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96
만개한 여름날 (3)
“너 콜포스에는 연고가 없지 않아? 여기 집사장을 미리 알고라도 있던 것처럼….”
“채트윈-탈봇 저택의 휘틀리 총집사장 실력은 수도에까지 유명하다고.”
“아버지뿐 아니라 집사도 유명인이었냐?”
“채트윈-탈봇 저택과 영지의 매각은 그 시대 최고로 화제가 되었던 부동산 매매였거든. 사용인까지 그대로 고용승계 하는 일은 드무니까.”
첼을 말을 듣고서야 의문이 하나 풀렸다.
평생 이 저택에서 살아온 것처럼 녹아든 노 집사는 기디온보다도 연배가 있어 보였다.
그림으로 그린 듯 대귀족의 사용인 같은 자가 어째 벼락부자의 집에서 일하나 했더니, 그런 내막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째 이 집안의 일을 네가 더 잘 아네.”
클레이오는 잔을 기울여 어색해진 표정을 숨겼다. 이 화제는, 역시 조금 불편했다.
딸그락.
칵테일을 음미하던 첼이 가벼이 대답했다.
“그럼 이런 데에 초대받으면서 뭣도 모르고 오겠어? 넌 재작년의 사고로 학교에 오기 전 일이 잘 기억 안 난다며. 너희 아버지가 추억담을 줄줄 늘어놓을 타입은 아닌 것 같고.”
알려진바 ‘클레이오 아세르’는 물에 빠져 과거의 기억을 잃었다.
이리저리 임시방편으로 변명을 짜깁기하다 보니, 배우고 익힌 지식은 일정 정도 복구할 수 있었지만 가족이나 주변인들에 대한 기억은 끝내 되찾지 못한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 찝찝한 부분을 첼이 찔러 내심 움찔한 클레이오였다.
“으음, 어차피 그럴 시간도 없는 분이지만 시간이 있다 해도 그렇게 다정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긴 하지.”
아들을 앉혀놓고 차근차근 옛 추억담을 들려주는 기디온이라니, 추억 같은 게 있는지는 둘째치고라도 영 그림이 안 그려지는 광경이긴 했다.
“그렇다니 잘됐네. 얘기 좀 들어 봐. 여기 온다니까 엄마가 날 티룸으로 불러내선 별별 얘길 다 해주더라?”
기디온 아세르와 카타리나가 사업상의 경쟁 관계는 아니라 해도, 정보 부족으로 인해 첼이 폐를 끼치거나 말빚을 지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러니 카타리나는 인연을 끊었던 것도 대충 뭉개고 이것저것 사전정보를 딸에게 주입한 모양이었다.
물론 첼은 적당한 시점에 그 내용을 클레이오에게 공유해주어 의리를 지켰다.
“우리 엄마 세대 사람들에겐 아직까지도 텔마 아세르의 파티가 회자되고 있잖아. 수도의 타운하우스에서 여는 연회도 굉장했다지만, 여기 채트윈-탈봇 저택에서 열린 19년 전의 섬머 파티는 사교계의 전설이란 말야.”
“그랬어?”
“엄마가 이번에 드 네쥬 에스트 호텔에서 연 데뷔탕트 무도회의 전범으로 삼았던 것도 예전 채트윈-탈봇 저택의 섬머 파티라고 해.”
첼은 클레이오가 이제껏 알지 못했던 아세르가의 비사를 족집게 선행학습 시켜주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텔마 아세르의 파티는 여흥을 위한 모임이 아니었다.
아세르가의 안주인은 자신의 파티를 통해 의상, 보석, 실내 인테리어 용품과 사치품, 각종 마도구를 룬데인에 유행시켰다.
수도의 유행은 한 번의 사교 시즌을 거치면 컨트리 하우스로 돌아가는 귀족들에 의해 지방까지 퍼진다.
유행은 기디온이 첸트룸에서 들여오는 대량의 마석과 마석을 원료로 한 상품 소비를 촉진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텔마는 극소수의 최상류층만 사용하던 마석과 마도구를 투자나 사업으로 부를 얻은 하급 귀족과 부르주아들 역시 구매하도록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기디온은 지금도 왕가와 정계에 막대한 기부금을 뿌리고 있지만 사업을 막 일으키던 그때에는 더 과감하게 로비를 벌였다.
품성이 밝고 따듯해 누구에게나 환영받았던 텔마는 극상품의 마석을 출가한 왕족 여성들에게 진상해 남들 앞에서 착용하도록 은근히 이끌었다.
그 결과가 지금 아세르 상사가 이룩한 명성과 부였다.
미혼일 적 텔마 라스카는 기디온 아세르와 결혼하지 못한다면 신녀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제가 한 말은 반드시 실천하는 인물이었다.
기디온이 첫 번째 첸트룸 행 선단에 동행했을 때 그의 성공을 믿는 이는 적었다. 귀항하기로 한 날짜에도 돌아온 이도 없었다. 시일이 한 달 이상 지체되자 모두가 선단은 난파되었다 여겼다.
