응?”
흙먼지로 가려놨지만, 골격이 근사한 금발의 검사는 필시 아서 왕자일 것이다.
왕자님과, 동경하던 마법사 선배가 엉망인 꼴인 자신을 살피고 있는 상황에서 릴리안은 빠져나가고 싶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녀는 두 청년을 마구 손짓해 쫓아냈다.
“괜찮으니, 일 보세요. 고마웠어요.”
“아니면 류바 사감선생님을 불러다가….”
“됐다니까요! 가세요! 조금만 쉬다가 갈 길 갈 거니까요.”
릴리안은 토라진 말투로 소리쳤다. 목소리 끝에서 숨기지 못한 부끄러움이 묻어나왔다.
아서는 거대한 강아지가 다친 어린애를 핥아주려는 것처럼 주변을 맴돌았다.
연신 이름을 물어보는 아서 앞에서 하급생은 고개만 휘저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기 싫은 모양이었다. 민망함이나 부끄러움에 대해 아서보단 자각이 있는 클레이오가 왕자를 끌어냈다.
“아서, 그만하고 일어서. 너는 혹시라도 더 아픈 데 있으면 꼭 의무실에 가 보고. 치료가 필요하면 3학년 클레이오 아세르 앞으로 연락 줘.”
하급생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럼 또 봐!”
샴페인 두 박스가 매달린 자전거를 번쩍 든 아서와, 자신의 자전거를 느릿느릿 끄는 클레이오가 숲을 가로질러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릴리안이 헛, 하고 헛숨을 내쉬었다.
“아, 학장님의 편지 전해줘야 했는데….”
릴리안은 손에 남은 손수건만 괜스레 꽉 쥐어보았다. 머리에선 심장이 뛰고, 심장에선 열이 나는 것 같았다.
고급스런 원단으로 만든 손수건 가장자리엔 KA라는 이니셜이 멋들어지게 새겨져 있었다.
“정말로, 신문은 다 거짓말이었잖아.”
천 줄의 미사여구도 그 마법과, 그 마법을 만들어내는 사람에 대해 적확하게 서술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17세의 릴리안 베넷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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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학년인가. 많이 놀란 건 아니겠지? 우리 본 건 말 안 하면 좋을 텐데. 제베디가 알면 귀찮아지잖아.”
“상처는 완벽하게 치료했고 혹시 몰라서 [경감]도 걸었어. 술 상자인 건 못 알아봤길 빌어야지.”
“윽, 주류 반입 금지령 한 번 더 어기면 징계랬는데. 절대 걸리면 안 돼. 차라리 육체노동이면 몰라, 마법식 강제 암기 처벌 또 받으면 난 살 수가 없어.”
이 2년간 클레이오와 아서가 교내 징계를 받은 사고는 모두 음주와 관련이 있었다.
술 먹고 에테르로 장난치다 등나무 아치를 다 말려 죽인 지난겨울, 제베디는 두 사람에게 교내 금주령을 내렸다.
물론 그 둘이 명령을 제대로 지킬 턱이 없었다.
“그러게 누가 앞뒤 안 살피고 내달리래.”
“시내를 가로질러 오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서 그랬지. 이러다간 내일이 돼야 판 벌일까봐 걱정이 되잖아.”
생각해보니 더 괘씸했다. 냉대받았다 해도 일국의 왕자이며, 어디 가서 팔뚝질 한 번 못 해본 놈이 남 앞에선 서민 출신인 척을 다 했단 말인가.
“내 생일 축하는 핑계고, 그냥 네가 얼른 마시고 싶은 거 아니냐?”
“에이, 레이! 넌 안 마시고 싶은 것처럼. 응? 리오그네스는 오랜만이잖아! 두 달 동안 네가 나보다 한 살 많을 기회인데 연장자 우대도 해 줄게! 첫 잔은 네 거!”
오늘은 클레이오의 생일인 5월 1일이었다.
이전 생에서도 별로 챙겨본 적 없고, 이번 생애에서도 낯선 날을… 클레이오는 그냥 받아들였다.
어차피 자신의 생일을 스스로 골라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아, 해 넘어갔으면 그냥 둘 다 열아홉이지 뭘 생일로 따져.”
아서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매사에 꼼꼼한 네가 나이 셈하는 건 그렇게 대충이라니 믿을 수 없어. 새해에 일제히 나이를 먹는다고?”
아주 드물게 클레이오는 아서의 말에 움찔했다.
