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38
세 번의 봄 (7)
그러는 동안, 이시엘이 리피를 정석대로 몰아붙여 연병장 가장자리까지 밀어냈다. 쌍둥이 중 언니는 장소를 벗어나는 실격패를 당하게 됐다.
그 과정이 너무도 깔끔하여, 학년을 불문하고 검사반 학생들은 모두 눈에서 에테르가 뿜어져 나올 만큼 집중해 대련을 지켜보았다.
클레이오 역시 멀리서 들리지 않을 박수로 이시엘을 치하했다. 어쩐지 그녀가 연습실 방면을 쳐다본 것도 같았지만 짧은 순간이라 확실하지 않았다.
그다음은 늘 그렇듯 이시엘과 아서의 대결이 되었다. 어떻게 대진표를 짜도 결국엔 둘이 남는 게 977기 검사반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 왕자가 이기게 되지. 천재기만 한 게 아니고 노력파이기까지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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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마친 날은 늘 그렇듯 시내의 펍으로 몰려나갔다.
학교에서 전차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펍 ‘퀸 카르멜라’는 어느새 아서와 친구들의 단골집이 되었다.
늙수그레한 주인은 수완이 좋아, 두 쌍둥이가 찾아대던 트리스테인 산 스트롱 에일까지 들여놓았다. 기차로 오크통을 실어 온다는 스트롱 에일은 퀸 카르멜라 술집의 명물이 됐다.
적당한 구석자리에서 모두들 맥주를 한 파인트씩 비웠을 즈음, 클레이오는 품에서 미에츠의 편지를 꺼냈다.
무미건조한 공문용 서식 봉투에는 엄격하고 절도 있는 필기체로 주소가 쓰여 있었다.
여전히 트리스테인 공작저에 ‘객원’ 기사로 머무르고 있는 미에츠가, 수도방위대 학교 제베디 학장의 ‘제2연구실’로 보낸 편지였다. 제2연구실은 클레이오가 차지한 건물의 정식 명칭이었다.
클레이오는 무심결에 봉투 겉면을 손끝으로 쓸어봤다.
‘아서 저놈이 쓰는, 안 어울리게 구식으로 멋진 글씨체까지도 미에츠 선생에게 물려받은 거라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지긴 해. 지 친애비보다 더 아버지 같잖아.’
클레이오는 이시엘에게 슬그머니 편지를 건넸다. 연구실로 편지를 받는 건 만에 하나 모를 유출을 피하고자 택한 방식이었다.
딱딱한 마법 이론이나 마석 정보라도 문의하는 것 같은 모양새지만, 봉투의 내용물은 이시엘과 아서에게 안부를 전하는 시시콜콜한 편지였다.
편지를 뜯어본 이시엘이 그 내용을 아이들에게 전했다.
북부 영지의 소식을 듣던 첼이 낄낄 웃었다.
“너희 스승님은 금세 떠날 것처럼 굴더니 아예 눌러앉으셨네.”
“아무래도… 트리스테인 기사단원의 상당수가 수도로 임지를 옮겼다 보니, 남은 이들이 적어 기사가 부족한 영지의 사정이 눈에 밟히시는 모양이다.”
태서턴이 이끄는 위풍당당한 트리스테인 기사단원 서른 명은, 궁성에서 멀지 않은 서안의 하류에 주둔지를 얻었다.
압살롬 2세가 지었던 헤브론 성은 카르멜라 여왕 대에 폐쇄되었다가, 수십 년 만의 보수를 거쳐 트리스테인 기사단의 새로운 본부가 되었다.
울창한 숲과 연무장이 딸린 고풍스러운 성으로, 요즘의 룬데인 부동산 시세를 생각하면 왕실 가족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내어줄 수 없는 위치와 면적의 부동산이었다.
멜키오르가 트리스테인 기사단을 높이 대우한다는 정치적 제스처라고, 사람들은 해석했다.
‘신년회나 탄신연 때 보면 공작위에 오르기 전과 마찬가지로 잠자코 수행기사 노릇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게 다일 리 없지.’
수도로 내려온 트리스테인 기사단의 정식 명칭은 ‘왕세자 근위대’. 고작 서른 명의 기사가 일으킨 풍파는 작지 않았다.
수도방위대 기사단장 피어스 클라겐의 경우, 수도에 두 기사단이 필요하지는 않으니 자신의 휘하로 그들을 편입시키란 의견을 왕실 자문위원회 안건으로 공식제출했다.
물론 그 안은 논의조차 기각당했단 이야길 들었다. 왕실 자문위원회에는 태서턴 역시 소속되어 있는데, 그는 말도 없이 피어스를 망신 준 격이 되었다.
국왕이 가진 최대의 무력집단 수장으로서 거들먹거려온 피어스의 위상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인망이라곤 없는 피어스이다보니, 귀족들까지도 그의 망신에 은근히 고소해 한다는 후문이었다.
