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41
알비온의 목가 (3)
《아세르 상사 조사부 귀중》
《제 이름은 사이러스 머천트로, 파리사 시에서 아세르 상사의 직영 소매점을 15년간 운영해왔습니다.
파리사 시는 핀토스 산맥의 중부에 자리해 고도가 높고 교통이 불편한 지역입니다. 키시온 영지의 주도이자, 동북 수비군의 군영이 자리한 곳이기도 합니다.
영지의 토양과 기후는 척박하고, 인력으로 막을 수 없는 눈사태와 산사태가 종종 일어납니다.
키시온 자작의 양심적인 통치에도 그리 풍족할 수 없는 땅이지마는, 군영이 위치한 도시치고는 분위기가 험하지 않습니다.
브룬넨과의 국경이 맞닿아 있다 한들 전쟁은 오래전 일이고, 키시온 자작은 규율을 중시하여 영지민에게 행패를 부리는 군인은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핀토스 산맥 최북단은 험준한 산세가 천연의 방벽이 되어주는 데 반해, 이곳의 지형은 비교적 완만합니다.
그렇다 한들 큰 짐이 오갈 길은 아니다 보니, 브룬넨과의 무역과 인적 교류는 물자를 이동시키기 쉬운 남쪽의 클로토 강을 따라 이루어지지 이곳엔 교역소가 없습니다.
즉 고립된, 조그마한 읍입니다.
대신 산등성이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압살롬 방벽이 세워져 있습니다. 방벽 위엔 일정한 간격으로 번호가 매겨진 감시초소가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키시온 자작저와 군영은 방벽의 이편에 자리합니다.
자작저는 압살롬 2세 치세에 마법으로 세워진 성이라 지반이 굳건하고, 외성벽은 포탄을 맞아도 부서지지 않을 두께입니다.
그러나 지금 키시온 자작의 성채에는 더 이상 서측 외성벽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평화로운 파리사 시에서 상사의 조사부로 급보를 보낼 일이 일어난 건 어제가 처음입니다.
먼저 증언의 신빙성을 보증하기 위해 개인적 배경을 첨언합니다.
저는 수도에서 상업학교를 졸업했기에 기사들에 대해 무지하지 않습니다. 또한 카르멜라 여왕의 전쟁에 관해서도 배운바 있습니다.
그러나 어제 새벽 키시온의 성을 무너뜨린 자의 무력은 능히 인간을 초월했다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보통 새벽에 일어나 장부를 정리합니다. 그래서 제때에 사건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새벽 세 시경, 엄청난 충격이 읍내를 뒤흔들었습니다.
다락방 창이 다 덜컹여 처음엔 지진이 일어난 줄 착각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강렬한 은빛 번개가 폭음 속에서 솟아올랐습니다.
물론 그건 번개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번개가 땅에서 하늘로 솟아오른단 말입니까?
부득이하게, 상품인 망원경을 꺼내 키시온 자작가의 성을 살폈습니다.
렌즈에 비친 건 충격적인 광경이었습니다.
한 남자가 성벽 앞에 서 있었습니다.
갑옷의 색이 어두워 처음엔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그가 다시금 검기를 내뿜기 시작하자 그 먼 거리에서도 눈이 시릴 빛이 터져 나왔습니다.
금빛이 아니라 확실히 은빛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소드 마스터였습니다.
기사의 단칼에 외성벽의 망대가 무너지고, 두 번째 검격에 백여 년을 버틴 굳건한 성문이 불시에 무수한 자갈로 돌아갔습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말입니다!
성벽 앞에 선 암청색 갑옷의 기사는 이내 넷으로 신형이 나뉘어 무너진 외성벽을 넘어 안으로 몸을 날렸습니다.
어둠과 먼지 때문에 내성에서 벌어진 일은 옳게 보지 못했지만,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붕괴된 버팀벽이 해자를 메우며 쏟아지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천지를 울리는 우르릉거림 때문이었습니다.
폭압적인 은빛 에테르의 궤적을, 황금빛 검기를 띄운 서른 명 남짓 기사들이 뒤따랐습니다.
제가 허황된 사교를 믿는 자였다면, 종말의 사도들이 지상해 거했다고 여겼을 광경이었습니다.
당연히 키시온 병영에서도 반격에 나섰습니다.
곧 포문이 열리고 포가 발사되었습니다. 연사되는 총탄의 소음이 밤하늘을 잡아 찢었습니다.
병사들의 일사불란한 대응과 키시온 영지 기사들의 분투에도 싸움의 승패는 명백해 보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총성이 모조리 멎었습니다.
저는 두려움에 몸이 떨려 망원경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침입자들의 행색이 낯설어, 당연히 브룬넨 측의 침공이라 예상했습니다. 이 영지를 공격할 세력은 그들뿐이니까요.
