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93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1)
“그게 뭐람.”
“토한 게 뭐 어떻다고.”
“별게 다 수치래. 프란, 너두 그 무거운 압지 꽁꽁 안고 오느라 고생했는걸! 대단해, 대단해.”
“어려운 브룬넨어도, 뭔 말인지 모를 연구 자료도 뚝딱 읽고.”
“성에서도 대활약! 정말 멋졌다고 레이가 그랬어!”
아서 일행과 휘말린 이후로 지나치게 친근한 취급을 받게 된 프란이었다.
비록 신장이 저와 비등비등하다 해도 얼굴은 아직 어린애 같은 두 쌍둥이에게 성을 낼 순 없어서 프란의 미간 주름만 점점 깊어졌다.
눈치 빠른 첼이 가볍게 분위기를 환기했다.
“뭐, 사실 꼬락서니 중 꼬락서니는 레이였지.”
“그건 맞아. 진짜 폐병 걸려온 줄로만.”
“그냥 감기몸살이어서 정말 다행이었어.”
쌍둥이들이 클레이오를 가지고 지지배배 떠드는 걸 이시엘이 조심스레 만류했다.
“클레이오는 정말 고생을 했으니 너무 놀리지 않았으면 한다.”
이시엘의 표정에 수심이 깊어 첼은 얼른 태도를 바꾸었다. 아무래도 며칠 전의 일이 아직도 마음에 남은 모양이었다.
“이런, 내 말이 심했구나. 실언을 사과하도록 할게. 엘, 네가 모슬린 원피스를 떨쳐입은 게 너무 어여뻐서 위험한 상황이었다는 것마저 잊었어.”
“그땐 비상시였지 않나. 쓸데없는 소릴.”
이시엘의 모슬린 드레스는 마인라트 공국 탈출 계획의 일환이었다.
이야기는 열흘 전 그날로 돌아간다.
이젠스 성에 잠입했던 날이 클레이오에겐 딱 죽을 맛인 날이었다.
하룻밤 동안 안 하던 등산을 하고, 기사들에게 붙들려 절벽을 오르락내리락하고, 비행기를 이착륙시키고, 그 빛과 소리를 지우는 이중발진 마법까지 썼다.
마지막에는 살의를 폭발시키던 7레벨 검사와 6레벨 검사의 대결에 끼어든 뒤 세찬 강물에 뛰어들기까지 했다.
이시엘은 클레이오가 물에 들어가는 걸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몇 년 전 강에서의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찬비 한 번 잘못 맞으면 폐렴에 걸릴 것 같은 동급생이 물에 빠진 모습은 실로 애처로웠다.
포옹의 반구를 이용해 하류에서 만난 아서와 이시엘은 경비병 제복 상의와 기능을 다한 은신 망토를 돌에 감싸 물속에 던져버렸다.
빠르게 강을 벗어나면서도, 아서는 이시엘을 먼저 보낸 이유에 대해 해명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 뒤로는 밤을 새 옛날 우편도로가 내려다보이는 숲길을 따라 이동했다. 혹여라도 추적에 붙들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중급과 상급 검사가 전력을 다한 질주는 거의 기차의 속도에 준할 만큼 빨랐다.
몸이 고된데도 이시엘의 마음은 내내 수런거렸다.
아슬란과의 대결 동안 곁을 지키도록 허락하지 않은 아서의 처사를 이해하면서도, 이시엘은 묵직한 자괴감을 느꼈다.
기사의 검은 강력하지만 때로는 강한 검과 맹세만으로 해낼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절감해서.
그녀는 불필요한 말을 더하는 대신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부상을 당한 아서 대신 이시엘이 클레이오를 들쳐 업었다.
밤이 새벽으로 저물고 새벽이 한낮이 될 동안에도 클레이오는 정신을 못 차렸다. 뜨끈하게 열이 오른 몸은 축 처져 힘을 줘 붙들지 않으면 흐느적 떨어질 것만 같았다. 젖었던 옷은 몇 시간 만에 금세 말라 버렸다.
의식을 잃은 사람은 무거워야 하는데도 클레이오는 다 자란 사내애라기엔 지나치게 가벼워서 이시엘을 당혹스럽게 했다.
깊지는 않지만 무시 못 할 부상을 전신에 입은 데다 오른팔이 부러진 아서도 밤새 이동하는 동안 점점 상태가 나빠졌다.
