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50
영구하지 못한 평화를 위하여 (1)
멀리 도시의 경계가 흑과 백으로 부스러지고, 태양이 한낮의 선명함을 잃는다.
익숙한 파열이었다.
클레이오는 이 변고의 원인을 알았다. 아서가 겪는 생명의 위협이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 쿵쾅거리고, 입 안이 버석하게 말랐다.
왕성 북문과 의회 사이의 거리는 몇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미칠 것 같았다.
비명소리조차 차단된 그 차가운 지하에서 아서는 도대체 무슨 일을 겪고 있단 말인가.
‘그래. 아서를 죽이진 않을 거야. 죽이면 끝인 건 저 작자도 아니까. 하지만 죽지만 않는다고… 그 애가 무사한 건….’
더 이상 「이격」조차도 불안을 막아내지 못했다.
클레이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챙그랑.
소서가 미끄러져, 차를 담은 자기의 굽이 떨어져 나갔다.
희끄무레한 박명 속에서 멜키오르는 청신한 웃음을 짓는다.
그의 시선은 클레이오를 비껴나 천천히 창밖으로 향한다. 강물조차도 흐르기를 멈춘 종말의 풍경 속으로.
“저 장관이, 세계에서 오로지 경과 나에게만 주어진 것이라니. 이 무슨 농간일까.”
그랬다. 멜키오르의 말은 맞았다.
몇 년 전 여름 아서가 다쳤을 때에도, 이시엘은 세상과 함께 멈추어버려 이변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클레이오는 왕세자와 대거리를 할 여유가 없었다. 앎의 연민 따위, 세상 전체의 멸망 앞에서 휘발돼버렸다.
북문 지하까지의 최단 경로를 가늠한 클레이오가 그대로 창으로 뛰어내리려던 순간,
파아앗―
흥분으로 인해 한계까지 확장된 「지각」에 폭발하듯 발동되는 치유 마법의 기운이 포착됐다.
‘도대체… 누가!’
간절한 마음이 ‘약속’의 능력을 증폭시킨 것일까?
왼손 검지의 반지가 뜨겁게 열을 내더니, 클레이오의 눈앞에 흐릿한 글씨의 잔영을 내비쳤다.
치유 마법이었다. 고작 3레벨 마법사가 시전하는 것이었지만, 에테르의 사용 방식이 능란했다.
마법식을 극도로 작게 전개해, 강도를 높이고 낮은 레벨을 만회하는 방식이었다.
하얗게 질려 식은땀에 젖은 클레이오를 아랑곳 않고, 멜키오르는 미지근해진 차를 자신의 빈 찻잔에 더 따랐다.
“갈 텐가? 물러나도 좋지만 한 가지는 알아두게. 수도방위장을 수여받은 이가 반역죄에 연루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라는 걸. 왕국의 역사에 남을 사건이 될 테지.”
손마디가 질리도록 힘을 줘 창틀을 붙들었던 마법사는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한 박자 늦게 고삐를 잡은 「이격」의 작용이었다.
“데르니에 대륙 최강의 광역 공격 마법사와 동북 수비군의 사령관이 가담하여 반역을 일으키려 했다면, 아서의 계승권 박탈에 관한 안건을 왕실 자문위원회에 올릴 근거론 충분하겠군.”
클레이오의 입 안에서 이의 사기질이 뜨드득 마모되었다.
저 작자에게 일반적인 설득 따윈 소용없었다.
그것이 접견의 목적도 아닐뿐더러, 멜키오르는 이 모든 게 구실이고 누명일 뿐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였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본인이 직접 설계한 공작일 테니까.’
이제는 확실해졌다.
애초에 크뤼엘이 저지르는 전횡을 알면서도 동북 수비군에 지원이 닿지 않도록 방치한 일부터가 멜키오르의 복안이었던 것이다.
바로, 왕위를 겨루는 자리에 아서가 설 자격 자체를 박탈하기 위해서.
