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49
알비온의 목가 (11)
“…이전 생애의 저를, 기억하십니까? 저로서는 알지 못하는 과거입니다만.”
“오로지 사후적으로 아는 것도 아는 것이라면. 기사 키시온이 이전 생애의 그대에게 작은 도움을 베풀지 않았던들, 그때의 기디온 아세르가 궁지에 몰린 키시온 군령에 자금지원을 할 정 같은 것은 없었겠지.”
‘약속’의 「기억」이 빠르게 되감겼다.
여덟 번째 세계에서 키시온 영지 전투가 일어났을 때, 정치적 농간으로 중앙의 지원이 끊긴 키시온 군영에 긴급 자금을 댄 익명의 기부자는 역시 기디온 아세르가 맞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강에 빠진 클레이오 아세르를 건져내서였던… 거였나.’
클레이오는 기도에 물이 든 것처럼 숨이 가빠왔다. 그 짧아진 숨의 주기를 눈치챈 왕세자는 흡족한 표정이 된다.
멜키오르는 더 이상 시계를 확인하지 않았다.
“신이 예비하지 않은 형태로, 자유로이 죽을 권리를 가졌던 그 애는 나보다 처지가 나았을지도 모르겠네.”
아홉 번의 생애 동안 한 번도 얻지 못했던 종류의 청자를 눈앞에 둔 희미한 흥분이, 왕세자의 뺨을 옅게 물들였다.
사람이라면 눈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으나, 왕세자의 아름다운 외견을 지배하는 정조는 절제된 광기이다.
“이렇듯 강력한 축성을 받은 자도 알지 못하는 게 있군그래. 하기야, 그것은 그대에게 축복이 어리기 전의 일인가? 한때 아세르 준남작에겐 이르게 죽은 섬약한 자녀가 있었네. 붉은 머리 기사가 물에서 건져냈지만, 때가 늦어 숨이 멎은 아이 말이야. 하지만 이제 내 앞에는 이르게 죽을 뻔한, 수도의 영웅이 존재하는군.”
멜키오르는 나붓이 입술을 움직여 덧붙인다.
“나는 그의 이름을 모르고, 어쩌면 애초에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존재였을지도 모르지.”
적어도 멜키오르가 기억할 수 있는 명명의 사건은 없었다. 성별조차도 불명확한 자녀는 그저 기디온 아세르의 행동 아래에서만 희미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렇듯 반복되나 동일하지 않은 세계 안에선 어떤 기억도 가볍지 않고, 어떤 인물도 주변적이지 않다.
멜키오르는 신의 방식에 익숙하다.
“과거를 기억함에도 불구하고, 내 싸움이 왜 그리 불리했는지 아나? 그건 매번 규칙과 패를, 인물의 역할과 의미를 바꿔버리는 판에 서야 했기 때문이었지.
맨 처음에 테오필라는 성도 없던 시골뜨기 신녀였다네. 예언의 능력 따위 없는 순진한 처녀였어.
그러나 여덟 번의 반복을 겪은 후 그녀는 강력한 신의 의지를 대리하는, 성스러운 테오필라 이그레인이 되었지.”
그 반복되는 생애 동안 멜키오르는 가만히 앉은 채 운명에 순응하지 않았고, 세계는 그의 저항에 반응하여 더 큰 억압을 일으켜왔다.
“그럴 때에 나는 신의 임재(臨在)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네.”
―그를 좌절시키는 신의.
왕세자의 말은 클레이오를 향한 것이 아니라, 클레이오를 그 자리에 있도록 한 신의 의지를 향한 것이다.
나는 당신을 알고, 당신이 행한 일을 안다는 웅변.
“나는 이번 생이 기껍네. 세계를 유지하려는 억지력이 약해졌음을 명백히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전에도 나는 매번 치료사를 트리스테인 영지로 보냈었지만, 테오 트리스테인이 그토록 오래 자신의 생을 붙잡고 있었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
젊은 아르모리크 공자로 하여금 부친살해의 죄를 알게 한 것 역시 최초였지. 슐리만의 영지를 급습할 수 있었던 것까지도, 완전히 처음이야.”