김치 없이도 살고 있지만 한국인의 습성을 못 버린 단 한 부분이었다. 해가 지나가면 아이들 나이를 한 살씩 높여 생각하는 셈법.
‘첼은 생일이 1월 1일이라 편한데, 이놈은 늘 귀찮게 굴어.’
“그러면 모두 항상 같이 나이 먹으니까 기억하기 편하잖아.”
“그렇게 아무렇게나 눙쳐도 넘어가주는 건 나 정도일걸. 아무튼, 빨리 가자. 애들이 기다리다 목 빠질지도 몰라.”
이날은 디오네까지 함께 모여 축하를 해 주기로 했다. 그래서 아서는 아세르 저택의 지하 셀러에 맡겨 두었던 샴페인을 찾아오는 데 서둘렀던 것이다.
아서와 이시엘, 첼과 쌍둥이들, 그리고 클레이오는 바로 어젯밤 수도에 도착한 탓에 준비가 늦어졌다.
걸음을 재게 놀리던 아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참, 레이. 대주교관엔 다음 주쯤 갈까?”
“…그래.”
“연락 넣어 놓을게. 거기도 오랜만이다.”
작년 초봄의 접견 이후 서서히 상태가 나빠진 이스토리아 대주교는, 다시금 긴 잠으로 빠져들었다. 주교관 역시 폐문했다.
폐문한 대주교관엔 원칙적으로 입장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클레이오는 절기에 한 번씩 잠든 주교를 접견할 수 있었다.
지난 여름방학, 이시엘과 함께 세인트 파틴 도서관에 한참 처박혀 있던 아서가 방법을 찾아 왔던 덕분이었다.
직계 왕족의 고해는 대주교가 들어주어야 한다는 거의 사문화된 규정이 구실이었다.
이미 카르멜라 여왕 시절부터 고해를 하는 왕족은 없었기에 룬데인 교구의 상층부는 혼란에 빠졌으나, 결국엔 3왕자의 청원을 들어주었다.
전적으로 아서의 주가가 폭등한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속화된 알비온의 교회는 정부에 속해 있는 도덕적 지침이자 구빈 기관에 가까웠다. 즉, 인간사의 풍파에 다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여왕의 정원’과 ‘원형 극장’―연이어 두 개의 ‘기억된 세계’를 파훼한 아서는 더 이상 교회가 무시해도 될 만한 사생아가 아니었다.
클레이오는 아서의 호의를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일방적으로 한쪽이 베풀기만 하는 사이는 다른 한쪽에게 부채감을 지우기 마련이다. 클레이오는 그런 방식으로 타인을 자신에게 연루시키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이름과 생일을 받아들였대도 그의 내면엔 여전히 과거에 대한 기억이 중첩되어 있었다.
클레이오가 레지나 이스토리아의 잠든 옆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자신이 어디서 도래한 존재인지 잊지 않으려는 의식에 가까웠다.
레지나 이스토리아의 출생기록이 올바르다면 그녀의 연령은 120세를 향해 간다.
마법과 신성력이 존재하는 세계이기에 사람들은 그녀의 존재를 용인하지만,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데 늘 같은 호흡을 유지하며 잠들어 있는 레지나의 모습이 클레이오는 경이롭고 기이했다.
어쩌면 마법보다도 더.
대주교관의 고위 사제는 신성력의 흔적이 그녀의 육신을 유지하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아서가 고해를 신청하는 과정은 여러 단계이지만, 클레이오가 잠이 든 레지나를 바라보다 나오는 시간은 늘 오 분 정도였다.
부쩍 자란 아서는 주교의 침실까지 같이 따라와 클레이오의 접견 동안 문가를 지키곤 했다.
안젤리움 쌍둥이와 같이 ‘레이가 대주교님을 목하 짝사랑 중임.’ 따위의 놀림을 입에 담긴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믿지는 않을 터였다.
아서는 그 기묘한 면담에 대해, 신의 대리자가 떠나간 신의 전언을 기다리는 부질없는 행위라 여기는 것 같았다.
클레이오는 아서의 오해를 정정하는 대신, 늘 그렇듯 침묵만을 적절히 배분했다.
원형 극장의 파훼 이후부터 클레이오는 가능한 한 진실되게 행동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세계의 틈새를 찢고 아서에게 새로운 앎이 주어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서의 추측은 크게 틀린 것도 아니었다.
클리오는 클레이오의 여신이었고, 그에게 세계를 부여한 존재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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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제자 연구실은 메리디에스 대륙의 해안 국가 우니카의 양식이었다.
