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45
알비온의 목가 (7)
클레이오는 다시금 프란의 편지를 펼쳤다. 한 자 한 자 놓치지 않고 재료로 삼아, 자신의 탄환으로 주조해내기 위해서였다.
《…
내가 도착했을 땐 이미 전투가 벌어지는 도중이었다.
초소에 접근하지 않고 원거리에서 ‘판별의 안경’과 ‘선명의 망원경’, ‘메아리의 증폭’을 써 상황을 파악했다.
곧 전투가 일단락되고 중상을 입은 기사 둘이 동료에게 들려 나가더군. 상당한 출혈이 있었고, 초소 역시 대파되었다. 폭주한 브룬넨 군인 두 명 중 한 명은 교전 도중 사망했다.
그 과정에서 6레벨에 달하는 힘을 발휘하던 한 놈은 결국 포로로 잡혔다.
이제껏 내가 조사한 바는 아래와 같다.
히드라의 독 복용자들은 발현된 에테르 레벨이 중급 이하일 경우 명령을 들을 정도의 이성이 보전되나, 발현된 에테르 레벨이 6레벨에 달하면 일견 멀쩡해 보여도 피를 탐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히드라의 독을 복용할 당시 피험자의 에테르 레벨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헌데 이번 놈은 6레벨의 스킬을 쓰면서도 당장 흡혈을 하지 않을 만큼의 자제심을 가졌고, 언어능력 역시 남아 있었다.
지켜보고 있자니 히드라의 독 복용자 특유의 발작 증상은 점점 심해졌다.
눈이 시뻘겋게 터져 광망을 흩뿌리고, 붉은 에테르가 몸 주변을 불처럼 넘실댔다. 아마 수명이 길게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놈은 이성을 유지했다. 들어보니 처음엔 브룬넨어로, 나중에는 카롤링거어로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자는 브룬넨의 군벌 귀족이다.
‘나는 귀족이며 기사이다. 천한 자들에게 연행될 수 없다. 예의를 지켜라. 이 고통은 독을 극복해낸 나의 용기와 의지에서 기인한 것이다. 나는 훈련 도중, 사고로 인해 국경을 넘은 장교이다. 적법하게 브룬넨으로 돌려보내라.’라고 명령해대더군.
다만 그를 연행하는 기사들은 그의 말을 전혀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알아듣는다 한들 곱게 대해 줄 이유는 없었을 테지.
암청색 갑옷의 기사 중 사망자는 없었지만, 6레벨 기사를 상대하다 보니 중상자가 서넛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사들이 어찌 취급하든 이번 복용자의 팔에 두른 계급장은 장교용이고, 머리카락은 윤기 나게 길며, 억양 역시 귀족의 그것이었다.
그의 말이 매우 조리 있는 것으로 보아, 강제로 실험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자의에 의해 히드라의 독을 복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마수의 준동 이후 독의 원재료인 마수의 피 수급이 손쉬워졌다. 그러니 실험 재료는 풍족해졌겠지.
그 결과 이젠 귀족 출신 기사에게도 투약이 가능할 만큼 독의 성분을 안정화시켰다는 뜻이 된다.
히드라의 독을 제조하는 자들은 본거지를 브룬넨으로 옮겼으며, 심지어 브룬넨의 군부 혹은 지역의 영주와 유착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너는 이해하리라 믿는다. 자세한 사항은 조만간 직접 전달하겠다.
추신. 상황이 바뀔 때마다 증거가 될 만한 ‘순간 초상’을 남겼으나, 거리가 멀어 선명히 찍힌 것은 여섯 장에 불과하다. 그중 세 장을 동봉한다.》
완전히 의외일 내용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히드라의 독을 만든 흑막이 쥴레이카란 심증은 있었다. 다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한 것인지에 대한 증명이 안 됐던 것뿐이었다.
‘지난 원고에서도 아슬란은 왕자의 난 끝에 핏줄을 내세워 자신이 두 나라의 왕관을 모두 쓸 수 있다고 주장하지. 그게 좀 더 빨라지고, 수단이 더 잔인해진 것뿐이야.’