그 사이 텔마는 자신을 강제로 다른 귀족과 약혼시키려는 라스카 자작의 뜻을 뿌리치고 교회로 갔다.
다섯 달 뒤, 라스카 자작의 딸이 신녀가 되는 1단계 서원까지 밟았을 무렵. 콜포스 항구로 막대한 양의 마석과 마광석을 실은 아세르 상사의 선단이 돌아왔다.
수도의 모든 신문이 기디온의 상행에 대해 다뤘으며, 그는 일약 상계의 기린아가 되었다.
그 날 텔마 라스카는 신전을 나와 기디온과 약혼했다.
기디온은 열한 살에 하급 사환으로 들어간 작은 상사를 스물두 살에 장악했다. 그 이후론 선구안을 가진 듯한 투자와 무역으로 상사의 내실을 키웠다.
스물일곱 살엔 첸트룸 상행을 성공시키고 막대한 기부금을 왕실에 납부해 준남작 작위를 샀다.
그렇게 해서 텔마 라스카는 신녀 대신에 아세르 가의 안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저택은 결혼 선물로 네 아버지가 너희 어머니에게 준 거라고 해.”
“그런 것도 너희 어머니가 알려줬어?”
“아니.”
“그럼?”
“내 객실을 담당하는 귀여운 이레네가 말이지, 이 집 유모의 조카인데, 이런저런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해 줬지.”
“또 그거냐.”
고작 이틀 새 팔러 메이드들의 이름을 모조리 다 외운 첼은 저택에 대해 별별 이야길 다 꿰고 있었다.
둘째 도련님에게 예의는 지키지만 묘하게 거리를 두는 사용인들과는 대화가 잘되지 않아 그만둔 클레이오와 달리, 첼이 알아낸 정보는 상당했다.
이 근사한 저택엔 당연히 과거지사가 있었다.
삼십 년 전까지 이 저택은 채트윈-탈봇 경의 컨트리 하우스였다.
카롤링거 귀족의 피가 짙은 채트윈-탈봇 후작가는, 한때 콜포스 전체의 토지를 소유했으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대지의 상당 부분을 매각했다.
그런데도 남아있는 목초지와 과수원, 저택 부지는 광대한 넓이였다.
제12대 후작 루시우스 채트윈-탈봇이 주식투자 실패로 상심해 쓰러졌을 때 그에게는 후계자가 없었다.
그렇다 해도 온유한 왕이었던 에드워드의 통치기에 단순히 대가 끊긴 귀족의 영지를 국고로 환수하는 경우는 적었다.
적절한 상속세와 양도세를 지불하면 재산관리인이 재산을 나누어 처분하는 일도 가능했다. 수많은 신흥 부르주아들이 그런 식으로 역사 깊은 컨트리하우스를 얻었다.
하지만 채트윈-탈봇의 영지와 저택은 그 엄청난 규모와 기존의 부채가 문제가 됐다.
팔리지 않은 저택과 부지가 왕실에 회수되려던 때, 막대한 금액을 제시하며 인수인으로 나선 이가 있어 고용인과 소작인까지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 인수인이 바로 첸트룸 상행에서 천문학적인 수익을 얻은 기디온 아세르였다.
지금 수도의 아세르 저택을 책임지고 있는 캔튼 부인도 40년 전 채트윈-탈봇 가의 메이드로 일을 시작한 사람이라 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클레이오는 입을 딱 벌렸다.
“그거 정말 우리 아버지 이야기 맞아?”
“숨길 일도 아니고, 부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증거라 하인들도 다들 자랑스레 여기는 걸 보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던데?”
“이럴 수가.”
비루먹은 둘째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데 걱정은 걱정대로 하면서도 다정한 말 한마디 못해, 돈을 들먹이며 뺨을 칠 만큼 감정적으로 서툰 인간에게 그런 순정이 있었다니.
대단한 로맨스는 로맨스였던 모양이다.
“소작인들도 이 저택의 새 주인인 네 아버질 몹시 따른다고 해. 이십 년간 한 번도 소작료를 올린 적 없다더라.”
“그야 돈은 상사에서 들어오고 땅은 그저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걸 테니까.”
“야아, 냉정하네. 어쨌든 소작료가 낮은 덕에 과일의 품질을 봐 가며 출하할 수 있어서 채트윈-탈봇 과수원의 과수는 평판이 좋아.”
“그게 그렇게 되는 거였군. 어쩐지 아서가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앉은 자리에서 과일을 한 바구니씩 다 없애고 가더라.”
“맞아. 과수는 시장에 내놓지 않고 너희 집안의 저택과 선물용으로만 소모한다더라.”
클레이오는 내심 ‘사치도 그런 사치가’ 따윌 생각하며 혀를 찼다.
첼은 다 마신 칵테일글라스를 한 바퀴 돌려 보더니 은쟁반 위에 내려놓았다.
에칭이 화려한 글라스도 묵직한 은쟁반도, 온도 차로 맺힌 물방울 조금만 떨어져 있을 뿐 거울처럼 흠 없이 반짝거렸다.