마침내 산맥이 완만해지는 지형에 다다른 저녁 무렵 클레이오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이젠스에서 남쪽으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읍, 가이스바이드의 초입이었다.
멀리 드문드문 인가가 보이기 시작하는 장소에서 눈을 뜬 클레이오는, 아서와 이시엘을 이끌어 포도 수확철 일꾼을 위한 농막으로 들어가게 했다. 아직 때가 일러 농막 안은 비어있었다.
조심스레 내려주자 아구구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에 앉은 클레이오의 첫 마디는 이거였다.
“너희들이나 나나 모두 기차를 타려면 좀 씻어야겠다.”
여태 클레이오가 메고 있었던 방수포 가방 안에는 세 사람이 입을 가벼운 여름옷과 양말 세 켤레, 브룬넨 탈러와 금화, 그리고 비누 한 조각이 들어있었다.
다행히 농막 앞에는 펌프가 있어서 모두들 땀과 먼지를 씻어내고 새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다.
가방 안의 옷은 구겨지기야 했어도 여전히 세탁한 후 끼워놓은 라벤더 포푸리 냄새가 남아 있을 만큼 깨끗했다.
그다음엔 벌레와 풀을 막아주던 평직 각반을 떼어 버리고 신발만 불가에 두어 말렸다. 가죽이 뻣뻣이 비틀어지긴 했지만 그럭저럭 남들 앞에 신고 나설 모양새는 됐다.
아슬란과 부딪칠 때 두건이 찢겨나가 머리색을 내보였던 아서는 염색 물약의 해독약을 마셔 머리색과 눈 색을 원래대로 돌려놓았고, 이시엘은 여전히 밤색 머리를 유지했다.
클레이오와 아서가 우물가에 나와 있는 동안 이시엘은 농막 안에서 옷을 바꿔 입고 나왔다.
초록빛 리본으로 단을 댄 가벼운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이시엘의 표정은 여전히 침중했다.
“꽤 불편하군.”
타이가 안 매져 손을 헛놀리고 있던 클레이오가 멋쩍게 웃었다.
“그렇지? 브룬넨만 벗어나면 바로 바꿔 입을 수 있으니까 하루만 부탁할게. 미안해.”
“이 위급한 상황에 그런 걸 따지려던 게 아니다. 단지 이런 복장을 하고선 널 들어 옮기기가 어렵잖나.”
“지금부턴 아서가 날 옮겨주면 되지 않을까?”
“그건….”
이시엘이 말을 멈췄다. 아서는 부어오른 오른팔을 슬그머니 가렸지만 클레이오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골절된 채 너무 오랜 시간을 달려 오른팔의 상태는 한층 악화되어 있었다. 암기가 스쳐 독이 번진 피부는 거뭇거뭇했고, 옷소매가 너덜거리는 왼팔엔 누가 봐도 자상이다 싶은 상처가 길게 나 있었다.
아서뿐인가. 이시엘의 팔과 뺨에도 긁히고 찢긴 자국이 선명했다.
클레이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희들이 이래서는 방금 싸움에서 빠져나왔소, 광고하는 꼴 아냐.”
열이 안 내려 정신이 없었던 그는 아이들의 부상을 미리 알아채지 못한 자신의 멍청함을 자책하며 아무 고지도 없이 서클 펼쳤다.
파아앗!
“너야말로 그런 상태로…!”
“내 역할은 아픈 사람으로 정했었잖아. 그러니까 이러고 있어도 돼. 다친 데는 없는걸.”
이시엘과 아서는 클레이오가 [경감]과 [치유] 마법식을 불러일으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해 몸이 흔들거리는 동급생의 입을 손으로 막기라도 하면 그대로 꼴까닥 넘어갈 것만 같아서였다.
마법의 황금빛은 아서와 이시엘을 온전하게 치유해 주었다. 저 자신은 아무런 위안도 얻지 못하면서.
.
.
.
몇 시간 후.
세 사람은 가이스바이드 기차역에 당도했다.
가이스바이드처럼 작은 읍에까지 소식이 전달되었는지, 역 입구에서 검문을 했다. 그것으로 마인라트 공국 서부 전역에 경계망이 펼쳐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 병사들의 움직임은 아슬란이 마인라트 공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지역 영주들의 협조까지 얻고 있다는 증거였다.