넋 나간 마법사를 내버려 둔 채로 왕세자는 손수 차를 준비하기 위해 일어섰다.
작은 화로에 올려 둔 뜨거운 물을 찻주전자에 붓고 간단히 우려내 찻잎을 거른다. 다구의 달각임 가운데, 강 건너 학교의 시계탑 종소리가 겹쳐진다.
퍼뜩, 정신이 났다.
클레이오는 여전히 목적을 잊지 않고, 본래의 목표를 제대로 달성해가고 있었다.
시간을 끄는 것.
달칵.
멜키오르는 클레이오 앞에도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금 원래의 자리에 앉아 먼저 차를 마셨다.
그의 손에 들리면, 의회의 인장만 찍힌 저렴한 공산품 자기조차도 일종의 예술품으로 보인다.
역설적이게도 이 순간의 멜키오르는, 클레이오가 그를 알아 왔던 세월 중 가장 인간다운 느낌을 준다.
그는 마치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길 원하는 모험가처럼 굴었다.
“그대는 ‘예측’의 성흔을 가졌으니, 언젠가 내가 할 일 역시 알겠군. 그걸 보았나?”
달그락.
「이격」조차도 다 막아내지 못한 동요는, 클레이오가 쥔 찻잔 위로 파문을 일으켰다. 멜키오르에게는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그래서 그토록 나를 두려워했나? 내가 그대를 그저, 어린 동생의 친우로만 대할 적에도?”
더 물러날 데도 없건만 클레이오는 저도 모르게 등받이를 향해 몸을 물리게 된다.
그렇다.
이전 생애에서, 두 강 사이의 전쟁 끝에 멜키오르가 저지른 죄업의 목록은 길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셌던 건, 세상의 에테르를 모조리 폐한 일이었잖아. 정말 그게 목적이었는지, 우발적인 사고였는지, 자신의 의지였는지, 저자의 안배였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냉정하나 공정하고, 군림하나 현명했던 왕세자가 어째서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는 누구도 밝힐 수 없었다. 오로지 왕가의 광증에 의한 것이라고만 추측되었다.
서사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방식, 신의 의지가 서린 벼락이나 폭풍처럼, 역할을 끝낸 그에게는 공교로운 광증의 저주가 내린 것이다.
‘운명은 반드시 실현된다.’는 형태로.
‘아서가 보던 환시… 핏속에서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멜키오르의 모습은 아마 그 순간의 것이겠지.’
이야기의 마지막에 다다라 살해와 겁박으로 대관식의 형식적 조건을 갖춘 왕세자는, 불길하고도 미약한 일식을 일으켰다.
아슬란을 처치하며 심각한 부상을 입은 아서는 태서턴을 넘어서지 못하고 멜키오르를 만류하는 데 실패했다.
아서 자신을 불리한 전장에 몰아넣었을지언정, 알비온의 궁성은 굳게 지켰던 형제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이 망설임에 몇 초를 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이 하늘의 틈새가 가늘게 찢겼고, 멜키오르는 축성의 권리를 악용했다.
알비온 왕국의 대관식은 일식의 때에 왕이 축성을 내리는 것으로 끝난다. 그 관습은 일종의 [언약]이었으며, 축성의 문구는 율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찬가의 힘을 아는 이, 영구한 권세를 누리라.’
멜키오르는 왕국을 천 년간 이어지도록 했던 약속을 파괴했다. 축복 대신 저주를 낭독함으로써.
그 순간 마지막 므네모시네의 문은 세계 바깥으로의 연결을 잃었으며, 세상을 감돌던 무형의 에테르는 대부분 흩어져 사라졌다.
