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99
만개한 여름날 (6)
“해도를 보고 있었습니다. 몹시 정교하게 잘 만든 물건이라 절로 눈길이 가더군요.”
기디온은 책상 의자에서 일어서려던 클레이오를 손짓으로 만류했다.
그는 벽감 바로 앞의 독서용 의자에 익숙한 태도로 자리를 잡았다.
창을 바라보도록 놓인 의자는 책상에 앉은 사람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오묘한 거리에 위치했다.
장소가 장소라 그런지 기디온의 어조는 비교적 부드러운 편이었다.
“평생 관심이 없던 바닷길에 말이군.”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만 친구들 말을 들으니 마음이 쓰이더군요. 첸트룸 대륙은 흥미로운 장소 같습니다.”
“흥미라… 그래, 일반적인 상식과 관념이 통용되지 않는 대지이긴 하지. 첸트룸에 대해 알고 싶나?”
“네. 무엇이든요.”
어쩐 일인지 평일인데도 출근을 하지 않은 기디온은 꽤 여유로워 보였다.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아니면 추억담이 떠오를 만한 이유라도 있었는지, 유한 태도의 기디온은 첸트룸에 관해 흔치 않은 정보를 여러 가지 전해주었다.
클레이오는 성의 있게 반응하며 기디온의 말을 꼭꼭 귀담아들었다.
풍향이 엉망에 해류가 이상하다든지, 해도만 보고서는 갈 수 없다든지, 식수공급이 어렵다든지 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였다.
‘…첸트룸의 폐허에 도서관이 있다고?’
물이 다 말라버리는 땅에서 드물게 오아시스가 발견될 때는 물 아래로 끝도 없이 깊은 계곡이 뻗어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계곡 가운데 ‘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다는 증언이 여럿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그 자리를 표시하고 어렵게 다시 가 봐도, 첸트룸의 다른 폐허들이 모두 그렇듯 감쪽같이 사라져 흔적도 찾을 수 없다고.
“그 물속에는, 물에서 건져 올리는 순간 녹아 사라지는 석판과 책들이 일견 완벽한 형상으로 보존되어 있다고 하더군. 교회에 신고를 했더니 불문에 부치기를 원했다.”
“그런… 보통의 폐허가 아닌 모양이군요.”
“그곳엔 ‘진실’과 ‘역사’의 책이 존재한다고 말하던 마법사도 있었으나, 노령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
“제가 이 이야기를 들어도 괜찮은 걸까요?”
대답 없이 클레이오를 바라보던 기디온은 안락의자 앞 책장에서 책 몇 권을 꺼냈다.
무작위로 책을 빼내는 것만 같았는데, 곧 책장 뒤에서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몇 초 뒤 책장 한 칸이 옆으로 밀리며 비밀금고가 드러났다.
티플라움으로 만든 금고의 문에는 상급 마법사가 새긴 [차폐]마법식이 선명했다.
클레이오는 헛숨을 내뱉었다.
이쪽은 못 찾는 게 당연한 기관이었다.
기디온이 금고를 열어 건네준 것은 마법으로 복사를 뜬 마광석 압지 몇 장이었다.
획이 울퉁불퉁한 걸 보니 원본이 종이가 아니라 점토판이나 석판 같은 모양새였다.
클레이오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복사지를 향해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더 상세히 살피니 압지에 옮겨진 형상은 ‘팔림프세스트’의 낱장과 형식, 서체가 흡사해 보였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문자로 쓰인 것인지는 한 번에 판별되지 않았다.
‘어?!’
순간 ‘약속’의 「이해」가 반짝이더니, 익숙한 단어인 ‘이솔트’나 ‘레오니드’ 같은 이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건 분명 세계의 비밀에 대한 중요한 단서처럼 보였다.
‘출처는 첸트룸의 수중도서관이란 말이지.’
클레이오는 지나치게 집중해 수상해 보일까봐 얼른 압지에서 눈을 뗐다. 그러나 이미 의심을 받을 만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기디온은 별 재촉 없이 찬찬히 말을 이었다.
“그 노마법사가 사망하며 첸트룸에 관한 연구 자료는 아세르 상사로 반환되었다. 그중 이런 것이 있더구나. 첸트룸의 수중 도서관에서 물 밖으로 가지고 나온 석판이 흩어지기 전 간신히 몇 장의 본을 떴다고 하더군.”
기디온과 이렇게 목적 모를 대화를 해본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클레이오는 불안해졌다.
‘갑자기 뭘 터트리려고 이러는 거람.’
클레이오는 기디온의 진의를 알 수 없어 이야기를 곁다리로 돌렸다.
“아마도 물이… 오래된 석판의 형태를 유지시켜준 것 같습니다.”
물론 노회한 사업가는 말려들지 않았다.
“그래, 올바른 추측이다. 네가 오래된 전승이 담긴 도서를 모으고 있다지? 이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클레이오가 틈틈이 수집하던 책은 세상의 구성에 관한 신화, 교회와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전설을 담은 고서들이었다.