어쩌면 지난 생에서 아슬란이 소드마스터가 되기 위해 썼다는 ‘부정한 방법’이 ‘히드라의 독’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때는 이렇게 이른 시기에 마수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마수 피의 수급도 지연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보다 뒤처져 실험을 하고, 아서보다 뒤늦게 소드마스터에 이른 것일지 누가 알겠는가.
무고한 이들의 생명을 희생하여 만들어진, 불안정한 독에 힘입어.
‘인간의 잔학성이 신의 상상을 뛰어넘은 거지.’
지난 세계, 스무 번째 세기의 기억을 가진 클레이오에겐 전혀 놀라울 것도 탄식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신이 이전 세계를 지우고 새로이 마지막 세계를 쓰기 시작한 이유가 더 나은 결말을 위해서라면, 신이 계획하지 않은 독의 발명 역시도 재개정을 결심할 이유가 되었을 것 같았다.
‘다른 세상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새로이 세상을 쓴다 한들, 그 시도가 꼭 성공하는 건 아니었던 거지.’
슈우우우―
[차폐] 마법식의 지속시간이 다 되어 서서히 빛이 흐려졌다. 서클에 다시금 에테르를 주입한 클레이오는 잡상을 떨쳐버렸다.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됐다.
우선은 당면한 상황을 타개하는 데에만 집중하자.
엉킨 채 나풀거리는 머리카락 안쪽에서 멜키오르에게 반격할 계획이 형태를 갖춰 갔다.
그가 미디어를 이용한다면, 이쪽도 미디어를 이용하면 된다.
그가 홀로 직권을 틀어쥐고 독재자처럼 군림한다면, 이쪽에는 손을 맞잡을 여러 사람이 있다.
그는 그가 결코 시도하지 못할 대응에 맞닥뜨려 아서를 놓아줘야 할 것이다.
단 한 번만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해볼 만한 모험이었다. 클레이오는 차갑게 침착해졌다.
.
.
.
오후 세 시 정각의 종소리가 이 구석진 여관의 복도까지 들려왔다.
삐걱삐걱.
타박타박.
또각또각.
뒤이어 계단을 올라오는 두 사람의 말소리가 문을 넘어왔다.
“그 총각이 아가씨 애인이야?”
“그런 건 아니에요. 아직 편지만 몇 번….”
“에이그, 아까 보니 말라갖고 매가리라곤 없어 보이더만. 나 같으면 그런 놈은 사위로 안 삼을 건데.”
“그렇지만… 좋은… 다정한… 분이에요.”
“그려, 둘 다 숫기가 없는 게 죽이 맞나봐. 좋을 때지, 좋을 때야. 저기 202호이니 가 보셔. 허허허.”
아까 클레이오를 안내했던 주인과,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가늘고 불안정한 음색으로, 수도 토박이의 노동자계급 억양을 썼다.
배 나온 주인이 바닥을 쿵쿵 울리며 계단을 내려가고 나자 복도엔 한 사람만이 남았다.
‘올 사람은 한 명밖에 없지만, 설마….’
클레이오는 「지각」을 켜 얄팍한 나무 문 밖의 상대를 살폈다. ‘약속’이 잡아내는 상대는 한 사람, 그리고 한 마리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아주 자그마하게 울었다.
“먀아―.(열어라―.)”
문을 여니, 복도엔 등을 움츠린 하녀밖에 안 보였다.
검은 목면 하녀복 위에 외출용 코트만 걸치고, 수수한 모자를 쓴 차림은 일하던 중 급히 빠져나온 모양새였다.
수줍음을 타는 듯 라탄 바구니의 손잡이를 꽉 쥐며 바닥만 쳐다보는 갈색 머리의 하녀는….
‘으아아악.’
클레이오는 비명을 속으로 눌러 참고서 방문객을 얼른 객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는 엄청난 속도로 [방음][차폐] 마법식을 펼쳤다.
벌컥!
마법의 기운을 느끼자 베헤못은 바구니의 뚜껑을 박차고 펄떡 뛰어나왔다.
거대묘를 담은 바구니가 빵 바구니라도 되는 양 가볍게 들고 있던 메이드는, 연극배우처럼 양손을 들어 올린 뒤 빈 바구니를 탁 놓았다.
움츠렸던 등을 쫙 펴자 단번에 하녀의 키가 몇 센티는 커졌다.