미리 계획한 대로 젊은 부부와 그들의 하인으로 행세하는 세 사람은 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이시엘은 유창하지만 딱딱한 발음의 카롤링거어로 ‘박람회장을 방문한 뒤 브레크강 유람을 하려 했는데, 합승 마차에서 짐을 잃은 데다 남편의 병이 심해져 곧장 돌아가고 있다.’는 설정을 진지하게 읊었다.
이시엘의 얼굴에 어린 걱정과 염려는 진짜였다.
윤기 어린 밤색 머리가 아름다운 부인의 구겨진 옷이, 그녀가 얼마나 서둘렀는지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녀의 뒤에, 한여름에도 파르스름한 안색을 한 ‘남편’이 하인에게 업혀 있는 모습은 퍽 안쓰러웠다.
부인은 군인들에게서 여행길에 행운이 있으라는 인사까지 받았다.
가이스바이드에서 출발한 완행열차는 하룻밤을 꼬박 지나 다음 날 점심 무렵에야 크뤼엘 공작령의 주도 디에르 시에 도착했다.
이시엘과 아서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가장 빨리 출발하는 특급 열차 표를 끊어 룬데인까지 달렸다.
돌아오는 동안 역무원에게 만년필을 빌린 이시엘은 외우고 있던 [경감] 마법식을 클레이오의 손바닥 위에 정성스레 그려 넣고선 한도 없이 에테르를 밀어 넣어 주었다.
책을 보거나 베껴 그려서는 효용이 없고, 그 자신이 온전히 외워 그린 것만 소용이 있어서 마법식을 못 외는 아서는 도와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시엘이 아무리 애를 써 보아도 서클을 펼치지 못하는 검사가 사용하는 마법식의 효력은 극히 미약해 클레이오의 열은 거의 내려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늘게 눈을 뜬 클레이오는 몇 번이나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가늘어서 이시엘은 눈 아래가 조금 뜨끈해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한 번도 울지 않았던 그녀에겐 낯선 감각이었다.
열차가 룬데인에 도착한 건 다음 날 새벽 한 시.
크뤼엘 공작령에서 미리 보낸 전보를 수신한 첼이 마차를 끌고 나왔다.
첼과 프란, 쌍둥이들이 만난 건 여전히 젊은 부부와 병약한 남편, 하인의 차림새를 하고 있는 세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클레이오를 보고 대경실색을 했다.
프란이 [경감]을 걸어 클레이오의 열을 내리지 않았던들, 지금처럼 이렇게 웃으며 그날을 회상하진 못했을 것이다.
“으음~, 미안!”
“나도!”
“우린 정말 휴양 여행 간 것 같았는데.”
“너흰 무척 고생을 했으니깐!”
쌍둥이들 말처럼 그들의 탈출은 그리 처절하지 않았다.
이젠스 성에서 히드라의 독 연구 자료를 빼내온 날 첼과 프란은 쌍둥이들과 키시온 영지 외곽에서 합류한 뒤 키시온 성엔 들르지 않고 산길을 우회해 듀브리스로 향했다.
키시온 영지는 두 달 전 벌어진 ‘브룬넨 초소습격 사건’ 사건의 여파로 여전히 뒤숭숭했다.
성을 복구하고 중앙정부의 감사를 견뎌내느라 하나뿐인 딸자식도 귀향하지 못 하게 한 슐리만 키시온에게 그 이상의 골칫거릴 더할 순 없었다.
쌍둥이는 마광석 압지를 나누어 들었고, 첼은 질색하는 프란을 수하물 취급하며 산맥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들은 다음날 오전, 파리사 시에서 직선거리로 38km 떨어진 듀브리스 시에서 룬데인 행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최근 들어 인구가 두 배는 불어난 듀브리스 시는 자유도시로 승격되었으나, 여전히 키시온 군영의 방위 범위에 속한 지역이었다.
물론 일행을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연분홍색 가로 줄무늬 원단에 레이스칼라를 댄 드레스 차림의 쌍둥이 소녀, 그녀들의 보호자인 가정교사와 어린 심부름꾼으로 이뤄진 일행은 핀토스 산맥의 휴양지에 들렀다가 수도로 돌아가는 휴가객들에 섞여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1등석에 탄 어여쁜 쌍둥이 소녀들의 트렁크 안에 리본이나 진주목걸이, 핀토스 산 소금 조각 장식물 대신 마광석 압지 복사물이 꽉꽉 채워져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로부터 사흘 뒤 브룬넨에서 아서와 이시엘, 클레이오가 돌아왔다.