“저택은, 정말로 근사해. 노반테스 성 이상이야. 건물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기물, 꾸밈새, 관리 상태 모두를 합해서 말야. 하인들은 모두 한 세대 전 사용인들처럼 충실하고 계단은 난간의 쇠 장식 하나에까지 먼지 한 톨 없어.”
“넌 정말 관찰력이 좋구나.”
“뭐, 그건 우리 집안의 밑천이니까.”
첼은 클레이오의 침실에 딸린 작은 응접실을 장식하고 있는 차 상자를 하릴없이 쓰다듬었다.
탁자 위에 자연스레 놓여 있지만 이마저도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자단목을 깎아 조각하고 청록색 재스퍼 장식을 끼워 무늬를 새긴, 우아하기 그지없는 골동품이었다.
‘이런 차 상자 하나까지 텔마 아세르가 고른 거라고 했지.’
채트윈-탈봇 저택 전체가 그랬다.
고작 삼십 년 전 매입한 장원인데도 마치 수 대를 거쳐 물려받은 것처럼 고아하고, 인수 당시 쇠락한 저택을 개보수하며 새로이 꾸민 부분도 천박한 데라곤 없었다.
“이 저택이 손님을 안 받은 지 이십 년이나 됐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야. 그나마 그걸 알 수 있는 건 실내장식이 이십 년 전 레이디 텔마가 유행시킨 스타일이란 것 정도인데, 워낙에 잘 꾸며놔서 시대착오적이라기보단 고상하게 보이지.”
“과연.”
“그러니까 여기는 네가 태어난 이후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거야.”
말을 마친 첼은 또렷한 관찰의 시선을 클레이오에게로 향했다.
클레이오는 그 시선을 옆얼굴로 느끼면서도 테라스 밖의 먼 수평선만 바라보았다.
‘이건 또 생각을 못 했던 부분이잖아.’
캔튼 부인이 회고하던바, 본래의 클레이오 아세르는 어지간해선 침실 밖조차 잘 나가지 않는 소년이라 했다.
혼자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은 종종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것도 사람이 적은 시기의 일.
같은 저택에 기거하는데도 수발을 드는 몇몇 하인과 캔튼 부인 외엔 얼굴마저 낯설었다고 했다.
그러니 한 번쯤 본가에 들러도 별일은 없으려니 했는데.
‘별일은 예상치 못한 구석에서 생겨버렸네.’
“음, 그런 사정이 있었군. 어쩐지 본가에 오고 싶은 마음이 별로 안 들더라니.”
“그렇지? 사용인들이 널 대할 때 나이 많은 사람들은 종기를 만지듯 조심스럽고, 젊은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라니까.”
“기억이 없으니 별생각도 없었는데, 그러면 사용인 아침 기도 시간에 공지라도 해 달라고 부탁해야 하나. 이젠 신경 안 쓰니까 편하게 대하십시오, 하고.”
“아서라, 인마.”
변변찮은 농담 속에 당혹감을 숨기며 클레이오는 잔을 완전히 비웠다.
굉장하다면 굉장한 환경이었다.
자신이 정말로 이 저택에서 태어난 ‘클레이오’였다면 자라는 내내 숨이 막힐 듯한 폐색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죽은 여인을 추모하는 장소는, 그녀의 죽음을 초래한 이를 단죄하는 공간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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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은 정석대로 밤 9시에 시작되었다.
총집사장과 키 큰 접객 하인들이 모두 동원된 거창한 저녁 만찬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꾸며진 높은 천장 돔 아래의 다이닝 홀에서 이루어졌다.
샹들리에의 불빛이 분광된 그림자를 화려하게 흩뿌리고, 테이블을 꾸민 꽃과 남국의 과일은 향기롭고 아름다웠다.
그 가운데 주인과 내빈의 대화는 극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막내아들의 친구들을 환영한다면서도 냉막한 표정을 풀지 않은 기디온 때문이었다.
그간 특별히 언질은 없었지만 클레이오가 앓고 다친 이력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 단숨에 뚜껑을 연 것이다.
“…하여, 이 아이는 사별한 처를 닮아 건강이 약하고, 저를 닮아 체격이 빈약합니다. 부디 너무 힘들고 어려운 자리로 이끌지는 말아 주십시오, 전하.”
“노력해 보겠습니다.”
‘너 왕위 쟁탈한답시고 내 아들 위험하게 만들 거냐?’란 말을 예의 바르게 잘 돌려 말하는 기디온은 솔직히 무서웠다. 기디온은 클레이오가 갖은 위험을 무릅쓰게 되는 원흉이 아서라 여기는 것 같았다.
기디온이야 클레이오와 여신 사이의 내막을 모르지 않는가. 아서가 신묘한 재주를 부려, 삶에 아무런 의욕이 없던 클레이오를 제 세력에 끌어들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평소의 유들유들한 언변은 다 어디다 버리고 왔는지 아서는 꽤 긴장한 기색이었다.
모르는 척 식전주를 마시며 클레이오는 생각했다.
‘기껏 말쑥하게 잘 차려입으면 뭐하나, 쯧. 평소의 기개는 어따 갖다 버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