도대체 몇 년간의 계획이었을까?
몇 번의 생애 동안 실패를 겪으며 만들어진 방안이었을까?
그 지독한 인내에 클레이오는 압도되지 않으려 애쓴다.
“말씀하신 바에 따르자면 아직 조사는 진행 중 아닙니까. 반역 혐의에 연루되었다 하나, 주동자조차 아닌 왕자를 고문하다니요.”
“고문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군, 클레이오 경. 중대한 사안에 대해 심문 중이던 내무보안국 국장이 그 과정에서 다소간 평정을 잃은 모양이나… 보게나, 곧바로 치유 마법으로 처치하지 않았나.”
멜키오르는 매끄러운 원단에 감싸인 손끝을 창밖을 향해 들어 올린다. 마치 재생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처럼.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전후관계는 반대이다.
멜키오르는 파괴를 명했고, 아서의 회복력이 세상을 되돌려놓은 것뿐이다. 그럼에도 왕세자의 행동은 기만적인 설득력을 가진다.
“보게. 강이 다시금 흐르는군.”
어느새 천공은 다시금 푸른빛으로 밝아졌고 강물은 종전처럼 아래로 아래로, 메모리아 외해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클레이오는 그 극적인 연출에 아무 반응도 내어주지 않는다. 저 행동은 너무나도 얄팍하고, 모욕적이다.
그는 오로지 「이격」에 매달려 침착함을 가장했다. 그리고 그저 주의를 환기하듯 멜키오르를 불렀다.
“저하.”
청년의 차분한 대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멜키오르는 고운 아미를 살풋 찌푸렸다.
“…흐음, 그대의 침착은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어. 아서 그 애는 그대의 냉정함에 어찌 의문을 못 가지는 것인지.”
‘대답을 해 주는 것 같은 모양새지만, 사실은 말을 돌리고 있잖아. 반역 혐의의 참고인이란 구실 따윈 진작 내팽개친 거고, 그보다 더 음험한 짓을 꾸미는 거야.’
클레이오는 멜키오르의 트집에 휘말리는 대신 본론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아서를 그리 험하게 다루시는 겁니까. 키시온 자작령의 사병 규모를 파악하는 데 학생의 증언까지 필요치는 않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또한 자작의 선택은, 근본적으로는 조국을 지키기 위함이었음을 저하께서 모르실 수는 없습니다.”
이 모든 건 당신이 설계한 판이 아니냐는, 도발적인 언사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북문으로 뛰쳐나가 감옥을 부수고 싶었지만, 그런다면 아서는 알비온의 왕위를 이을 자격을 잃는다.
아서의 신체가 상하도록 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명예를 빛바래도록 할 수도 없다. 클레이오는 둘 모두를 구해야 했다.
그러려면 먼저 멜키오르의 의중을 알아야 했다.
“아서를 취조하자면, 키시온 자작령에 올바른 지원이 갈 수 없도록 훼방 놓은 크뤼엘 공작에게도 죄를 물어야 옳은 수순이겠지요. 진짜로 그 애에게서 얻으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궁금한가?”
“답을 해 주는 기쁨을 얻길 바라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만.”
저 두려운 존재와 부대껴온 몇 년간의 시간은 클레이오에게도 일종의 직관을 안겼다.
왕세자는 그와 함께 저 모든 세월을 살아왔을 범인들과 달리, 망각의 은총을 받지 못했다. 앎은 그를 고립시켰고, 고독은 인간을 미치게 한다.
대단한 강인함과 의지를 타고나지 않았던들, 왕세자는 그의 역할을 수행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계에 다다른 왕세자는 맨 처음 조우했던 순간부터 클레이오에게 ‘이해’를 구하고 있었다.
“아하하! 그래, 나는 줄곧 발화의 대상을 찾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군. 그대의 정의가 참으로 간명하여 좋아. 그래, 답해주지.”