클레이오는 하루 동안 앓고는 일어나 다음날부터 프란과 함께 연구실에서 두문불출하더니, 이렇게 아이들을 부른 거였다.
“자, 클레이오의 소중하고 단 하나뿐인 실험 보조인님을 놀리는 건 그 정도로 하고. 오늘 이 연구실 주인이 우릴 초대하며 귀띔하길 중대 발표가 있을 거라 했거든?”
“아세르가 그렇게 전했나? 안 그렇게 생겨서 과장하는 버릇이 있었군, 쯧.”
“과장이라니. 고작 일 주일 만에 자료 분석이 끝났으면 굉장한 일이 맞잖아. 그래서 오늘은 연구발표를 해주는 건가?”
실험실에서 응접실로 꾸물꾸물 걸어 나온 클레이오는 손을 내저으며 첼의 질문에 답했다.
“연구 보조인님이 아니라 사실상의 연구자분이시지. 연구는 모조리 이분이 하신 거니까 난 아는 게 없어. 흠흠, 여기 프란 화이트 씨는 히드라의 독 분석을 주도하신 주체입니다.”
지나친 찬양에 프란의 얼굴이 구겨지더니 곧바로 반격에 들어갔다.
“하, 그래. 그 말도 맞다. 아세르 네가 하는 건 연구가 아니라 예언이니까.”
“아니, 저기….”
장난 좀 치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클레이오는 머쓱한 표정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레모네이드가 든 피처와 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응접실로 들어오던 아서가 호들갑스레 말을 받았다.
“난 어려운 얘긴 잘 모르니까 쉽게 설명해 줘, 프란!”
“그래, 말해줘도 넌 이해하기 어려울 테니 결론만 전하지. 히드라의 독은 마석 비탄의 자수정으로 중화가 가능하다.”
아서는 레모네이드 피처를 따르려던 자세 그대로 클레이오를 돌아봤다.
“헉! 레이, 우리 그 뭐시기 자수정 갖고 있지 않아?”
“있지.”
24캐럿 크기 비탄의 자수정은 원형 극장에서 얻은 마석이었다. 마석 오닉스보다 더더욱 드물어 세간의 소문조차 없는 물질.
“그러면 그걸로 히드라의 독을 먹은 군인들을 얼마든지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건가?”
프란은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그렇게 일이 쉽게 풀릴 리가 있나? 한정된 면적 안에 위치한, 한정된 수의 복용자라면 중화가 가능하리라 이론적으로는 판단된다는 것뿐이다. 그러기 위해선 선결해야 할 과제가 여러 가지 있고.”
프란이 냉정한 브리핑을 이어가든 말든, 아서를 비롯한 아이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저렇게 열의 없이 할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천재는 다 이런 건가?’
아서는 진심으로 감격한 눈치였다.
“브룬넨에 갔다 온 후 2주도 안 됐잖아.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재료는 저기 아세르가 미리 다 준비해 두었고, 남이 정리해 놓은 연구 자료를 가지고 실험을 재현한 것뿐인데 무슨 헛소리냐. 그리고 리오그난, 레모네이드는 네가 닦아라.”
“앗!”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새 레모네이드가 주르륵 넘쳐 아서의 발밑을 적시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함께 기뻐하며 작전 성공을 축하했다. 피처에 반쯤 남은 레모네이드를 따라 건배를 하고, 아서가 바닥을 닦는 동안 웃음소리와 소란이 커져갔다.
한 발 물러나 얼음이 녹아가는 레모네이드 잔을 쥔 프란은, 주군을 도우려는 이시엘을 꼭 붙든 채 바닥은 혼자 닦으라며 아서를 타박하는 클레이오를 렌즈 너머로 응시하고 있었다.
수도에 온 뒤로 기능을 강화하여 새로 제작한 ‘판별의 안경’조차도 클레이오 아세르의 존재를 규명해주지는 않았다.
아세르가의 차남은 프란이 인생에서 두 번째로 조우한 미지였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첫 번째 미지는 공포와 압도를 사람의 형태로 굳혀놓은 그것, 왕세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악의 덩어리였다.
두 번째는 존재는 왕세자와 전혀 다른 종류의 인물이었으나, 이해와 분석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은 동일했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땐 그저 평범한 학생처럼 보이는데도.
프란은 클레이오 아세르의 다른 얼굴을 알았다.