저는 정체불명의 기사들이 벌이는 일방적 파괴행위에 대한 급보를 전하기 위해 1층 가게로 내려왔습니다. 헌데 수화기를 들어보자 전화 회선은 이미 끊겨 있었습니다.
보통 일이 아니다 싶어 의관을 바로잡고 문을 나서려 한 순간, 내려둔 철창을 거세게 두드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숨죽이고 귀를 기울여보니, 이 지역에선 접하기 쉽지 않은 매끄러운 표준 알비온어가 들려왔습니다. ‘중앙 정부의 조사입니다. 문을 여십시오.’란 말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화를 갖춘 장소는 모두 군인의 방문을 받았더랬습니다.
그들은 전화가 불통이 된 경위를 설명해주었습니다. 키시온 영지의 불법사병 양성 사건을 조사 중이라고요.
저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날이 밝자 광장에 벽보가 붙더군요.
동북 수비군의 감사가 끝날 때까지, 관공서와 우체국, 기차역의 업무를 중지하고 모든 거주민은 오후 6시까지만 외부 출입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르모리크 경’이라는 직인이 가장 아래에 찍혀 있었습니다. 귀족의 계보에 어두운 저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이 휘두르는 권력은 거짓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날이 훤히 밝았는데도 역엔 기차가 한 대도 들어오지 않았고, 수송 마차 역시 모두 산의 초입에 억류되었습니다.
파리사 시 전체가 봉쇄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감히 덧창도 열지 못하고 집에서 숨을 죽였습니다.
시내에서는 높은 곳에 위치한 성채가 잘 보였습니다.
절반쯤 폐허가 된 자작저를 목격한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벽보의 명령을 어기겠습니까?
불안의 첫날이 느리게 지나갔습니다.
다행히 그 다음날부터는 생필품을 실은 마차만 겨우 출입을 허가받았습니다. 저희 상회도 처음 보는 기사와 군인들의 감시하에 짐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물품을 정리하기도 전에 초와 기름 등을 징발하기에 제가 직접 성까지 옮겼습니다.
상회의 짐꾼과 함께 배달 마차를 타고, 그동안 수백 번은 오갔을 성의 진입로에 들어선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혔습니다.
가까이서 본 성채는 옛이야기에 나오는―저주를 받아 하룻밤 새 폐허가 된 도읍을 방불케 했습니다.
성의 서면은 거인의 발에 짓밟힌 듯 무너져 있었습니다.
저는 가능한 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물품을 옮겼습니다.
내성의 안마당, 영주관과 창고는 무사했습니다만 건물이 무사한들, 사람들이 모두 무사한 건 아니었습니다.
벽의 총탄자국과 검게 말라붙은 핏자국들이 종종 눈에 띄었습니다.
주의를 기울여 봤지만 영주님이나 키시온의 기사들은커녕, 얼굴을 익힌 병사 한 명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파되고 피가 흐른 성내는 놀라우리만치 평화로운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내막을 눈치껏 캐보느라 애를 끓였습니다.
암청색 갑주를 갖춰 입은 기사들은 투구를 내려놓고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곳이 마치 그들의 성이고, 일상적인 대련을 하다 막간의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투구 아래의 얼굴들은 순박했고, 몇몇 젊은 기사는 짐을 옮기는 저를 도우며 친절하게 굴었습니다.
와르르 농담을 하거나 담배를 나눠 피며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은 모두, 뚝뚝 끊기는 북방의 억양을 썼습니다.
그들이 어느 기사단 소속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짐작건대 키시온 자작은 브룬넨 측의 도발을 대비하여 몇 년간 병력을 늘려왔던 것 같습니다. 중앙의 지원이 닿지 않아 개인적으로 벌인 일이지 싶습니다.
어쩌면 행정적 불찰에 불과한 문제일 수도 있는데, 기사들은 마치 반역 도당의 본거지를 습격한 듯한 태도였습니다.
어제 새벽의 습격은 아주 유효했던 것 같습니다. 만사 방비를 하는 성미인 키시온 자작이 제대로 된 대응도 못 한 채 구금당하고 말았으니까요.
애초에 말입니다, 그런 초월적인 무력을 가진 소드 마스터와 자비를 모르는 기사들 앞에서, 동북 군영의 평범한 기사와 병사들이 어찌 대처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갖춘 암청색 갑옷의 견장에는 호수, 투구, 사선으로 가로질린 검의 문장(紋章)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견문이 짧아 가문을 특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조사부에서 조회해 보시기 바랍니다.)
짐을 다 옮기고 담배를 한 순배 돌려도 더 캐낼 이야기가 없어 물러나려던 차, 그 은빛 에테르의 기사를 맞닥뜨렸습니다.
피가 말라붙은 검을 쥐고 내성에서 걸어 나오는 그이는, 한눈에 알아보겠더군요. 아직 덜 가셔 몸 주변을 감도는 은빛 에테르 덕분이었습니다.