메이드 제복을 입은 첼이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하고 오라곤 했지만… 정말 의외성 넘치는 변장인데, 첼. 길에서 봤다면 절대로 널 몰라 봤을 거야. 괜히 오월 무도회 연극의 스타가 아니었구나.”
두 해 연속 왕자님 역을 맡았던 첼은 청소 담당 하녀 역도 엄청나게 잘 연기해냈다.
여관 주인은 지금도 하녀와 시골뜨기 사무원이 풋풋하게 데이트라도 하고 있으리라 여길 것이다.
“너야말로. 이런 거지 같은 여관에서 유행이 애매하게 지난 보울러 햇을 눌러쓰고 있으니, 어디 시골 상회의 어리숙한 사무직원 같네! 흠, 숫기 없는 청소 담당 하녀의 편지 애인으로 딱 좋아.”
“그, 그래. 그런 설정이구나… 바가지요금까지 순순히 내고서 이런 여관에 방을 잡은 보람이 있네.”
“지금 룬데인에선 환대산업 총회가 열리고 있으니 곳곳이 붐비고, 외지인들이 많아져 비밀정보부가 일하기도 쉽진 않겠지. 우리에겐 기회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두 사람은 자연스레 손을 맞잡아 악수하고는, 피차 초췌한 서로의 낯빛을 살폈다.
할 말이 너무 많아 잠시 말을 멈춘 동료 사이로 거대묘가 풀쩍 뛰어 끼어들었다.
“웨오오오오옭!(하이고오오, 삭신이야!)”
클레이오는 공치사를 하는 베헤못의 양 볼을 쓰다듬어 치하한 뒤, 웱웪거리는 노묘를 위해 하나뿐인 침대를 내어 주었다.
아침부터 뛰어다닌 베헤못의 발은 거리의 흙먼지로 더러웠지만 어차피 객실도 시트도 냄새나고 퀴퀴해, 때 좀 묻은들 티가 날 것 같지도 않았다.
“우에에에엥, 에우우우웅.(침대가 영 누추하나, 내 피곤하니 참는다.)”
“수고 많았어, 베헤못. 이 일만 마치면 샴페인에 몸을 담그고, 실크를 휘감고 잘 수 있도록 해 줄게. 너 아니었다면 어떻게 일을 해결했을지 몰라.”
“에옹, 에우욻.(알면 됐다, 약속은 지켜라.)”
“응, 꼭.”
클레이오는 어리광을 피우는 베헤못의 턱 아래를 살살 긁어주며 첼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양이와 클레이오가 상식을 벗어난 대화를 나누는데 익숙해진 첼은, 놀라는 대신 티 테이블 위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가발 위에는 낡은 모자가 얹혔고 뺨에는 색이 안 맞는 화장품이 발려 있지만, 클레이오가 아는 바로 그 첼이었다.
“어디서 그런 옷을 다 구했어.”
“가발은 요즘 점점 머리숱이 줄어드는 우리 하녀장 거, 옷은 세탁실에 있던 거. 외투는 설거지 담당 하녀 건데, 꼭 돌려줘야지. 식재료를 실어내는 뒷문으로 나오느라 별수 없었어.”
“집 안에서 추리소설을 한 편 시연했구나.”
“일하는 아가씨들을 귀하게 대해온 덕에 동선 파악이 쉬웠다고 해 두지.”
은빛 눈을 휘며 묘한 눈웃음을 치는 게, 영락없는 평소의 첼이었다. 어떤 차림새를 해도 본연의 빛은 가려지지 않는다.
동료 한 명과 합류한 것만으로도, 클레이오의 마음은 이상할 만치 차분해졌다. 침착함을 되찾자 난데없는 변장에 놀라 눈치채지 못했던 에테르 반응을 감지해낼 수 있었다.
「지각」을 켜니 더 선명했다.
하녀 제복의 높은 칼라 아래에 활성화된 티플라움 반응이 있었다.
“…첼 너 지금, 제압구를 찬 거야?”
“오, 그게 보여? 장래의 대마법사님이 다르긴 다른데.”
“누가 그런 짓을 한 거지? 너는 네 어머니가 보석금을 치렀다고 들었는데, 설마 왕세자가 다시―.”
클레이오가 평정을 잃으려 하자, 첼은 이제 자신보다 키가 더 큰 청년의 양어깨를 잡아 티 테이블과 세트인 나무 의자에 눌러 앉혔다.