그는 가만히 앉아 지난 며칠간의 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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룬데인에 도착한 날 밤 프란이 걸어준 [경감] 마법은 2레벨 수준에 걸맞게 미약한 것이었다. 클레이오는 그냥 나을 때가 돼서 일어난 거나 매한가지였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프란에게 큰 은혜라도 입은 듯 굴었다.
연구실에는 이미 말린 에스라의 철필, 트리스테인 영지에서 입었던 마수 피가 묻은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강령회에서 얻었던 오니로 한 줌, 박람회에서 디오네에게 얻은 아글라오포티스 약간도 곧 추가되었다.
병상에서 일어나자마자 연구실로 달려온 클레이오는 용매로 쓸 마석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는 프란의 요청에 흔쾌히 금고방을 열었다.
본래 창고로 쓰던 연구실 아래 작은 지하실은, 클레이오가 마법으로 구조를 변경하여 금고방으로 만들었다.
카펫을 걷고 마루판 문을 젖히면 아래엔 매끈한 석회벽만 드러났다. 석회벽의 한쪽 구석에다 여섯 개 마법식을 겹쳐 열쇠처럼 체결해 넣어야만 열리는 설계였다.
아직 5레벨이면서 무슨 그런 오만한 설계를 했냐고 타박하니 클레이오는 배시시 웃으며 변명했다.
“동시에 펼칠 필요 없이 지연해서 새겨 넣어도 되니까 순서만 맞추면 돼. 마법식 순서는 봤지? 그냥 천천히 두 개씩 채워도 끝에는 열려.”
그렇게 펼친 마법식 크기는 손바닥 반만 한 것부터 입구 전체 크기까지 다양했다.
이젠스 성에서 본 금속 문처럼 제 순서로 제 크기의 마법식을 각각 펼쳐야만 봉인이 풀리는 구조였다.
메이지 마스터인 제베디라 할지라도 부수면 부쉈지, 원리를 모르고선 쉽게는 열지 못할 금고방이었다.
마침내 열린 지하 금고방은 어둡지 않았다.
마석 수정과 마석 금 필라멘트를 써서 오래도록 빛을 내게 만든 전구가 사방에 놓여 있었다.
그 밝은 그늘을 들여다본 프란은 저도 모르게 낯이 딱딱히 굳어졌다.
지하를 채운 보물은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판별의 안경’ 렌즈가 과부하를 일으켜 몇 초간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편지에 쓰여 있길, 소량씩 틈틈이 매입해뒀다던 마석 은과 금, 티플라움 강괴는 모아보니 상당한 양이었다.
귀중한 마석들은 나무로 칸을 친 서랍 안에 박물관의 광물 표본처럼 사무적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보석보다는 실험용 재료를 보관하는 형식에 가까워 어딘지 부조리해 보일 지경이었다.
게다가 마석 아래엔 각각 마석의 유래와 용법 등을 작은 메모로 적어두기까지 했다.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던 마수 바르그에서 난 운모 반 조각, 여왕의 정원에서 나온 벚의 로즈쿼츠, 관목의 호박. 원형극장에서 나온 24캐럿짜리 비탄의 자수정. 크라테르 제후국에서 왔다는 비둘기의 루비가 가득 든 상자.
마수 티아마트에게서 난 사파이어의 자리만 빈 채 ‘3층 교실 냉장 도구 기동부에 꽂아 두었음.’이란 메모가 붙어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무슨 계획이라도 가진 듯 고스란히 모여 있었다.
그때 클레이오가 품에서 아무렇지 않게 꺼낸 아공간 지갑 안에는 마수 옥타보에서 나온 운무의 아게이트, 이젠스 성에서 가져온 반사의 아크로아이트, 양귀비 석류석, 완화의 진주, 빙냉의 사파이어 그리고 5캐럿 크기의 비탄의 자수정이 정리도 안 된 채 포개져 들어있었다.
그것만 해도 이미 흔히 볼 수 없는 소장목록이었다.
심지어 반대편 캐비닛에서는, 수백 개는 될 강경의 다이아몬드가 영롱한 빛을 발했다.
‘마석이 좀 있으니 필요하면 쓰라.’는 말로 설명이 되는 규모가 아니었다.
프란은 기가 막혔다.
“포옹의 반구를 개량할 때 어쩐지 마석이 끝도 없이 나오더라니. 개인의 소장품으로는 왕국에서도 손에 꼽을 규모군.”