말 그대로였다. 자개처럼 빛을 반사하는 속눈썹 아래, 밝은 청록빛 테를 두른 주홍빛 눈이 기쁨으로 반짝반짝 어룽거렸다.
“나는 그저 아서에게 충성의 [언약]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네.”
“!!!”
“나는 그 애의 올곧음을 믿지만, 작금과 같은 오해나 사고가 두 번 있어선 곤란하지 않겠나?”
클레이오의 내면에서 여과되지 않은 본심이 용솟음쳤다.
‘개자식이 뚫린 입이라고, 오해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충성 [언약]이라니. 응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 걸 멜키오르 상대로 해 버린다면, 아서는 아예 왕위를 추구할 수 없게 된다.
부당한 요구를 들이밀고서 딱 죽지만 않을 정도로 사람을 괴롭혀대고 있는 판에 무슨 변명이 저리 길단 말인가.
“오, 나를 그리 불한당 보듯 보지 말게. 그대는 나를 탓해선 안 돼. 내가 도대체 무엇을 걸고 그 앨 겁박할 수 있었겠나? 그대 본인이야. 마법사 클레이오 아세르.”
“무슨 말씀이신지요.”
“북문에 먼저 도착한 그 애는, 마차에서 내린 그대가 감옥의 어둠 속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지.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었을 거야. ‘설득’을 위한 근거로 꽤 도움이 됐지”
클레이오는 까마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이 아서의 생명과 미래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었다니.
멜키오르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스스로가 누구인지 자문해 보게. 하늘에서 창을 내리꽂고 불의 비를 내리는 힘을 지녔음에도, 경은 언약의 의무를 지고 있지 않지. 그렇다면 신의의 상대에게 언약을 부과하는 것도 대책이 되지 않겠나.”
동요를 숨긴 채 멜키오르를 똑바로 직시하던 클레이오는, 왕세자의 뺨 어림에서 기쁨으로 인한 홍조를 발견한다.
‘저 교묘한 언사로 아서가 겪는 고통을 내 탓으로 돌리려 드는군.’
거기에 뒤흔들릴 만큼 클레이오는 순진하지 않았다.
죄책감에 발목을 잡히거나 그것을 경감시키고자 변명 혹은 자기연민을 주워섬긴다면, 그때부터 진정 실책이 시작될 것이다.
지금 상황에선 적절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클레이오는 잘 고른 말로 답했다.
“제가 조국을 배신하리라 여기시다니, 어디서 그런 단서를 얻으셨단 말입니까. 저는 알비온의 기사이고, 그 어떤 때에도 신과 국가에 충성할 것입니다.”
멜키오르가 뒤집어씌우는 혐의는 터무니없었다.
여신은 이 왕국에 세계의 미래를 위임했는데, ‘약속’과 의무에 매인 자신이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멜키오르에게는 댈 수 없는 이유였지만 말이다.
“내가 그대의 충의를 의심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러한 의심이 성립 가능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잖나.”
“저하. 저의 충의를 증명 받고자 하신다면 아서가 아니라 제게 [언약]을 명령하심이 이치에 맞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대가 아서보다는 평정을 잘 유지하는군. [경감]이 아쉽기는 하나, 적어도 ‘이번 생애’에는 그대의 신체와 정신을 상하게 하여 [언약]을 요구할 마음은 없다네.”
클레이오는 왕세자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이번 생애’는 자유를 누리도록 하여 신에게 속한 자가 과연 어떤 일까지 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려는 것이다.
왕세자에게 인생은 일회의 사건이 아니라 영원히 반복되는 굴레였으니.
“그렇지만 아서 그 앤 그 사실을 모르고, 덕분에 경지 높은 검사인 내 막냇동생을 북문 지하의 의자에 얌전히 붙박여 앉도록 할 수 있었단 얘기지. 질문에 답은 되었나?”