알비온에선 매우 보기 드문 스타일로, 몇 세대 전 학장이 우니카의 풍물에 반해 사비로 지은 건물이라 들었다.
복잡한 장식을 인 흰 기둥, 중정에는 귀퉁이를 맞춘 포석, 남색, 청록색, 붉은색의 기하학적 모자이크 타일로 벽과 바닥이 장식된 주랑, 어두운 티크 원목의 문과 덧문.
얼핏 보기에는 멋진 건물이었다. 클레이오가 처음 입주했을 때에도 청소와 보수는 완벽하게 되어있었다.
문제는 단열이었다.
클레이오는 ‘이 날씨 구물구물한 동네에 미쳤다고 사철이 여름인 나라에나 어울릴 건물을 지었냐고!’ 생각하며 내면적 분노를 드러냈지만… 미의식 높은 디오네와 첼은 연구실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
어쨌든 겨울은 갔고, 지금은 봄이다.
주랑 아래 양지바른 자리에서 해를 쬐던 베헤못이 하품을 했다. 그리곤 분홍빛 혀로 뒷다리 안쪽을 핥기 시작했다.
잔등에서 반드르르 윤이 나는 고양이를 바라보던 이시엘이 반사적으로 손을 움찔거렸다.
스읏.
에메랄드빛 타일 위의 간이의자에 앉아 가운 대신 흰 비단을 두른 이시엘의 밀빛 목줄기 위로, 은도금한 미용 가위의 날이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이런 이시엘, 가만. 움직이면 다쳐.”
“미안하다.”
“못 선생이 너무도 유혹적이긴 하지. 뒷머리만 좀 더 다듬으면 되니까 잠시만.”
“아니다. 마음에 차도록 천천히 해라.”
“하하, 고마워. 그럼 오늘은 좀 더 짧게 다듬어 볼게.”
“머리가 짧으면 준비시간이 줄어드니 편리하겠군.”
“아니, 준비시간이 문제라면 내가 매일 아침 말려 줘도 되는데.”
“한 달에 한 번 머리를 다듬어 주는 것도 고마운데, 매일 어떻게 첼 네 신세를 지겠나.”
첼에게선 숨 쉬듯 나오는 달콤한 말에도 이시엘은 무심히 응대했다.
중도 자퇴자가 생긴 지난해부터 두 사람은 하우스 메이트가 되었다. 한 해는 정석의 모범생 이시엘도 첼의 말투에 익숙해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루밍을 마친 후 뒷발로 턱 아래를 살살 긁던 베헤못이 들리지 않는 항의를 했다.
“웨에에에에에에웅?(첼 저것은 제 재주가 거기까지인 걸, 왜 본묘 탓을 하는고?)”
고양이가 웨옼거리자, 디오네가 움직였다.
그녀는 보고 있던 특허료 정산 서류를 탁 덮었다. 고양이 곁의 야외 탁자에 앉아 일을 하려던 건 너무 큰 꿈이었다.
의자 위에서 두 팔을 내밀자 베헤못은 거만한 태도로 그녀의 품에 가 착 안겼다.
디오네는 세상을 다 가진 얼굴로 고양이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에구 우리 못이, 첼 누나 재주가 별로에요? 사람이 보기엔 아주 빼어난 미용 솜씨인데, 영묘님껜 다른 거겠죠?”
능숙한 자세로 가위를 쥔 첼은 이시엘의 단발머리 수평을 딱 맞춰가면서도, 농담을 건너뛰지 않았다.
“디오네 당신까지 저 뚱심술묘의 포로가 되다니… 질투를 금할 수가 없군요.”
“뚱심술묘라뇨.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런 못이를요. 아무튼, 첼도 의외의 재주가 있네요.”
“후후, 매력적인 반전이죠?”
“확실히요. 누가 탕페트 드 네쥬 집안의 귀한 영애에게 그런 기술을 전수했나요?”
“그것도 역시 외할머니의 가르침이죠. 자르는 법, 컬을 만드는 법, 봄철 무도회용 머리 올리는 법, 결혼식 날의 머리 장식법까지 전부요.”
디오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리 탕페트 드 네쥬가?’
평생 손끝에 물 한 방울 안 묻혀봤을 것 같은 노부인을 디오네는 먼 기억 속에서 떠올린다. 요즘 시대엔 듣기도 어려워진, 구식으로 귀족적인 카롤링거어 억양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