“그래 봐야 실험 재료인데 뭐. 앞으로도 만들고 싶은 게 있다면 부담 없이 말해 줘.”
“내가 이걸 사적으로 유용하리란 생각은 안 하나?”
한여름인데도 지하는 서늘한 탓에, 막 자리를 털고 일어난 클레이오는 추위를 느끼는지 재킷을 여미고 있었다.
그렇게 기력이 딸려 음성도 크게 안 내는 약골이 한다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네가 그럴 사람이라면 그것도 사람을 잘못 본 내 탓이겠지.”
그리고는 비슬비슬 웃는 거였다.
그 순간 프란은 깨달았다.
저 순한 태도 뒤에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평정심이었다.
절로 프란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나를 이젠스 성까지 끌어들였던 것도 내가 너를 배신할 수 있는 인간인지를 시험해 본 거였군.”
클레이오는 낯빛조차 바꾸지 않고 왼손의 검지만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아니라고는 하지 않을게.”
프란은 갈비뼈 안쪽이 뜨끔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머리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건만 심장은 그 괴상한 비교를 향해 기운다.
육신의 조건과 정서적 표현이 완전히 괴리되어있다는 점에서, 클레이오 아세르는 멜키오르와 기이하게 비슷한 인상을 줬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과연, 3왕자가 왕국을 얻으리란 뜻을 세울 만한 토대로군. 여기 있는 마석 전부보다도 너 하나가 훨씬 더 가치 있을 테니.”
“야, 그건 꽤 민망한 칭찬 아니야? 엄청난데.”
프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세르 너는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옛이야기 속 악마같이 구는 면이 있다.”
프란의 내심을 알 길 없는 클레이오는 이 소리, 저 소리 들으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너무 뒷주머니를 크게 찼다고 혀를 차려나, 하는 염려 정도밖에는.
악마 어쩌고 운운도 마찬가지였다.
‘수작질이 좀 심했단 뜻이겠지?’
므네모시네 여신의 교회에는 악마의 개념이 자리 잡을 데가 없었지만, 구전설화와 전승에는 천사와 악마의 존재가 촛불을 등진 종이 인형처럼 그림자를 드리웠다.
뮤즈들이 국가 제례의 신이 되고, 아버지 신과 그의 사자들, 그리고 가장 사랑받았으나 신을 거역하고 타천한 배반자의 서사가 외할머니의 옛날이야기 자리를 차지하다니, 기묘한 설계이긴 했다.
물론 이제 클레이오는 이 정도 기묘함엔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이 세계의 신은 클레이오가 살았던 이전 세계를 들여다봤고 때로는 잇기도 하니, 두 세계는 미묘하게 틀어져 닮을 수밖에.
그러니 프란의 나무람 역시 기독교에서 말하는 악마나 현대문학의 메피스토펠레스를 뜻하는 건 아닐 터이다.
‘빈정거림 좀 들으면 어때. 금고를 열어 줄 예비인력은 꼭 필요하다고.’
이 금고방은 마법사만이 열 수 있는 설계였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겨서 자신이 연구실에 올 수 없게 되면 누군가 한 명은 금고를 열 수 있어야 했다.
‘베헤못은 더없이 똑똑하지만 에테르 감응력이 없고, 기사들의 마법식 전개 수준으로 열리게 하면 금고의 방비가 너무 약해진다고.’
프란이 아서와 친구들을 위해 성흔을 쓰거나 마법사가 되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클레이오가 없어 아이들이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면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리란 확신은 있었다.
수도방위대 학교를 출입할 직원증을 가진 데다 사사로운 욕심이 없는 프란은 안성맞춤인 인물이었다. 부유한 백작가의 유일한 상속자로 사는 대신 다락방 아래에서 살며 공용 욕실을 쓰는 삶을 택한 사람의 양심이 보통 단단하겠는가.
이렇듯 동상이몽을 꾸는 가운데, 두 마법사는 연구보고서에 기록된 개량형 히드라의 독을 제조해 중화 반응을 일으키는 것에 집중했다.
정확히는 프란이 제조를 하고 클레이오는 필요한 물품을 갖다 대는 식으로.
이 개량형 독의 제조법과 성분은, 국왕 서고에서 나왔던 한 세기 전의 제법과는 확실히 달랐다.
클레이오가 간단한 심부름을 하는 틈틈이 모아뒀던 비서며 금서를 탐독하는 새, 프란은 맹렬히 밤을 샜다.