이곳은 이미 신들과 한없이 멀어진 세계였기에, 세계 저편과의 희미한 연결은 맥없이 소멸했다.
멜키오르의 마지막 말은 기록되지 못했으므로, 그가 어떻게 세상에서 에테르를 박탈했는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왕세자의 최후는 신화적인 불분명함 속에 남았다.
‘하지만 므네모시네의 문을 폐한다 한들 저 작자가 바라는 대로 세상이 완전히 끝장날 리가. 엄청난 고통과 희생이 뒤따랐다 해도 역사는 이어지는데.’
클레이오가 살았던 이전 세계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기사가 검기를 잃고, 마법사가 치유력을 잃었어도 티플라움의 에테르만은 활성화가 가능했다.
또한 상대적으로 에테르 감응력이 낮은 연구자들의 능력은, 상급 기사들의 능력보다 한층 오래 지속되었다.
불완전한 일식 직후 핏물 속으로 침몰한 멜키오르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모를 수밖에.
알비온에서 채굴되는 엄청난 양의 티플라움은 문명세계 전체에 귀중한 유예를 제공했다.
대륙을 폭력적으로 정복하려던 브룬넨을 저지하고, 마법이 과학으로 교체되는 고난의 시기를 지탱해 준 것이다.
굶주림, 질병, 기간시설의 붕괴는 엄청난 인명을 희생시켰다.
그렇게 스무 번째 세기의 목전에, 인류는 세계의 재정립을 겪었다.
에테르 상실의 진통 가운데, 인간들은 그 자신만의 힘으로 신이 떠난 세계를 운영하는 법을 배웠다.
신화의 시대는 역사의 시대로 이행되었으며, 가장 앞장서 그 일을 해낸 것은 바로 아서 리오그난이었다.
오로지 의지로 빚어진 자, 인간의 왕인 아서는 왕국의 과학아카데미와 수도방위대 마법단의 평범한 연구자들을 독려해 새 시대를 열었다.
다시금 열차가 제시간에 대륙을 가로지르고, 광산이 석탄을 안정적으로 생산해낸 때에 이르러서야, 아서는 미루어두었던 대관의 의식을 거행했다.
그것이 과거 클레이오가 읽었던 1부의 종장이었다.
클레이오가 생각하기에 가 맞이한 결말은 충분히 온당한 것이었다.
신들은 자신들이 만든 세계를 떠나고, 인간의 역사는 클레이오가 익히 알던 철의 세기로 수렴하는 것.
그리하여 읽는 이에게 서정적인 슬픔을 안기는 부분까지도 ‘사라진 과거의 황금시대’라는 소재의 빼어난 변주라 여겼다.
‘그리고 그 모든 고난을 인간은 결국 극복해 낸다는 데서 독자를 안심시키는 구조였잖아. 그 가운데 아서는 충분히 훌륭한 주인공이자, 왕이었다고만… 여겼지.’
다정하고도 결점이 적은 역사를 빚어낸 무사이가 이토록 공들여 조성한 세계를 다시 쓰기로 결정한 이유를 자신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깨달음은 항상 그렇듯, 뒤늦게야 온다.
‘여신은 애초에 철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 자체를 바라지 않은 건가?’
그럴 때가 아님을 알면서도 클레이오는 스스로를 조소하고야 만다. 그는 저자의 의도 혹은 신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대리인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아직은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지 않았다. 자책을 할 호사스런 여유는 없었다.
그렇게,
이지러졌던 헤이즐의 눈동자에 지성의 빛이 돌아오는 것을, 멜키오르는 흥미롭게 관찰한다.
“…네. 보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요.”
“그때에도 나는 기뻤다네. 나의 퇴장은 항상 다른 형태였지만, 이 정밀한 세계의 천판을 뜯어낼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생애를 통틀어 그때가 처음이었거든.”