“스승님이 말은 막되게 해도 정이 깊어서 그러면 절대로 못 떠날 거야. 노후준비는 웬걸, 키시온 자작령보다 더 추운 데로 가가지곤 머리도 노인네처럼 급 허예져갖고.”
“아서 님, 말씨를 좀. 스승님도 쉰 살이 다 되어 가시는데 머리가 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시엘이 정색하자 첼이 아서를 돕듯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래, 아서. 그 나이엔 대머리 안 되고 숱이 풍성하기만 해도 선빵이야. 이시엘, 하던 이야기 계속해 줘!”
“이번 여름에는 결국 북벽의 보강공사를 마무리했다는군. 로탄 경은 오히려 망설였는데 라이사 경이 과감히 밀어붙여서 가능했다고 한다.”
“휘유~, 그 사자머리 기사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더라니, 토목공사까지 잘 해내는구나.”
“라이사 경에게 사자 머리라니! 천둥벌거숭이인 아서 너에 비하면 천 배는 멋진 기사 아니냐.”
첼이 아서의 말에 반격하는 사이 이시엘이 편지의 다음 장을 다 읽었다. 둘의 아웅다웅에 익숙한 이시엘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또, 수도로 파견됐던 트루데 경이 근 이 년 만에 장기 휴가를 받아 공작령으로 돌아와서… 삽질을 많이 해야 했다는군. 수도에 있을 때도 즐거움을 누리기는커녕, 트리스테인 공작과 함께 지독한 수련만 해 불만이 크다고 한다.”
사정에 밝은 게, 이 년이 아니라 이십 년은 트리스테인 영지에서 있었던 사람 같았다. 미에츠는 이미 공작령의 사람으로 취급받는 듯했다.
‘8레벨 소드 마스터에, 저런 성정의 인물이 지난 원고에서 눈에 띄지 않았던 건 말이 안 돼. 미에츠 역시 이번 원고에서 대폭 변화한 인물 중 하나라고 판단해도 되겠지.’
아서의 말투 역시 그렇지 않은가.
클레이오가 과거에 읽었던 원고 속 주인공은 서사시의 인물답게 고풍스럽고, 이입을 배제하는 방식으로만 말했다.
그의 성격적 특성은 변치 않았으니, 달라진 것은 이번 생애의 그를 만든 경험일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미에츠와 함께 보낸 유년 시절이 큰 자리를 차지하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모친을 잃은 아서에게 검을 쥐는 방식뿐 아니라 새 잡는 법과, 낚시하는 법을 알려주었던 스승과의 나날이.
형식은 안부편지이지만 미에츠의 편지에선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많았다. 기사단원 중 누가 공작령에 잔류했는지, 공작령의 현황은 어떠한지 등이었다.
그 정보를 조합하면 멜키오르가 휘하의 직속 근위대를 어떻게 부리고 있는지도 윤곽이 잡혔다.
수도에 온 후 어디에도 출정하지 않은 기사단은, 헤브론 성에서 두문불출하며 기량을 쌓는 데 힘쓰는 것 같았다.
왕세자에 대한 기묘한 맹목성을 제하고 보면 태서턴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기사이자 영주였다.
주군에게 충성하고 영지민에게 자비롭고 기사단원들의 상벌에 공정하다. 개인적 사치나 영달을 전혀 추구하지 않고 검소하게 생활한다. 누구보다 열심히 수련에 매진하며 앞서 기사단원을 이끈다.
젊고 미혼인 트리스테인 공작의 위상은 상당히 높았다.
그래서 클레이오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검집에 들어 있다 해서 검이 아닌 것은 아니고. 때를 오래 기다릴수록, 칼을 빼들 일에선 망설이지 않겠단 뜻이겠지.’
딱 두 파인트씩의 맥주만 비운 아서와 아이들은 통금시간이 되기 전에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아직 노동시간 단축안이 합의되지 않아 전차는 여전히 운휴 중이다.
클레이오가 뒤처지자 리피가 먼저 클레이오를 번쩍 들더니 반 접어 어깨에 걸치고 뛰기 시작했다.
몇 블록이 지나자 이번엔 레티샤가 비틀거리는 클레이오를 넘겨받아 거리 여섯 개를 가로질렀다. 항의할 틈도 없었다.
학교에 도착했을 무렵엔 하얗던 클레이오의 얼굴이 아예 새파래져버렸다.
다시는 사람을 마음대로 들고 뛰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한 뒤, 겨우겨우 방으로 돌아와 씻고 나서야 정신이 좀 났다.
자기 전 속을 가라앉히려고 그랑 마니에르를 얼음 한 조각 넣은 코디알 글라스에 따라 베헤못과 나눠 마셨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였다. 마석 장판을 시동시키고 고양이와 함께 일찍 침대에 들었다.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주제가 둥실둥실 떠다녔다. 트리스테인 기사단. 영지. 북벽. 라이사.