이미 천 년이나 지났으니 레오니드와 이솔트, 랑슬로에 관한 이야기는 모조리 뒤섞이고 변질되었다.
그저 요행을 바라고, 혹시라도 천 년 주기로 역사가 반복되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별 소득 없이 수소문을 했었다.
그게 아세르 상사의 정보망에 걸렸을 줄이야.
“대단할 것 없는 호기심이었는데, 이런… 귀한 자료를 내주셔도 됩니까?”
귀할 뿐 아니라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 자료가 아닌가. 알비온 왕국의 시조들에 관한 이야기가 분명한데.
“내게는 쓸모가 없으니 말이다. 어떤 마법사나 학자도 그 언어를 해석할 수 없었다. 허나 네게는 소용이 닿는 것 같구나.”
기디온은 자신이 압지를 건넨 순간 클레이오가 거기 쓰인 글을 읽었음을 파악했다.
그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클레이오는 난감해졌다.
‘아, 어쩌지….’
기디온은 무심한 얼굴로 클레이오의 당황을 흩어놓았다. 듣는 입장에서는 계속 심장이 벌렁거릴 소리였다.
“그것도 네가 타고난 운명의 능력이겠지. 카롤링거어를 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역시 이전 만찬 때 첼 앞에서 말을 맞추어 준 일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클레이오는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 해야 할 질문을 했다.
“애초에 제가 예전에, 카롤링거어를 배운 적이 있기는 합니까?”
“없다. 폰틸리스 대학을 나온 가정교사는 이 년 내내 매 수업 시간 자릴 지켰지만, 다른 모든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네게 뭔가를 가르치는 덴 실패했다.”
어색한 침묵이 서재를 채웠다.
시계의 초침이 두어 바퀴 돈 후, 당황한 클레이오를 당황에서 건져낸 이도 기디온이었다. 방금까지의 대화는 없던 일인 듯 짐짓 그는 화제를 돌렸다.
“네 동무들은 모두 바닷가로 갔다는데 굳이 해도를 보러 이런 데에 와 있었나.”
“매일 함께하기에는 기사예비생의 체력을 따를 도리가 없고, 도서실에 묘하게 마음이 가는 터라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군. 기억을 잃어도 그런 건 마음에 남아 있었나 보군. 어릴 적부터 너를 돌봤던 캔튼 부인이 종종 텔마의 이야기를 해주던 것으로 안다.”
별로 숨기려던 것도 아니었지만 곧바로 정보 출처를 털리니 클레이오는 표정 관리가 점점 어려워졌다.
기디온은 클레이오의 곤혹에도 아랑곳 않고, 클레이오를 넘어 호두나무에 제이다이트 패널 장식을 덧댄 책상만 응시했다.
“텔마는 드로잉 룸에서 차 대접을 할 때에도 나무랄 데 없는 여주인 노릇을 해냈지만, 기실 가장 좋아하던 곳은 네가 앉은 그 책상 앞이었다.”
클레이오는 책상에 올려두었던 두 팔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래서 여기 편지가 들어있었나?’
못 하나 박지 않고 가장자리를 끼워 맞춰 만든 에텐셀식 고가구는, 텔마가 결혼하며 가져온 유일한 개인 소장품인 모양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부부간 추억의 장소 뭐 그런 모양인데.’
책상의 주인에 대해 말할 때 네 모친이나 네 어머니 대신 ‘텔마’라고 부르는 부분이 묘했다. 부인이 아니라 연인을 대하는 것 같아 내밀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클레이오는 뒤늦었으나마 얼굴을 추슬러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감추었다. 이미 죽은 여인의 절절한 편지를 본 직후라 쉽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친부모라도 어색할 화제인데 기디온은 친부모조차 아니지 않은가.
“그랬군요.”
텔마에 대해 느릿느릿 회고하는 기디온 역시 썩 편안한 모습은 아니었다. 늘상 보여주는 차가운 표정이 무너지고 희미한 혼란이 얄팍한 입술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았다.
‘평소에 이런 대화를 하는 사이는 아니었단 거지.’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이런 기회를 기다려온 듯한 말. 수신인이 올바르지 못한 진심.
클레이오는 그것을 가만히 흘려 넘긴다.
그 모든 것을 다 잊고 모든 것이 다 바뀌었는데 제가 당신의 차남임을 어떻게 확신합니까?, 라고 묻지도 않았다.
완전한 타인으로서 나름 은혜를 받은 바가 있는 자가 가진 일말의 염치였다.
기디온 아세르는 영구히 자식을 잃었다.
어쩌면 여덟 번. 그리고 아홉 번째로도.
그 사건엔 기디온의 죄이면서 죄가 아니고,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면서도 이해를 불허하는 신비가 개입되어 있다.
신이 있는 세계란 한 개인의 잘못조차도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곳.
클레이오 아세르는 자신이 이 세상에 있기 전, 클레이오 아세르로 존재했던 이의 삶에 관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가 할 이야기는 다른 것이다.