“하지만 저하, 그런다 한들 인간의 역사는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데 그 시도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그 역사가 흡족하였다면 왜 신은 세계를 되돌렸을까? 보시기에 좋지 않았음이 분명하잖은가. 그렇듯 신의 은총이라 불리던 에테르를 폐할 수 있다면, 은총이 이어진 틈을 거슬러 오를 수도 있겠지.
앞으로도 다시 아홉 번 정도 이 고통스런 반복을 견뎌낸다면 나는 언젠가 신의 펜 끝을 꺾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클레이오의 낯이 희게 질리는 걸 포착한 멜키오르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하, 진정 두려운 것은 그저 신의 뜻에 휘둘리는 나 같은 자가 아닌데 어찌 그리 정색을 하는지.”
빈 찻잔을 내려놓은 멜키오르는 한갓지게 말했다.
“역사의 변곡점을 확정시킬 능력은 오로지 아서에게만 주어져 있고, 그 애가 움직여야만 사건은 역사가 돼. 신의 냉엄한 펜 끝은 그 외의 일들을 누락하지. 그대 역시도 그 애의 생명과 이 세계의 지속이 조응하는 요소임을 알잖나.”
더 이상 아서는 ‘그 애’라고 불릴 만한 모습이 아니었지만, 멜키오르는 장성한 청년을 여전히 어리디 어린 막내처럼 불렀다.
사람이 살아내기에는 너무 많은 생애, 아홉 번째의 삶을 사는 자에겐, 이제야 겨우 열아홉 살을 목전에 둔 청년이 아이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앎이 주는 고통은 어떠했나?”
“신의 이끄심 없이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군요.”
멜키오르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짐짓 실망을 연기한다.
“이런, 신의 선택을 받은 이에게 내 처지에 대한 이해를 구함은 참으로 덧없는 짓이었군. 오래 산 자의 미망이지.”
뎅―
어느덧 시침이 한 바퀴를 돌아, 오후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 본론을 시작도 못 했는데, 시간이 야속하도록 빠르군. 자, 이제껏 한 번도 찾지 않던 나를 그대가 찾은 것은 모두 아서 때문이겠지?”
클레이오는 부정하지 않았다. 서로 믿지 못할 말을 굳이 해서 뭐 하겠는가.
“나는 그 애의 목숨을 거둬갈 생각이 없으니, 그리 안달하지 않아도 돼. 감히 어찌 그러겠나? 또다시 양막을 찢고 산도를 빠져나오는 순간으로 되돌아가기를, 나 역시 원치 않는데.”
떨림을 숨기기 위해 거의 마시지도 못한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온갖 정보가 한꺼번에 밀려든 머리가 어지러웠다.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그랬던 거였나.’
거의 전능해 보이는 왕세자조차도 가 마지막 원고이며, 이것은 다시 쓰일 수 없는 상태임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알았다면… 자길 지독하게 취급하는 신의 세계 따위 후련하게 멸망시켜버렸겠지.’
그것은 반드시 숨겨야 할 진실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다면 멜키오르는 아서를 살해하고 세상과 함께 소멸하길 택할 테니까.
그리하여 영구한 평화를 얻을 것이다.
‘내 이름 앞에 붙은 이런저런 수식어들, [경감]을 해줄 수 있는 마법사니, 신녀가 예언한 자니 하는 건 그저… 위장이었던 거였어.’
세계의 존망을 뒤흔들 수 있는 대적자로부터 가장 중요한 진실을 은폐하려는 장치로서.
그때였다.
날카로운 이명이 클레이오의 머릿속을 쑤셨다.
삐이이이이이이이―
세계가 멈춰서는 소리였다.
이어, ‘약속’의 금빛 글자가 경고를 담아 산란했다.
세계의 구성에 깊이 연루된 존재가 강압 속에서 피 흘리고, 고통받으며, 비명을 삼키고 있었다.
하늘의 가장자리로부터 먹처럼 검은 운무가 밀려들었다.
저것은 영광의 구름이 아니다.
붕괴의 전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