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
원고 속으로 (1)
오 년간의 직장생활은 허망하게 끝났다.
주로 거래하던 도매상이 도산한 탓에, 고작 직원 넷 뿐인 역사서 전문 출판사는 부도난 어음쪼가리만 들고 동동거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책이 안 팔려 근근이 버티던 차였다. 사장은 아예 출판사를 폐업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은 마지막 회식이었다.
“우리 김정진 편집자가 이제껏 수고가 많았어.”
“아닙니다, 사장님.”
“온갖 궂은일을 다 도맡아 하고.”
여길 나가면 갈 데가 없으니까.
당장 한 달이라도 월급이 끊기면 안 됐으니까.
편집자라고 하면 얼핏 그럴듯하게 들리는 직업이지만, 실상은 저자의 시다바리에 가까웠다.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동떨어진 직업이었다. 저작의 주제와 방향을 바꿀 만한 대단한 권한 같은 건 없었다.
주석 한 개 빼고 원어병기 세 개 삭제하자고, 저자에게 읍소하는 메일을 보내고 전화통을 붙들고 있어야 할 때도 있었다.
덕분에 속으로 욕을 해도 웃는 낯 하는 법은 아주 제대로 배웠다. 지금도 요 조그만 노인넬 후려치고 싶지만, 퇴직금 못 받을까봐 참는 중이었으니까.
“오히려 제가 사장님 덕에 일을 많이 배웠지요.”
“저자들도 늘 자넬 칭찬했어. 일 꼼꼼히 한다고.”
“제가 뭐 특별히 대단한 일을 했다고, 좋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이렇게 겸손하기까지 하고 말이야.”
일처리가 맘에 안 드니, 유도리가 없니 면전에서 비꼬던 사장이 한 입으로 세 말을 한다. 술 마실 때만 다정한 게 사장의 술버릇이었다.
‘뭐 됐다. 이제 끝이야.’
술집에 틀려 있는 텔레비전에선 핵 재무장이 어쩌고 하는 뉴스가 이어졌다. 이럴 땐 그냥 세상이 망한들 어떤가 싶었다.
무거운 분위기의 술자리는 소주를 몇 병이나 비운 뒤에 파했다.
밤은 늦고 답답한 마음은 안 가셨다.
정진은 강북의 회사부터 집까지 무작정 걸었다. 사당동 언덕 꼭대기, 몇 년이나 살았던 옥탑방을 향해.
집주인이 재개발을 기다리며 묵히던 물건이라 세가 엄청나게 저렴했지만, 그만큼이나 낡고 불편했다.
그마저도 곧 퇴거해야 한단 연락을 받았다. 차일피일 미뤄지던 재개발이 다가온 탓이다.
‘거길 나오면 어디로 갈지.’
서울엔 어른이 되어 혼자 올라왔다.
고등학교 때까진 어촌 마을을 떠돌며 자랐다.
어떻게든 시골을 떠나려고, 문과 중에서도 비인기 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평생의 운은 대학 입학 때 다 쓴 것 같았다.
그 후론 일하고 학교 다니고 일하고.
오 년 전 태풍이 왔을 때, 양식장을 손보다 머릴 다친 어머니 병원비를 대고.
몇 년 동안 병석에 계시다 홀연히 가신 어머니의 병원비는, 학자금 대출을 안고 있는 사회초년생이 감당하기에 벅찬 액수였다.
아버지는 김정진이 세 살 때 외항선에서 돌아가셨다. 동생은 어릴 적 저수지서 놀다 잃었다.
인생 내내 좋은 일이라곤 없었다.
온갖 잡생각에 휩싸여 걷는 동안 점점 인적이 드물어졌다. 동작대교 인도로 기어올랐을 땐 이미 새벽으로 넘어간 시간이었다.
건너편으론 강의 남쪽. 아파트 숲이 빽빽한 가운데 집 한 칸 없는 처지가 씁쓸했다.
그리고선 얼마나 지났는지.
드르르― 드르르―
그만 멍때리라는 듯이 울어대는 핸드폰 진동에 김정진은 정신을 차렸다.
업무 메일 계정의 알림이었다.
‘새벽 두 시가 넘었는데 누가 보낸 거야.’
[RE: RE: RE: RE: 투고 원고 재중] [안녕하십니까, 김정진 편집자님.무사이입니다.
일전의 요청에 긍정적인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원고를 개정하는 작업에 참여해 주신다니 꼭 보답을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쓰는 원고는 의 가 될 겁니다. 이 이야기를 완벽한 형태로 끝내는 것이 제 필생의 목표입니다.
편집자님이 함께해주시면 2부 역시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이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원고 투고자의 뜬금없는 답 메일이었다. 메일을 본 정진은 술이 확 깼다.
“아니 내가 언제 도와준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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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진이 ‘무사이’란 저자에게 첫 번째 메일을 받은 건 지난 주 금요일이었다.
폐업이 다가오자 오히려 일이 넘쳐나 연일 야근이 이어지던 와중이었다.
번역서 라이센스 정리며, 디자이너 외주비 정산까지 한 번에 처리하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일 때, 그 메일이 왔다.