“귀중한 추억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아버지. 선물 역시 감사합니다. 상황에 어울리지는 않지만 뵙게 되었으니 저도 올릴 말씀이 있습니다. 상단의 사업에 관련된 겁니다.”
“사업에 말이냐?”
희미한 애수가 덧씌워졌던 녹갈색 눈동자가 평소와 같은 명징함과 냉랭함을 되찾는다. 죄책감과 회한에 물들었던 부친의 얼굴은 한순간에 냉정한 사업가의 얼굴로 변했다.
클레이오는 차라리 이 대화가 훨씬 수월하게 여겨졌다.
“메리디에스에서 재배되는 신 약재 아글라오에 저희 상단 외의 공급망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그건 왜 묻지?”
긴 호흡을 내뱉은 클레이오는 블라드와 아글라오, 히드라의 독에 관해 설명한 후 장남이 아슬란의 불법 실험에 가담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기디온이 반문했다.
“증거는 있나?”
클레이오가 즉답했다.
“없습니다.”
증거가 있으면 이렇게 구구절절 얘기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기디온이 먼저 낌새를 챘을 테니까.
행적을 지켜본바, 기디온은 적어도 합리성의 측면에 있어서만은 믿을 만한 인간이었다.
‘대량인명살상 같은 사회 안정성 떨어뜨리는 일에 가담할 인간 같지는 않아. 극도의 합리주의자니까. 손해 볼 일은 안 해.’
만일 블라드가 아슬란 세력에 본격적으로 합류한다면 그걸 저지할 만한 인물은 기디온뿐이었다.
이미 아서의 편으로 돌아선 클레이오가 하는 말을 모함이라 비판할 만도 한데, 생각을 읽기 어려운 무표정을 두른 기디온은 ‘알겠다.’라고만 답한 후 도서실을 나섰다.
클레이오는 진이 빠진 채로 책상 의자에서 일어나 넓은 소파에 가 널브러졌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 머리가 혼란했다.
첸트룸에서 온 세 장의 마광석 압지는 ‘약속’의 「이해」를 써도 완벽히 해석되질 않았다.
그저 한 부분.
‘니네베 호수로 간 레오니드가 이솔트의 얼굴을 보기를 청하며 여러 날 동안 물가를 서성였다.’는 짧은 행 한 줄만이 온전히 읽혔다. 어떤 문헌에서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일화였다.
‘고어 중에서도 변형형 같긴 한데… ‘약속’을 써도 못 읽으면 나한텐 수가 없지.’
나중에 서사개입도가 더 오르면 다시 읽어보기로 마음먹고서 압지를 꼬깃꼬깃 접어 아공간 지갑 안에 넣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정말로 세상의 비밀을 풀고 싶다면 언젠간 첸트룸 대륙에도 가 보긴 해야겠군. 후….’
고생도, 움직이는 것도, 항해도 질색인 클레이오에게는 아주 괴로운 결심이었다.
***
쿠콰콰쾅!
철썩, 쏴아아아아아!
투투투투투투.
컴마섬까지 멀어졌던 첼은 비행기의 동체를 솜씨 좋게 선회시켜 해변가로 돌아왔다.
솨아아아아아!
촤아아압!
짧은 해안선을 따라 평행하게 비행기를 몰던 첼은 절묘한 각도로 착수해 얕은 물가에 비행기를 착륙시켰다.
첼의 비행기조종 기술은 가히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엉거주춤 선베드에 드러누웠던 클레이오는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에어쇼에 어안이 벙벙했다.
오늘도 수영복을 입은 리피와 레티샤는 신이 나 첼이 막 빠져나오고 있는 콕핏 앞까지 첨벙첨벙 뛰어들었다.
이시엘과 함께 펀치 피처를 들고 오던 아서가 멀리서 환호작약하는 소리가 들렸다.
첼은 한 번에 도움닫기를 해, 발을 하나도 안 적시고 우아하게 해변으로 올라왔다.
클레이오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뭐긴 뭐야, 비행기지. 클레어 클레비던스 씨의 신작 CC-3! 얼마 전 새로 내달라고 한 마석 다이아몬드가 이렇게 돌아왔지.”
그야 다이아몬드를 달랄 땐 새 기체를 제작할 거라 생각하고 내주기는 했다.
“근데 그거 겨우 이 주일 전이잖아. 졸속 제작 아냐? 이거 타도 괜찮은 거냐.”
“무슨 소리야! 클레비던스 부녀는 한다면 하는 사람들이라고. 봤잖아. 이전보다 훨씬 방향 전환이 자연스럽고 [강화]도 기체 전체에 고르게 전달돼!”
“그래, 에테르의 빛이 꼬리까지 비슷하게 닿는 걸 보니 그건 그런 것 같다만, 아까 그 굉음은 또 뭐냐.”
아이스박스 위에 앉아 다리를 꼰 뒤, 고글을 위로 올려 이마 위에 고정한 첼은 누구라도 반할 듯한 청량한 미소를 지었다.
“네 마법에서 영감을 얻었지. 아직 내 레벨이 모자라 [진격의 원]을 날릴 순 없으니까, 화기로라도 흉내 내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