클레이오는 미에츠를 통해 부러 실명으로 라이사에게, 북벽 수리에 쓰라고 마광석 주철을 보냈다.
‘로탄이나 라이사는 당연히 자신의 주군이 하는 선택을 따르기야 하겠지만, 또 언젠가 결정적 순간에 잠시의 망설임만 더해줘도 되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해둔 분산투자였다고 할까.
그르르릉. 푸우.
꼬물대던 베헤못이 잠들어 코고는 소리를 내고 털뭉치에 턱을 파묻고 있던 클레이오 역시 곧 잠에 빠져들었다.
시험은 마쳤고, 배는 부르고, 술도 적당히 취하니 딱 잠이 잘 왔다.
여느 때와 같은 평온한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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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은 폭력의 예감 가운데 잠을 깨운다.
흐려 음울하게 느껴지는 에테르 가운데 클레이오는 눈을 떴다. 바닥에 떠오른 형상은 분명했다. 누군가가 발동시킨 [방음] 마법식이었다.
침실 문 아래의 틈으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지각」을 켰다.
훈련받은 군인. 적어도 여섯 명 이상의 징 박은 군홧발 소리. 기마병사. 화기와 냉병기 둘 모두가 걸음과 함께 흔들리며 내는 미세한 소음. 길들인 가죽과 피, 화약의 냄새.
이윽고 클레이오의 문 앞에서 모든 걸음 소리가 멈췄다.
그와 동시에.
우드득! 지끈!
끼이이이이! 탕!
기숙사 침실 문이 무작스럽게 뜯겨나갔다.
아무런 계급장도 붙어있지 않은 어두운 남색 제복을 입은 자들이, 문틀 바깥에서 지레와 도끼를 들고 서 있었다.
익숙한 일인지 좁은 공간에서 여럿이 움직이는 데도 서로를 전혀 방해하지 않고 업무를 수행해냈다.
그들의 등에는 연발소총이, 허리춤엔 리볼버가 매여 있었다. 완전히 무장한 병사들이었다.
챙그랑.
탁자에 놓아두었던 코디알 글라스가 떨어져 깨졌다. 마룻바닥 위로 오렌지 술과 얼음 녹은 물이 미지근하게 섞인 액체가 튀었다.
벽시계가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느새 클레이오의 품을 벗어난 베헤못이 꼬리를 펑 터트리며 털을 곤두세웠다.
“캬아아아아아아앜!(해도 안 뜬 시각에 무슨 짓이냐!)”
희미한 잠기운마저 모두 달아났다.
벌떡 일어난 클레이오는 우선 베헤못을 품에 껴안아 달랬다.
클레이오에게 베헤못은 둘도 없는 친구이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길이 덜 든 집짐승에 불과했다.
이 밤중에 들이닥친 병사들이 임무에 방해 되는 짐승을 곱게 대해줄 것 같지 않았다.
클레이오는 여러 가능성을 검토했다.
방에 펼쳐져 있는 마법식은 고작 소리만 막는 것이었다. 자신보다 레벨 낮은 마법사의 서클을 격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새로이 서클을 열고, 감속 마법을 걸어 창으로 몸을 빼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섣불리 행동해선 안 된다는 판단이 클레이오의 행동을 막았다.
또각, 또각또각.
뜯겨 나간 문 안으로 키 작은 여성이 등장한다. 무표정하게 늘어선 장정들 사이에서 같은 제복을 입고 나타난 중년 여성은 굽 낮은 구두를 신고 찬찬하게 걸었다.
극히 무던한 태도로, 마치 지금이 한낮이고 자신은 잠시 방문한 손님인 양 긴급 소환장을 내미는 사람은 관료적으로 친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5레벨 마법사 클레이오 아세르 경, 알비온 내무보안국의 소환에 응하도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이 밤중에 무슨 일입니까.”
“자세한 사항은 소환장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느긋하게 봉투를 건넸다.
침대 위에 엉거주춤하게 앉아, 정강이까지 밀려올라간 잠옷 차림으로 고양이를 끌어안은 학생을 상대로는, 모욕적으로 느껴질 만큼 정중한 태도였다.
낯설도록 오랜만에 ‘약속’이 달아올랐다.
생경한 속도로 「기억」이 되감겼다.
긴 머리채를 땋아 화관처럼 둥그렇게 두른 여인의 머리 위로 ‘약속’이 메시지를 띄워 보냈다.
[3레벨 마법사]학교 선생 같은 몸가짐,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묘하게 상대를 비껴나는 시선, 한 세대는 유행이 지난 헤어스타일.
클레이오는 곧 그녀가 누구인지 추측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통성명이나 소개 없이 상대의 정체를 알아낸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어느 모로 봐도, 어머니의 심정으로 멜키오르를 달래려 하는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베스나 드리스콜.
과거에 읽은 것과는 달라진 또 한 명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