아서에게는 클레이오의 안위를 위협하며 언약을 요구하고, 클레이오에겐 그 자신의 무력을 얽매기 위해 대신 아서를 볼모 삼는다고 말한다.
멜키오르는 아서와 클레이오가 서로를 위할수록 서로의 목을 죄이도록 하는 구조를 만들려했던 것이다.
‘그 계획이 실패하더라도, 나나 아서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데이터는 얻을 수 있고… 그걸 바탕으로 ‘다음 번’에는 더더욱 교묘한 방안을 마련하려는 거야.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문득 고개를 튼 왕세자는 다시금 돌아온 빛 아래 먼지가 떠도는 허공을 응시한다. 어떤 징조를 기다리듯.
그러나 징조는 없다. 여전한 침묵뿐이다.
멜키오르는 애석한 듯 옅은 한숨을 내쉰다.
“…그 애에게 신의를 다하여 그댈 위할 대단한 기회를 마련해 주었는데, 흠, 아직은 자신의 진정성을 [언약]으로 증명할 결심까진 못 한 모양이군.”
클레이오의 얼굴에 떠오른 희미한 경멸의 기색을 감지한 멜키오르는 차분히 웃는다.
“비난할 상대가 틀렸잖은가, 클레이오 경. 아서의 고통은 신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지. 그대는 오로지 내 동생을 위하여 현현한 신의 사자일 터. 사자의 도달이 복인지 화인지는, 인간의 방식으로는 판별할 수 없지.”
멜키오르는 연행의 밤을 기억한다.
눈과 귀를 가리운 채 하얗게 드러낸 맨발로 보안국의 요원들에게 붙들려 끌려 들어가는 동료의 모습은, 의연하던 막냇동생의 용기와 침착을 산산이 부숴 놓았다.
그것은 최초의 사건이었다.
고통과 공포, 무력감과 자책, 슬픔과 분노로 물들어 창백하게 질려가는 영웅의 얼굴을 목격하는 일.
‘신의 도구라 할지라도, 도구는 쓰임에 따라 역할이 달라지는 법이지.’
아홉 번째의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멜키오르는 이 마법사의 존재가 기껍다.
이제까지 아서의 인생에선 존재하지 않았던 순전한 우정. 주인공으로 태어난 자가 방비하지 못한 연약한 구석.
“나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즐거워. 이제까지 그 애의 인생에서는 대가로 걸고 겁박을 할 만한 대상이 부재했거든. 그 애의 동료들이야 대의를 위해 죽거나 살려는 이들이었으니, 서로의 생명이 스러진다 한들 뜻을 바꾸지 않았어. 그들은 오히려 죽음까지도 겁내지 않는 용기를 자랑스럽게 여겼네. 이를테면 그 망명귀족의 딸이라든지.”
8교 이전의 내용을 모르는 클레이오로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과거였다.
그것은 지난 생애의 일로서 8교엔 남아있지 않았던, 이전의 원고를 다시 쓰도록 한 사건들이었을 것이다.
‘그건 결코 변경될 수 없는 정전의 항목.’
그 애들은 모두 자신의 의지로 모였으니, 동료 개개인의 목숨이 아니라 그들의 뜻이 살아남는 것을 더 중히 여겼으리라.
배반을 감수하며 구해준다 해도, 그 구명을 기꺼워할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므로 멜키오르는 더 이상 첼, 이시엘, 리피와 레티샤를 회유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는 기다렸겠지.
도대체 몇 번의 생이었을지 짐작할 수도 없을 시간을, ‘바꿀 수 있는 항목’을 탐색하는 데 쏟으며.
멜키오르는 주어진 조건을 부수기 위해 그 어떤 일이든 한다. 그의 양심에는 계율이 없다. 살인과 형제살해의 금기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
저 지독한 반복이, 의지 깊고도 명철한 인간을 여기까지 영락시켰다.
클레이오는 탄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