내려다보니 클레이오는 더 초췌해 보였다. 첼은 생각했다.
‘이 녀석은 안 그래도 말라서 눈이 커 보이는데 저렇게 치뜨니 톡 빠져버릴 것 같네.’
싸구려 여관의 부실한 의자는 가벼운 클레이오의 무게도 못 버티고 기우뚱 다리가 기울었다.
“아냐. 이거 우리 엄마 짓.”
“뭐!?”
“그래도 베헤못 저 똘똘한 게 네 쪽지를 갖다줘서 접선할 방도를 찾았네. 덕분에 살았어.”
에테르가 묶인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첼은 어머니와의 일을 간단하게 요약했다.
“…내가 누굴 닮았냐니, 엄마도 참. 난 어딜 가나 카타리나가 한 명 더 있는 것 같단 소리 듣는데. 아무튼 수면제 때문에 비몽사몽 하던 중, 베헤못이 찾아와 정신이 확 들도록 고양이 펀치 맛을 보여줘서 일어날 수 있었지.”
“그럼 그 뺨의 상처는 설마 베헤못이 한 짓이야?”
어색하게 화장품을 얹고 온 이유는 가까이서 보아야 알 수 있었다. 뺨의 상처를 덜 두드러지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아니, 이것도 엄마가.”
클레이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지나치게 역동적이라, 그로선 상세한 상상이 불가능한 모녀의 역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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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은 프란의 편지를 읽고 클레이오의 설명도 들었다. 머리가 비상하니 상황 파악이 빨랐다.
“키시온 자작을 구명하려면 온 수도에 초소 습격 소식이 쫙 퍼져야 한다 이거지? 그의 증언이 변명이 아니란 증명이 될 테니까. 브룬넨 놈들이 남의 나라 국경을 기막힌 타이밍에 습격해 줬군.”
“그래, 천운이지. 터트리는 방법에 따라선 호외로 역 앞이 빽빽이 뒤덮일 거야.”
“그렇다면 클라리온? 프레젠티아? 룬데인 스탠다드?”
“클라리온은 일간지가 아닌 데다 독자 수가 너무 적고, 프레젠티아는 교차검증 안 된 정보는 안 실어. 룬데인 스탠다드는 중산층 사무직들이 주로 보니 딱 좋지만, 호들갑 떠는 대신 변경의 작은 마찰 정도로 서술할 가능성이 높아.”
“그걸 다 빼면 스위프트 가제트와, 이브닝 스타가 남는군.”
학교엔 비치되지 않고, 캔튼 부인이 아침에 가져다주지도 않는 종류의 신문 이름을 첼은 딱 알맞게 꼽았다.
어느 오페라 가수의 불륜 소식, 어느 귀족의 사생아가 유산의 권리를 주장하는 소송, 선박이 침몰해 자살한 사업가의 유령 소문 등 흥미 위주의 가십이 실리는 신문으로서, 가장 가격이 저렴하고 독자가 많았다.
“그래. 그 정도 황색지가 딱 좋아.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커다랗고 천박하게 뽑는.”
“둘 중에선 스위프트 가제트가 낫겠어. 사주가 부친을 브룬넨과의 전쟁에서 잃어서, 이런 이야기라면 크게 부풀리고 싶어 할 거야.”
“딱인데?”
“딱이지. 찌라시 기사 써서 돈을 얼마나 쓸어 담았는지, 사옥 지하에 최신식 자동식자 주조기도 들여놨다고.”
“그러면 인쇄용으로 활판을 짜는 시간이 엄청나게 단축되겠군.”
“바로 그거야.”
긴 치맛자락을 대충 구기고 앉아, 오른 발목을 왼 다리 무릎 위에 얹은 첼이 눈을 빛냈다. 굴욕을 되갚을 기회를 얻어 신이 난 표정이었다.
클레이오도 머리를 굴려봤다.
이미 바틀비 씨 인쇄소에서 봤듯 증기 실린더식 인쇄기가 일반적으로 보급되어 있으니, 인쇄판만 짜면 시간당 이만 부 이상 인쇄가 가능했다.
‘제보를 곧바로 발표한다고 가정할 때, 호외라면 금세 찍어서 수도에 깔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