몸 아껴가며 천천히 하라 해도 ‘마법사까지도 실험체로 삼았다는 보고서가 있다. 외부 연구자가 더 있었던 것 같다.’던가, ‘경감 마법식을 적용해보려던 시도가 여의치 않자 아글라오포티스 사용으로 수렴했다.’ 같은 말을 툭툭 던지며 분석에 열중했다.
가끔은 베헤못도 영역시찰을 하다 와 제 식사 시종이 밥은 잘 챙겨 먹나, 자리는 편한데 누웠나 확인을 하고 갔다.
겉으로 보기엔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하지만 긴 의자에 누워 고양이를 껴안고 빈둥댄다 해서 클레이오의 마음까지 편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젠스 성에서 엿들었던 연구원들의 대화를 몇 번이고 복기했다.
프란이 히드라의 독 개발 이력을 되짚어갈 때마다 연구원들의 말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차곡차곡 쌓인 셈이었다.
마법사에게 한 실험은 헤스터 워드의 것이었다. 경감 마법식을 적용해보려던 발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헤스터가 아슬란에게 갈 거란 건 알았어. 하지만….’
아글라오라는 신 약재는 현재 아세르 상단의 메리디에스 지부에서 블라드의 감독하에만 독점 공급한다고 했다.
디오네의 제보이니 틀림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신 약재를 아슬란이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단 사실이 뜻하는 바는 한 가지뿐이었다.
‘블라드 아세르가 아슬란에게 붙다니.’
클레이오가 알기로 메리디에스 교역소는 이제 전적으로 블라드의 소관이었다.
기디온 아세르가 그걸 정말로 몰랐을까?
혹은 알면서도 제지할 수 없었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골치 아픈 문제다.
이번에 콜포스로 가서 그 부분을 캐볼 수 있을는지, 그러다 밑천을 다 털리면 어떻게 될지 등등을 고민하는 클레이오에게 다시금 프란이 설명을 요구했다. 대략적으로만 전달했던 강령회 때의 일에 관한 거였다.
이번엔 차근차근 한 부분도 빼놓지 않고 전해주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헤스터는 본래 [경감] 마법식을 변형해서 피 대신 에테르를 빠는 사술을 쓰게 하려고 했던 것 같아.”
“올바르게 외우기만 한다면 서클을 못 여는 기사 역시도 미약한 마법식의 효과를 볼 수는 있으니 가능은 한 발상이다만―.”
프란은 들고 있던 마광석 압지를 팔락 넘겨보고는 안경을 추어올렸다.
“여의치가 않았던 것 같군. 마법식을 외울 수 있는 브룬넨 기사는 전무했을 거고.”
“그래? 이시엘이나 첼뿐만 아니라 안젤리움 애들까지도 마법식을 곧잘 외우던데. 이상하네.”
“마인라트의 기사들은 알비온과 다르게 교육받는다. 타국의 마법 기술이 알비온보다 뒤떨어진 것과 맞물려, 검사는 마법사보다 한층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해.”
프란의 말을 들은 고양이의 눈이 쪽 가늘어졌다.
“에오오오오웅. 먀아아앜, 냣(놈들은 뭘 모르는구나. 자빠진 소리, 츳).”
바닥에 꼬리를 탁탁 치는 베헤못의 심기를 맞춰드리기 위해 클레이오는 푹 퍼져 있던 등을 일으켜 세우고는 고양이의 엉덩이를 토닥여 주었다.
토닥토닥토닥.
숙련된 솜씨로 고양이 궁둥이를 두드리면서도 클레이오는 자유롭게 생각을 이어갈 재주가 있었다.
‘나라별로 에테르를 다루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니, 그건 생각도 못 한 부분이잖아.’
이전 원고를 안다고, 알비온에서 몇 년 살았다고 이 세계 전체에 대한 분석력이 절로 생기는 건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프란의 두뇌가 귀중하게 여겨지는 그였다.
“그리고 사실 네 친구들 쪽이 비전형적인 검사지. 수도방위대 학교가 뭐라고 생각하나. 에테르 감응자 중에서도 추리고 추린, 한 줌의 엘리트만을 입학시키는 기관이다. 손으로 그려서 효과를 볼 만큼 마법식을 정확하게 외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프란의 말을 들은 클레이오는 룬데인으로 돌아오는 동안 마법식의 잉크가 지워질 때마다 덧그리며 간절히 에테르를 스며들게 하던 이시엘의 따듯한 손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