한 자루 검처럼 벼려진 단단하고도 단련된 지체는 보통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나타나자 방금까지 웃으며 농담을 하던 기사들 모두가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담배를 눌러 끄고, 웃음을 멈추었으며, 벗어둔 투구를 다시 제대로 썼습니다.
그가 이들의 지도자, 아르모리크라는 기사임이 분명했습니다.
서른 명이 한 몸이 된 듯 발을 척 구르자 먼지구름이 일며 천지가 진동했습니다.
그들은 용맹하고도 무도한 군대, 기사 서른 명이서 능히 일개 여단을 상대할 무위를 갖춘 자들임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은빛 에테르의 기사는 가까이서 보니 검의 성취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젊은 얼굴이었는데, 드문드문 푸르게 바랜 머리카락과 목줄기를 비스듬히 가로지르며 난 상처가 특이했습니다.
그 이상은 살피지를 못했습니다. 상인으로서 제법 배짱이 있다 자부하던 저였으나, 그 기사 앞에선 절로 고개가 수그러들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자작령 봉쇄의 책임자인 소드 마스터는 아주 오래된 가문의 일원일 것입니다.
요즘 시절에는 어지간해선 볼 수 없는 자세와 태도를 가진 이였습니다. 상당한 장신이기도 했지요. 사람을 해방 전의 농노처럼 굴도록 만드는 인물이었습니다.
물러나 성을 내려오고 보니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그날 이후에는, 성에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풀려난 사용인들 말론, 키시온 자작과 그의 후계자가 여전히 성에 구금되어 있다고 합니다.
부디 업무에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1892. 5. 22.
키시온 영지 파리사 시 주재 아세르 상점 대표 사이러스 머천트 발송.》
클레이오는 다 읽은 편지를 내려놓았다.
제아무리 변경의 소도시라도 아세르 상사의 상회는 있기 때문에 알게 된 비보였다.
바꿔 말하자면, 그 정도 파이프라인을 가지지 않고선 알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고 신속하게 키시온 영지 습격이 이루어졌단 뜻이 된다.
불면의 피로에 편지의 정보가 더해지자 관자놀이 부근이 묵직하게 쑤셨다.
‘트리스테인 기사단이 키시온 영지를 급습한 건 이미 이틀 전 일이란 거군.’
태서턴 트리스테인이 키시온 성에 돌입한 시각, 룬데인에선 아서와 친구들의 체포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제 구금의 목적은 명확해졌어. 아서와 애들이 키시온 영지 수색을 방해하지 못 하게 하려던 거야.’
의회의 인가 없이 시작된 수색이다. 시간을 끈다면 여론이 나빠질 테고, 증언이나 증거를 확보 못 한다면 키시온 자작을 구명하려는 움직임도 대두될 것이다.
‘…그리고 미에츠라는 변수.’
고작 한 주 전 도착한 미에츠의 편지에는 이런 사태에 대한 암시가 전혀 없었다.
트리스테인 영지에 남은 나이든 기사들은 수도로 간 자들이 맡은 임무를 모르는 게 분명했다.
‘이걸 알았으면 미에츠가 가만두고 봤을 리 없지. 아서에게 알리고 본인도 키시온 영지로 부리나케 달려가 일이 저렇게 안 되도록 항전했을 거야.’
그리고 미에츠가 그렇게 행동하리란 건 멜키오르 역시 예상했으리라.
‘애초에 왕세자는 이 편지교환 역시 눈치채고, 우리 쪽에 미흡한 정보가 들어가도록 놔뒀던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그때 간파의 구조시로 미에츠의 레벨을 파악했다면, 이런 일을 칠 땐 키시온 영지에서 떨어뜨려 두는 게 합리적이었다.
태서턴 트리스테인이라 해도 소드 마스터가 막아섰다면 그토록 손쉽게 키시온 영지를 장악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뭣보다 트루데에게 휴가를 보내준 게 결정적이잖아.’
아이들과 특별한 친교를 나누었던 기사들이라 해서 공작의 명령을 어기진 않겠지만, 만에 하나 손속을 늦출 만한 가능성마저 소거시킨 것이다.
사이러스의 편지에 묘사된 기사들은, 클레이오가 침식을 함께했던 솔직하고 순박한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잘 웃고 재미있는 사람들인 동시에, 잔인하고 강경한 자들이다. 멜키오르 리오그난에게만 손잡이를 허락하는 날 선 칼이다.
클레이오가 편지의 내용을 완전히 받아들이길 기다리던 기디온이,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 편지는 생필품을 실어 간 수송 마차의 빈 상자 아래 덧붙어 왔다. 비상 연락수단이지. 수송마차도 지금은 출입이 중지됐고, 키시온 영지는 완전히 봉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